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17
– 217화에 계속 –
217화 대의멸친(大義滅親)
“그래, 잘 결심했다. 네가 새로운 조선의 기틀을 잡는 태종이 되어라.”
“할아버님께서 기왕 태조 대왕과 태종 대왕의 선례를 따르라 하셨으니, 저도 이를 따르고자 합니다.”
“좋다.”
“칭제 건원은 단순히 황제가 되어 제국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500년 전 태조께서 그러하셨듯이 새로운 나라를 개창하는 대업입니다. 저는 새 나라를 옛 조선의 연장선이 아닌, 새로운 하늘을 열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포부가 좋구나. 일전에 내가 일개 종친이었을 때의 일이다. 어떤 지관이 나한테 예언을 한 바가 있었다.”
대원군이 문득 생각에 잠겼다.
“가야산 동쪽에 명당이 있는데, 그곳에 묘를 쓰면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고 하더군. 가서 보니 과연 천하의 명당이더라. 그런데 2대에 걸쳐 황제가 배출된다니, 당시 정세를 생각해 보면 가소로운 일 아니냐. 나는 그저 웃으며, 잘하면 영의정 하나쯤은 배출되겠다고 답했지.”
“그래서 어찌하셨습니까?”
“사실 나는 명당이니 풍수니 하는 걸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니다만, 밑져야 본전 아니겠느냐? 가산을 털어서 그 땅을 사고, 아버님의 묘소를 가야산으로 이장했다.”
흥선군의 부친, 남연군(南延君) 묘에 얽힌 유명한 전설이었다. 이선은 대원군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되니 새로웠다.
“그런데 정말로 철종 대왕께서 붕어(崩御)하시고, 내 아들이 왕좌에 올랐지. 나는 그 예언이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천자라는 건 비유적 표현이고, 내 후손들이 대를 이어 천하를 호령하겠구나 하고.”
순간 대원군의 눈빛이 형형하게 돌았다.
“그런데 정말로, 내 후계자가 천자의 위(位)에 오르겠구나! 참으로 신통한 예언이 아니냐. 지난 오백 년간, 이 나라에서 누가 감히 천자를 논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마침내 내 후손이…….”
“정말로 예언의 덕이라고 믿으십니까?”
손자의 물음에 대원군이 헛웃음을 흘렸다.
“뭐,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렇게 되기까지는 너나 나, 사람의 노력이 컸지. 그래도 후대의 전설로 만들어질 일이 아니냐.”
굿이나 점을 좋아하는 임금과 민씨와 달리 대원군은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대원군 역시 ‘예언’이 주는 솔깃함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럼 저도 몇 가지 예언을 해 드리고자 합니다.”
“좋지, 해 보거라.”
이선은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저는 새로운 나라를 부강하고, 그 어떤 외세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자주독립국으로 만들어나가고자 합니다. 군주나 왕족, 양반 사대부만의 나라가 아니라, 한 사람의 군주하에 모든 국민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나라, 일군만민(一君萬民)의 국민국가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전에도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뭐, 우리의 나라라고. 나는 별로 공감이 안 된다만, 네 치세의 시대는 분명 다를 터이니. 어차피 이 늙은이는 보지 못할 미래의 일이겠지.”
대원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뜻대로 하거라. 네가 그 나라의 정점에 올라서 천하를 호령한다면, 나는 더 바랄 바가 없다!”
이선은 입 밖에 내지 않은, 왕좌에 관한 자신의 구상이 몇 가지 더 있었다.
‘첫째. 내가 왕좌에 오른다면 기존의 조선 군주와는 크게 다를 것이다.’
이선이 구상하는 황제는 천명을 받아 종묘사직을 계승한 동양식 전제군주가 아니라, 보나파르티즘(Bonapartism)적인 ‘국민의 황제’에 더 가까웠다. 광범위한 국민의 지지 위에서, 신 제정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두터워질 것이었다.
‘둘째. 유교적 허례허식을 완전히 폐할 수는 없겠으나, 이는 적당한 왕족에게 맡긴다.’
유교는 조선의 근본 토대니 왕실의 유교 의례도 폐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선으로는 절대적으로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타협책으로 직계 왕족 중에 종친의 수장을 뽑아서 그에게 친왕 작위를 주고 왕실의 유교 의례를 전담할 생각이었다.
‘셋째. 나는 황제랍시고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있을 생각이 없다.’
궁궐 안에만 있는 건 이선의 성미에 맞지 않은 일이었다. 서양의 황제들처럼 외국을 다니는 건 쉽지 않을 일이겠으나, 일본의 천황처럼 전국 순행하며 현황을 시찰하고 민심을 다독일 수 있었다.
그리고 꼭 필요한 외교적 사안에는 시암(태국) 국왕 라마 5세처럼 직접 외국으로 떠날 용의도 있었다. 근대적 개명(開明) 군주인 라마 5세는 수차례 서양을 순방했다.
‘넷째.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개설하며, 헌정을 실시해 입헌군주제의 토대를 갖춘다.’
신 제정은 전제군주제와 입헌군주제가 혼용된 프로이센식을 참고하는 게 수월했다. 영국식 정당 우위 입헌군주제는 시기상조였고, 러시아식 전제군주제는 시대착오였다.
먼저 헌정을 실시한 일본이 프로이센 헌법을 참고한 것처럼 조선의 성격에 맞는 헌법을 신설할 계획이었다.
‘다섯째. 태종이 그러했듯이, 유능하고 덕망 있는 후계자를 양성하여 적절한 시기에 선위한다.’
후대에 흔히 평하는 것처럼, 태종의 최대 업적은 왕조의 기반을 닦고 세종이라는 위대한 군주의 통치를 예비했다는 점이었다.
이선은 태종처럼 제국의 기반을 닦고, 세종과도 같은 유능한 후계자를 키워내 대업을 물려줄 계획이었다. 영원히 왕좌에 앉아 있다가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족히 20년 이상의 시간은 있어야겠지.’
역사가 그대로 전개되리란 전망은 없었지만, 세계대전은 피할 수 없으리란 예측이 들었다. 제국주의 열강 간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최소한 그때까지는, 실제 역사대로라면 1919년까지는 이선이 국가의 키를 잡고 있을 생각이었다.
‘1919년이면, 역사적 전환점이 오겠지.’
‘대군주가 개전 직전 청국에 밀서를 보내 내통했다’라는 소문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궁궐로 돌아간 김옥균과 박영효는 일단 이준용부터 단속시켰다. 뜻을 이룬 대원군으로부터 밀명을 전달받은 이준용은 자숙에 들어갔다.
이준용이 군부 일각에 퍼트린 소문이 아직 민간까지는 확대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왕실과 조정, 문무 관료 가릴 것 없이 소문이 돌아다녔다.
김홍집 내각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자는 엄단할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통제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 아니었다.
김옥균은 개화당을 움직여 정치 공작에 들어갔다. 김홍집과 온건파 대신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근위사단 장교들이 궐기하는 걸 보셨잖습니까? 국가와 군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군인들은, 대군주가 밀서를 보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군부의 신망을 받는 완화군께서 잘 다독였기에 망정이지, 군란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대군주께서 책임지고 물러나셔야 합니다.”
“그래도 어찌 신하 된 입장에서 군주에게 선위를 요구할 수 있겠소?”
김홍집과 온건파 대신들은 주저했다. 대군주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리더라도 왕권의 제약을 가하는 정도이지, 선위를 강요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우리가 어물쩍거리면, 국태공께서 종친들을 움직여 선위 여론을 주도할 겁니다. 정국의 주도권을 국태공과 종친들에게 넘기시렵니까?”
김홍집도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려는 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내각에서도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알겠소. 총의를 모아 봅시다.”
강녕전 안에 사실상 유폐된 대군주나 상황이 돌아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왕후와 왕태자 역시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김옥균과 대원군과의 합의 이후 이선은 일부러 입궐을 자제하고 있었다. 이선이 직접 나서기에는 거북한 상황이었기에, 김옥균과 대원군이 막후에서 움직이며 정치공작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왕후는 완화군에게 입궐을 요청했다. 이선은 고사하려다가, 거듭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어 입궐하였다.
이선이 내전에 이르니, 왕후 김씨와 왕태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완화군. 별래무양합니까?”
“지극한 성은으로 인해 무탈합니다. 왕후 폐하와 왕태자 전하께서는 어떠하신지요?”
“완화군의 염려 덕에 무탈합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 간 후, 왕후는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가급적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려 하는 왕후로서는 꺼려지는 일이었으나, 사실상 감금된 처지의 대군주와 불안한 표정의 왕태자를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완화군, 지금 궐내에 도는 흉흉한 소문이 사실입니까?”
이선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후와 왕태자는 누구라도 할 것 없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 그렇다면……. 국태공이나 내각에선 정말로 성상께 선위를 요구할 생각입니까?”
“자식 된 도리로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왕후는 이선의 말에 희망을 품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맞습니다. 완화군께서는 성상의 자식이지요. 차마 부왕께 지나친 거조를 강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선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하오나 이는 국가의 대의가 걸린 일입니다. 전쟁 중에 적과 내통한 일을 어찌 그냥 지켜만 볼 수 있겠습니까. 눈물을 머금고 대의를 따르고자 합니다.”
왕후와 왕태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완화군이 이토록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왕후는 착잡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왕태자가 이복형 완화군에게 호소했다.
“일각의 소문에 따르면, 대군주 폐하를 대신해 제게 대리청정을 맡긴다고 합니다. 제게 너무 과분한 일입니다. 형님, 진작부터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태자의 자리에 맞는 분은 제가 아니라 형님이십니다. 저는 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고자 하니, 부디 형님께서 받아주십시오.”
왕태자의 호소에 이선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태자는 진작부터 태자 자리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임오군란 이후 그는 궁궐에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처지였다.
이선도 태자이자 아우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선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는 제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부디 왕태자께서는 심기를 굳건히 하시옵소서. 금명간에 적절한 결론이 내려질 것입니다.”
“형님…….”
“대군주 폐하와 저는 부자의 사이고, 태자 전하와 저는 형제의 사이입니다. 어찌 골육 간에 상쟁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지금은 국가의 대의가 더 중요하기에, 잠시 사사로운 정을 잊는 것뿐입니다. 하오나 저는 결코 부친과 형제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선의 다짐에 왕후와 왕태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대군주가 잘못한 것이었다. 완화군이 처신이 바르고 권력욕에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완화군의 양식(良識)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완화군이 입궐했다는 소식은 강녕전의 대군주 귀에도 들어왔다. 대군주는 내전으로 내관을 보내 완화군이 강녕전으로 와 달라고 청했다.
‘아무래도 오늘 부왕과 결판을 내야겠구나.’
이선은 마음을 먹고, 강녕전으로 향했다.
강녕전은 궁내부 관리들과 호위대의 엄중한 경비하에 있었다. 대군주는 함부로 외부와 접촉할 수 없었다.
호위대장은 이선의 최측근이기도 한 장무영 정령이었다. 이선이 눈짓을 보내자, 장무영은 호위대와 관리들을 철수시키고 이선이 대군주와 독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신 이선, 삼가 대군주 폐하의 부름을 받아 입시옵니다.”
“아직도 짐의 명령을 들어준다니 기쁠 따름이다.”
대군주의 말은 빈정거림에 가까웠다.
“이제 짐을 어찌 처분할지 결정하였느냐? 국태공께서는 당장이라도 짐을 퇴위시키고 싶어 하겠지?”
“처분이라니요, 지나친 말씀이십니다.”
“대원군과 종친들이든, 내각의 대신이란 자들이든, 하나같이 짐보다는 너를 따르지 않느냐. 만인의 대망이 너에게 이르고 있으니, 짐이 알아서 내려오라는 뜻이겠지.”
이선은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신은 폐하의 아들이자 신하입니다. 비록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신과 각료들이 군주의 대권을 위임받았다고는 하나, 신은 폐하를 위해 끝까지 충성을 다할 생각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신을 저버리셨습니까?”
대군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충성? 군주인 짐을 뒷방 허수아비로 만들어놓은 게 어찌 충성이란 말이냐?”
“신이 그토록 못마땅하면, 군주로서의 권위를 발휘해 꾸짖고 파직하시면 그만입니다. 어찌 적국인 청국 황제에게 의존하려 하셨습니까?”
대군주도 이 지적에는 부끄러운 빛을 보였다. 하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짐을 따르는 충신이 있었더라면, 어찌 그와 같은 극약처방을 했겠는가! 하지만 손발이 다 잘린 짐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폐하의 신하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 걸고 적국과 싸우는데, 어찌하여 군주께서 국가의 대의를 저버리신단 말입니까!”
“짐이 곧 국가이거늘, 짐이 어찌 대의를 저버린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군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고, 짐의 권한을 빼앗아 국가를 농단한 건 그대들이지 짐이 아니다!”
대군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국가관을 갖고 있었다. 군주가 곧 국가라는 전제적 사상을 신봉하고 있는 그로선, 신하들이 왕권을 빼앗아 10년 넘게 허수아비로 만든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국왕 루이 16세에게 처가이자 적국인 오스트리아와 내통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반역을 일으킨 역도들에 맞서서 처가의 힘을 빌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은 루이 16세를 적국과 내통한 반역죄로 단죄했다. ‘짐이 곧 국가’에서 ‘국민의 국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신은 자식이자 신하 된 도리로서, 부왕과 대립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부왕을 덕국의 카이저나, 일본의 천황처럼 만들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새로운 제국의 가장 존귀한 황제로 높이 떠받들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
순간 이선과 대군주의 낯빛에 동시에 회한이 서렸다.
“하오나 이제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국가의 대의를 위해, 감히 대의멸친을 각오할 것입니다.”
대의멸친(大義滅親). 이선의 입에서, 전에 없이 단호한 말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