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24
– 224화에 계속 –
224화 대사절단
궁을 나오던 이선은 문득 폴란드 여인, 마르가리타가 생각이 났다.
‘그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군. 소식이 끊긴 지 꽤 오래되었으니…….’
인생에서 딱 두 번 만났고, 마지막으로 만난 지 어느덧 8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이선의 마음 한편에는 마르가리타가 남아 있었다.
유라시아 반대편에 있어도 종종 서로 편지를 주고받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연락이 끊겼다. 때마침 동아시아 전쟁이 발발했을 무렵이라, 이선도 국무가 급해서 사정을 따로 알아보지는 않았다.
‘이번에 러시아에 가면 만날 수 있으려나.’
하지만 그녀와 만날 수는 있어도, 이어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그럴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분명 나는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건만. 왕좌도, 정치도, 결혼도, 인생도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군.’
씁쓸함이 밀려왔다. 분명히 권좌에 올랐는데, 아니, 권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행동은 제한적이었다.
김씨 여인에게 한 말은 어느 정도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지금껏 외교를 위해 여러 나라를 다녔으나 마음 편히 여행을 다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역사의 현장 속으로 가 보고 싶고, 역사 속 위인들도 만나고 싶다.’
지금껏 숱하게 만나본 왕과 정치가들이나 아니라, 이 시대를 빛낸 예술가나 학자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들과 예술과 학문에 관해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이선도 19세기 말 절정을 맞이한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절)’ 시대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었다.
그동안 이선은 쉬지 못했다. 아니, 쉴 수 없었다.
마침내 청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자주독립을 쟁취하고,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갖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럴 수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러지 못하리라.’
이선이 더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이에 따르는 책무는 더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는 그 책무를 잠시라도 방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역사를 체험하는 시간 여행자가 아니라, 역사를 바꾸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렇기에 이선은 쉴 수가 없었다. 이선의 판단에 조선의 운명이, 아니 앞으로는 세계의 운명도 바뀔 수 있었다.
“아라사 황제께서 즉위하여 대관식을 가지는 경축일이 가까우므로, 짐은 정1품 칙임관(勅任官) 완화군 이선을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아라사로 가서 축하 의식에 참가하게 하겠다. 또한 완화군 이선과 의화군 이강을 구주(歐洲, 유럽) 특파대사에 임명하니, 구주 각국을 방문하여 수교국에 답례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널리 알리도록 하라.”
개국 505년, 1896년 2월 11일, 대군주의 명의로 조령(詔令)이 반포되었다. 물론 명의만 그러할 뿐, 실질적으로 결정한 건 내각이었다.
실제 역사라면, 이날은 바로 아관파천이 이뤄진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에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조령이 반포되다니, 역설적이군.’
하지만 역사적 위상 차이는 극과 극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는 희대의 치욕적인 비극을 당하고, 사실상 일본의 포로가 된 고종이 회심의 반격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영향력을 몰아낼 수는 있었지만, 일국의 군주가 외국 공사관에서 안전을 구한 씁쓸한 일이었다. 아관파천 시기에 파견된 즉위 축하 사절단은 러시아의 군사적 보호를 청하기 위함이었다.
바뀐 역사에서는 일본의 위협에 노출된 약소국이 아니라 당당한 승전국이자 자주독립국으로, 러시아의 보호를 부탁하는 처지가 아니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을 논할 우방으로,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사절단 중 한 사람이 아니라 황제의 우인(友人)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사절단의 목적은 조령에서 반포된 바와 같이, 첫째, 러시아 황제 폐하의 즉위를 경축하는 것, 둘째, 유럽에서 외교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세 번째 목표를 더하니, 신진 관료에게 서양 시찰의 기회를 주고, 청년 학도들에게 선진국에서 학문을 익힐 기회를 주고자 합니다.”
사절단의 규모는 전례 없이 큰 수준으로 예정됐다. 12년 전에 떠났던 보빙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다.
사절단과 수행원 50인, 유학생 50인 등 총 1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모든 비용은 국비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기간도 1년 이상으로 계획했다.
전권대사인 이선은 국내를 오래 비울 수 없어 열강과의 외교 협상을 마무리 지으면 곧바로 귀국할 예정이었지만, 사절단과 수행원은 서양 각국을 시찰하고, 유학생은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학문을 익힐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선 사절단의 모델은 표트르 대제의 대사절단(Velikoye posolstvo, 大使節團),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이었다.
1697년에서 98년, 러시아의 젊은 차르 표트르 1세는 직접 사절단을 이끌고 서유럽을 방문했다. 표트르는 가명을 쓰고 몸소 각종 교육과 실습에 참여했다. 표트르의 체험은 낡고 낙후한 러시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1871년에서 73년까지 구미 12개국을 방문한 이와쿠라 사절단의 모델이 바로 표트르의 대사절단이었다.
이와쿠라 도모미,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등 유신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장기간 서양을 체험하면서 근대화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사절단에 다녀온 각료들은 메이지유신의 방향성을 결정했고, 유학생들은 장차 일본의 중추가 되었다. 사절단의 기록인 『미구회람실기(米欧回覧実記)』는 일본 근대화의 표본이었다.
‘조선은 이미 근대화의 기틀을 닦았으니 똑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장차 국가를 이끌어나갈 엘리트 계층에게 새로운 경험과 충격을 주려는 의도는 같다.’
단기간의 근대화로 청나라를 무찌르고 자주독립을 쟁취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었다.
지금까지의 근대화가 제도적·군사적으로 치중된 외형적 근대화였다면, 이선이 장차 구상하는 근대화는 총체적 근대화였다.
그리고 이 행렬에 동참할 이들은, 장차 국가를 이끌어나갈 촉망받는 인재들이었다.
특명전권대사, 구주특파대사 완화군 이선
부사, 구주특파대사 의화군 이강
부사 금릉위 전 내무대신 박영효
부사 전 법무대신 유길준
부사 전 궁내대신 이범진
대관식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해 대사와 부사에는 왕족 및 칙임관급 인사들이 결정되었다.
이선의 적격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강은 현재 미국 유학 중이고, 이선이 새로운 왕실 외교의 축으로 양성할 계획이라 부사를 맡겼다.
박영효는 왕실의 부마이자 러시아 공사를 지낸 경험을 고려해 임명되었다.
유길준은 당시 조선 최고의 국제법 전문가로 인정받았으므로 부사로 동행하게 되었다.
이범진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재임한 바 있어 임명되었지만, 내심 그가 각료 중 가장 대군주에게 충성한다는 점을 고려해서였다. 이범진이 근왕파의 총수로 떠오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목적도 있었다.
사절단의 참서관·서기관·수행원에는 주임관(奏任官)과 판임관(判任官)급 관료들이 선정되었다.
선정 기준은 문명 개화에 관한 관심과 외국어 구사 능력이었다.
외국 경험이 있는 주임관급 관료, 민영환, 윤치호, 이완용, 이하영(李夏榮), 이채연(李采淵), 이상재 등이 선발되었다.
‘실제 역사에서 매국노로 악명을 떨치는 인물이 포함되어 있지만, 바뀐 역사에서는 능력 있는 관료들이니…….’
이완용 같은 이름을 보면 이선도 본능적으로 찜찜함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현재는 직무에 충실한 유능한 관료였다.
‘이완용과 같은 인물은 친미에서 친러, 친일로 주인을 계속 바꿨지. 본질적으로 기회주의자이기 때문에, 조선이 강성해진다면 굳이 변절할 이유가 없지.’
판임관급 신진 관료들도 대거 선발되었는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탁지부 재무관 겸 한성사범학교 교수 이상설(李相卨)이었다.
27세의 이상설은 조선의 마지막 문과 급제자이자, 새 고등고시 합격자이기도 했다. 두 시험을 모두 통과한 유일한 인재답게, 전통적인 성리학에서 서양의 정치, 법률, 경제, 사회, 수학, 과학, 철학까지 모두 파고드는 학문의 대가였다.
이상설은 천재로 이름이 자자했고, 탁지부 관료를 맡으면서도 한성사범학교 교수직으로 초빙되어 후학을 양성했다.
‘헤이그 특사로 이름난 이상설 선생이 이렇게까지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다니. 결국, 시베리아에서 풍찬노숙하다 돌아가신 건 민족적 비극이야. 이런 분이 마음껏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지.’
이상설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의 독립운동가들도 면면이 보였다.
법무부 법제과장 38세 이준(李儁), 외무부 구주과장 28세 이시영(李始榮), 학무부 유학과장 38세 박은식(朴殷植)도 낯익은 이름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헤이그 특사의 일원인 이준. 근대 법학을 익혀 근대적 사법제도 확립에 기여했다.
실제 역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법무총장 이시영. 정보장교 이회영 참령의 아우이자,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이기도 했다.
실제 역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 본래 성리학을 익혀, 황해도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명망이 높았지만 갑신경장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박은식은 개신유학(改新儒學)을 대표하게 되었고, 신정부에 봉직하며 유학의 변혁을 이끌었다.
각국으로 파견될 유학생들은 외국어 구사 능력을 고려해, 주로 육군무관학교와 관립외국어학교를 졸업하거나 재학 중인 학생들이 선발되었다. 무관학교 졸업자는 외국에서 군사유학을, 관립학교 졸업자는 관심 분야에 따라 각종 학문을 익힐 예정이었다.
유학생으로 선발된 50인의 면면을 보다가 낯익은 이름이 여럿 보였다.
평안도 평양 출신으로, 관립 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한성일보에서 외신번역 업무에 종사중인 26세 양기탁(梁起鐸).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함경도 단천 출신으로,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참전한 육군 부위 24세 이동휘(李東輝).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황해도 송화 출신으로,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참전한 육군 참위 22세 노백린(盧伯麟).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서울로 상경하여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관립 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재학 중인 22세 이승만(李承晩).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평안도 강서 출신으로, 서울로 상경하여 경신학당을 졸업하고 관립 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재학 중인 19세 안창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새로운 시대의 변화로구나.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나.’
이선은 감탄사를 흘렸다. 새로운 시대는, 이들에게 새로운 잠재성이 발휘할 기회를 부여했다.
처음 선발된 여성 유학생 5인의 면면에도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던 남성 유학생 선발과 달리, 여성 유학생은 지원자가 적었다. 아직 여성의 공부, 더욱이 외국 유학은 상상도 못 하는 인식으로 인해서였다.
자연히 일찌감치 신식 교육을 익힌 여성들이 지원자로 좁혀졌고, 5인이 선발되었다.
20세의 박에스더, 속명 김점동은 실제 역사에서 최초의 여성 의사였다. 에스더란 세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을 보좌하다가 의학의 꿈을 꾸게 되었다.
함께 선발된 김마르타, 이그레이스, 이마리아 등도 속명이 아니라 세례명을 사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평민 이하 출신으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의학이나 교육학을 공부하길 원했다. 현시점에서 조선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건 여성 의사와 교사였다.
유일하게 사대부 여식 중에 선발된 건 이화학당을 졸업한 19세의 김아영(金娥英)이었다.
바로 대원군이 완화군의 간택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여인이었다.
김아영은 이선의 말을 듣고 유학생으로 지원할 것을 결심했다.
당연하게도 부모는 펄쩍 뛰며 반대했으나, 그녀는 몰래 지원서를 작성해서 학무부에 제출했다.
그 사실을 대원군이 알았을 때는 이미 유학생으로 선발된 뒤였다.
“네가 유학 가라고 권유했다지? 대체 어쩔 셈이냐? 결혼도 하지 않은 미혼의 규수에게 외국 유학이라니? 그 여인과 혼례를 치르기 싫다는 의미냐?”
대원군이 이선을 불러들여 다그쳤다.
“아뇨, 좋은 일 아닙니까? 그 여인이 원하는 대로 넓은 세계를 보여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대로 혼례를 치르면 궁궐을 벗어나지도 못할 텐데, 그 전에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대원군은 실망을 해야 할지, 안심을 해야 할지 갈피가 안 잡혔다.
이선이 직접 유학생으로 뽑았다는 건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의미인데, 유학 간다면 혼례는 자연히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은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좋다. 이왕 이리된 거, 네가 책임지고 함께 다녀라. 장기 유학 같은 건 절대 용납 못 한다. 네가 데리고 가서 함께 돌아와라. 안 그러면 혼례는 없는 거로 알고, 새 간택 후보를 물색하겠다. 그때는 후보를 미리 알려 주지도 않을 거다.”
대원군은 자신이 손자며느리 감으로 뽑은 김씨 여인, 아니 김아영과의 혼례를 강행할 의사였다. 그런데도 끝내 유학을 보낸다면, 이선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또 다른 여인을 간택 대상으로 뽑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녀 처지도 난감해지겠군. 가문에서 용인하지 않을 터.’
이선은 대원군의 타협책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1896년 3월 1일.
사절단과 수행원, 유학생 100명으로 구성된 조선의 대사절단이, 인천항에 집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