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19
– 219화에 계속 –
219화 민심의 동향
“제가 아니었더라면, 대군주께서 이런 실수를 저지르셨겠습니까? 대군주께 누를 끼쳐 드렸으니, 자식이자 신하 된 도리로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저는 책임을 통감하고 모든 관직에서 사직하겠습니다.”
“그게 어찌하여 대감의 책임이란 말입니까? 물러나시면 안 됩니다.”
“아닙니다. 왕태자께서 대리청정하신다면, 제가 물러나는 것이 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각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선은 군무대신에서 사임했다.
이선은 뒤로 물러나 가만히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빛나는 공훈을 세우고도 부왕의 질시로 인해 밀서 사건이 터지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책임을 느낀다며 관직에서 사임했다.
예상대로 이선에 대한 동정과 지지 여론이 몰렸다. 대원군과 개화당은 경쟁하듯 사람을 풀어 여론을 더욱 조장했다.
이선의 처신은 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포장되었고, 이선이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수록 그를 받드는 여론이 더 강해졌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였다.
“신하 된 자로서 군주께 이런 진언을 올려 송구할 따름이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아룁니다. 작금의 사태를 극복하려면, 일시적으로 왕태자 전하께 대리청정을 맡기십시오.”
김홍집과 내각 대신들이 강녕전을 찾아 대군주에게 청원했다. 이미 대군주의 명의로 된 대리청정 조서는 작성되어 있었고, 형식적인 재가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국태공과 완화군이 그렇게 시키던가?”
대군주는 냉소적인 어조로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내각의 중론이 각의를 통해 그리 결정되었습니다.”
“분명히 경들은 짐에게 충성을 다짐한 짐의 신하이다. 그런데도 신하가 군주에게 지엄한 대권을 내놓으라 강요하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여전히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는 김홍집이 잠시 머뭇거리자 김옥균이 대신하여 답했다.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여 군주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김은, 열성조의 고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입니다. 세종, 숙종, 영조, 순조께서 대리청정을 명하시어 국가의 중흥을 꾀하셨으니 실로 왕조의 전범(典範)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리청정이 어찌 짐과 태자를 위한 일인가! 완화군의 찬탈을 포장하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가 아닌가?”
대군주가 벌컥 화를 냈다.
“김옥균! 경은 분명 짐이 발탁한 신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군주를 저버리고 완화군과 사사로이 결탁하여 역적질하기에 이르렀는가!”
“역적이라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신등(臣等)은 오직 국가를 위해 헌신하였고, 개혁을 이끌어 마침내 조선의 자주독립을 이룩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신등이 그토록 역적이라고 생각하셨으면, 군대를 몰아 신등을 체포하고 처벌하셨어야지요. 어찌하여 적국의 황제에게 밀서를 보내 일이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사실상 신하이기를 포기한 김옥균의 비판이었다. 다른 대신들은 김옥균의 ‘불충’을 꾸짖기는커녕, 말없이 동조의 뜻을 보였다.
“이, 이이이…….”
신하의 입으로 비난을 받는 것은, 아들에게 받는 것 이상의 분노와 수치심을 느꼈다.
대군주는 노성을 퍼부으려다가, 순간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래도 최소한 종묘사직은 이을 수 있지 않은가. 저자들의 우두머리가 완화군이 아니라, 성 다른 김옥균이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조선 왕조의 존재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역적’의 우두머리는 군주의 장자였다.
왕조가 무너질 일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민심의 지지 위에서 왕조의 기반은 더욱 튼튼해지리라.
완화군이 부왕이나 태자를 해칠 리도 없었다.
모든 권력을 빼앗긴 채 뒷방 늙은이로 살아가는 건 용납하기 어렵지만, 일단은 후퇴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대군주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를 수 있었다.
“경들의 뜻대로 하라. 짐의 심기가 크게 어지러우니 왕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 국가의 중대사를 처결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군주의 재가를 받자 대리청정을 알리는 조서가 반포되었다.
아! 짐이 열성조의 크나큰 위업을 계승하고 지켜온 지 이제 32년이 되었다.
여러 차례 큰 난리를 겪으면서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소란이 나날이 심해지고 조치가 시기에 대부분 맞지 않아 근심스러운 일이 급하게 생겼다.
다행히 왕태자의 덕스러운 기량은 하늘이 준 것이고 훌륭한 명성은 일찍부터 드러났다.
짐은 우리 왕조의 선례를 계승하여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를 왕태자에게 대리하게 하노니, 신민은 왕태자를 충성스럽게 보좌해야 할 것이다.
“소자는 대리청정할 자질이 없습니다. 소자는 어리고 무지하여 국가의 대사를 맡을 수 없습니다.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왕태자는 거듭 상소를 올려 사양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미 조서는 반포되었고, 내각도 의결을 마친 상황이었다.
이선이 왕태자를 찾아 좋은 말로 설득했다.
“태자 전하께서 대리청정을 맡아 주셔야, 국가가 비로소 안정될 것입니다.”
“형님께서 이끌어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이 아우는 정말로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태자는 불안감을 보였다. 이선은 태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는 일개 왕족이요,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태자이십니다. 전하께서 대임을 맡는 것이 지당합니다.”
“그, 그래도…….”
“중요한 일은 모두 내각에서 결정할 것이고, 전하께서는 내각의 보좌를 맡아 국가를 호령하시면 됩니다. 그 기간이 아주 길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왕학을 익히고, 국가의 실무를 맡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 주십시오. 저도 전하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왕태자는 결국 대리청정을 받아들였다.
“내가 비록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으나 많이 부족한 사람이니, 제공(諸公)이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성심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이선의 말처럼 중요사항은 모두 내각에서 결정하였고, 태자의 역할은 결정된 사항을 재가하는 정도였다.
왕태자 이척은 본래 소극적인 사람이었고 권력욕도 없었다. 통치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단지 맡은 바 의무는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동안 세자로서 익혀온 유교적 의례에도 정통하여 어려운 예식도 처음부터 끝까지 척척 해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동양적 입헌군주의 상으로서는 이보다 더 적절한 사람이 없었다.
이선은 태자의 대리청정을 보면서 문득 후계의 일을 생각했다.
군주제가 유지되는 이상 다음 군주도 현명하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야 했다.
이선이 당장 결혼해서 후계자를 얻어서 장성하는 시간만 해도 한참은 필요했다.
‘만약 후계자를 얻지 못한다고 해도, 의화군 이강이나 대군 이영이 있으니 다행이군.’
현재 미국에 유학중인 19세의 이강은 근대와 자유주의, 진보의 세례를 받고 있었고, 개화를 충실히 지지했다.
‘강의 학업이 마치면, 나를 대리해서 왕실 외교의 중책을 맡겨야겠다.’
내년으로 예정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이강도 불러들여 국제 외교를 경험하게 할 생각이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왕족만이 할 수 있는 외교가 있었다.
9세의 대군 이영은 아직 나이가 어려 대군 작호를 받지 않았고, 관례도 치르기 전이었다.
역사상 실제 인물인 이강과 달리 이영은 바뀐 역사가 만들어낸 인물이었으므로, 이선은 막냇동생의 성장이 궁금했다.
이영의 나이는 아직 어렸지만, 상당한 총명함을 보였다. 모친인 왕후의 가문이 학문으로 이름 높은 광산 김씨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리지만 학구열이 상당했다.
특히 세계에 대한 관심이 많아, 이선이 선물한 지구본과 세계지도를 늘 뚫어지라 보면서 공부했다.
“대군이 총명하니 왕실의 복입니다.”
“아직 관례도 치르지 않은 어린아이니, 총명함을 논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이선의 칭찬에 왕후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왕후는 직계 소생의 총명함을 드러내기 꺼렸다.
‘여러모로 폐비와 대비되는 분이군.’
왕후는 여러모로 정치적 야심이 없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적자인 대군의 지위를 높이겠다는 시도도 없었다.
오히려 관례 시기도 늦추면서 주목받기를 꺼렸다. 폐비가 세자를 겨우 9세에 혼례를 치르게 한 것과 비교하니 처신이 크게 대비될 정도였다.
혹여 왕좌를 놓고 부자간에 이어 형제간의 갈등이 생길지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외척과 대군이 완화군에 반대하는 세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길 극력으로 피하고 있었다.
“영아, 네가 총명하고 배우길 좋아하니 나도 기쁘구나. 특히 네가 외국의 지리와 역사를 좋아하니 더 좋구나. 장차 이 형과 함께 외국을 다니며 문물을 구경하게 될 날이 올 게다.”
“예, 형님! 정말 기대가 됩니다.”
이선은 19살이나 어린 막냇동생을 우애로 대했고, 이영도 큰 형을 곧잘 따랐다.
스스로 터득한 이선과 달리, 이영은 어릴 적부터 영재 교육을 하게 할 생각이었다.
‘장래가 밝아. 처음부터 제대로 공부시켜서, 장성하면 국가의 중책을 맡기도록 해야겠다.’
왕실의 일을 정리한 이선은, 대리청정이 안정 궤도에 오르자 측근 몇 명만 데리고 전국을 순행하기 시작했다.
모든 직책에서 사임했으니 개인적인 방문이었지만, 어딜 가나 완화군의 방문을 환영했다.
특히 경의선을 타고 북쪽으로 갈수록 민심의 환호가 더 강해졌다.
이선이 탄 왕실 열차가 평양역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역에 도열해 있었다.
“완화군 대감께서 오셨다!”
“평양 전투의 영웅, 완화군 만세!”
“승리의 지도자, 완화군 만세!”
평양 시민들은 이선을 열렬히 환영했다.
전쟁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지역이 전선이 된 평안도고, 특히 결전이 벌어진 평양 일대였다.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이들은 정부를 원망할 만도 하겠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완화군은 몸소 최전선에서 동고동락하며 마침내 승리를 이끈 영웅이었다.
지역적으로도, 계급적으로도 평양이 이선을 환영할 이유는 충분했다.
서북 지방은 오랫동안 조선에서 차별받는 지역이었다. 오랜 차별로 인해 서북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것처럼, 중앙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이 있었다.
특히 조선 제2의 도시인 평양은 부유한 상업으로 인해 착취 받기 십상이었다.
이선과 개화당 정부가 집권하면서 마침내 평안도는 새로운 역사의 중심부로 진출할 수 있었다.
서북인에 대한 차별은 사라졌고 신정부의 정책은 오히려 평안도에 유리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평안도 사람들은 문벌 대신 상공업에 투신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상공업이 발달했다.
신정부의 적극적인 식산흥업과 자원 개발은 평안도에 수혜를 안겨 주었고, 평양 일대에는 신흥 상공인 계층이 형성되었다. 양반 지배층이 적은 평양은 새로운 시대에 빠르게 적응했다.
비록 전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기는 하였으나 승전과 북방 영토의 확대는 서북인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조선이 만주에 공을 들일수록, 그 중간지역인 평안도의 전략적 가치는 수직 상승했다.
평안도는 더 이상 변방이 아니라, 새로운 제국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완화군 대감과 신정부가 아니었더라면, 계속 서울놈들한테 무시당하며 살지 않았겠나? 등골까지 쪽쪽 빨리면서.”
“길티, 길티요.”
“꼴 조타, 세도 문벌 종간나 새끼들!”
“어허, 우리도 이제 서울말 씁시다. 정부가 표준어를 제정하고 보급하고 있는 상황에. 우리가 새로운 시대의 주류로 떠오르려면 정부 시책을 준수해야지.”
“암요, 그렇지요.”
평양이 한양에 느끼는 감정은 양가적이었다. 한양은 조선에서 가장 빠르게 근대화가 진행 중이었고, 경의선을 타고 한양에 온 평양 사람들은 한양의 변화를 보면서 부러워하고 질시했다.
“서울놈들에게 질 수 없지 안카서?”
평양의 신흥 계층이 선택한 건 더 급진적인 변화였다.
“하느님 아버지,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빠른 서구화를 상징하듯, 근래 평양에는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개화기의 조선에 기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서학(西學)으로 인식되었고, 사람들은 기독교가 서양을 빠르게 익히는 통로라고 생각했다.
유학자들은 기독교를 사교(邪敎)라 칭하며 혐오했지만, 유학의 영향이 적은 평안도는 기독교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다른 지역에서 천주교가 강세를 보이는 것과 달리 평안도는 미국인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개신교가 성장하고 있었다.
더욱 종교적인 접근을 하는 천주교와 달리 개신교는 주로 의료 선교사들을 보내 ‘의학’과 ‘과학’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평양에서 개신교가 새로운 시대의 통로로 인기를 끌게 된 것이었다.
“의료인은 언제나 환영이오.”
서양과의 조약으로 기독교 선교는 허용했지만, 딱히 우호적이지 않은 정부도, 의료 선교사들은 적극 환영했다. 근대의학이 자리 잡은지 얼마 안 된 조선에서 의료 인력은 귀중했다.
전쟁으로 인한 군대 규모의 갑작스러운 확대로 인해, 조선 내부에서 양성한 의사들은 대부분 군의관으로 복무하였다.
민간 차원의 의료는 아직 취약한 수준이었다. 특히 한양과 달리 지방의 의료 수준은 아직 열악했다.
그 공백을 메워 주는 것이 서양인 의사들이었으니, 정부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했다.
정부가 군대 못지않게 공을 들이는 게 의료였다. 내무부 산하 위생국(衛生局)에서는 전염병 방지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들이고 있었다.
전쟁 기간 만주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여름이 되면서 압록강을 넘어 평안도에 침투했다.
정부는 즉각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내무부 위생국을 중심으로 방역대책을 강구했다.
이선의 평양 방문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방역대책도 중요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