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26
– 226화에 계속 –
226화 고대의 영광
조선 사절단이 탑승한 기선은 인도양을 횡단해 홍해에 접어들었고 이집트에 도착했다.
서양인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대기하는 동안 단체로 피라미드를 여행했다.
12년 전 보빙사는 ‘옛 국왕의 무덤을 들여다보다니 불경하다’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사절단은 크게 개의치 않고 관람했다.
“애급(이집트) 문명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대 문명이오. 고대의 역사를 살펴보는 건 후대인에게 필요한 일이오. 다만 애급인이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관리하지 못하고, 영국인의 손으로 발굴하고 관리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지.”
이선은 사절단을 이끌며 자신이 직접 가이드 역할을 하곤 했다. 이선의 설명에 사람들은 열심히 필기하거나 귀를 기울였다.
“애급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는 반드시 자주독립을 지켜내고 우리 역사를 우리 손으로 관리해야 하오.”
이선은 망국으로 인해 수많은 고고학적, 역사학적 탐구가 일제에 의해 자행된 걸 안타깝게 여겼다. 그런 역사는 결코 반복될 수 없었다.
근래 들어, 조선도 유적 관리에 나섰다. 한반도 내부에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고대 유적들을 관리하고, 새로운 발굴을 위해 고고학 연구를 시작했다.
고대사는 조선의 민족 정통성과 애국심 고취를 위해 활용되었는데, 예컨대 압록강 너머 집안(輯安)의 광개토대왕릉비는 조선의 새로운 민족적 상징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잊혀진 광개토대왕릉비는, 봉금령이 해제되면서 1880년 발견되었다. 1882년 일본 장교가 접근하여 비석의 탁본을 뜨고, 일본이 먼저 연구를 개시했다.
그 직후 새로 출범한 조선 개화당 정부, 특히 이선은 광개토대왕릉비의 연구가 일본에 의해 독점되길 원치 않았다. 조선은 청국 길림 당국과 협약을 맺어 비석의 접근을 금하게 하고, 독자적인 금석학 연구에 나섰다.
일본이 광개토대왕릉비 해석을 통해 역사 왜곡에 나설 계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한 셈이었다.
연구 결과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기록한 비석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조선은 고구려의 역사적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강조했다.
동아시아 전쟁으로 민족주의적 프로파간다가 확산하면서 광개토대왕은 민족사의 영웅으로, 만주는 되찾아야 할 조상의 고토로 여겨졌다.
시모노세키 강화 조약은 철저히 실용성을 중시했으므로 집안은 할양지에서 빠졌지만, 옛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되찾을 수 있었다. 이미 상당수 조선인들에게 옛 고구려의 영토는 ‘언젠가 되찾아야 할 미수복 영토’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고대 역사가 현대 정치를 정당화하는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된 것이었다.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찾길 원하는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수복주의(Irredentismo)’,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되찾길 원하는 신생 그리스 왕국의 ‘위대한 이상(Megali Idea)’과 흡사했다.
고대의 역사적 정통성을 내세워, 이탈리아인과 그리스인이 상당수 거주 중인, 과거 자신들을 억압했던 다민족제국(합스부르크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되찾는다.
신생 근대국가 조선과 쇠퇴하는 다민족제국 청의 사례와 비슷한 측면이 많았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지중해에 접어든 후, 목적지인 흑해 오데사에 가기 전 조선 사절단은 공교롭게도 그리스를 경유하게 되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조선과 그리스는 아직 미수교 국가였고,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지만, 이선은 그리스를 방문지에 포함했다.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원류였고, 서양을 연구하려는 이들에게 직접 방문해 볼 가치가 있지.’
그뿐만 아니라, 조선과 흡사한 측면도 있었다.
‘고대의 영광을 되찾길 원하는 약동하는 신생 근대국가라는 측면 외에도, 약소국이면서도 열강을 이용한 외교술로 약진한 측면이 있지.’
여러모로 근대 그리스는 흥미로운 나라였다.
조선 사절단이 도착할 무렵, 그리스 왕국의 수도 아테네는 축제 분위기였다.
바로 이때, 1896년 4월 6일부터 15일까지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평화의 제전’이라는 고대 그리스 올림픽의 이상을 근대에 재현하기 원했던 이들은, 1896년 아테네에서 첫 대회를 개최했다.
훗날처럼 세계 전역에서 선수단이 도착하는 건 아니고, 유럽과 아메리카의 14개국에서 파견한 소수의 선수단이 전부였다. 고대 올림픽처럼 여성의 참여는 불가능했고, 오직 남성만이 가능했다.
즉 1회 올림픽은 서양 남성만의 올림픽이었지만, 고대의 이상을 되찾겠다는 올림픽의 역사적인 첫발임은 틀림없었다.
“러시아 황제 폐하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향하던 우리 조선 왕국 사절단 일행은, 그리스 왕국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할 목적으로 귀국을 방문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동양에서 온 손님들의 방문에, 그리스도 반가워했다.
“머나먼 극동에서도 올림픽에 관심을 두고 있다니, 세계적 평화의 제전이라는 이상을 내건 올림픽의 정신과 맞닿는 것입니다. 귀국 사절단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올림픽 참석을 위한 선수단은 아니었지만, 동양에서 온 사절단의 방문은 그리스와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조선은 오랫동안 잊혀진 ‘은자의 나라’로 여겼지만, 1차 동아시아 전쟁의 승리는 조선에 대한 인지도를 급속도로 끌어올렸다.
그리스 여론은 동양에서 온 사절단에게 호의적이었고, 사절단의 탐방 요청을 흔쾌히 승인하고 환대했다.
“희랍(希臘, 그리스)은 서양 문명의 원류지요. 서양인들도 그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희랍을 방문하곤 하지. 우리는 물론 저들 발전하는 서양의 근대를 이해하고 배우고자 하지만, 그 연원을 알려면 본질적으로 희랍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소.”
이선은 사절단과 유학생들에게 고대 그리스의 유적들을 탐방할 기회를 주었다.
19세기 유럽의 ‘그리스 애호가(Grecophile)’들 덕분에 고대 그리스를 연구하는 풍조가 활발했고, 올림픽도 그 연장선이라 할 수 있었다.
예컨대 프로이센은 고대 아테네의 후계자를 자처했고, 베를린에는 아테네를 연상시키는 신고전주의풍 건물들이 늘어섰다. 이는 일부 애호가뿐만 아니라, 카이저의 취향이기도 했다.
‘그 프로이센을 조선과 일본이 배우고 있으니, 아테네와 아주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지.’
신생 근대국가 일본과 조선에서 새로 유행하는 건축 양식이 신고전주의 양식이라는 건, 고대 아테네를 모방한 프로이센을 모범으로 삼는 이들 국가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4월 15일, 아테네 올림픽의 폐막식이 있었다. 이선과 조선 사절단은 4월 10일에 도착해 개막식에는 참석할 수 없었으나, 폐막식에는 귀빈으로 초대받을 수 있었다.
“των Ελλήνων τα ιερά, και σαν πρώτα ανδρειωμένη, χαίρε, ω χαίρε, Ελευθεριά! (그리스의 위대함과 자유여, 지난날처럼 용감하노니, 만세, 오, 만세! 우리의 해방이여!)
폐막식에서 영국의 시인이 선수단을 대표하여 고대 그리스어로 찬송가를 낭송하고, 그리스 국가를 불렀다. 귀빈과 관중은 일제히 기립하여 국가를 따라 부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여기에는 그리스인과 외국인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Ζήτω η ελλάδα!”
“그리스 만세!”
‘햐, 이거 진짜 부럽네. 조상 덕에 앉아서 얻는 이익이 얼마야. 우리도 저렇게 이미지 빨로 외교적 이익을 쟁취해야 하는데…….’
이선은 유럽인들처럼 감동은 받지 않았지만 부러움을 느꼈다.
그리스 애호가들의 덕을 보는 건 단순히 문화에 그치지 않았으니, 외교적 이익도 상당했다.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라는 3대 열강이 모두 독립을 후원하고, 이후 오스만제국과 끊이지 않는 영토 분쟁에서도 열강들은 번번이 그리스의 손을 들어주곤 했다.
1829년 그리스 건국 이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확장한 영토도 상당했다.
이해 1896년에도 크레타섬에서 그리스로의 병합을 요구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그리스는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강과 접촉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리스 왕가의 힘도 상당했는데, 그리스 왕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가문은 여러 열강과 혼맥을 맺고 있었다.
그리스 왕가는 개인적인 이유로도 이선과 관계가 있었다.
“조선 왕국 대군주 폐하를 대리하여, 왕자 이선이 그리스 왕국 국왕 폐하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Geórgios I)는 반갑게 이선을 맞이했다.
“그리스인의 국왕인 짐은, 멀리 조선에서 온 손님을 기쁘게 환영하는 바이오.”
50세인 국왕은 멋들어진 수염에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이선과 국왕은 정중히 악수를 나누었다.
“다그마르와 니콜라이로부터 조선 왕자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소.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반갑군.”
요르요스 1세는 본래 덴마크 왕자 빌헬름으로, 1863년 열강의 안배로 그리스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여동생이 덴마크의 다그마르, 즉 러시아 황태후 마리아 표도로브나였다.
바로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요르요스 1세의 조카였다.
“알고 있었소? 니콜라이는 짐의 조카이기도 하지만, 러시아는 짐에게 있어 처가이기도 하지.”
“저도 황제 폐하로부터 여러 차례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스 왕비인 올가 콘스탄티노브나는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생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딸이고, 즉 요르요스 1세는 알렉산드르 2세의 조카사위이기도 했다.
덴마크 왕자 빌헬름이 그리스 국왕으로 즉위하고 안정적으로 권좌에 앉을 수 있었던 건, 알렉산드르 2세의 도움이 컸다. 그는 차르의 은혜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국왕이 은인이자 처백부인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막고, 여동생의 아들인 니콜라이 2세의 암살도 막은 이선을 반갑게 여길 만도 했다.
“짐에게 있어 러시아는 소중한 우방이자, 인척이기도 하오. 그 러시아 황제가 형제처럼 여기는 왕자는 짐에게도 가족이나 다름없소.”
“황공한 말씀입니다, 폐하.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조선이 청국에 맞서 거둔 승리는 그리스에도 전해졌소. 우리 그리스인들 역시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과도 같은 처지이므로, 이를 매우 통쾌하게 생각했소. 귀국의 승전과 자주독립을 축하하는 바이오.”
“감사합니다. 그리스 또한 과거 자신을 얽매었던 제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고, 고대의 영광을 되찾고 고토를 수복하고자 하니, 조선에서도 그리스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서로 존재도 모르는 나라였지만 온갖 외교적 미사여구가 쏟아졌다.
“그런데 서로 국교가 없어서 여러모로 아쉽구려. 가까운 시일 내로 귀국에 답례 사절단을 보내 수교를 맺도록 합시다.”
“예, 폐하. 조선 역시 바라는 바입니다.”
양국의 수교를 약속하며 공식 면담은 끝이 났다.
요르요스 1세는 이선과 조선 사절단을 위해 왕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왕자에게 묻고 싶은 바가 있는데.”
“예, 폐하.”
“왕자는 아직 미혼이라고 들었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여기서도 결혼 여부가 궁금한가?’
이선이 쓴웃음을 지으니 국왕이 미소를 지었다.
“왕족의 결혼은 국가의 대사나 마찬가지니까.”
“예, 옳으신 말씀입니다. 슬슬 혼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거 좋은 일이군. 이것도 실례가 될 질문일지 모르겠는데…….”
“개의치 말고,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나는 동양에 관해 잘 모르지만, 동양에서는 왕가 간의 결합이 없소?”
“없지는 않습니다만, 매우 드문 일입니다. 동양에서는 서양처럼 교류가 잦지 않다 보니.”
“아, 그래요? 신생 국가를 발전시키고 안정시키는 데 국혼만큼 도움 되는 것도 없는데. 이건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덴마크 왕자였던 짐이 그리스인의 국왕으로서 이렇게 국가를 이끌 수 있는 것도…….”
국왕은 동양에서 온 왕자에게 호의를 드러내며, 그리스인에게는 하지 않는 말을 했다.
“짐은 본래 루터교도였지만 정교회로 개종했고, 그리스어를 익히고, 영국 왕실 및 러시아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소. 그리스의 발전은 물론 그리스인의 노력 덕이지만, 외국의 도움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
거대한 인척 관계로 엮인 유럽 왕가의 일원이라는 건 굉장한 메리트였다.
빌헬름이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로 즉위하자마자, 영국은 영국령 이오니아 제도를 선물로 주었다. 이유인즉슨, 이오니아의 주민이 대부분 그리스인이기도 했지만, 요르요스의 누나인 알렉산드라가 영국 왕태자 에드워드의 부인이자 훗날 영국의 왕비인 덕이었다.
요르요스가 영국 왕태자의 처남이자, 러시아 차르의 조카사위이자 황태자의 처남인 덕에, 그리스는 정세에 따라 영국과 러시아라는 양대 열강의 지원을 번갈아 가며 받을 수 있었다. 이로 얻는 유·무형적 이익은 상당했다.
“폐하의 말씀은 충분히 공감됩니다. 그렇기에 저도 열강의 호의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요. 그러니 이렇게 러시아에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좋은 일이오. 작은 나라, 특히 국력을 뻗어 나가고자 하는 신생 국가는 필연적으로 열강과의 외교가 중요하지. 왕자는 그런 점에서 타고난 외교관이오.”
“칭찬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왕족이라는 점을 좀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왕가 간의 결합만큼 좋은 게 없는데. 동양은 종교도 다르고, 그런 전통도 없다니 아쉽군…….”
국왕의 말에 이선은 그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왕가 간의 결합이라. 좋기야 하겠다마는, 기독교 개종에 서양 왕가와의 혼인이라고? 조선이 그걸 받아들일 환경이 되나. 왕족이어도 안 될 판인데, 차기 군주로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은퇴하고 싶으면 그래도 되겠지.’
이선도 생각해 보지 않은 바는 아니었지만,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