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3
– 23화에 계속 –
23화 미행(微行)
이선은 공친왕과의 예방(禮訪)을 마친 후, 이홍장의 북경 업무가 마칠 때까지 그의 저택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씩 답답함을 느낄 때 집 밖으로 나가 장무영과 함께 북경 성내를 산책하곤 했다.
하지만 이선이 아무리 처신을 조심한다고 해서, 그를 노리는 시선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선이 청나라의 유력자들을 만난 시점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감, 미행(尾行)이 있습니다.”
장무영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고했다. 이선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을 보며 말했다.
“몇 명이나 되나?”
“한 명입니다. 제압할까요?”
“음, 인적 없는 곳으로 유인해서 제압하지.”
이선과 장무영은 천천히 이홍장의 저택으로 향하는 척하다가, 인적이 드문 지역으로 걸어갔다. 갈수록 길이 복잡하고 골목들이 많았다.
미행자가 골목으로 접어드는 순간, 갑자기 머리로 강한 타격이 왔다.
“으윽!”
미행자가 눈을 떠보니, 어두운 실내였다. 몸을 움직이다 자신이 묶여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잡혔다는 걸 인지했다.
“네놈은 누구냐? 조선인 같은데.”
미행자는 호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변발을 하고 있지 않아 조선인이라는 게 티가 났다.
“…….”
이선을 대신해서 심문하던 안영흠이 거듭 물었다.
“네놈의 배후가 어디냐? 왜 미행을 하고 있었느냐? 이것만 말하면 살려서 보내 주마.”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챙!
시치미를 떠는 미행자를 향해, 장무영이 칼집을 뺐다가 닫았다.
“왜 수명을 단축하는지 모르겠군. 순순히 말하면 살려 준다니까.”
안영흠의 냉소적인 말에, 미행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무래도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이 아닌 듯했다.
“조선을 떠난 완화군 대감이 북경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듣고 그 뒤를 쫓아보라고 명하셨소.”
그때, 장막 뒤에서 듣고 있던 이선이 나타났다.
“대체 누가 말이냐?”
“사……, 사역원정(司譯院正) 변원규(卞元圭) 영감이오.”
‘변원규? 변원규가 누구더라…….’
이선이 아리송해하는데, 안영흠이 다시 캐물었다.
“사역원정이면 정3품 역관인데, 어찌 청국에 와있는 것이냐?”
“영감께서는 성상의 명을 받들어 청국의 군비를 익히기 위해 오신 것이오.”
‘아아, 김윤식과 함께 영선사로 오게 되는 역관이로군! 이제 알겠다.’
영선사를 파견하기 전에 이홍장과 교섭하기 위해 실무자를 파견했는데, 그게 바로 변원규였다. 이선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행자를 직접 심문했다.
“그럼 성상께서 완화군의 행방을 뒤쫓으라 명하셨단 말이냐?”
“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미행자는 고개를 숙였다.
“좋다. 그럼 사역원정을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해 볼 수 있겠는가?”
“대감! 굳이 그러실 필요가…….”
안영흠의 만류에도, 이선의 뜻은 확고했다.
“지금 당장 만나고 싶은데.”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미행자를 잡은 건 이선이었으니, 아쉬울 게 없었다.
“아니, 내가 갈 수는 없고 사역원정이 이쪽으로 와야지. 무영, 이자로부터 사역원정의 거처를 묻고, 영감을 모셔 오게나.”
“명을 받듭니다.”
얼마 후, 사역원정 변원규가 장무영의 안내를 받아 안가로 들어왔다. 안가에 들어서니 자신이 보낸 미행자가 묶인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게 보였다. 변원규는 혀를 끌끌 찼다.
“역시 완화군 대감께서 청국에 있으리라는 추측이 맞았군.”
“그렇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이선이 직접 나타나 변원규에게 인사했다. 어쨌건 완화군은 왕의 장자이니, 변원규는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표했다.
“사역원정 변원규, 삼가 완화군 대감을 뵙사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먼 길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선이 답례하고,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북경에 온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미처 몰랐군.’
“북양 대신 각하는 뵈었습니까?”
“인사차 예부(禮部)에서 뵈었습니다.”
‘이 영감탱이, 조선 사신이 왔는데도 내게 알려 주지 않아?’
“이중당이 내가 북경에 있다 말해 주던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들리는 소문에 이중당께서 조선에서 온 귀빈을 극진히 대한다더군요.”
어쩌면 이홍장은 이선이 어떻게 나올지 시험해 보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선이 정말로 대원군의 밀명을 받고 나온 밀사인지, 아니면 왕실과의 불화로 인해 탈출한 망명자인지.
“군 대감, 어찌 고귀하신 몸으로 사사로이 조선을 떠나 청국에 있단 말입니까? 하물며 북양 대신의 저택에서 머무른다니요? 얼마 전에는 공친왕 전하를 예방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겨우 이틀 사이에 내 뒷조사를 열심히 하신 모양이시군요. 성상께서 나에 대해 분부한 게 있으십니까?”
“출발 전에 밀명을 내리시길, 완화군 대감이 청국에 있다는 소문이 맞으면, 잘 설득해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중궁전께서는 따로 말씀이 없으십니까?”
“완화군께서 건강히 잘 살아 있기를 바라며, 생사를 확인해 무사히 돌아오시길 바란다 하였습니다.”
‘고양이 쥐 생각하시는군.’
이선은 속으로 냉소했다.
“하지만 성상께서 영감을 사신으로 파견한 목적은 그게 아닐 터인데.”
“물론 청나라의 군비를 살펴보고, 조선에서 유학생을 파견해 무기 제조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 또한 그렇습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청국이 서양 각국과의 수교로 문호를 넓히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군비를 튼튼히 하는 걸 확인하러 온 것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이선은 변원규가 개화파 실무 관료임을 깨닫고, 역으로 그를 설득할 목적이었다.
“그건 나라에서 할 일이지, 왕족이 할 일이 아닙니다. 왕족이 사사로이 중국의 권력자들과 통하다니, 이는 오해를 받기에 딱 좋은 행동입니다. 저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시지요.”
변원규의 설득에 이선이 빙긋 웃었다.
“사역원정 영감, 영감이 청국에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북양 대신을 뵙고, 무기 제조와 군사 훈련을 배우는 문제와 서양 각국과의 수교를 논의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영감의 일이 쉽도록 이미 이중당께 다 손을 써두었습니다. 사실 나도 조선 사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변원규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시무(時務, 당대의 시급한 일. 개화를 의미)가 중요한 때가 아닙니까? 나 역시 동의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하려는 일이 편하도록 미리 다 준비를 해놨다는 것이지요. 이중당이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지금이 바로 적기입니다. 청국의 간섭을 최대한으로 줄여서 서양과 자주적으로 수교할 적기란 말입니다.”
이선은 자신이 청나라에서 했던 일, 향후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변원규에게 설명했다.
처음엔 애송이라고 여겼던 변원규도, 이선의 차분한 설명을 듣다 보니 놀라게 되었다.
중국을 여러 번 사신으로 왔던 사역원 역관이자, 오경석과 같은 역관 출신 개화파 지도자와 어울렸던 변원규는 조선에서 국제 정세에 밝기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변원규는 이선이 하는 말이 정확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감, 실로 놀랍습니다. 어찌 이토록 시무의 일에 밝으십니까?”
“내가 어느 분의 아들이고, 어느 분의 손자인지를 잊었습니까?”
이선은 이번에도 편리하게 대원군을 팔았다. 대원군이 완고한 보수파이긴 해도, 유능한 정치가임이 틀림없었기에 변원규도 납득이 되었다.
‘운현궁이 총애한다더니, 과연 왕재가 남다르구나.’
“아, 앞으로 서양과 수교하게 되면 영감과 같은 역관들이 중요하게 쓰일 날이 올 것입니다. 역관들이야말로 외국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들이거늘, 어찌 사대부가 중인이라 하여 무시하겠습니까? 이제 비로소 중인 허통(許通)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이선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그가 권좌에 오르면, 신분에 무관하게 실무자를 우대할 생각이었다.
“……!”
이선의 말은 변원규의 마음을 울렸다. 막상 외교 실무를 맡는 건 언제나 자신들 역관인데도, 중인 나부랭이라고 경멸하는 명문가 출신 고관대작들을 보면 울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그런데 왕자가 중인의 울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미래에 대해 희망적인 길을 안내하니, 그로선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감, 이중당을 뵙고 청국의 일이 마무리되면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시지요. 앞으로 조선에는 대감과 같이 시무에 밝은 인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곤란합니다. 범월죄인(犯越罪人)이 어찌 조선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이는 나라를 위한 일이었으니, 성상께서도 용서하실 것입니다.”
“영감의 생각에는, 내가 왜 청국에 왔는지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변원규는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서장자가 있어 왕실에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중전마마와 세자 저하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외국에 남아 조선의 시무를 돕겠습니다.”
변원규는 짐작한 바가 들어맞아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왕명을 받은 이상 귀국을 종용하지 않을 순 없었다.
“대감의 지극하신 충심은 신도 잘 알겠사오나, 오히려 대감께서 청국에 남아 공친왕과 이중당의 보호를 받게 된다면 그게 왕실에 더욱 큰 부담이 될 것입니다.”
제3자가 보기에, 이선의 행동은 그가 공친왕과 이홍장을 등에 업고 조선으로 돌아올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 오해 사기가 딱 좋았다.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조선 사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청국에서 할 일은 거의 다 끝난 것 같으니, 영감에게 업무를 이관하고 청국을 떠나겠단 뜻입니다. 그러니 중궁전께 걱정하지 말라 전해 주십시오.”
“그럼 조선으로 돌아오겠단 말씀이십니까?”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나는 조선에서 더 멀리 떨어질 생각입니다. 이중당께 부탁하여 태서(泰西, 유럽)로 갈 예정입니다.”
“대감, 태서라니요? 어찌 귀하신 몸으로 저 멀리 양이의 나라까지 가시려 하십니까?”
“영감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시무를 배우기 위해 청국에 유학생을 파견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직접 서양에 가서 본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이미 청국과 일본에서도 서양으로 많이 유학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는 서양이 얼마나 강한지, 조선에 위협이 될지, 그 허실을 미리 파악해 보고 싶습니다.”
“으음…….”
“또한 내가 청국에 있으면 중궁전과 세자궁에 부담이 될 터이니, 알아서 비켜드리려는 목적도 있지요.”
“이렇게 나라와 왕실을 사랑하시는데, 어찌 곡해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대감의 충심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천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변원규는 이선의 충심에 감복하여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선이 진심으로 조선과 왕실을 위하여 멀리 떠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조선에 가서 그렇게 보고해 주십시오. 나 이선은 나라와 왕실을 위하여 멀리 떠날 것이니, 아무 걱정 마시라고.”
“대감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신은 받들도록 하겠나이다. 그리고 대감께서 풍운의 뜻을 이루시고 조선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겠나이다.”
사실상 충성 맹세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이선은 기쁘게 화답했다.
“이해해 주니 고맙습니다, 사역원정 영감. 반드시 뜻을 이루고 다시 만납시다.”
‘이제 때가 되었다.’
공친왕과 이홍장 등 청국의 핵심 인사들과 친분을 맺어, 조선과 이선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조선을 위해 향후 청나라의 군사 개입과 내정 간섭을 막기 위한 선제 조치였고, 이선을 신뢰할 만한 조선 당국자로 여기기 위함이었다.
‘내가 멀리 떠나는 것은, 가장 빠르게 돌아갈 길을 찾기 위함이다.’
이선이 유럽으로 떠나려는 건 결코 왕실에 대한 충심도, 도피도 아니었다.
근대의 두 가지 힘 – 자본과 군비를 축적하기 위함이었다.
근대 세계를 주도하는 게 서양인 이상, 이선은 유럽에서 가장 빠른 길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국제법에서, 외교 사절이나 국가 원수가 그 신분을 알리지 않고 사적으로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일을 미행(微行, incognito)이라고 한다.
완화군 이선의 미행은 유럽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