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16
– 216화에 계속 –
216화 왕좌(王座)
“대원군도 마찬가지야! 물론 난 대원군의 은혜를 입었지. 하지만 대원군이 꿈꾸는 후계자, 진정한 군주의 자리! 난 애초에 그런 거 원한 적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아!”
지금까지 감정을 꾹꾹 눌러 참고 있던 이선은, 마침내 폭발하고야 말았다.
“대저 조선의 군주라는 게 뭔가? 유교적 명분론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왕이자 유학자로서 살아야 하고, 끊임없이 유교 의례를 지켜야 하고, 온갖 감시하에 살아야 하지. 인제 와서 나더러 그런 삶을 살라고?”
조선이란 나라 자체가 유교적 토대 위에 건설되어 500년을 내려온 만큼, 갑신경장으로 국가를 일신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임금만 해도 겉보기에 하는 일이 없어 보여도, 엄격한 궁중 예법과 유교 의례를 충실히 수행하며, 유학 군주로서의 삶을 철저히 준수했다.
군주가 된 이상 사생활이란 것도 있을 수가 없었다. 일상생활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온갖 제약에 놓여 있고, 일거수일투족이 만인의 관심 대상이었다.
“국민에게 자유를 주면 뭐하나? 왕이 되는 순간 이 나라에서 가장 부자유스러운 처지가 되는 거야. 그것도 죽을 때까지!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내게 궁이란 창살 없는 감옥이고 곤룡포란 죄수복이나 다름없어. 왕좌에 앉아봤자 가시방석 위에 앉는 거지!”
이선은 이미 자신의 인생 절반은 나라에 바쳤다고 생각했지만, 왕좌에 앉는 순간 완전히 끝이라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노심초사한 끝에 죽어서야 내려올 수 있는 무간지옥이었다.
‘내 성향을 보건대 왕이 됐다고 대충할 리가 있나? 세종이나 정조처럼 조기 과로사행 확정이지.’
“대, 대감. 취하셨나 봅니다. 잠시 진정하시고…….”
김옥균은 처음 보는 모습에 일단 진정시키고자 했다. 이선의 외침에 공감은 됐지만, 군주에 대한 평가는 불경에 가까운 말이었다.
“나 안 취했네. 개화당 그대들도 마찬가지야. 그대들은 나를 개화파의 꿈을 모두 다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지도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도 똑같은 사람이야. 언제든지 실수할 수 있고, 갑자기 죽을 수도 있는!”
감정이 폭발한 이선은 이번엔 화살을 개화당에게 돌렸다. 이선은 개화당 일각에서 지나치게 자신을 신성화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밖에서 충성맹세 한다고 떠드는 저 작자들, 저런다고 내가 고마워할 줄 아나? 천만에! 이 나라 군대가 무슨 내 개인 조직이야? 나라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저따위로 굴면 안 되지! 군대는 국가를 지키는 조직이지, 절대 정치 불개입이다. 임오군란이나 갑신경장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재현할 생각은 추호도 없네.”
“대감, 비록 개화파 일각의 행동이 과격하다고는 하나, 이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지. 내가 그거 하나 때문에 러시아에서 이 조선으로 돌아온 거야. 황제를 구해서 황실의 은인이 됐고, 온갖 부귀영화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걷어차고 조선으로 돌아와 이 고생을 하고 있네!”
이선은 자신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지만, 가끔 유럽에서 자유롭게 있던 시절이 그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암살을 막은 이이자, 나를 은인처럼 여기는 벗이 대제국의 황제가 됐네. 러시아에 오게 될 날만 기다리겠다고 하더군. 막말로, 당장 다 그만두고 러시아로 가도 내 삶은 지금보단 행복하지 않을까? 황제의 자문 역하고 황족 대우받으면서 온갖 부귀영화 속에서 내 마음대로 살 수 있겠지!”
니콜라이 2세가 이선을 우대하는 건 기정사실이고, 앞으로도 황제의 총애를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러시아 혁명을 막고 세계사의 변화를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선 국내의 정치투쟁이 다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군.’
“…… 완화군 대감, 대감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거, 대감도 알고 저도 알고 만인이 다 압니다. 그럴 분이라면 애초에 조선으로 돌아오지도 않았겠지요. 인제 그만 진정하시고, 앞일을 논했으면 합니다.”
김옥균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흐흐, 하하하!”
이선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다가 술병을 내려놓고 찬물 한 사발을 들이켰다.
짝! 짝!
이선은 소리가 날 정도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쳤다. 볼이 얼얼했다.
‘자, 현자타임 왔다. 애초에 완화군의 삶을 살게 됐을 때부터 내 운명은 조선하고 뗄 수가 없지.’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술주정이라고 생각하시오. 그리고 지금은 술 깼소.”
취기 때문인지 갑작스러운 타격 때문인지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황공합니다. 오히려 이제 대감의 속내를 알게 되어 기쁩니다. 대감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너무 완벽해서 가끔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대감의 예측대로 모두 정확히 들어맞을 때마다 혹시 미래를 보고 온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하하.”
‘…… 예리한데?’
“맞습니다. 대감도 저희와 똑같은 사람이시지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한창나이의 청년. 그동안 저희가 대감 한 분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워 드렸는지 아닌가 싶습니다.”
“뭐, 꼭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고…….”
“13년 전, 저와 개화당 동지들은 대감과 이 나라의 변혁을 함께 꿈꾸기로 결심했습니다.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의 꿈. 우리는 마침내 이를 이뤄냈습니다. 완화군 대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김옥균은 잔잔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나라에는 대감과도 같은 현명한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김옥균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선을 향해 절했다.
“저는 이미 13년 전에 완화군 대감께 충성을 맹세했지만, 거듭 다시 청합니다. 이 나라와 만민을 이끌어 주십시오.”
“…….”
“무엇을 주저하십니까? 왕실과 신료, 군인과 백성, 만인의 대망이 오직 완화군 대감께 쏠려 있습니다. 그로 인해 대감께 이루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책무가 주어지고 있음을 저도 압니다. 하오나 그건 천명을 얻은 이의 숙명이 아니겠습니까.”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다고 해도 세계사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직 미미하다. 역사의 흐름은 크게 바뀌지 않았으니 내 예측 범위 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오히려 외교가 훨씬 편해.’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이선의 장점은 미래를 통해 알게 된 역사적 지식과 이를 토대로 한 대응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역사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바뀌었다. 이제 어찌 될지 가늠하기 정말 어렵다. 과연 내가 내치까지 완벽하게 할 수 있을까? 2000만의 운명이 걸려있는데,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이선은 두려웠다. 그는 자신이 철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자신의 실수가 그 개인의 실패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국가 전체의 실패로 끝나게 되는 게 아닐지.
‘실제 조선이 망국을 면치 못했듯이, 만약 내 실수로 망국으로 이어진다면…….’
“아무리 현명한 지도자라고 해도, 실수가 없는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조력자가 필요한 것이고, 국민의 지지가 필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김옥균은 마치 이선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저와 개화당 동지들, 아니 모든 국민들이 대감이 얹은 짐을 함께 지겠습니다. 대감께서 진정한 자주독립 국가, 국민국가로 이끌어 주십시오. 저희도 대감을 위해 분골쇄신하여 견마지로(犬馬之勞)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선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김옥균을 보면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김옥균 한 사람이 아니지. 수천수만의 사람들……. 사람의 기대와 열망을 한 몸에 받는다는 건 부담스럽지만 행복한 일이다.’
역사대로라면 이미 완화군 이선도 죽고 없어야 했고, 김옥균은 고된 망명 생활 끝에 타지에서 암살당했을 터였다. 자신이 그토록 변혁하고 싶어 했던 고국으로 시체로 돌아와, 그 육신마저도 갈기갈기 조각나 효시 되는 비참한 최후였다.
조선의 처지는 더욱 참담했다.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을 짓밟고 세상을 바꾸고자 일어났던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군 기관총 앞에 무수한 피를 흘려야 했다.
일개 군인과 낭인들이 궁궐을 유린하고, 일국의 군주를 겁박하고 왕후를 잔혹하게 시해했다.
조선은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개혁에 돌입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미 망국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다. 절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
이선은 확신이 있었다.
‘그건 나 한 사람만의 공로가 아니다. 나는 불씨를 심었을 뿐, 만인의 노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어쩌면 내가 너무 오만했을지도 모른다. 나 한 사람의 선택에만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는 게 아니다. 모든 국민의 노력에 국가의 운명이 바뀌리라.’
“일어나시오. 고균은 나의 동지이자 고굉(股肱)인데, 어찌 개와 말로 비하합니까.”
이선은 김옥균과 손을 맞잡았다.
“결심했소. 나는 주어진 책무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고, 만인의 대망을 외면하지 않겠소. 우리의 혁명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니까. 혁명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요. 우리 함께 이끌어 나갑시다.”
김옥균은 감격한 어조로 외쳤다.
“신등(臣等)은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김옥균이 이선에게 이미 충성을 맹세했다지만, ‘신(臣)’이란 표현을 쓴 건 처음이었다. 군주 외에는 아무에게도 쓸 수 없는 표현이었다. 이전까지는 정파의 지도자로서 충성했다면, 앞으로는 국가의 지도자로서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미였다.
“고맙소. 이제 뒷감당을 해야겠는데…….”
“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최선의 길을 모색하겠습니다.”
“음, 믿겠소. 술 냄새 풍기는 채로 나다닐 수는 없으니 일단 한숨 자야겠군.”
“예, 피곤하실 터인데 쉬십시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은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일단 우리 집에 온 불청객들은 쫓아낸 후에.”
이선은 김옥균을 대동하고 밖으로 나왔다.
“군무대신 각하!”
여전히 마당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교들이 도열하여 부동자세를 했다.
“나는 만인의 열망을 결코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선의 은유에 장교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
“과연 완화군께서는 우리의 지도자이십니다!”
그때, 이선이 차고 있던 칼을 빼 들었다.
“그대들은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원대 복귀하라. 오직 맡은 바 임무에만 충실하라. 군인이 파벌을 형성해 정치에 개입하려는 건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일은 불문에 부치겠으나,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그때는 모조리 군복을 벗기고 목을 벨 것이다!”
서슬 퍼런 이선의 외침에, 장교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일단 정부를 부탁하오, 고균. 난 눈 좀 붙였다가 국태공을 만나 뵈어야겠군.”
“예, 맡겨주십시오.”
김옥균은 이선을 향해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이선은 방으로 돌아가 잠시 눈을 붙였다. 온갖 생각이 들었으나, 잡념을 떨치고 가까스로 잠이 들 수 있었다.
두 시간 후, 이선은 잠에서 깼다. 뭔가 꿈을 꾸었지만 생생하진 않았다.
일어나 목욕을 마친 이선은 의관을 정제했다.
운현궁으로 향하려던 차에, 모친 숙원 이씨가 아들을 불렀다.
“완화군. 이 어미는 어리석어, 결코 그대가 하려는 일에 개입할 생각이 없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선은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50대, 어머니 얼굴에는 여전히 젊은 날의 미모는 남아있지만, 나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아까 군인들이 하는 말을 들었소. 나는 정말 두렵소. 정녕 부왕과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려는 것이오?”
“…….”
“완화군, 아니 선아. 너는 내게 과분한 아들이다. 내 소생에서 이렇게 총명한 아이가 나올 줄 몰랐다. 어미로서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없구나.”
숙원은 이선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네게 생명을 주었듯, 부왕도 네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다. 어찌하여 부왕과 화해할 수는 없는 것이냐. 정녕 대원군과 부왕의 악연을 반복할 생각이란 말이더냐!”
“나는 네가 다른 이처럼 혼례를 치르고, 자식을 보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어찌하여 고된 길로만 가려고 하느냐. 어리석은 아녀자의 소견이라고만 비웃지 말고, 부디 내 말도 귀담아들어 다오.”
“어머님, 제가 어찌 어머님을 어리석다 하겠습니까.”
이선은 붙잡은 어머니의 손을 토닥였다.
“저도 어머님의 뜻을 따르고 싶습니다만, 세상이 그렇게 놔두지 못하나 봅니다. 이제 저는 누군가의 아들만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게 천명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요.”
이선은 정중히 어머니께 예를 올리고 집을 떠났다.
숙원은 눈물을 흘렸다. 마치 15년 전, 아들이 멀리 떠날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비록 물리적 거리는 멀지 않아도, 심리적 거리는 좁힐 수 없으리라.
운현궁에 도착한 이선은 대원군을 만났다. 예를 표한 이선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까지 제가 왕좌에 앉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예전에도 말하지 않았던가? 나의 뜻을 이루어 줄, 완벽한 후계자를 찾았다고. 바로 네가, 진정한 군주의 자질을 지닌 네가 왕좌에 앉아야 한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늙은이의 마지막 사업이 될 것이다.”
“경하드립니다. 결국 할아버님 뜻대로 되겠습니다.”
대원군이 웃음을 흘렸다.
“뭐, 이제라도 손자가 할아비 뜻을 따르겠다니 기쁘구나.”
“앞으로 어찌하실 겁니까? 아들이 아비를 몰아냈다는 패륜으로 보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물론 안 되지. 그건 이 할아비에게 맡겨라. 태조 대왕처럼, 만인의 추대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 마침 칭제건원도 하니 명분도 좋지 않으냐.”
“그래도 바로 즉위하는 건 명분상 문제가 많을 터인데요.”
“우리 왕조의 전례를 참조하자꾸나. 정종 대왕과 태종 대왕의 사례도 있지 않느냐.”
정종과 태종. 칭제건원을 할 때까지, 임시 군주를 세우겠다는 의미였다.
이선은 쓴웃음을 짓더니, 결심을 밝혔다.
“알겠습니다. 뜻이 그러하시다면, 기꺼이 새로운 조선의 태종이 되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