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45
– 245화에 계속 –
245화 삶과 죽음
이선은 독립문 행사를 마치고 급히 궁으로 돌아왔다. 교태전 주위에는 의료진과 궁인들로 분주했다.
“황제 폐하 납…….”
궁내부 관리가 황제의 등장을 알리려는데, 이선이 조용하게 했다.
“안에서 바쁠 터인데, 번거롭게 하지 말라. 상황은 어떤가?”
“순산이십니다. 곧 희소식이 있으실 겁니다.”
응애-!
때마침,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탄생을 알리는 울음소리였다.
궁인이 밖으로 나와 희소식을 전했다.
“황자 아기씨이십니다!”
“오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황실의 경사이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손을 꽉 쥐던 이선은 자연히 힘이 풀렸다.
“산모는 건강하신가?”
교태전 안에서 호튼 여사가 나왔다. 산부인과 경험이 풍부한 호튼은 출산 주치의를 맡았다.
“마마와 아기씨 모두 건강하십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폐하.”
“고맙습니다, 닥터 호튼.”
이선은 의료용 가운으로 갈아입고 교태전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가 의사의 옷을 입는 걸 보고 사람들은 놀라워했지만, 이선에게는 군주의 체통보다 산모와 아이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영은 기절한 듯 누워 있고, 마르가리타가 곁에서 땀을 닦아 주며 보살피고 있었다. 나이든 상궁이 강보(襁褓)에 싸인 아이를 안고 있었다.
“황제 폐하!”
궁인들이 일제히 이선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힘없이 누워 있던 아영도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선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일어설 것 없소. 고생이 많으셨소, 부인.”
“화, 황공하옵니다. 아이를 보시옵소서.”
아영의 눈짓에 상궁이 강보에 싸인 아이를 황제에게 안겨 주었다. 이선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받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았다.
세상 밖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된, 갓 생명을 얻은 아이는 너무나 작았다. 이선은 가슴이 뭉클했다. 제국의 후계자를 얻었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 태어났다는 생각에 뭉클했다.
아직도 21세기의 기억이 남아 있는 이선에게, 자식의 탄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에게 강한 연결 고리와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너무나 기쁘구려. 한 아이의 아비가 된다는 게 이렇게 특별한 기분일 줄이야. 궁궐의 황제든 시골의 촌부이든 똑같은 일이겠지.”
이선은 부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소, 부인. 나는 무엇보다 부인과 아이가 건강한 것이 기쁘오.”
“황공하옵니다. 모두 폐하의 지극한 성심 덕분이옵니다.”
“아니오, 솔직히 미안하오. 국정에 신경 쓴답시고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지켜보지 못하고, 무신경했던 것 같소.”
이선의 사과에 아영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는 한 여인만의 지아비이자 한 아이만의 아비가 아니라, 2천만 신민의 어버이이십니다. 폐하께서 국가와 신민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소. 역시 부인은 군주의 지어미, 국가의 어머니가 될 자격이 있소.”
이선은 따뜻한 눈빛으로 부인과 아이를 쳐다본 후, 강보에 싸인 아이를 다시 상궁에게 전했다.
“몹시 힘들고 피곤할 터인데 푹 쉬길 바라오, 부인. 다시 찾아오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선은 마르가리타를 잠시 밖으로 불러내었다.
“고맙소, 닥터 얀코프스카.”
“치하는 닥터 호튼에게 해주세요. 주된 일은 그분이 하시고, 저는 보조 역할만 했을 뿐입니다.”
“아니, 꼭 의료진 역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선생이 부인의 벗이자 심리적 버팀목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마르가리타는 미소를 지었다.
“별말씀을요. 오히려 마마께서 먼 타국에 온 저를 위해 힘써 주셨지요.”
“역시 선생을 이 나라에 데려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폐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폐하.”
“정말 고맙소. 곧 선생의 생일이지요? 29일로 알고 있는데. 감사의 선물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알고 계셨군요. 어찌 제 생일까지…….”
이선은 빙긋 웃었다.
“내가 워낙 기억력이 좋아서.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 말했잖아요. 오흐라나 문서에서 보기도 했고.”
“후후, 정말 그렇군요. 배려 감사드립니다.”
마르가리타는 문득 아영이 부러워졌다. 그녀의 나이 어느덧 스물아홉, 한창나이지만 서양 기준으로도 혼기는 꽉 찼다.
서양 여성이 드문 조선 사회에서, 마르가리타는 어디서든 주목받는 존재였다. 재한 서양인들 사이에도 아름답고 유능한 여의사는 화젯거리였다.
황성에 체류하는 미혼의 서양 남성들은 마르가리타의 등장에 환호했다. 각국 외교관과 상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구혼을 받았지만, 그녀는 모두 거절했다. 그 이유가 걸작이었다.
“나는 내 조국 폴란드가 독립하기 전까지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구혼자들은 하나같이 머쓱해 했다. 당분간 폴란드 독립의 전망이 없어 보였으므로, 사실상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라고, 그녀가 수녀원에 들어가 순결서원(純潔誓願)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웃었다.
그런 이유를 대고 구혼자들을 뿌리치긴 했지만, 아이를 낳고 행복한 모습의 부부를 보고 부럽다는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르가리타는 대신 아영과 태어난 아이를 가족처럼, 자매와 조카처럼 생각하겠다고 결심했다.
이선은 제일 먼저 부황에게 황자의 탄생을 알렸다.
황제와 태상황 사이는 한동안 서먹했다. 이선이 매일 문안을 오긴 했지만, 형식적인 만남일 뿐이었다. 그 얼음장과도 같은 관계는 황자의 탄생으로 어느 정도 녹아내렸다.
“황자의 탄생이 더없이 기쁘구려. 부디 건강히 자라길 바라겠소.”
“태상황께옵서 이렇게 기뻐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태상황은 장손의 탄생을 기뻐했다. 아무리 아들이 미워도 손자가 예쁜 건, 대원군이나 태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호외요! 호외! 황자 아기씨 탄신!”
“오오!”
“마치 대한의 독립과 제국 선포를 기념하는 것 같은 탄신이로군!”
황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호외로 전국에 전해졌다. 제국의 후계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만인이 기뻐했다.
온 황실과 국민의 경사라지만, 가장 기뻐하는 이라면 역시 대원군이었다.
대원군은 노구를 이끌고 직접 경복궁으로 가서, 손자와 손자며느리에게 축하 인사를 했다.
“폐하, 이 늙은이는 이제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살아생전 증손주까지 보게 될 줄이야. 신은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만수무강하셔야지요.”
“이 늙은이가 벌써 일흔하고도 여덟입니다. 살면 더 얼마나 살겠습니까? 이미 과분하게 오래 살았습니다.”
이선은 순간 대원군의 실제 수명을 떠올렸다. 역사대로라면 그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늙어도 기력이 왕성했던 대원군은, 근래 들어 급격히 노쇠해 보였다. 특별한 지병은 없어도, 피할 수 없는 노환이었다.
“바라건대, 황자의 아명(兒名)은 국태공께서 지어 주십시오.”
본래 조선 왕실에서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 워낙 유아 사망률이 높은 시대이기 때문이었다. 시일이 지난 후에야 아명을 지어 주고, 아예 아명을 건너뛰고 이름 없이 ‘아기씨’로 불리다가 큰 후에 본명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이선은 태어난 즉시 이름을 지어 주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 황자의 탄생을 열망했던 대원군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직접 짓게 해 주고 싶었다.
대원군은 손자의 마음을 이해했다. 맏손자, 선(墡)의 이름을 지어준 것도 바로 그였다. 왕손이 귀한 왕실에서, 왕자의 탄생을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럼, 신이 잠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왕자의 이름은 멋대로 짓는 게 아니라 왕실에서 숙고한 다음에 정했다. 예컨대 태상황의 본명은 재황(載晃)이지만, 즉위한 후에는 형(㷩)으로 바꿨다. 피휘(避諱) 풍습 때문에 군주의 본명은 잘 쓰이지 않는 어려운 글자로 정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아명은 보통 복을 많이 받으라는 뜻에서 쉽게 정해 주곤 했다. 태상황의 아명은 명복(命福)이었다. 어렸을 때는 천하게 이름을 지어야 오래 산다는 풍습으로 인해 ‘개똥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장차 제위에 오를 아기씨이니, 아명이라 하여 함부로 지을 수 없습니다. 봉황 황(凰)자에 길할 길(吉)자를 써서 황길이 어떻겠습니까?”
‘황길이라. 뜻은 좋은데 어감이 약간 촌스럽군. 하지만 대원군이 직접 지어 준 이름이니.’
이선은 흔쾌히 수락했다.
“국태공께서 정해 주신 이름이니 좋습니다. 아이의 아명은 황길이라 하지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아기씨께서 성수무강하시길 기원하옵니다.”
증손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대원군은 눈가가 촉촉해졌다.
‘늙으면 눈물이 많아진다더니, 어찌 이리 칠칠치 못하게 눈물이 잦아지는고.’
냉혹한 철혈 정치인 대원군도 그랬다.
태어난 증손자의 이름은 지어 주었지만, 그 아이가 자라는 것은 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제 여한은 없었다. 삶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었고, 태어나는 아이가 있다면 죽는 노인도 있는 게 자연스러웠다.
1898년, 광무 2년의 새해가 밝았다.
신생 대한제국은 원동력이 가득했다. 젊은 황제는 열성적으로 국정을 맡았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도 활기가 가득했다. 옛 시대의 퇴조는 자연스러웠다.
옛 시대의 퇴조를 알리듯,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황실에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1월 8일, 정유년 12월 16일에 황제의 할머니이자 국태공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가 훙서(薨逝)했다.
향년 80세. 당시로는 놀라운 장수였다. 1897년 3월 16일에 부대부인의 팔순을 기념하는 성대한 잔치가 열렸는데, 그날이 마지막 생일이 되고 말았다.
이선은 어의를 보내 부대부인의 쾌차를 기원했으나, 끝내 노환은 이기지 못했다.
부대부인은 천주교로 개종했기에, 생전에 종부성사(終傅聖事)를 받길 원했다. 대원군은 부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었다. 뮈텔 주교가 운현궁으로 와서 부대부인의 종부성사를 집전했고, ‘민마리아는 주님의 품 안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법적으로 태상황이 문조(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자식이라고는 하나, 부대부인은 엄연히 생모였다. 태상황은 부친과는 더없이 냉랭한 사이였으나, 모친의 죽음은 크게 슬퍼했다.
태상황과 황제는 직접 성복일(成服日)에 운현궁으로 왕림하여 조문하였다.
상주는 장자인 이재면이었다. 이재면은 태상황과 황제가 운현궁에 직접 와 준 것에 감격했다.
하지만 상복을 입은 태상황과 대원군은 서로 간에 절을 주고받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상황은 단지 모친의 신위 앞에서 곡을 하며 슬퍼할 뿐이었다.
심적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역시 대원군이었다. 이미 죽음을 바라보던 대원군은,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더욱 빠르게 노쇠해 갔다.
‘부인, 우리가 60년을 넘게 해로했거늘, 내 어찌 혼자 오래 살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곧 내가 따라갈 날이 머지않았으니.’
상복을 입은 대원군은 완전히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이었다.
이선은 할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의(太醫)는 국태공을 각별히 모시도록 하라.”
이선은 어의와 최상의 의료진을 보내 대원군의 건강을 관리하고자 했으나, 대원군은 굳게 사양하고 운현궁을 떠나 별장인 마포의 아소당(我笑堂)으로 향했다.
대원군이 마지막 안식처로 정한 곳이었다.
겨울의 차가운 날씨와 부인을 잃은 슬픔은 대원군의 건강을 회복할 수 없게 하였다.
이미 삶의 의지를 상실한 대원군이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제 더 바랄 게 없다는 마음에서였다.
‘조선, 아니 대한의 창창한 미래를 보고 가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끝났다. 나라의 뒷일을 맡기고 갈 후계자가, 할아비와 아비보다 훨씬 뛰어난 후계자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2월, 대원군은 와병으로 몸져누웠다. 이선은 급히 어의를 보내 병세를 확인하게 했다.
“국태공께서 완고히 진료받기를 거부하십니다.”
“어허, 어찌 이러신단 말인가. 짐이 직접 아소당을 찾아 국태공을 뵈어야겠다.”
이선은 직접 아소당을 찾았다. 대원군을 모시던 백부 이재면과 사촌 동생 이준용이 이선을 맞이했다.
“국태공의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많이 위중하십니다. 하오나 폐하께서 친히 와 주셨으니 털고 일어나실 것입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이재면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원군의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리란 건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아버님, 성상께서 오셨습니다.”
안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뫼시거라.”
이선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대원군이 이재면과 이준용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성상께서 오셨는데 미리 나가지 못한 불충을 용서해 주십시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 손자가 진작 찾아뵙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부대부인의 장례를 치른 후, 대원군은 완전히 노쇠해져 있었다. 가뜩이나 마르던 몸은 비쩍 말랐고, 얼굴에는 죽음의 기운이 가득했다. 오직 특유의 그 눈빛만은 형형했다.
이선은 할아버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 왔다.
“아범과 준용이는 나가 있거라. 내가 성상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
대원군의 명에, 이재면과 이준용은 고개를 조아리고 방에서 나갔다.
이선과 단둘이 남자, 대원군은 몸에 힘을 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