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12
– 212화에 계속 –
212화 나라와 백성
군주이자 아들의 항변에 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10년 전 밀서는 그렇다 쳐도 이번 일은 묵과하기 어렵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적국과 내통하려 하다니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십니까?”
“내가 그랬다는 명백한 증거라도 있습니까? 설령 이 밀서가 사실이라 쳐도, 어디에 적국과 내통하려는 말이 있습니까? 청 황제에게 전쟁의 위기에 내몰릴 조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 호소하는 게 아닙니까?”
대군주는 나름의 논리를 강변했다.
“다행히 전쟁에서 이겼지만, 만에 하나 청국이 이겼을 경우에도 대비해야지요. 왕실과 국가 전체가 책임을 지느니 일부 신하의 죄로 돌리면 조선이 져야 할 패전의 책무가 가벼워지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망국을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대군주 폐하!”
마침내 이선이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의 병사들, 폐하의 국민들이 전쟁에서 목숨 바쳐 싸웠습니다. 그들이 전장에서 뭐라고 외치는지 아십니까?”
이선은 대군주가 들을 수 없었던, 전장의 목소리를 전했다.
“대조선국 만세! 대군주 폐하 만세!”
“…….”
“그들은 국가와 군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패전 이후 책임을 면할 일을 논하고 계십니까. 승리하면 군주의 덕이고, 패배하면 신하의 죄입니까? 그걸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상징이오, 군주이거늘! 이 전쟁의 결과에 군주와 사직의 명운도 달렸던 것입니다!”
이선의 통렬한 비판에 대군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도 수치심을 느끼는 게 분명했다.
“저는 진심으로 대군주께서 이 일에 연루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국가의 체면이 달린 일이니, 지금은 이 사안을 내각의 대신들만 알고 있습니다. 군주가 적국과 내통했다는 혐의는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엄중히 조사하여, 각의에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책임져야 할 이는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그럼 짐을 폐위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신하가 군주를, 아들이 아버지를?”
대군주는 분노와 수치를 억누르며 말했다.
“짐은 조선의 군주이다. 누가 짐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인가! 대원군과 종친들이? 신하들로 구성된 내각이? 소위 민의를 대표한다는 중추원이? 군주국인 조선의 주권은 짐에게 있다! 천지에 짐을 폐위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대군주의 논리는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지난 500년 간, 전제군주국 조선에서 국가의 주권은 오로지 군주에게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 있었다. 대군주도 그걸 인식하면서도 부정했다.
“그대들이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니 짐을 끌어내릴 수는 있겠지. 임오년에 그랬던 것처럼 난군이 궁궐을 침범하고 짐을 위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미사여구를 붙이더라도 그건 역적질에 불과하다. 조선이란 나라의 뿌리를 알고 있는 이들은 폭거를 용인하지 않겠지.”
대군주는 대원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버님은 내가 즉위한 게 자신의 공이라고 생각하시지요. 애초에 아버님이 이 자리에 앉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거라 생각하시지요? 그러니 오랫동안 나를 폐위하고 싶었을 것 아닙니까?”
대군주의 빈정거림에, 대원군은 혀를 찼다.
“주상이 이렇게 된 데에는 내 책임도 큽니다. 내가 뿌린 씨이니, 내가 죽기 전에 거두는 게 맞겠소.”
“총애하는 손자를 옥좌에 앉히시려고요? 마침내 소원을 이루시겠습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요. 결정이 날 때까지, 강녕전에서 편안히 머무르시기 바랍니다.”
대원군과 이선은 대군주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대원군과 이선이 강녕전에서 물러나자, 언제 기다리고 있었는지 궁내부 협판 이준용이 나타났다.
“준용아, 궁내부가 대군주를 편안히 모시거라. 대군주의 옥체 미령하시니 당분간 강녕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잡인의 출입을 금하도록 하여라.”
“예, 그리 하겠습니다. 대군주를 편히 모시는 게 궁내부의 책무이지요.”
궁내부는 왕실의 일을 총괄했다.
“하오나 궁내부대신이신 이범진 공께서는 생각이 다른 듯합니다만.”
이범진은 각료들 중에서 대군주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 이범진을 교체해달라는 암시였다. 그럼 이준용이 협판으로서 궁내부대신 서리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준용은 이선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실제 역사대로라면 대원군은 호방한 성격의 손자 이준용을 총애해 고종을 몰아내고 즉위시키려는 공작을 여러 차례 진행시킨다.
하지만 역사가 바뀌었으니 그럴 일은 없었다. 이준용은 운현궁의 지원을 받아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입각하여 관직을 맡았다.
야심만만한 이준용은 대원군 계열 보수파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올랐다. 대원군이 변함없이 이선을 지지하고 있으니 이준용도 이선을 따랐지만, 이선은 내심 이준용의 야심을 꺼렸다.
‘시대가 변했는데 왕족이라고 중용할 생각 없다.’
“직무에 충실하니 좋은 일이 아닌가? 이 시점에서 각료를 함부로 교체할 수 없다. 경은 궁내부협판으로서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도록.”
이선이 단도직입적으로 거부를 하니, 이준용은 실망한 듯했다. 대원군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완화군의 말이 옳다. 준용이 너는 형님의 말을 따르도록 해라. 대군주를 잘 받들도록 하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할아버님.”
이준용은 대원군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군주의 충복은 아니더라도, 대원군의 충복임에는 틀림없었다.
이선은 대원군과 단둘이 남자, 의문점을 물었다.
“계미년에 폐비가 대군주와 접촉했단 말입니까? 어찌 된 일입니까?”
“폐비를 충주의 한 사찰에 유폐했는데, 어떻게 수를 썼는지 시종을 보내 주상에게 살아있음을 알렸더구나. 당연히 주상이야 놀랐겠지. 그래서 청국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 아니겠느냐.”
대원군은 냉소를 흘렸다.
“그래서 속히 새 중전을 간택했지.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
“그럼 폐비는 어찌 되었습니까?”
“때마침 병사(病死)했다.”
대원군은 담담히 말했지만, 이선은 자연사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때 민씨의 나이 겨우 서른셋이었다. 병사할 나이도 아니고, 시기도 너무 공교로웠다.
“어째서 제게는 알리지 않으셨습니까?”
“말했다시피 넌 그때 미국에 있었고, 돌아온 후에는 이미 일이 해결됐지. 굳이 알릴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폐비의 무덤은…….”
“내가 충주의 양지바른 곳에 후히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네가 더 신경 쓸 건 없다.”
이선은 새삼 대원군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할아버지이자 동지로서는 든든했지만, 적이 되었다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부왕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분노하고 절망감을 느꼈겠는가. 속으로 이를 갈만도 하군.’
“지나간 일은 개의치 말라.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지.”
“예, 엄중한 조사 후에 각의에서 결정하겠습니다.”
대원군이 어조를 높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이 일은 내각이 아니라 왕실에서 결정해야 한다.
“그럼 할아버님께서는 어찌하길 원하십니까?”
“과거에는 중국이 국왕을 책봉했으니, 중국의 허가를 받는 절차가 필요했지. 하지만 이제 중국에도 완전히 자주독립을 이뤄냈으니, 누가 개입을 하랴? 내가 종친을 움직이겠다. 왕태후의 교지를 받아내면 될 일이다.”
명목상 왕실의 큰 어른은 헌종의 계비, 왕태후 홍씨였다. 대군주의 법적 모친인 조대비와 달리, 왕태후는 전혀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왕태후의 교지를 받아낸 다음은요?”
“물으나 마나. 옥좌에 어울리는 진정한 군주가 있어야 한다. 바로 너 말이다.”
대원군은 마침내 왕위 교체에 대한 뜻을 드러냈다.
‘말은 고맙지만…….’
“너무 낡은 방식이 아닙니까?”
“뭐가 말이냐? 태조께서 전조의 공양왕을 폐위할 때도, 연산군을 폐위할 때도, 광해군을 폐위할 때도 모두 대비전의 교지가 있었다. 전례를 따르는 게 안전하다.”
“그때와는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할아버님.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시대지요.”
“그래서, 대신들의 눈치라도 보자고? 답답한 소리! 이런 중차대한 일을 내각에 맡기면 왕실의 권위가 무엇이 되느냐! 왕실 내부에서 처리해야 한다.”
“단순히 내각뿐이 아닙니다. 민의도 무시할 수 없지요.”
대원군은 더욱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민의는 무슨 놈의 민의! 언제부터 백성의 의견 따위가 중요하단 말이냐? 왕실에서 정하면 따르면 그만이지.”
“군주인수(君舟人水).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니,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또한 배를 뒤집기도 합니다. 공자 시절부터 있었던 말입니다.”
유학자들도 좋아하는 말이지만, 패도 정치가 대원군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야말로 공자님 말씀이지. 백성에게는 나라가 선정을 베풀면 그만이다. 민의를 일일이 신경 쓰다가 무슨 대업을 한단 말이냐.”
“할아버님, 아까 대군주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국가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인즉슨 주상의 말이 옳지. 국가의 주권은 오직 군주에게 있다. 그만큼 책무도 무겁지. 그러니 네가 그 자리에 앉아야한다는 것이다.”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할아버님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늘 감사드리고 있지요.”
대원군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그와의 괴리감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국가를 바라보는 저와 할아버님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 전쟁은 국민의 희생과 노고 위에서 이뤄낸 승리입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어리석은 백성이 아닙니다.”
이선은 개선을 하고 돌아와, 중추원 의관 전봉준을 만났던 걸 떠올렸다.
이선으로부터 명을 받은 전봉준은, 후방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에게 국가의 요구사항을 전하고 여론을 청취하여 백성의 열망을 정부에 전했다.
‘농민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전봉준은 민심의 안정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선은 전봉준을 치하하고,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 공, 노고가 많았소. 후방의 안정에는 전 의관의 덕이 큽니다.”
“대감과 병사들은 전방에서 용맹히 싸웠는데, 저는 후방에서 무위도식했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 무슨 소리. 작금의 전쟁은 국민전쟁이라고 불리오. 후방에서 국민이 생업에 종사하고, 군수물자를 생산하였기에 전쟁도 가능한 것이오. 후방도 곧 전선이나 다름없지요.”
이선의 말에 전봉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민전쟁이라. 참으로 와닿는 말입니다.”
“내가 전 공을 중시하는 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목소리를 내게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오.”
“그렇기에 제가 대감을 마음 깊이 존경합니다. 대개 통치자들은, 일개 지방관이나 유지들조차도, 피치자(被治者)의 외침을 거북해합니다. 대감께서는 가장 고귀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가장 낮은 이들의 목소리도 듣고자 하시니…….”
전봉준은 이선에게 진정 감격한 듯했다. 이선은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국민이 없으면 국가가 전쟁을, 아니 어찌 통치를 할 수 있겠소? 전쟁 수행과 승전에 대해 농민들의 의견도 있을 터. 정부 보고서에 빠진 부분을 진솔하게 들어보고 싶소.”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도 가감 없이 보고토록 하겠습니다.”
분명 전쟁은 후방의 농민에게도 애국심과 단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징집되어 전쟁터에 나간 이들은 대부분 농민 청년들이었고, 이들은 승전의 주역이었다. 승전을 이끈 이들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과 단결을 몸소 체화했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청년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농민으로 머무르지 않았다. 애국심, 사회의식, 문명과 진보에 대한 열망, 더 나아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개념도 점차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농민들이 가장 원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들이 무엇보다 원하는 건 두 가지입니다. 낡은 신분제의 잔재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자신 소유의 토지를 가지고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봉건제의 폐기와 토지개혁. 실제 역사에서도 동학농민전쟁을 일으킨 농민들의 가장 큰 요구사항이었다.
“전자는 상당부분 성취를 이뤄냈으니, 이제 후자를 원하겠지요.”
“깊이 참고하겠소. 그렇다면 대군주와 정부에 대한 지지는 어떻소?”
“절대적이지요. 전에 없는 선정을 베풀고, 청나라를 무찌르고 승리까지 이루어냈으니. 나라님의 은혜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자자합니다.”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전근대적 전통이 남아있는 농민들에게, 나라님이란 절대적인 존재였다.
“과거 혹정이 있었을 때는 군주에 대한 인식이 어떻소?”
“임금을 원망하는 목소리는 감히 드러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라님은 어질고 현명하신데, 주위의 간신들이 임금의 성총(聖聰)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괴롭힌다 인지했지요. 올바른 신하들이 임금을 보좌하면 나라가 제대로 서리라 믿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미증유의 농민봉기를 이끈 전봉준조차도, 군주에 대한 근왕의식은 차마 저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간신과 탐관오리의 목을 베라고 촉구할지언정, 군주에 대해서는 변함없는 충성의 뜻을 보였다.
“지금도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폐비와 외척들이 나라를 농단할 때는 혹정이 이어졌으나, 국태공과 완화군을 비롯한 현명하고 정직한 신하들이 보좌하니 마침내 나라가 바로 서게 되었다고.”
‘농민들로 구성된 병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이선은 병사들의 외침을 기억했다.
대조선국 만세, 대군주 폐하 만세.
그들은 국가와 군주를 동일시했고, 절대적인 충성심을 표현했다.
전쟁으로 이뤄낸 나라와 백성, 군주와 국민의 일체감은 전례 없는 수준이었다.
‘그 고양된 일체감을, 밀서 나부랭이로 깨트릴 수가 없지.’
공개해서는 안 될 사안이고, 국민이 알아서도 안 될 일이었다.
‘그렇다고 군주의 책임을 방기할 수도 없는 노릇.’
이선은 내심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