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13
– 213화에 계속 –
213화 우리의 나라
이선은 개화당 지도부를 소집하여 회의를 개최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충성을 맹세한 개화당은 이선을 절대적으로 지지했지만, 정국 방향을 놓고 의견 차이가 있었다.
“대군주께서 사실상 밀서를 보냈다고 자인한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마땅히 책임을 지셔야지요.”
“허 참, 앞으로는 그토록 개화를 지지하는 신뢰를 보이시더니, 뒤로는…….”
“대군주 입장에서야 정국을 주도하는 완화군 대감과 우리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지.”
“대군주께서 퇴위하시고 개화와 승전에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완화군께서 즉위하시는 게 나라를 위한 길이오.”
“시기상조요. 내각에서도 의견이 갈리는데, 여론이 양위를 지지한다는 보장이 없소. 밀서를 공개하기도 어렵고…….”
“건강상의 이유로 양위한다고 발표하면 되지 않겠소?”
“대군주의 보령(寶齡)이 아직 40대에 불과하거늘, 건강 문제를 운운하면 누가 믿겠소.”
“그리고 왕태자는 어찌합니까? 대군주께서 양위하면 왕태자께서 즉위해야 순리가 맞지요.”
“왕태자야 뭐, 상황이 그리되면 스스로 물러나시지 않을까 싶은데…….”
양위와 즉위를 놓고 갑론을박하는데, 본질적인 정치 체제에 대한 의견이 제기되었다.
“완화군께서 꼭 즉위해야 합니까? 이 기회에 대군주를 압박해서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개설하여 군민공치를 실현하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완화군께서 신정부의 수상을 맡고, 우리 개화당이 여당으로 정부에 포진하면 되지요. 영국이나 일본처럼 입헌정치를 하면 되지 않습니까?”
“조선은 군주국이오. 군주가 친히 통치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군민공치는 아직 이르지 않을까?”
“그러니 헌법과 의회라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자는 게 아닙니까. 이보다 더 헌정을 실천할 절호의 기회가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건…….”
좌장 격인 김옥균이 정리에 나섰다.
“우리의 지도자, 완화군 대감의 의중이지요. 대감께서는 오늘 결론을 내린다고 하셨습니다. 일단 대감의 말씀을 기다려 봅시다.”
잠시 후, 이선이 회의실에 들어섰다. 개화당 지도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선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선은 모두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한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부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물밑에서 공작을 이어나가던 김옥균이 답했다.
“대신들의 의견은 분분합니다. 특히 총리대신께서는 이 사건을 조용히 정리하고, 대신 내각에 통치권을 부여하는 방안이 최선이라고 여기십니다.”
김홍집과 온건개화파는 사건을 불문에 부치고 대군주 지위를 보장하되 실질적인 내각책임제를 시행하자고 주장했다. 유학을 익힌 이들로서는 선뜻 군주를 폐위하자는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군부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군부는 신군의 창건자이자 승전의 영웅이신 완화군 대감을 절대적으로 지지합니다. 다만…….”
전쟁이 끝나고 대장으로 승진한 윤웅렬이 답했다. 그는 현재 이선의 뒤를 이은 군부의 이인자였다.
“군의 통수권자는 대군주이시고, 병사들에게 충군 애국하라고 늘 정훈 교육을 해 왔습니다. 이들은 자세한 사정을 모르기에 대군주 역시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했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밀서 내용을 공개하거나 대군주께서 퇴위한다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선도 잘 알고 있었다. 전선을 향해 돌격하는 병사들의 구호는 ‘대조선 만세, 대군주 폐하 만세’였다. 그들에게 애국이란 곧 충군(忠君)이었다.
“대부분 국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니 특히 농촌으로 갈수록 군주에 대한 소박한 믿음과 충성이 강합니다.”
이는 유학을 익힌 사대부뿐만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500년 내려온 조선왕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군주에 대한 충성을 자연스럽게 체화시켰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충성을 바치는데, 부왕은 어찌 그 충성을 저버리려고 들었단 말인가.’
이선은 씁쓸하게 웃었다. 부왕은 전근대의 군주로는 나쁘지 않지만, 근대의 국가적 상징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밀서 공개는 승전으로 고양된 국민적 단결을 무너트리고 사회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정권의 안정만 해치게 될 겁니다. 이는 묻어 두는 게 좋겠습니다.”
이선의 결론에 개화당 지도부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그게 최선은 못 돼도 차선 책임은 알고 있었다.
“하오면 향후 통치는…….”
이선은 이에 대해서도 결론을 내렸다.
“마침내 우리가 구상하던 군민공치를 구현하기 좋은 시기가 왔습니다. 국민개병과 국민교육이 궤도에 올랐고, 우리 국민은 전쟁으로 충성과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이선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우리는 승전국이자 세계만방에 공인을 받은 자주 국가이니 칭제 건원을 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1년 내로 제국을 선포하고, 3년 내로 헌법을 제정하고, 5년 내로 총선거를 실시해 의회를 개설하고자 합니다. 입헌정치를 실시하고자 하는데 동지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칭제 건원! 이는 오래전부터 우리가 꿈꿔오던 일입니다. 그동안 제국을 열망해 왔지요.”
개화당은 환호했다. 갑신경장 때부터 개화당은 청조를 타도하고 제국을 선포할 날을 고대해 왔다.
“군민공치 또한 그렇지요. 헌법과 의회, 입헌정치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체제입니다. 바야흐로 문명국의 반열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입헌군주제, 의회제 역시 현재 개화파가 생각하는 최선의 정치체제였다.
“그렇다면 대군주, 아니 새 제국의 황제는…….”
개화당 일부는 기대를 지닌 눈빛으로 이선을 쳐다보았다. 이선은 의외로 선선히 답했다.
“대군주께서 황제로 즉위해야 순리에 맞지요. 대내적으로든, 대외적으로든 모양새도 가장 보기 좋소. 밀서를 공개하지 않은 이상 명분도 없고.”
일부가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자 이선이 웃으면서 덧붙였다.
“새 제국의 황제는, 영국처럼 존숭받고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을 겁니다. 설마 나더러 그 자리에 앉으라고 하는 건 아닐 테지요?”
이선의 말에 개화당은 새 제국의 정치 체제에 대해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확고한 내각 우위의 입헌군주정이었다.
“하오나 대군주께서 이를 받아들이실지 의문입니다. 결국, 밀서 사건도 군주의 적법한 통치권을 빼앗겼다는 울분 때문이니…….”
유길준의 우려에 이선이 씩 웃었다.
“대군주의 선택이 달렸지요. 통치권을 행사하지 않는 대신 명예롭게 황제로 존숭받고 군림하시든가…….”
이선은 웃음을 거뒀다.
“불명예스럽게 퇴위하여 상황이 되시든가.”
이선과 개화당이 방침을 정해 각의에 알리자, 정부의 한 축인 김홍집과 온건파도 만족해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구태여 밀서의 내용을 공개해 국가적 단결을 깰 이유가 없습니다.”
“신하가 군주를 폐위한다는 부담도 질 필요가 없고. 그리되면 사대부의 반대와 민심 이반이 상당했을 겁니다.”
“칭제 건원 하여 제국을 선포하면, 대군주께서도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게 되는 것이지요.”
“제국을 선포하면서, 자연스럽게 입헌군주정으로 통치 체제를 전환하면 여론도 지지할 터.”
“좋습니다. 내각의 총의(總意)를 대군주께 아뢰도록 합시다.”
이때 이선이 나섰다.
“가뜩이나 대군주의 심기가 편찮으신데, 신하들이 단체로 몰려가 주청하면 군주로서의 체면 때문에라도 가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아들이자 신하된 도리로 대군주를 먼저 설득할까 합니다만.”
김홍집은 잠시 생각하다가, 동의를 표했다.
“말씀을 듣고 나니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완화군 대감께서 대군주를 설득하고, 그 후에 내각이 정식으로 주청을 올리도록 하지요.”
그날 밤, 대원군이 급하게 이선을 운현궁으로 불러들였다.
이선이 운현궁에 도착하자마자 대원군은 즉시 사람을 물리고 독대했다.
“내 오늘 일에 대해 들었다. 칭제 건원 하고, 주상을 황제로 즉위시킨다고? 그리고 그 후에는 헌법을 만들고 선거를 실시해 입헌정치라는 걸 한다고?”
‘거 참, 정보도 빠르시군. 뭐, 어차피 통보는 하려고 했으니…….’
“예, 내각에서 그리 결정했습니다.”
“칭제 건원, 좋다! 우리 이씨 왕실에서 황제가 배출된다니 다시없는 영광이지. 조선의 황제라!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열망했는지 모른다.”
대원군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네가 아니고 주상이란 말이냐? 이 나라 조선에 어울리는 황제는 바로 너다!”
“국가의 안정을 위해 밀서는 공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럼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자식이자 신하 된 입장에서 군주를 폐위시킬 수도 없고.”
“그러니 종친을 움직여 왕태후의 교지를 받아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니지, 이왕 칭제 건원 하는 김에 자연스럽게 너를 황제로 추대하는 방법도 있겠군. 주상을 압박해 스스로 옥좌에서 내려오게 하는 거다.”
“새 제국의 황제는 존숭받고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으려 합니다. 저는 황제가 아니라 정치인으로 남고 싶습니다.”
대원군이 벌컥 화를 냈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황제가 통치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놈의 황제란 말이냐! 허수아비, 빛 좋은 개살구지!”
마침내 이선은 대원군과 명확한 관점의 차이를 드러냈다.
“새 제국은 조선의 연장선, 혹은 옛 중화제국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헌법에 기초하여 민의에 기반을 둔, 입헌정치가 될 것입니다.”
“누가 중국 황제처럼 하라고 했느냐? 네가 좋아하는 그 아라사도 전제군주국 아니냐? 왜 아라사 황제처럼 네가 전제군주가 될 수 없단 말이냐!”
대원군의 지향점은 명백히 전제군주정이었다.
하지만 이선은 전제군주정이 이 시대에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역사 지식을 통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앞으로 개혁의 노력이 없다면, 러시아 전제군주정도 오래가지 않아 혁명으로 붕괴할 터였다.
근대는 바야흐로 국민의 시대였다.
“제가 아라사의 덕을 봤고, 아라사 황제와 친분이 두터운 것도 사실이나, 그 체제를 본받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전제정은 비효율적입니다. 세계의 대세는 입헌과 군민공치입니다.”
“군민공치는 그 무슨 같잖은 소리야! 왜 군주가 절대왕권을 포기하고 무지렁이 백성들과 통치권을 공유하느냐? 내가 저 외척 놈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여흥 민씨가 넘보던 왕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건만……! 그 왕권을 거저 퍼주겠단 말이냐!”
왕권의 확립을 일평생의 목표로 삼았던 대원군은 이선의 구상에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주상이 내 꿈을 이뤄주길 바랐다. 내가 주상을 대신해서 왕 노릇 하려고 한 게 아니란 말이다!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왕권을 만들어 주상에게 바치고자 했다. 하지만 주상은 그 여우 같은 계집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오히려 외척을 끌어들이고 아비를 적대했다. 그리고 왕권을 여흥 민문이 갉아먹었지! 내가 그렇게 분노하고 절망감을 느낄 때…….”
대원군은 감정적인 어조로 옛일을 회고했다.
“네가 나타났다. 내 꿈을 완벽하게 이루어줄 유능한 후계자, 내 피를 이어받은 장손이! 그래서 나는 주상을 대신하여 네게 희망을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임오년의 기회가 왔지.”
대원군은 이선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나는 너를 믿었다! 그래서 네게 모든 걸 물려줬다. 기존 정책과 정반대로 바꿔 서양과 손을 잡자고 해도, 서양식으로 개혁하자고 해도 다 받아줬다. 네가 하는 일이 급진적이고 못마땅한 게 많아도, 나를 따르는 자들이 비난해도, 나는 너를 인정하고 변함없이 지지했다. 왜인지 아느냐?”
대원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대원군은 기존 정책과 정반대로 급진적 근대화 개혁에 동의하고, 정권도 이선에게 맡길 정도로 신뢰했다.
이선이 대원군의 손자가 아니었더라면, 그것도 대원군이 진심으로 인정한 후계자가 아니었더라면, 권력욕의 화신과도 같았던 대원군이 그리 순순히 권좌에서 내려와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네가 내 꿈을 이뤄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부국강병, 어떤 외세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력한 나라! 전제왕권, 그 어떤 놈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군주의 나라!”
대원군은 마치 적이라도 만난 듯, 노성을 토하며 탁자를 내리쳤다.
“그리고 너는 마침내 강력한 나라를 만들어냈다. 이제 군주의 나라가 눈앞인데, 그걸 눈앞에서 던져 버린다고? 제정신이냐? 정신을 차려라!”
이선은 대원군의 분노를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 대원군의 말이 끝나자,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아버님의 은혜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저뿐만 아니고 이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할아버님께서는 세도정치의 폐해를 바로 잡아, 왕권을 바로 세우고 민생을 안정시켰습니다. 우리의 역사에, 할아버님은 새 제국의 기틀을 연 첫 지도자로 길이 칭송받게 될 것입니다.”
바뀐 역사에서, 대원군은 망국의 문을 연 지도자가 아니라 부국강병을 추진해 새 국가의 기반을 만든 지도자로 기록되리라.
이선은 그 지점에서 멈추지 않고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할아버님,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입니까?”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 당연히 군주와 전주 이씨의 나라지!”
대원군이 아무리 개혁에 동의했어도, 그는 어쩔 수 없는 전근대의 사람이었다.
개혁과 근대화는 수단에 불과했다.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전제왕권을 세워 영구한 전제군주국을 만들고자 했다.
“지난 500년간은 그랬지요. 하지만 경장 이후, 승전 이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나라는 이제 군주 한 사람의 나라, 나만의 나라가 아닙니다. 국민의 나라, 우리의 나라입니다.”
이선은 잔잔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국민은 더 이상 무지렁이 백성이 아닙니다. 시대착오적인 전제국가가 아니라, 진정한 국민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헌법과 의회는 그 시작입니다. 이 나라는 앞으로 국민과 함께 흥할 것이요, 국민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