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27
– 227화에 계속 –
227화 니콜라이 2세
그리스를 떠난 조선 사절단은 흑해에 면한 항구, 오데사에 도착했다.
오데사 항구에는 재무대신 세르게이 비테(Sergei Witte)와 러시아 주재 조선 공사 김학우가 영접하려고 나와 있었다.
“러시아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공작 각하.”
“고명하신 재무대신께서 오데사까지 친히 나와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선과 비테는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반갑게 덕담을 주고받았다.
“별말씀을요. 그만큼 황제 폐하께서 각하를 특별히 여기심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참으로 황공한 일이군요. 저 역시 황제 폐하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절단을 이끌고 지구 반대편까지 왔습니다.”
“기쁠 따름입니다. 편안한 여정이 되도록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차르 대관식을 위해 사절단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고 있다지만, 100명이나 되는 규모의 동양 사절단이 도착하자 자연스럽게 러시아인들의 시선이 끌렸다.
“어느 나라에서 왔데? 키타이(중국)? 야포니야(일본)?”
“극동의 카레야(조선)라는 나라라는군.”
“거기가 어디야?”
“시베리아를 지나 태평양 쪽에 있는 나라 아닌가.”
“멀리서도 왔군.”
“우리 대신이 영접하는 저 동양인은 누구야? 높아 보이는데.”
“뭐, 높으신 분이겠지?”
“이 무지한 사람들아, 어떻게 저분을 모를 수가 있나? 우리 차르께서 일본을 방문했을 때, 폭한으로부터 암살당할 위기에서 구해준 분이 아닌가!”
“아아, 그 왕자! 그렇다면 선제의 암살을 막은 분이기도 하지?”
“맞네. 바로 그분이시네.”
“주님께서 로마노프 왕조를 위해 보내주신 분이로군!”
신앙심 깊은 러시아인들은 경건하게 성호를 그었다.
이선과 사절단의 행렬이 도시를 지나가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로마노프 왕조의 벗, 이선 공 만세!”
“러시아인은 이선 공을 환영합니다!”
몰려드는 환호에 마차에 타고 있던 이선은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며 답례했다.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계속되는 환대에, 조선 사절단은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우리 완화군 대감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구나.”
“이 나라 황제를 구하셨으니, 이 정도 환대는 당연한 게 아니겠나.”
“앞으로 완화군 대감 덕을 크게 보겠어, 하하하.”
사절단을 지켜보는 오데사 시민들 속에,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학교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학생이었다. 그는 특히 수학 실력이 뛰어났고, 장차 대학에 진학해서도 수학을 전공할 생각이었다.
러시아의 우수한 학생들은 흔히 정치적 급진주의에 빠졌지만, 이 소년은 수학이 주는 형이상학적 매력에 푹 빠져 정치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활달한 성격의 소년은 도시의 볼거리를 찾아 돌아다녔고, 동양에서 온 사절단과 같은 진귀한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았다.
“이야, 정말 대단한걸. 당분간 여러 나라에서 온 사절단 구경하느라 심심하지는 않겠어.”
성공한 유대인 부농의 아들이자 오데사 성 바울 학교의 우등생,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Lev Davidovich Bronstein)은 이때 16세였다.
트로츠키(Trotsky)라는 혁명가의 가명을 쓰기 한참 전의 일이었다.
사절단은 오데사에서 잠시 머무른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열차에 탑승했다. 러시아 황실이 제공한 특별열차였다.
재무대신 비테는 이선과 함께 귀빈석에 앉아 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가장 유능한 관료인 비테가 단순히 내 영접이나 맡으려고 오데사까지 왔을 리가 있나.’
“역시 러시아의 철도는 좋습니다. 이게 다 재무대신 각하의 공로로 알고 있습니다만.”
비테는 러시아 철도의 계획자이자 경영자였다.
철도회사 매표원으로 시작해 경영자까지 올라선 인물이었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재무부 철도국장을 맡았다. 이후 교통대신에 이어 재무대신까지 오르는 입지전적인 출세의 사다리를 탔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과 극동의 개발에 러시아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보았고, 가장 빠르고 경제적으로 부설을 완료하기 희망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러시아는 광활한 제국이니만큼 철도가 중요하지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어서 부설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멀리 항해하는 고생도 없이, 2주면 조선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 닿을 터인데요.”
“하하, 과연 그렇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대동맥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시베리아를 돌아서 부설하려니 쉬운 일이 아니지요. 만주를 횡단하면 신속하게 부설을 마칠 수 있을 터인데.”
바이칼 동부와 아무르 구간 부설이 난항에 부딪히자, 비테는 만주 횡단철도를 구상했다.
치타에서 만주를 횡단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노선이 가장 짧고 빠르며, 만주 개발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역시 공작께서는 현명하십니다. 정확히 보고 계시군요.”
“청국의 이홍장 백작이 러시아에 오는 바로 이번이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삼국간섭이 성공한 후 러시아는 청국의 호의를 살 수 있었고, 비테는 이홍장의 대관식 방문을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공작께서 이야기가 잘 통하니, 바로 말씀을 드리지요. 귀국에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부속 계획으로, 만주 횡단철도에 관해 어찌 생각합니까?”
“조선이야 환영할 일이지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동맥이 연결되고, 조선은 유럽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거니까요. 나는 조선의 미래가 북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철도 부설에 우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가 삼국간섭을 주도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특히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공로병(恐露病, russophobia)이라고 할 만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으니,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공되는 날이 러시아의 동양 침략이 이뤄지는 날이라고 믿습니다.”
이선이 슬쩍 일본의 러시아 공포증을 찌르자, 비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도 안 되는 억측입니다. 러시아의 철도 부설은 평화를 위해 나아가는 길입니다. 미개지로 남아있는 극동과 만주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선도 북방으로 가는 철도를 적극적으로 부설하고 있으니까요. 완공된 경의선을 만주로 연결하고, 현재 부설 중인 경원선 노선을 확장해 시베리아 횡단철도까지 연결하고 싶습니다.”
“아, 장대한 구상이군요. 그렇다면 만주 횡단철도 말고 종단철도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기적으로 고려해 볼 만한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북방으로 나아가려는 조선과 시베리아와 극동을 개발하려는 러시아의 이해관계는 겹치는 바가 많았다. 만주는 두 나라의 이익이 중첩되는 지역이었다.
조선은 열강인 러시아의 힘을 빌려 만주로 나가길 원했고, 러시아는 극동에서 가장 우호적인 조선을 파트너로 삼으려 했다.
영국과 일본을 견제해가며 평화적인 만주 진출을 원하는 비테는, 청국과 조선을 모두 끌어들여 극동 삼국동맹을 구상했다.
이선의 계획은 비테와 달랐지만, 일단 그의 구상에 장단을 맞춰 줄 생각이었다.
이선과 비테는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4월 26일, 조선 사절단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대관식은 모스크바에서 한 달 뒤로 예정되어 있었다. 조선 사절단은 당분간 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하며 외교와 견학을 수행할 계획이었다.
100명이나 되는 사절단의 숙소로, 조선 공사관 인근 저택을 통째로 빌렸다.
귀족의 호화저택이라 사절단원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대제국의 부유함이란 참으로 대단하군요.”
“이건 놀랄 것도 없소. 황궁 보면 아무것도 아닐 터이니.”
대서양을 횡단 중인 의화군 일행은 아직 페테르부르크에 당도하지 못했으므로, 이선은 먼저 부사 3인을 대동하고 황제가 머무르는 겨울궁전을 찾았다.
극도로 화려한 겨울궁전의 영접실은, 이곳을 수차례 방문한 외교관들조차 새삼 놀랍게 할 정도였다.
문이 열리고, 군복 차림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 폐하, 이선 공 이하 조선 사절단이 황제 폐하를 알현합니다.”
시종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큼성큼 걸어간 니콜라이 2세는 이선의 앞에 섰다.
“조선국 대군주 폐하를 대리하여, 이선이 국서를 러시아제국 황제 폐하께 봉정합니다.”
이선이 정중하게 국서를 봉정하자, 차르는 이를 받아들여 읽고 화답했다.
“귀국 대군주 폐하의 국서를 잘 받았소. 대군주 폐하께 짐의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해 주길 바라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공식적인 국서 봉정이 끝나자, 니콜라이는 반갑게 이선과 악수를 나누었다.
“진짜 오랜만이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공식에 참석한 게 마지막이니까, 5년 만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니콜라이는 이선과 여러 번 만났지만, 황제 신분으로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황제와 타국 외교관이 아닌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말했다.
“반갑네, 반가워. 5년 만에 유라시아 반대편에서 만나는군.”
“저 역시 기쁩니다. 황제 폐하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조선의 사절단을 이끌고 이렇게 유라시아 반대편까지 왔습니다.”
“그래, 많이 왔다고 들었네. 설마 내 대관식에만 참석하려고 이렇게 많은 인원을 데려왔을 리는 없을 테고.”
“물론 폐하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게 가장 큰 목적입니다만, 제가 존경해마지 않는 표트르 대제의 대사절단을 본받아, 미래가 창창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넓은 세계를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이선의 말에 니콜라이가 크게 기뻐했다.
“경은 예전에 조선의 표트르 대제가 되고 싶다고 했지. 과연 그렇게 되었네. 조선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당당한 자주독립국이 된 걸 축하하네. 그동안 러시아는 중립이라 대놓고 축하할 순 없었지만, 짐은 조선의 승리를 염원했다네.”
이선은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감히 표트르 대제와 비견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하하! 경과 짐은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는데,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지. 짐의 치세도 이제 막 시작이니,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아.”
니콜라이는 동갑내기 친구인 이선이 자신의 국가를 이끌어나가며 도약시켰다는 것에 기쁨과 자극을 동시에 받았다.
재작년 갑작스럽게 제위를 이어받았을 때만 해도 혼란에 빠져 있었던 니콜라이지만, 점차 통치에 자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삼국간섭의 성공은 자신이 거둔 첫 외교적 승리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아 참, 아직 황후를 만나지 못했지?”
“예, 아직 그런 영광은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 오늘 온 김에 황후를 만나고 가지. 알릭스도 경의 방문을 환영할 거야.”
여기서부터는 사적인 만남이라, 차르는 이선만을 대동하고 겨울궁전의 내실로 향했다.
“알릭스! 나의 벗, 이선 공을 소개하오. 선, 내 아내일세.”
니콜라이의 소개를 받은 이선이 정중히 인사했다.
“조선의 왕자 이선이 황후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20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인이 웃으며 화답했다.
“황제 폐하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갑군요.”
니콜라이 2세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Alexandra Feodorovna). 본래 독일 헤센 대공국의 공주였다.
정략결혼이 일반적인 왕가 간의 결합에서, ‘니키’와 ‘알릭스’는 드물게 사랑으로 이뤄진 결혼이었다.
알렉산드라의 언니인 엘리자베트 공주가 니콜라이의 숙부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했고, 자연스럽게 두 가문이 가까워진 상황에서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는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1894년 결혼했고, 슬하에는 이미 딸인 올가 공주가 있었다.
“이선 공은 내 생명의 은인이지. 이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일본에서 미치광이의 칼을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네.”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 그랬더라면 전 러시아가 비탄에 빠지고, 나도 남편을 만나지 못했겠죠.”
알렉산드라가 감사를 표하자, 이선은 겸손하게 답했다.
“제가 한 일이 아니라, 신께서 로마노프 왕조를 보우하신 덕이 아니겠습니까. 러시아 국가(國歌)처럼 말이지요.”
“어쩜 이렇게 겸손하실까. 역시 주님께서 로마노프 왕조를 위해 보내신 분이 맞군요. 그래요, 이 모든 일은 우리 주님께서 예비하신 바이지요.”
알렉산드라는 깊은 감명을 받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루터교도인 알렉산드라는 혼인을 위해 정교회로 개종한 지 얼마 안 되었으나, 내면으로 광적인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그 편집증적인 신앙심이 결국 러시아 제국에 파국을 가져오게 되었으나, 이때만 해도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남편만을 바라보는 처지였다.
이선과 차르 부부는 한동안 즐겁게 환담을 나누었다. 니콜라이는 문득 화제를 돌렸다.
“조선의 일은 베베르로부터 보고 받았네. 그럼 이제 자네가 조선의 왕위에 오르는 건가?”
밝게 웃던 이선은 무거운 표정으로 답했다.
“자식 된 입장에서 부왕과 대립하고 싶지 않았네만,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네. 책임이 막중해졌지.”
“어쩔 수 없지. 군주는 하늘이 내리는 자리이기에 신하가 감히 교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자네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차르는 타국의 일이라 해도 군주를 폐위한다는 것 자체를 불경으로 여겼으나, 자신의 벗인 이선이 애초부터 군주에 어울리는 이였기에 당연한 귀결이라고 받아들였다.
“자네 기분 이해하네. 나 역시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는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었네. 뭘 어찌해야 할지도 몰랐지. 하지만 자네는 이미 나라를 이끌어본 경험이 있으니, 잘 해낼 거야.”
속내를 드러내는 니콜라이의 말에 이선은 다시 웃으며 화답했다.
“나라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지.”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곧 조선의 왕위에 오른다니 궁금한 게 있네.”
니콜라이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선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