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20
– 220화에 계속 –
220화 위생의 탄생
콜레라. 조선에서는 콜레라를 호열랄(虎列剌) 혹은 호열자(虎列刺)라고 불렀다. 본래 콜레라를 한자로 음차한 말이지만, ‘호랑이가 갈기갈기 찢는 듯한’ 고통을 준다고 하여 호열자라고 불렸다.
콜레라는 근대의 질병이었다. 인도에서 처음 발병한 콜레라는, 무역이 발달하고 교통망이 확대되면서 전 세계로 빠른 속도로 퍼졌다.
1820년 중국으로 전파된 콜레라는 이듬해 압록강을 넘어 조선에 상륙했고, 이 희대의 괴질(怪疾)은 조선 전역에서 수십만의 희생을 내고야 말았다.
전통 사회에서 콜레라는 속수무책의 질병이었다. 전통 의학은 콜레라의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끔찍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미신에 빠져들었다.
“이건 사람의 일이 아니다! 귀신이 내리는 벌이다!”
콜레라가 ‘쥐 귀신’ 때문에 걸린다는 속설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고양이 그림을 내걸고 무당을 불러 굿을 벌였다. 물론,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
개항 이후에도 콜레라는 빈번히 발생했다. 외국과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생긴 역효과였다.
1879년에는 일본을 통해 콜레라가 전파되었고, 당시 조정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동안 조정이 실시한 방역 대책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여제(厲祭)였다.
1880년대에 개화파 정부가 수립된 후에야 비로소 당국은 진정한 의미의 방역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1886년, 이번에도 외국을 통해 콜레라가 전파되었다. 이선과 정부 당국자들은 신속히 대책을 세웠다.
“호열자는 결코 귀신이 옮기는 병이 아니다. 사전 대책만 잘 세워도 전염을 방지할 수 있다.”
내무부 산하 위생국이 신설되고, 정부 훈령으로 콜레라 예방 규칙[虎列剌豫防規則]이 선포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막 서양의학이 도입된 시기였고, 관립의학교와 제중원의학교는 『콜레라 예방주의서[虎列刺病豫防注意書]』를 공동으로 편찬해 배포했다.
독일에서 시작된 근대적 개념인 ‘공중 위생(Öffentliche Hygiene)’이 조선에 도입되었다. 첫 시작은 도시위생이었다.
전통 사회에서 한양의 더러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곳곳에 인간과 동물의 분뇨가 나돌았고, 식수로 사용할 하천과 우물에도 섞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분뇨가 역류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수인성 질병인 콜레라가 전파되기 제일 좋은 환경이었다.
‘일단 더러워서 내가 못 참겠다. 백번 양보해서 불결한 건 참을 수 있더라도, 이래서야 전염병의 온상이지 않은가!’
현대의 기억이 있는 이선이 조선에서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불결함과 위생 관념의 부재였다.
이선은 당시 조선인이 보기에 극렬히 유난을 떨 정도로 위생을 강조했다. 늘 비누로 손을 씻고, 자주 목욕하고, 물을 끓여 마시고, 화장실을 개선하고, 청소를 주기적으로 했다.
“이건 왕족의 고상한 취미가 아니오. 위생은 곧 개인의 건강과 사회의 안전으로 이어지는 법이오!”
조선의 그 누구보다 위생을 강조한 이선 외에도, 급진개화파 역시 진작부터 치도론, 즉 도시계획론에 관심이 많았다.
개화파 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양부터 변모하기 시작했다.
“한양부터 시작해 싹 바꿔 나갑시다.”
상수도가 설치되어, 궁궐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수질 검사가 이뤄진 양질의 물이 공급되었다. 상수도가 공급되지 못하는 곳에는 우물을 철저히 관리하도록 했다.
근대적 도시 계획에 따라 넓은 도로가 신설되어, 도랑을 없애고 오물을 치워 냈다. 낡고 밀집된 초가집들은 철거되어 전염병과 화재를 예방했다.
곳곳에 공중화장실이 세워지고, 예전처럼 아무 데서나 용변을 보거나 분뇨를 버리는 행위는 엄금되었다.
경무청 산하에 위생순검이 한양 곳곳을 돌아다니며 위생을 점검했다. 그 과정은 강압적이었다.
“네 이놈! 아무 데서나 용변을 보지 말라는 조정의 훈령도 보지 못했느냐!”
“아이구, 나으리, 쇤네가 너무 급해서…….”
“이런 무지한 놈! 급하다고 참지 못하면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
위생순검들은 훈령을 어기는 자들에게 거침없이 공권력을 집행했다. 현행범에게 방망이가 날라오기 일쑤였고, 잡혀간 자들은 위생을 개선하기 위한 교육과 강제노역에 투입되었다.
“신정부는 전문가를 우대하오. 의사 여러분께서 많은 도움을 주시길 바랍니다.”
조선 시대에는 의사의 신분이 높지 못했지만, 개화기에 그 위치가 급상승했다.
초대 위생국장으로 임명된 개화파 지도자 유홍기는, 전염병이 발생하자 내국인과 외국인을 막론하고 근대의학을 배운 의사를 소집해 방역위원회를 설치했다.
전문가인 의사들이 방역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소제청결법이 제정되어, 우물, 시내, 하천, 화장실, 쓰레기장, 개울 등 병독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장소는 주의하여 소독을 시행했다.
노력의 결과, 전국을 뒤흔든 1886년 콜레라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공중위생으로 일신한 한양에는 콜레라가 거의 침범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정부의 계몽 노력에도 다수의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아직 조선은 지방을 모두 일신할 만큼의 재정과 행정력, 인적자원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정부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적극적인 공중위생 정책, 방역 대책만이 전염병의 전파를 막을 수 있다.”
1886년 이후, 한양에 이어 외국과 접촉이 많은 개항장인 인천, 부산, 원산에 먼저 도시계획과 공중위생이 이루어졌다.
1895년 콜레라는 동아시아 전쟁의 결과였다. 실제 역사에서도 청일전쟁 직후 조선에 만주발 콜레라가 전파되었는데, 이번에는 수만의 조선군이 직접 남만주를 점령하고 돌아왔으니 접점이 더욱 강해졌다.
동시기 일본군 전상자의 대부분도 전사자가 아닌 각기병과 콜레라로 인한 병사일 정도였다.
만주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종전 이후 여름이 되자 점차 기승을 부렸고, 압록강을 넘어 평안도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의주에서 콜레라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는 즉각 방역 대책에 돌입했다.
“전시 상황에 준하는 대처를 해야 합니다.”
방역 위원회가 재결성됐다. 정부에서는 완화군 이선, 내무대신 박영효, 외무대신 김옥균, 법무대신 유길준, 군부협판 겸 군의부장 서재필, 내무참의 겸 위생국장 지석영이 위원회에 참가했다. 모두 강력한 공중위생론자들이었다.
서재필과 지석영의 경우 본인이 의사이기도 했다.
“조선의 개혁은 의학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지석영은 종두법을 개발한 이후 근대의학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이선의 후원을 받아 일본에서 유학하고, 서재필은 의학에 심취하여 주미 외교관 직위를 사직하고 의대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었다. 이들은 귀국 후 모두 중책을 맡게 되었다.
민간의 의사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직 소수에 불과한 조선의 양의사는 전쟁으로 인해 예외 없이 군의관이었으므로, 민간 의사들은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제중원의학교의 학장 에비슨(Oliver R. Avison)이 방역위원회 민간부위원장을 맡고, 미국 공사관 서기관 겸 왕실어의 알렌, 경신학교 학장 언더우드, 관립의학교 교수 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 한성병원 원장 스즈키 유조 등 재조선 외국 의사들도 적극 참여했다.
이들은 이전까지 서구에서 콜레라 병인론으로 인식되던 독기(毒氣)설을 배제하고, 1883년 로베르트 코흐가 발견한 세균론을 받아들였다.
—–
호열자는 세균에 의해 발병됩니다. 균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수가 급격히 증가해 병을 일으킵니다.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음식을 반드시 끓이고 그 음식이 감염되기 전 먹기만 하면 됩니다. 갓 끓인 숭늉을 마셔야 합니다. 찬물을 마실 때도 끓여서 깨끗한 병에 넣어 둬야 합니다. 혹은 숯으로 거른 물을 사용하십시오. 식사 전 반드시 손과 입안을 깨끗하게 씻으십시오. 손을 씻을 때 비누를 사용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분뇨는 아무 곳에 버리지 말고, 반드시 소독해서 처리해야 합니다.
이를 준수하면 호열자에 걸리지 않습니다!
—–
방역위원회는 『호열자 예방주의서』를 간략히 요약하는 포스터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배포했다.
정부는 방역을 위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발 빠른 대처를 했다. 청국으로부터 배상금 1차분을 받은 직후라, 재정도 의지도 충만해 돈과 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전국으로 전염이 확산하기 전에, 선제적으로 제압한다.”
검역 규칙을 만들고, 호열자 예방 규칙을 전국적으로 적용되었다. 주요 교통로에는 검역소가 설치되었다.
조기 완공되어 전시 군용으로 사용되던 경의선과 경부선이 종전 후 민간 개통을 앞두고 있었는데, 이동을 전국적 콜레라 전파를 우려해 개통도 1896년으로 연기되었다.
항구나 역을 통해서 철저한 검역이 이루어졌다. 유행지에서 온 선박들은 모두 검역 대상이었다. 승무원이나 승객들은 검변(檢便)을 피할 수가 없었다. 가장 확실한 콜레라 확진 방법이 대변 검사였기 때문이다.
“전염병은 국가의 적이다! 자주독립을 위한 전쟁은 끝났으나, 전염병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모든 국민은 승리를 위해 분투하자!”
전쟁으로 인해 조선은 국민 동원과 프로파간다에 익숙해졌다. 방역은 경찰력을 동원해 전에 없이 엄격하게 시행되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정부의 시책이 그렇다면 받아들여야지.”
“암, 역병 방지는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닌가.”
정부와 국민의 노력으로, 불행 중 다행히도 콜레라의 전파는 평안도 이남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계는 있었고, 8월이 되자 콜레라는 평양 인근까지 도달했다.
전쟁에 이어 전염병까지 닥치게 된 평양 시내에 공황 우려가 생기자, 정부 내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방역 위원장직만 맡고 있던 이선이 직접 서재필과 에비슨 등을 대동하고 평양을 순방했다.
평양 전투의 영웅, 완화군 이선이 평양에 도착하자 주민들은 기쁘게 환영했다.
“친애하는 평양 주민 제군! 제군은 지난 독립전쟁에서 가장 큰 희생을 감수하고, 대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이제 호열자라는 새로운 적이 평양을 위협하니, 왕실과 정부는 제군과 고난을 함께 해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만청이 평양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전세의 역전을 가져왔듯, 주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역병은 결코 평양을 넘지 못하고 진압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에도 승리할 것입니다!”
이선의 연설에 평양 주민들은 더욱더 열렬히 환호했다.
“옳소! 호열자를 박멸하자!”
“대조선국 만세!”
“승리의 지도자, 완화군 만세!”
“다행히 아직 평양 시내까지 진입은 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바로 인근, 강서군과 강동군에는 호열자가 돌아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지난 전쟁의 전선과 거의 유사한 전염병 분포도가 보였다. 이선과 방역 위원회는 즉각 방역 대책에 돌입했다.
전쟁으로 인해 미루어졌던 평양의 상수도 도입이 즉각 실시되어, 공사에 돌입했다.
평양 시내로 진입하는 길이 일시 차단되고, 곳곳에 검역과 소독이 실시되었다.
평양부의 순검, 내무부 산하 위생순검, 심지어 진위대 병력까지 방역을 위해 동원되었다.
정부에서 파견한 군의관과 자발적으로 합류한 민간 의사들이 평양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집집을 돌아다니며 환자 여부를 파악하고, 위생을 철저히 할 것을 당부했다.
평양신학교를 설립한 선교사 새뮤얼 모펫 (Samuel A. Moffet)과 재평양 외국인들도 방역위원회에 합류하여 주민을 향한 계몽운동을 벌였다.
“환자들은 즉각 격리 수용해서 치료해야 합니다.”
방역 외에도 치료법도 강구되었다. 환자들은 피병원(避病院)으로 지정된 병원에 격리수용되어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치료법은 부족했다.
‘경구 요법을 시행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선은 콜레라 치료법인 경구 요법에 관해 대략 알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알지 못했다.
‘역시 의학사나 과학사를 공부했더라면 가장 큰 도움이 됐을 텐데, 결국 문과의 한계인가!’
이선은 자책했지만, 현대의 전문의가 와도 조선에서 경구요법을 시행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 전근대사회를 벗어난 조선에서 현대적 의미의 경구 요법을 시행하기에는 난관이 많았다.
당시 의학 수준은 서양에서도 세균설이 막 도입된 상황이고, 경구 수액은 개념조차 없었다.
서양도 아직 콜레라에는 속수무책이었고, 1850년대 존 스노우(John Snow)가 제창한 콜레라 대책은 1890년대에 이르러서야 확립될 수 있었다.
당시 최고 의료 선진국인 독일조차도, 1890년 함부르크에서 대규모 콜레라 발병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로베르트 코흐의 세균론을 받아들이고, 적극적 위생 정책에 돌입해 콜레라를 몰아낼 수 있었다.
독일조차도 그런데 조선에서는 아직 언감생심이었다.
상수도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구 수액이 오염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오염된 물과 그렇지 않은 물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깨끗한 경구 수액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무균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공정을 개발할 능력도 없었다.
괜히 세계적으로도 경구 수액이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도입된 게 아니었다.
“나는 의학에 대해 무지하지만, 궁금한 게 있습니다. 콜레라는 인간의 수분을 모두 뺏어가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니, 그 수분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면 사망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충분히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미련이 남은 이선이 경구 수액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자, 에비슨과 의사들은 해결책을 골몰했다.
곧 에비슨은 당대로는 획기적인 치료법을 마련했다.
소금물에 대동강의 신선한 물을 섞어 주사기로 투입해 환자들의 탈수를 효과적으로 막았다. 엄밀히 말해서 생리식염수와 경구 요법은 아니었지만, 수액 투입 요법은 많은 생명을 살렸다.
적극적인 방역대책의 결과로, 콜레라는 6주 만에 진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역적으로 대동강을 넘지 못했고, 대도시인 평양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 희생자도 최소화했다.
치료도 획기적이었다. 1821년에 처음 조선에 콜레라가 도달했을 때는 전국적 발병에 치사율이 80%에 달했다.
하지만 1895년 콜레라는 평안도로 한정되었고, 환자도 수천 단위, 치사율이 20%도 되지 않았다.
“개국 504년도 호열자는 성공적으로 방역하였다!”
근대적 방역 대책, 공중위생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