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31
– 231화에 계속 –
231화 왕관의 무게
국혼 문제는 차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이선이 본국과의 협의를 원하자, 니콜라이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두 나라는 당장 시급한 일이 많았다. 국혼은 차르 개인이 추진하는 바였고, 러시아 정부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건 만주철도 문제였다.
조선 역시 보다 중요한 건 동아시아의 미래를 놓고 협상을 이뤄내는 것이었다.
5월 18일, 차르 니콜라이 2세가 대관식을 위해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
같은 날, 조선과 각국 사절단도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선은 러시아에 속속들이 도착하는 각국 외교관들을 만났다. 차르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한 나라는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등지의 30여 국에 달했다.
조선과 별다른 관계가 없는 나라들에는 이강과 부사들을 보내 인사하고 친교를 다지게 했다.
보다 중요한 나라들에는 이선이 직접 찾아가 방문했는데, 가장 흥미로운 건 역시 이홍장과의 재회였다.
“시모노세키 이후 간만에 뵙습니다. 중당께서는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워낙 일이 많기는 합니다만, 덕분에 무탈합니다. 완화군께서도 그러시겠지만.”
“하하, 그렇지요. 전쟁 못지않게 힘든 일이 전후 처리이니.”
이선과 이홍장은 서로 예의를 갖춰 인사했지만, 말에는 뼈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100명이나 되는 사절단을 파견했다지요? 마치 예전에 열하의 대청 황제 폐하를 뵙기 위해 보낸 조공 사절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새로운 상국을 섬기려는 조선의 정성이 갸륵합니다그려.”
이홍장의 조롱에 조선 사절들이 불끈하는데, 이선은 여유롭게 웃으면서 화답했다.
“조선은 청국과 무관한 자주 독립국이니, 이제 조선의 일은 중당이 걱정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중당께선 중국을 떠나며 관을 짊어지고 오셨다지요? 참으로 대단한 충정입니다.”
이홍장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북양대신 직례총독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내각대학사 총리아문대신으로 외교 정책을 총괄했다.
서태후와 공친왕은 이홍장에 대한 변함없는 신임을 표했고, 청나라에 아직 그를 대체할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홍장은 러시아 대관식 참석에 이어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을 돌며 외교 협상을 이어 나갈 예정이었다.
이 시대 기준으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74세 노인에게는 막중한 책무였다. 이홍장은 아예 타지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배에 관을 싣고 왔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국의 온정을 구하고, 차관을 얻으려니 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중당에게만 떠넘기니, 처지가 참 딱합니다. 귀국 조정에서 중당의 충정을 이해해 줘야 할 텐데요. 이번에 중당이 어떤 협정을 맺고 오더라도 매국노라고 비난할 무리가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선은 걱정하는 척하면서, 이홍장의 아픈 점을 찔렀다.
청나라는 3년 치 예산에 달하는 막대한 비용을 전쟁배상금으로 물어야 했고, 돈벼락을 맞은 일본이나 조선과 달리 청의 국가재정은 파탄 지경이었다.
결국, 해결책은 차관뿐이었다. 이홍장은 급히 차관을 구하기 위해 각국을 향해 손을 벌려야 했다.
하지만 이홍장이 국익을 위해 부득이하게 열강을 향해 손을 벌릴수록, 그를 향해 굴욕 외교와 매국노라고 쏟아지는 비난은 그치지 않았다.
“뭐, 귀국 덕분이지요. 조선이 분수에 맞지 않게 칭제건원하려 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동안 중국에 지극정성으로 충성하며 사대한 귀국의 열성조에게 부끄러운 일이외다.”
“별말씀을요. 우리 효종 대왕께서는 심양을 점령해 삼전도의 치욕을 씻으려 하셨건만, 심양의 눈앞에서 이를 이루지 못해 후손으로서 부끄럽지요. 대신 요동으로 갈음하였으니, 종묘사직에 승리를 고할 만합니다. 하늘의 열성조께서도 크게 기뻐하시겠지요.”
이홍장의 가시 섞인 말을 이선은 유들유들하게 다 받아쳐냈다. 되로 받으면 말로 갚는 격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노인도 이선의 화술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나도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던가.’
아니, 이제는 말뿐만이 아니었다. 이선의 조선은 실체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조선이 곧 칭제건원 한다는 소문에 격분했다. 조선을 대대로 번국으로 여겼던 황실의 분노는 더욱 컸다.
조선이 칭제건원해도 참칭(僭稱)에 불과하니,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의견이 조정의 주류였다. 심지어 시모노세키 조약을 파기하여 배상금 지불을 중단하고, 전쟁을 재개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왔다.
현실주의자인 이홍장은 강경론을 일축했다.
“조선이 칭제건원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시오. 보다 중요한 건 바뀐 정세를 어떻게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냐는 것이오.”
이홍장은 동아시아 전쟁과 삼국 간섭으로, 몇 가지를 깨달았다.
‘일본과 조선이 중국을 위협하는 새로운 적으로 떠올랐다. 둘 중에 더 위험한 건 육해군이 막강하고 호전적인 일본이다. 일본의 팽창주의를 꺾어야 한다. 일본을 꺾을 수 있는 나라는 러시아다. 영국은 중국의 손해를 지켜만 보다가, 재빠르게 일본 편에 가담해 이권을 빼앗는데 가담했으니 믿을 수가 없다. 러시아와 손을 잡아 일본을 견제한다.’
이홍장이 러시아를 방문한 건, 결국 대일(對日) 군사 동맹을 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러시아 차르와 특별한 관계인 이선을 자극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원한은 잊고 이선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홍장도 사람이라 이선에 대한 감정을 감출 수는 없어 가시 섞인 말을 쏟아 냈다.
“한 가지 물어봅시다. 조선은 일본과 동맹을 맺어 승리했으니, 조선인들은 일본을 좋아하지 않나요? 그리고 완화군은 러시아를 좋아하는 것 같고.”
“몇몇은 그렇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인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지요. 내 의견을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건 오직 조선뿐입니다.”
이선의 말에 이홍장은 한 방 먹은 듯 껄껄 웃었다.
“하하, 과연. 귀국이 원하는 대로 북벌을 이뤄냈으니, 그렇다면 구원(舊怨)은 풀렸다고 할 수 있지 않소이까?”
“원래 정치라는 게,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법이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홍장의 질문에 이선은 은유적으로 답했다. 이홍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귀국과는 여전히 대화가 가능할 것 같군. 대관식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논의해 보도록 합시다.”
“그러도록 하지요.”
이홍장과 이선은 악수를 주고받았다.
이제 이홍장도 악수라는 서양식 예법이 거슬리지 않았다.
1896년 5월 26일. 러시아에서 사용하는 율리우스력 14일.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의 우스펜스키(성모승천) 성당에서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오전 6시, 조선 사절단은 대례복을 입고 오스만 공사관으로 향했다. 각국에서 온 사절단이 모두 오스만 공사관에 집결하여, 다 함께 8시경 크렘린 궁전에 도착했다.
5월의 모스크바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봄이었다. 태양은 대열에 도열해 있는 사람들을 찬란하게 비추었다.
은빛 투구를 쓴 용맹한 근위병, 금빛 법의를 입은 근엄한 사제들, 레이스와 보석으로 치장한 아름다운 숙녀들, 번쩍거리는 훈장을 매달고 있는 멋진 신사들, 각양각색의 복장을 하고 있는 각국의 사절들.
러시아 전역에서 온 대표단과 모스크바 시민들도 구름처럼 모여들어 대관식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뎅- 뎅- 뎅- 뎅- 뎅.
퍼엉! 퍼엉!
오전 10시, 대성당의 종이 울리고 예포가 발사되었다. 군악대는 차이콥스키가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작곡한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가 모습을 드러내자, 일제히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황제 폐하께서 오십니다!”
“황제 폐하 만세!”
“하느님, 차르를 보호하소서!”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차르 부부는 손을 들어 답례를 표했다. 차르 부부는 붉은 융단을 밟고 지나 사제가 들고 있는 성화에 경의를 표하고, 우스펜스키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각국 사절단도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단, 오스만·페르시아·청국 사절단은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정교회 예법에 따라 성당 안에서는 그 누구도 모자를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오스만과 페르시아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청국 사절단은 유교 예법에 따라 모자를 벗길 거부했다.
결국, 이들은 성당 밖의 누각 위에서 참관해야 했다.
동양에서도 조선과 일본 사절단은 모두 서양식 대례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각국 사절단과 함께 성당 안에 입장했다.
성당 밖에 남은 청국 사절단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대관식은 러시아 전통에 따라 엄숙한 예법으로 진행되었다.
우스펜스키 성당의 내부는 아름다운 성화로 가득 채워져 극도로 화려했다. 성가 소리가 성당 안을 메우고, 금빛 법의와 주교관을 쓴 정교회의 고위 사제단이 대관식을 집전했다.
니콜라이 2세는 17세기의 차르 알렉세이의 다이아몬드 옥좌에, 알렉산드라는 15세기의 차리나 소피아 팔레올로고스의 상아 옥좌에 앉았다.
이반 3세와 결혼한 동로마 마지막 황제의 조카의 옥좌가 상징하듯이, 모스크바는 곧 제3의 로마이고 비잔티움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그처럼 대관식은 비잔티움 전례와 서구적 양식이 뒤섞인 형태였다.
“Κύριε ἐλέησον, Χριστὲ ἐλέησον, Κύριε ἐλέησον(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스도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정교회 예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에서 서 있어야 했다. 유교 의례 뺨칠 정도로 엄격한 러시아의 예식에 조선 사절단도 기립 자세로 진땀을 빼야 했다.
예배가 끝나고, 정교회 종무원장이 황제와 황후의 공식 착의식과 성유 도유식을 거행했다.
니콜라이 2세는 무릎을 꿇고 성유를 바른 후, 일어나서 선서했다.
“짐은 전 러시아인의 황제이자 전제 군주로서, 신성한 러시아 제국과 전제정을 수호할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주여, 러시아를 보살펴주소서.”
“주님, 러시아를 보우하소서!”
“신의 은총으로, 전 러시아의 황제이자 전제 군주, 모스크바와 키예프, 블라디미르, 노브고로드의 차르, 폴란드와 카잔, 아스트라한, 시베리아의 차르, 핀란드와 리투아니아, 스몰렌스크, 프스코프, 볼히니아, 포돌리아의 대공, …… 캅카스와 투르케스탄 제후의 지배자, 모든 북방 영토의 주권자,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이신…….”
종무원장은 러시아 황제의 무수히 많은 작위들을 끊임없이 이어나갔다.
“니콜라이 2세 폐하 만세!”
니콜라이 2세는 종무원장으로부터 예카테리나 2세의 왕관을 전달받아 손수 머리에 올려놓았다.
본래 그는 무게 1킬로그램인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왕관을 쓰고 싶었으나, 엄격한 예법에 따라 예카테리나 여제의 왕관을 써야 했다.
거대한 루비와 다이아몬드, 보석이 줄줄이 박힌 여제의 왕관의 무게는 5킬로그램이나 되었다.
‘무겁군.’
니콜라이는 머리 위에 쓴 왕관이 무겁다고 느껴졌다. 아니, 단순히 왕관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다.
모스크바 공국으로부터 내려오는 러시아의 전통, 표트르 대제 이래 유지해온 강대국의 위상, 저 무수히 많은 작위들, 1억 5천만 신민을 통치해야 하는 전제군주.
니콜라이는 막중한 책임감에 어깨가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니콜라이 2세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러시아 제국 만세!”
“주여, 차르를 보우하소서!”
이윽고 엄숙한 국가가 연주되었다.
국가 연주를 끝으로, 5시간에 걸친 장엄한 대관식은 끝이 났다.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는 로마노프 왕조의 상징인 쌍두독수리가 수놓인 비단 망토를 입고 교회를 떠났다.
차르 부부는 운집해있는 군중을 향해 세 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와아아아!”
군중들 사이에서 열렬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축포 소리가 모스크바 전역을 뒤덮고, 수많은 교회에서 일제히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러시아 제국의 미래는, 국민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더없이 밝아 보였다.
‘…… 참 화려한 대관식이군.’
대관식의 처음과 끝을 지켜본 이선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더없이 화려하고 웅장한 대관식이지만, 정작 차르 본인은 왕관의 무게에 짓눌러 보였다.
다른 사람은 알아보지 못해도, 차기 군주의 사명을 공유하고 있는 이선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조선도 내년에 대관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러시아처럼 화려하고 웅장할 순 없겠으나, 새 제국의 출발을 알리는 중요한 자리였다.
“정말 역사에 길이 남을 대관식이었습니다.”
“과연 대러시아 제국의 위용은 다르군요.”
다른 사절단들이 하나같이 감탄을 표했다. 이선과 달리 이들은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으니, 화려하고 웅장한 대관식에 매혹될 법도 했다.
“이번 대관식 일정에 6천만 루블이나 들었다지요.”
“6천만 루블이면 얼마요?”
“청은으로 하면 3천 5백만 냥, 우리 돈으로 하면 7천만 원쯤 됩니다.”
사절들은 일제히 입을 딱 벌렸다.
“어휴, 그럼 조선으로 치면 대체 몇 년 치 예산인가…….”
“일시적인 행사를 위해 그리 큰돈을 쓰다니. 차라리 그 돈을 아껴 러시아의 발전에 썼더라면, 훨씬 유용하게 쓰이지 않았을까 싶군요. 당장 낙후한 모스크바 도로부터 개선할 수 있을 터인데.”
문득 윤치호가 중얼거렸다. 말을 하고 난 순간 그는 실수했다 싶어 이선에게 사과했다.
“송구합니다, 대감. 제가 괜한 소리를…….”
“아니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대국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겠지. 조선은 그럴 여유가 없으니, 대관식에 쏟아 붓을 돈이면 조선의 발전을 위해 씁시다.”
이선도 같은 생각이었다.
극도로 웅장한 대관식이지만, 실제 역사대로라면 이게 마지막 대관식이었다.
‘과연 모스크바에서 새로운 대관식이 열릴 수 있을까?’
물론 역사가 바뀌고 있기에, 로마노프 왕조와 러시아 제국이 영속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이선도 친구 니콜라이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긴 원치 않았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라는 거대한 변혁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강력한 전제 군주라도 몰락의 길을 걷기 마련이었다.
이전 시대와 달리, 곧 접어들 20세기라는 시대가 그랬다.
그렇기에, 전제 군주의 왕관은 더없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