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18
– 218화에 계속 –
218화 흥국과 망국
대의멸친, 문자 그대로 대의를 위해서라면 혈육의 정도 저버리겠다는 의미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따르면,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충신 석작(石碏)이 반역을 일으킨 왕자와 협력한 아들을 죽이라고 명한 고사에서 대의멸친이란 말이 비롯되었다.
대군주도 모를 수가 없는 고사였다.
“아들이 반역을 꾀해 아비가 아들을 벌하였으니, 오히려 지금 이 상황과는 반대가 아니냐?”
대군주는 고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들었다.
“제가 반역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범하여 정권을 탈취한 대원군과 손잡고, 군주를 위협해 왕권을 빼앗았으니 반역이 아니면 무엇이랴?”
부왕의 억지에 이선이 냉소를 흘렸다.
“나라를 도탄에 빠트려 군란을 초래했고, 외세에 진압을 요청하여 망국으로 이끌 뻔했습니다. 마침내 조선을 침략한 적국에 밀서를 보내 내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반역이란 이를 지칭함이지요!”
이선은 더 이상 자식이자 신하로서 예를 지키지 않았다.
“대의멸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정성공이 내세운 살부보국은 어떠십니까? 지금 이 상황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살부보국(殺父保國). 아버지를 죽이고 나라를 지키겠다.
명말 청초의 해상 군벌 정지룡(鄭之龍)의 아들 정성공(鄭成功)은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내걸고 청나라에 끝까지 투쟁했다.
청조는 정지룡을 포섭해 항전을 이어가고 있는 정성공에게 투항을 권유했다.
정성공의 답변은 단호했다. 살부보국 기치를 내걸고, 청조에 맞선 북벌을 이어나갔다.
아버지는 청나라에 내통하여 나라를 팔았고, 아들은 끝까지 충의를 지켜 북벌을 수행했으니 절묘한 비유였다.
“네놈이 정녕 신하이기도, 자식이기도 포기했구나! 양이(洋夷)의 습속에 물들은 결과가 바로 이것이구나.”
대군주는 분노를 토해 냈다.
“오냐, 마음대로 해 보거라! 하지만 네가 하는 짓이 반역이자 찬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자식이 아비를 핍박했으니 패륜이요, 신하가 군주를 폐위했으니 반역이다!”
“맹자 양혜왕 8장. 제 선왕이 말하기를, ‘신하 된 자로서 제 임금을 시해한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이선은 맹자의 답변을 그대로 인용했다.
“맹자가 말했습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잔적한 이는 일개 필부일 뿐입니다. 무왕께서 주라는 자를 주살하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말은 들어 본 바 없습니다.’”
패역한 군주를 몰아내는 건, 서양의 시민혁명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양에서도 이미 2500년 전에, 맹자가 그 정당성을 설파한 바 있었다.
대군주는 이선이 서양의 사상에 물들어 동양 군주제의 전통을 흔든다고 비난했지만, 그건 잘못된 지적이었다.
어떠한 관점에서 보아도, 이선의 행동은 반역이 아니었다. 군주의 권위보다 국가의 대의가 더 중요했고, 부왕은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고 배신했다.
“뭣이……!”
대군주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몸을 떨었다.
“그래? 짐은 은 주왕이고, 네가 주 무왕이란 말이냐! 천명을 받들어 정혁(鼎革)하고 폐주를 죽이겠다 이것이냐? 네놈이 겉으로는 짐에게 충효를 다짐하더니 끝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중전을 폐하고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군주조차 폐하고 죽이려고 들다니! 정녕 이 나라 조선이 망할 때가 되었구나.”
“분명히 낡은 조선은 망했습니다. 하지만 낡은 조선의 잔해 위에서 새로운 제국이 탄생했습니다!”
이선은 물러서지 않았다. 부왕을 헛된 미몽에서 깨트려야 했다.
“임오년에 제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누군가의 뜻대로 청군이 개입하여 대원군을 납치하고, 한성을 짓밟았을 겁니다. 청국은 명목상의 종주국이 아니라 실질적인 상국 노릇을 하려 들며 내정간섭을 했겠지요. 그럼 일본은 가만히 있을까요? 끊임없이 조선을 흔들려고 들었을 겁니다. 자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 원죄가 있는 조선은 청일 간의 갈등 속에 주도권을 빼앗긴 채 계속 표류했을 겁니다!”
바뀐 역사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일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예언’했다.
“그리고 어찌 되었겠습니까? 조선을 놓고 청일 간에 전쟁이 일어났겠지요. 조선 땅에서 조선의 패권을 놓고 벌이는 전쟁! 전쟁을 벌이는 건 청과 일본인데, 희생되는 건 조선 백성들! 일본군은 경복궁을 유린하고, 칼을 빼 들어 군주를 노골적으로 위협했을 겁니다. 조선은 일본의 총칼에 짓밟히고 말았을 겁니다. 폐하의 통치가 계속 이어졌더라면, 그 결과는 끝내 망국입니다!”
이선과 여러 사람들이 노력하여 역사를 바꾸었기에, 비탄과 절망의 역사는 환희와 희망의 역사로 바뀌었다.
실제 역사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분명 낡은 조선은 사라질 터이지만, 그 뒤를 잇는 건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라 조선인의 주체적인 자주독립 국가, 새로운 제국이었다.
대군주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는 지나치게 부당한 비난이었다. 1882년 이후의 일은 그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선이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짐이 통치하면 망국이고, 네가 통치하면 흥국(興國)이란 말이냐?”
“단언컨대 그렇습니다. 폐하께서는 망국의 군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뻔하였으나, 저와 국민의 노력으로 그러한 불명예는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폐하를 위해서도, 이 나라를 위해서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과 후대의 후손들을 위해서도 참으로 다행인 일입니다!”
이선은 당대의 인물이 아니라, 후대의 인물 입장에서도 ‘고종’을 비난했다.
고종이란 군주에 대해 갖고 있었던 그의 냉정한 비판은 오랫동안 속에 감추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동안 신하이자 자식이라는 처지로 인해, 부친에게 효성을 다하고 싶어 했던 완화군의 본래 영혼을 위해, 이선은 고종에 대한 충효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고종에게 나라를 맡겨 놓으면 망국으로 갈게 뻔히 보였으므로 왕권을 대행하여 조선을 개혁과 자주독립으로 끌어나갔다.
그런데도 고종의 재위만큼은 보장해 주고 싶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군주로.
그러나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치하지 않는 군주는 그에게 있어 군주가 아니었다.
그 결과는 파국뿐이었다.
“폐하, 저는 자식 된 도리는 다하겠습니다. 완화군 선, 왕태자 척, 의화군 강, 대군 영 모두 부친께 효성을 다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안온한 궁궐에서 만수무강을 누리시겠지요. 부디 마음 편안히 노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는 폐하를 대신하여, 가시방석과 같은 왕좌에 앉아 통치의 무거운 짐을 지겠습니다.”
이선은 강녕전에서 물러나며, 부왕에게 마지막 절을 올렸다.
이제 부자간, 군신간, 신구(新舊)간에 기나긴 줄다리기는 끝이 났다.
이선의 승리, 새로운 시대의 승리였다.
내각은 해결책을 골몰했다. 대군주가 청국에 밀서를 보냈다는 소문은 이제 궁궐을 넘어 도성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이제 덮어두기는 불가능했다.
대원군은 종친들을 소집해 선위 여론을 조성했고, 이선의 복심이나 다름없는 김옥균과 개화당이 정부에서 강경론을 주도하고 있었다.
고심하던 김홍집은 타협책을 내세웠다.
“이제 대군주께서 원활히 통치를 이어나갈 수 없다는 건 자명해졌으니 일단 왕태자께 대리청정을 맡김이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습니다.”
이선은 즉시 선위는 시기상조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개화당도 타협책인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받아들였다. 세자의 대리청정은 선례가 여러 번 있었으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밀서 건은 완전히 묻어둘 수 없게 되었으니, 정부가 적당하게 얼버무려서 발표합시다. 사실대로 발표하면 국민이 뭐라 하겠습니까? 왕실의 권위가 크게 추락할까 우려스럽습니다. 정부도 아주 곤욕스러운 처지에 놓일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시렵니까?”
“계미년과 을유년 밀서는 물증이 없으니 아예 논외로 치고, 갑오년 밀서는 이렇게 했으면 합니다.”
김홍집의 의견에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정부의 성명이 관보에 게재되었다.
——
…… 세간에 소문이 돌고 있는 소위 대군주 폐하의 밀서는 일정 부분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조선이 패전할 경우를 대비한, 대군주 폐하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만약 조선이 패전하게 된다면, 국가 전체가 멸망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에 정부에서 전쟁을 주도한 이들이 책임을 지고자 했던 것이다.
…… 정부의 적절한 지도력, 충용스러운 조선의 군인과 국민들의 노력으로, 조선은 마침내 승전과 자주독립을 쟁취했다.
이에 이르러 대군주 폐하께서는 오판을 자책하셨다. 비록 성심에 심모원려가 있었을지라도, 전쟁을 앞두고 적국 황제에게 밀서를 보낸 건 적절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에 대군주 폐하께서는 책임을 통감하시고, 지엄한 군상대권(君上大權)을 왕태자 전하께 일시 대리청정하라 명하시었다.
정부는 변함없이 국가를 지도하고 있다. 그러니 그대들 신민은 유언비어에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충실하도록 하라.
—–
대군주의 밀서가 사실임을 알리는 소식이 관보에 게재되자, 각종 신문이 재빨리 호외를 찍어내 한성 곳곳에 뿌려졌다.
“호외요! 호외!”
“대군주 폐하의 밀서, 사실로 드러나!”
“패전의 경우를 대비한 불가피한 조치!”
“대군주 폐하, 책임을 통감하고 왕태자 전하께 대리청정을 명하시다!”
호외를 받아든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아니,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이야?”
“사실이니 발표했겠지. 군인들이 괜히 궐기했겠나?”
“나 원 참, 전쟁을 앞두고 군주가 청국 황제에게 밀서를 보내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로군.”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게 말이 되나? 우리 군인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데?”
아무리 충군애국 하라고 교육을 받았다지만, 군인들의 허탈감은 더욱 컸다.
“장교들이 완화군 대감 댁에 몰려갔던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대체 우리는 누구를 위해 싸웠단 말인가?”
근위사단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불만을 토로하는데, 장교들이 병사들을 집결시키고 교육을 실시했다.
“병사 제군! 우리는 조국의 독립과 동포들을 위해 싸운 것이지, 대군주 폐하 한 분만을 위해 싸운 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름처럼 근위(近衛)사단입니다. ‘대군주 폐하 만세’를 외치며 적에게 돌격하여 싸웠는데, 어찌 폐하께서는…….”
병사들이 대군주의 밀서를 받아들이지 못하자, 장교들이 말을 이어나갔다.
“제군은 우리와 함께 전선을 누비며 동고동락한 군무대신 각하를 잊은 건가? 제군은 군무대신 각하의 연설을 잊었는가?”
병사들은 잊을 수 없었다. 평양성 전투 직전, 승전 직후, 북벌을 개시하며, 압록강을 넘을 때의 기억을. 완화군은 그들과 함께 있었으며 사기를 북돋는 연설을 했다.
그들의 충심은 추상적인 존재인 대군주가 아니라, 함께 승리를 쟁취했던 완화군에게 가 있었다.
그들은 대군주에 대한 실망이 큰 만큼, 완화군이 새로운 통수권자가 되기를 고대했다.
“호외! 군무대신 완화군 대감도 사직을 청하다!”
이윽고 나온 소식에 사람들이 더욱 놀랐다.
“대체 군무대신은 왜 사임하셨단 말이오?”
“본의 아니게 부왕께 부담을 드렸다는 이유로, 스스로 불충불효를 자책하시고 사직을 청하셨다는군.”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완화군께서 나라를 제대로 이끌고 승전을 쟁취하였는데, 그게 어찌 공이 아니라 죄가 된단 말인가?
누군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쉿, 이건 궁궐에 도는 소문인데, 바로 그 때문에 폐하께서 완화군을 질시하였다는 거야.”
“뭐? 그게 말이 되나?”
“왜, 지나간 옛일이긴 하다만은,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잖은가.”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며 전공을 세운 세자 광해군을 질시하고,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부왕 대신에 심양으로 끌려가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소현세자를 질시했다는 역사적 선례가 있었다.
이 시대는 아직 선대왕의 권위라는 게 있어 선조나 인조를 비판하기는 어려웠지만, 대군주는 이들 선대의 행각과 비견되었다.
“무책임한 아비를 두면 책임감 있고 현명한 아들이 힘들군그래.”
“흐흐, 그건 왕실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지.”
“이런 소문도 있네. 완화군께서 정성공의 일을 떠올리며, 대의멸친과 살부보국의 의미를 알았다고.”
“어휴, 그건 좀 센데.”
작은 목소리로 말하던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완화군도 사람이신데, 어찌 실망하지 않으시겠나?”
“하긴 정성공도 청나라와 내통한 부친을 용납하지 않았지. 그리고 반청복명을 끝까지 고수했고.”
“하지만 완화군은 정성공보다 훨씬 대단하지. 정성공의 북벌은 실패했지만, 완화군은 북벌을 완수하고 만청 오랑캐를 무찔러 치욕을 갚지 않았는가?”
“맞네, 맞아. 정성공에 비할 바가 아니지.”
“이런 분을 몰아내려고 핍박한다는 게 말이 되나?”
“절대 안 되지!”
“그런데도 충효스러운 완화군께서는 책임감을 느끼시고, 스스로 물러나려고 하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네.”
여론의 동정과 지지는 완화군에게 몰렸다.
원래 완화군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높았지만, 대원군과 개화당의 여론 공작까지 더해졌다. 이들은 사람을 풀어 궁궐의 내밀한 일을 전하며 대군주에 대한 비판, 완화군에 대한 동정과 지지 여론을 더욱 증폭시켰다.
문자 그대로, ‘민심의 대망’이 완화군 이선에게 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