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29
– 229화에 계속 –
229화 왕가의 결합
개혁 군주 알렉산드르 2세는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 흠이 있었다.
황후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헤센의 마리) 외에도, 정부(情婦)를 여럿 두었던 것이다.
황제가 황후 외에 정부를 두는 건 당시 유럽에서 흔한 일이었으나, 알렉산드르 2세는 더 나아갔다.
차르가 가장 총애했던 여인은 무려 29세 연하인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Yekaterina Dolgorukova) 백작 영애였다.
40대 후반의 차르는 10대 후반의 예카테리나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자식 셋을 두었다.
“짐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그대밖에 없네. 짐은 반드시 그대를 황후로 맞이할 거야.”
1880년 황후가 죽은 직후에, 알렉산드르 2세는 유럽 황실에서 금기시해 오던 귀천상혼(貴賤相婚, 다른 신분 간의 결혼)을 단행했다.
예카테리나는 신분상 정식 황후가 되지는 못했으나, 유리예프스카야 공비(Princess Yurievskaya)의 작호를 받고, 그녀의 자식들도 사생아가 아닌 정식 황족으로 편입되었다.
황후의 정실 소생 6남 2녀 외에도, 예카테리나 소생 1남 2녀도 황제의 자식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들은 이제 왕자와 공주였다.
알렉산드르 2세가 조선을 떠나온 서자인 이선을 ‘공작’으로 높이 예우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사정과 관계가 있었다.
역사대로라면 그 이듬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지만, 역사가 바뀌면서 유리예프스카야 공비는 사실상의 황후 대접을 받았다.
“어머님께서 병으로 돌아가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결혼이라니? 폐하께서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단 말인가!”
당연하게도, 황태자 알렉산드르와 정실 소생들은 이러한 조치에 크게 분개했다.
특히 알렉산드르는 형 니콜라이 황태자가 요절한 후 아버지의 강요로 애인과 헤어지고, 원래 형수가 될 예정이었던 덴마크 공주와 정략결혼을 강요받았다. 그런데 막상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자마자 자식뻘인 애인과 정식 결혼을 올리니 더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1887년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자 알렉산드르 3세는 유리예프스카야 공비와 그 자식들에게 거액의 연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러시아를 떠날 것을 강요했다.
공비는 받아들여야 했다. 황제이자 사랑하는 남편이 죽은 이상, 적대적인 황실로부터 그녀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로마노프 황족들은 유리예프스카야 일가를 황족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후 유리예프스카야 공비와 그녀의 자식들은 프랑스에 정착했다.
한동안 프랑스 생활을 하던 공비의 자식들은, 비교적 관대한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한 후에야 러시아로 돌아오는 걸 허락받을 수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끝내 반역자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왕자님께서 구해 주신 덕에 6년이란 시간을 더 할 수 있었어요. 아버지께서도 왕자님께 얼마나 고마워하셨는지 몰라요. 암살 기도가 있었던 그날, 매년 3월 1일이 되면 왕자님을 위해 기도하셨죠. 저는 아직 어렸지만, 왕자님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이선이 알렉산드르 2세의 수명을 6년 연장해 준 건 러시아 역사에 있어 대의정치의 진전이라는 중요한 결과를 낳았지만, 가족들에게도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 늦둥이 막내딸 예카테리나는 더 그랬다. 실제 역사대로라면 3세에 아버지를 잃어 기억조차 하지 못했겠지만, 6년이란 시간이 더해진 덕분에 아버지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자란 기억을 갖게 되었다.
“황제 폐하를 위한 일이었지만, 공주님께도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그럼요. 왕자님께 꼭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이제라도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어 기뻐요.”
예카테리나는 이선을 향해 동양식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선은 웃으면서 답례했다.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역시 아버지께 들은 대로, 왕자님께서는 겸손하시군요. 그토록 인품이 훌륭하시다더니.”
이선은 자신을 향한 찬사를 들으면 낯간지러운 걸 참지 못했다. 그는 화제를 돌렸다.
“황실에서는 공주님께 잘해 주십니까?”
“그, 그럼요. 제가 러시아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황제 폐하의 은혜 덕인걸요.”
이선은 그녀의 처지가 애매하다는 걸 깨달았다. 혈통 상으로 분명 예카테리나는 알렉산드르 2세의 딸이고, 나이는 어려도 니콜라이 2세의 고모였다.
하지만 로마노프 황실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만 17세, 니콜라이보다 10살이나 어린 공주는 황실의 일원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니콜라이의 동생인 유리 대공이 파리를 방문했을 때, 공비와 자식들은 만나길 청했으나 병을 핑계로 거절당했다. 유리 대공은 딱히 그들 가족에게 악감정이 없었으나, 황실 어른들이 그들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예카테리나의 언니인 올가가 독일 귀족과 결혼할 때, 유리예프스카야 공비는 차르에게 결혼식의 대부가 되어 주기를 청했다.
니콜라이는 허락하려고 했으나, 황태후의 반대에 부딪혀 거절했다. 황태후는 남편 알렉산드르 3세의 분노를 기억하고 있었고, 유리예프스카야 일가는 ‘부정한 관계로 잉태된 정부의 자식’에 불과했다.
공비는 분노했다. 계속되는 홀대는 그들 일가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딱하군. 상처받기 쉬운 나이인데.’
예카테리나가 겉도는 신세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외국 왕족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선은 예카테리나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공주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공주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네요.”
“저야 얼마든지! 아,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워낙 유명한 분이라, 제가 너무 시간을 뺏는 건 아닐까요…….”
예카테리나는 본래 당당한 성격이었지만, 로마노프 왕족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바쁜 사람인 건 맞습니다만, 오늘 같은 무도회에선 할 일 없는 사람입니다. 워낙 춤을 못 추거든요.”
이선의 말에 예카테리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그렇군요. 왕자님은 뭐든 잘하는 분, 국가의 운명을 바꾼 분이라고 들었는데, 못 하는 것도 있군요. 오히려 그래서 인간적이네요.”
이선은 예카테리나를 배려해 사람들의 시선이 잘 미치지 않는 구석 좌석으로 인도했다.
예카테리나는 만족감을 표하며 프랑스어로 한창 이야기를 떠들었다. 그녀는 철든 이후로 프랑스에서 살았기에, 절반은 프랑스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이선은 주로 듣는 쪽이었다. 그녀는 이선과 조선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고, 그는 친절히 답해 주었다.
“왕자님은 정말 멋지고 현명한 분이신데, 왜 여태 피앙세가 없는지 궁금하네요.”
“음, 국정이 중요해서 좀 미뤘습니다. 곧 결혼할 생각이긴 합니다.”
“오, 대체 어떤 분이 그런 행운의 여인이 될지 궁금하네요. 그 왕비님은 정말 행복할 거예요.”
아무리 이선이 이성 문제에 관심이 적다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예카테리나의 눈빛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물론 공주가 나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거나 그런 일은 아닐 터고.’
사랑하는 아버지를 구해 준 ‘조선 왕자’는 멋지게 장성했고, 더욱이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음, 10대 소녀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신비한 동양 왕자와의 로맨스 같은 건, 당대 유럽에서 흔히 있는 로맨스 소설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조선 왕자와의 재회를 고대하고, 갑갑한 러시아를 탈출할 기회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뭐, 내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고.’
이선은 인종차별이 아직 극심하던 시대에, 자신이 왕족이자 국가 지도자라고 해도 서양 여성이 동양인을 진심으로 좋아하긴 쉽지 않으리란 생각을 했다. 제국주의 시대는 그렇게 녹록한 시대가 아니었다.
“오, 안 보인다 싶더니 이런 곳에 있었군.”
“황제 폐하!”
니콜라이 2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이선과 예카테리나는 예를 표했다.
“공주, 내 친구 이선 공과의 대화는 즐거웠던가요?”
“예, 폐하! 폐하께서 무도회에 초대해 주신 덕에 은인을 뵐 수 있었습니다.”
“공주도 로마노프 왕가의 혈통을 이었는데, 당연히 초대해야지요.”
“화, 황공하옵니다.”
혈통 상으로는 조카와 고모지만, 나이나 신분에서 니콜라이가 압도적으로 우월했으므로 예카테리나는 조심스러워했다.
“공주에게는 미안하지만, 잠시 내 친구랑 이야기했으면 좋겠는데.”
“예,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왕자님, 만나 뵙게 되어 정말 기뻤어요.”
예카테리나가 인사를 하자, 이선도 정중히 답례했다.
“또 뵙게 되길 바랍니다.”
“네, 저도요.”
10살이나 어린 고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니콜라이가 물었다.
“그래, 공주와 이야기해 보니 어떻든가?”
“음, 좋은 분이더군. 보통 공주라고 하면 도도한 느낌인데, 아주 쾌활하고 서글서글하게 잘 대해 주시는걸.”
“그거야 뭐, 일반적인 공주하고는 처지가 다르니까.”
니콜라이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할아버님과 유리예프스카야 공비의 관계를 알지? 그리고 황실에서는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도.”
이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직하지 않은 결합일지라도, 공주 역시 선황의 혈통임은 틀림없네. 특히 예카테리나는 할아버님께서 가장 총애하던 막내딸이지. 아버님이야 인정할 수 없으셨겠지만. 나는 로마노프 황실의 수장으로서, 딱히 차별하고 싶은 마음이 없네.”
니콜라이는 황태후의 반대로 인해 대놓고 이들을 옹호할 순 없었지만 딱하게 여겼다.
결국 올가 공주의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예카테리나에게는 황제의 딸에 걸맞은 좋은 혼처를 구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말 해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게. 나는 장차 조선 왕위에 오를 자네가 유럽 왕가, 특히 로마노프 왕가와 인척으로 엮이면 어떨까 생각을 해 봤거든.”
“불쾌하기는. 호의를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네.”
“자네가 괜찮다면, 나는 예카테리나와 자네를 중매해 줄 생각이 있었다네. 공주도 자네에게 꽤 호감이 있는 것 같고. 자네가 선황을 구한 사람이니, 그 막내딸과 결혼하면 좋은 그림이 되지 않겠나? 러시아와 조선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 같은데. 내가 특별히 허락할 터이니 자네가 정교회로 개종할 것도 없네. 부인의 신앙만 존중해 준다면야.”
일전에 베베르로부터 조선 상황을 보고 받은 니콜라이는, 문득 이선이 미혼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스 국왕도 즉위한 직후에 우리 로마노프 왕가의 올가 당고모님과 혼인했지. 그 덕택에 그리스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그리스는 우리가 언젠가 콘스탄티노플을 정교회의 기치 아래 수복할 때 함께할, 충실한 우방이 아닌가.”
니콜라이는 자신의 생각이 마음에 드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장차 극동을 중시하려 하니, 조선의 협력이 필요하네. 왕가 간의 결합이라면 가장 좋겠지.”
“하오나 폐하, 조선은 그리스가 아닙니다. 왕가 간의 결합이 일상적인 유럽과는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동양은 전통을 중시합니다. 유럽 왕가와의 혼인은 전례가 없어서…….”
동양 문화에 정통한 베베르가 난색을 표하자, 니콜라이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음, 그런가? 그래도 의사 타진은 해 봤으면 하는데.”
“공식적으로 제안하면 오히려 이선 공이 부담스럽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 이선 공은 짐의 벗이 아닌가. 짐이 직접 이야기해 보지.”
니콜라이는 로마노프 왕가의 일원 중에서 적당한 후보를 골라봤다. 가까운 방계 중에 찾았지만, 공교롭게도 20세 무렵의 미혼 여성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다 결혼했거나 아직 너무 어렸다.
유일한 후보는 알렉산드르 2세의 막내딸, 곧 18세가 되는 예카테리나 유리예프스카야 뿐이었다.
예카테리나는 공주로 인정받았다지만 적자는 아니었으므로, 다른 공주들과 달리 왕실 혼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의 언니인 올가도 독일 백작과 결혼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서자여도 계승권이 있었고, 이선 자신도 서자인 점을 감안하면 괜찮겠다 싶었다.
마침 예카테리나도 아버지의 은인인 이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니콜라이는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면서도 이선의 의사를 타진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 폐하, 폐하의 호의는 굉장히 고마운 일입니다마는.”
이선은 러시아의 차르인 니콜라이가, 비록 서녀라고는 해도, 로마노프 왕가의 일원과 혼인시킬 용의가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비기독교 국가와 국혼을 치르는 건, 아무리 따져도 모스크바 공국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아무리 계산해도 답이 안 나와.’
이선도 어찌하면 자신의 국혼을 최대한 정치적 이익으로 연결할 수 있을지, 한참을 고민하던 바였다.
분명 로마노프 왕가와의 인적 결합은 조선이란 국가의 위상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사회에서는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한 사람의 개인, 아니 대신만 되도 어떻게 추진해 볼 수 있네. 하지만 왕실의 일원인 이상, 아니 백번 양보해서 일개 왕족이라면 괜찮겠지만, 왕위 계승자를 고려한다면 그럴 수가 없네. 그랬다간 내가 아무리 실권자라고 해도…….”
전국적 반발에 부딪혀 실각이야,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네 할아버지, 대원군이 반대하겠는가? 그분이 배외적이고 서양을 싫어한다는 말은 들었네만.”
니콜라이는 의외로 조선의 정치를 잘 알고 있었다.
“대원군만이 아닐세. 대군주와 종친들도 용납하지 않을 거고, 정부 관료와 국민도 반대할 걸세.”
이제 막 전통사회를 벗어난 조선, 20세기도 되지 않은 이 시대에, 대통을 이을 차기 군주로 여겨지는 이선이 서양인과 혼인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오랫동안 폐쇄적이었던 조선에서 외국인, 그것도 외양과 문화가 완전히 다른 서양인 왕후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조선은 외국인을 국모로 받들고, 혼혈아에게 왕위 계승권을 줄 만큼 개방적인 사회가 아니었다.
‘그래도 차르의 호의를 그냥 외면하기엔 너무 아까운걸. 앞으로 러시아는 가장 중요한 파트너인데, 왕가의 결합으로 이어지면 환영할 일이지.’
이선은 머리를 굴렸다.
‘이래서 왕위는 안 오르려고 했던 건데. 하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그럴 수야 있나.’
이선이 본래 자신의 구상대로, 스스로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정부 실권자로 남아 있었다면 그래도 됐을 터였다.
하지만 당초 구상과 달리 황제 추대가 기정사실이 된 이 시점에선, 그럴 수가 없었다.
계속 고심하던 이선은, 문득 해결책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