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46
– 246화에 계속 –
246화 거인의 퇴장
“폐하, 신이 죽기 전에 꼭 아뢰고 싶은 말이 있사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전국이 국태공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어서 쾌차하셔야지요.”
“신의 나이가 어느덧 일흔아홉입니다. 폐하의 증조부이신 남연군께서는 마흔아홉에 돌아가셨지요. 그에 비하면 과분할 정도로 오래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내년이면 팔순이십니다. 이 손자가 팔순 잔치를 성대하게 준비하려고 합니다. 꼭 쾌차하시어 팔순 잔치를 열게 하여 주십시오.”
대원군은 고개를 저었다.
“감읍할 따름이오나, 이미 폐하께서 제국을 선포해 제위에 오르는 걸 보았고, 그 후계자까지 태어났는데,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잔치도 이만하면 족합니다.”
대원군은 더 이상 삶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한때, 권력욕의 화신과도 같았던 대원군은,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했다.
“폐하, 신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제부터는 감히 황제의 신하가 아닌 할아비로서 말하고자 합니다.”
“부디 편히 말씀하십시오. 저 역시 오늘만큼은 할아버님께서 황제가 아닌 손자로 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전처럼 말입니다.”
이선은 흔쾌히 수락했다. 공적으로는 대원군이 신하였으나 사적으로는 할아버지였다. 다른 이가 보는 앞에선 군신(君臣) 관계를 지키더라도, 단 둘이선 조손(祖孫) 관계로 대해도 족했다.
“황명이시니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선아. 하하, 이렇게 부르니 좋구나. 나 말고 누가 감히 황제의 어휘(御諱)를 함부로 부를 수 있겠느냐?”
“하하, 오직 할아버님뿐입니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즐겁게 웃었다.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다. 방계 왕족으로 태어나 내 아들이 왕위에 올랐고, 손자가 제위에 오르는 걸 보았으니. 그리고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의 후손이 아니냐.”
“그럴 수 있었던 건 할아버님의 공이 크지요. 할아버님이 아니었다면 어찌 부황께서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겠으며, 오늘날 제가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아마, 태어나지도 못했겠지요.”
이선은 대원군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허허, 과연 나는 무관(無冠)의 제왕이로다. 내 비록 왕은 되지 못했으나, 왕의 아비이자 황제의 할아비이니, 신하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존귀한 위치에 오르지 않았는가.”
“그렇지요. 할아버님께서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왕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형제들을 친왕으로 봉하면서, 대원군도 왕으로 올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선도 흔쾌히 수락하였으나, 대원군 본인이 거절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국태공 저하(國太公 邸下)라는 존칭이면 충분하다. 살아생전 이미 최고의 영예를 누렸는데, 이제 왕작을 받아 무엇하랴? 굳이 예우하고 싶다면 운현궁의 장손들을 앞으로도 아껴 주길 바라네. 재면은 황제의 백부요, 준용은 단 하나뿐인 사촌이 아닌가.”
“물론입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장차, 운현궁은 재면과 준용이 계승하겠지. 내 신신당부하였으니, 운현궁은 황제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네.”
실제 역사에서 대원군은 고종을 밀어내고 이준용을 추대하려고 했기에, 이준용은 대한제국의 적이었다. 하지만,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의 수족들이, 나를 따랐던 모든 이들이,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리라.”
섭정 이래 정보 습득과 여론 공작의 달인인 대원군은 ‘천하장안’으로 대표되는 사적 조직망을 아직도 갖고 있었다. 대원군은 이를 고스란히 황제에게 바칠 뜻을 밝혔다.
이선은 공적으로 정부 산하인 내무부 경무청 소속 경찰 정보 조직, 원수부 정보국 소속 군사 정보 조직을 거느렸다. 사적으로는 김옥균이 지휘하는 개화당의 비밀 결사인 충의계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선의 정보 조직은 이미 막강했지만, 국내 정보와 여론 공작의 측면에서는 ‘천하장안’만큼 오래된 이들도 없었다. 이선은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제 직속의 신생 정보 기관을 구상했고, 하나로 통합하여 출범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할아버님께서는 이 손자를 늘 위해 주시는군요. 이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우리 가문에 이토록 영명한 왕재(王才)가 태어나 나의 사업을 완수하고, 아니, 한참 뛰어 넘었지. 경장을 이룩하고, 북벌을 완수했으며, 마침내 천자의 제위에 올랐다. 아, 이토록 뛰어난 후계자라니! 내가 어찌 마음으로부터 깊이 감복하지 않겠는가?”
대원군은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실제 역사의 대원군은 노추(老醜)라고 할 정도로 권력에 집착했다. 고종을 몰아내기 위해 이재선, 이재면, 이준용을 돌아가며 내세웠으며, 손잡을 대상으로 청과 일본을 가리지 않았다.
자신이 왕으로 내세운 아들에 대한 배신감, 10년 섭정의 업적에 대한 자부심, 고종과 민씨의 실정에 대한 분노가 복합적으로 얽혀 대원군을 끝없는 권력의 집착으로 밀어 넣었다.
섭정기의 대원군은 유능한 정치가였지만, 실각 이후의 대원군은 국가를 끝없는 정쟁으로 몰아넣는 노추 그 자체였다.
‘하마터면 추하게 퇴장할 뻔 했으나, 이 녀석이 모든 걸 바꾸어 버렸다.’
그런데, 이선의 등장이 모든 걸 바꾸어 버렸다. 대원군과 정치관은 크게 다르지만, 빼어난 능력과 넓은 시야, 대국적인 판단과 신속한 결단력. 이래저래 실망스러운 아들과 비교하면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손자였다.
성리학 근본주의자들하고는 다른 패도(霸道) 정치가이긴 해도, 대원군은 본질적으로 유교 보수주의자였다. 이선과 개화당이 추구하는 급진적 근대화 개혁은 그의 지향과 크게 다른 것이었다. 대원군을 따르는 보수파들이 불평불만을 쏟아 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이선을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이선이 그의 손자가 아니었더라면, 그가 마음속으로 인정한 후계자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그런 일은 없었을 터였다.
“소손이 이룬 일이 어찌 저 한 사람의 공이겠습니까. 위로는 국태공과 정부 관료들, 아래로는 만백성에 이르기까지 합심하였기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이지요. 특히, 나라의 중심에 국태공이 없으셨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합심할 수 있었겠습니까? 할아버님의 공이 지극합니다.”
이선에게도 대원군은 단순히 할아버지가 아니라, 정권의 동반자인 고마운 존재였다.
이선은 급진 근대화 개혁으로 인해 기득권과 성리학 근본주의자들의 숱한 반발을 예상했다. 심지어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처럼 지방 사족 반란도 우려했다.
하지만, 산발적으로 소소한 불만이 터졌을지언정, 무력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앙 정부가 군사력을 독점하여 지방 사족들이 무력을 보유하지 않은 덕이 컸지만, 보수파를 대표하는 대원군이 반발 여론을 잠재우려고 힘쓴 공도 컸다.
여전히 민간에서는 세도 정치를 끝장내어 왕권을 세우고, 각종 폐습을 철폐하여 백성을 위하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막아 낸 ‘대원위 대감’의 명망이 드높았다. 대원군은 이선의 신정권이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커다란 버팀목 역할을 한 것이다.
“그래, 나는 그래서 너를 믿을 수 있다. 네 공을 독점하지 않고, 흔쾌히 아랫사람에게 돌리지. 권력을 잡은 자는 무릇 성공이 뒤따를수록, 스스로에 도취되고 아집이 강해진다. 나도,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너는 젊어서 권력을 잡았는데도, 현명함을 잃지 않는구나. 앞으로도 그러겠지.”
대원군은 손자를 칭찬하다가, 문득 근본적인 의문을 풀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모든 건 네가 민 중전의 암살 음모를 피해 외국으로 떠났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력을 얻어 금의환향하여 나라를 지켜 냈지. 너는 어찌하여 그토록 어린 나이에 세상을 잘 알 수 있었던 것이냐? 나는 물론이고, 상황 역시 네게 그런 교육은 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무엇을 익히고 보았기에 이렇게 국운을 바꿀 수 있었는가?”
“…….”
이선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21세기의 기억을 갖고 이 시대에 왔음을,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대원군에게만은 말해도 되지 않을까?’
자신에게는 120년 뒤를 살던 역사학도 이선우의 기억이 공존하고, 그 기억을 통해 시대를 헤쳐 나가고 세상을 바꿀 수 있었음을.
“제가 그럴 수 있었던 건…….”
대원군은 기대하며 이선을 쳐다보았다.
“늘 역사를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역사를 거울로 삼아 기억하고 경계하며, 변화하는 세상을 누구보다 빠르게 익혀 현실을 바꾸는 데 적용하고자 했습니다.”
이선은 고민하던 끝에, 결국 절반의 진실만을 말하기로 했다.
미신을 믿지 않는 대원군에게, 전통 시대를 살아온 19세기의 사람에게 ‘나는 21세기의 기억을 갖고 이 시대에 왔으며, 내가 아는 역사적 진실은 이렇소!’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말이겠는가.
어찌 되었건, 결국 역사 덕분이었다. 이선우가 통한의 역사를 익히고 기억했기에, 그리고 그 기억을 통해 이선이 정확한 판단을 내려 제국주의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래, 과연 역사를 익히는 건 제왕의 덕목이다. 그렇기에 늘 역대 제왕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익혔지. 하지만, 이는 동양만의 역사였다. 너는 세계의 역사를 모두 꿰고 있기에,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게로구나.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대원군은 여전히 심중에 품은 의문을 다 풀 수 없었지만, 손자의 설명을 받아들이고 납득했다.
“앞으로 국가의 일은 모두 네가 잘 알아서 하겠으니, 이 늙은이는 더 이상 당부의 말은 하지 않겠다. 이제부터 하는 말은 지극히 사적인 말이다.”
“말씀하시옵소서.”
“상황은, 주상은, 아니 재황은 본래 내 막내아들 명복이다. 명복이가 왕이 되는 날 너무나 기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명복이는 내 아들이 아니었다. 효명세자의 아들이자 국가의 주인이었지. 그래도 처음 10년은 부자간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주상은 나를 믿고, 나는 주상의 나라를 위하여…….”
대원군은 회한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리되었구나. 권력이란 놈이 이렇게 무섭다. 결국, 내 아들과 손자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었으니. 네게 부탁하고 싶다. 나는 비록 아들과 화해하지 못했지만, 너는 반드시 아버지와 화해하거라. 부자간에 앙금을 남긴 채로 죽는다는 게 얼마나 비통한 일인지…….”
대원군의 회한에 이선은 목소리를 높이며 다짐했다.
“할아버님,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절대 부자간에 앙금을 남기지 마시옵소서.”
“고맙구나. 하지만 주상이 내게 한이 많은데, 따를진 모르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대원군은 오랫동안 심중에 품던 말을 했다. 그가 죽음을 앞두지 않았더라면 결코 하지 않을 말이었다.
“내 비록 민 중전과 원수였다고는 하나, 본래 그 여인은 처가의 일족이었고 내가 직접 뽑은 며느리였다. 하지만 정적이 되어 임오년에 몰아냈고, 끝내 내가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었다.”
“…….”
“어찌, 내 마음이라고 편했겠는가? 하지만 국가의 대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여인이 사라졌기에 나라를 바로 잡을 수 있었고, 네가 경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소손도 그리 생각합니다. 할아버님의 고뇌에 찬 결단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 일은 역사에 조용히 묻힐 것입니다.”
“그래,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지. 하지만 우리는 알아도 될 것이다. 충주 미륵사에 가면, 묘비 없는 무덤이 있다. 그래도 한때 국모의 자리에 있던 여인의 무덤인데, 너무 초라하구나. 폐비 되어 사사된 희빈 장씨조차도 대빈묘(大嬪墓)에 있지 않은가. 나중에 너의 치세가 안정되면, 양지바른 곳에 이장해 주어라. 그리고 나 대신 장례를 치러 다오.”
죽음을 앞둔 대원군은 한때 증오했던 원수, 자신이 제거한 정적에게도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리하겠습니다.”
“내가 척에게는 너무 못할 짓을 했다. 같은 손자인데도 전혀 애정을 주지 않고, 어미까지 빼앗고 말았구나. 네가 그 아이를 잘 돌봐 주길 바란다. 다만, 어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몰라야 하고…….”
“순친왕은 제 아우입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형제들을 우애로써 대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너를 믿는다. 형제를 우애로 대하고, 부자간에도 사랑을 잃지 말거라.”
“예, 결코 할아버님의 말씀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 내가 너무 말이 많았구나. 늙으면 이렇게 잔걱정이 많은 법이다. 네가 어련히 잘하겠느냐? 말이 많았더니만 피곤하구나. 이만 쉬어야겠다.”
대원군은 초탈한 표정이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이선은 대원군의 뜻을 읽었다. 큰 절을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오 척 단구(短軀)지만 조선의 그 누구보다 컸던 거인이, 역사에서 퇴장한다. 이선은 깊은 비애의 감정이 들었다.
대원군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했다. 이선은 아무리 국정이 바빠도 이틀에 한 번은 아소당에 와서 병세를 살폈다.
2월 22일,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위중해 병석에 누워있던 대원군이 중얼거렸다.
“주상은 오시지 않았느냐? 주상은 아직도 오시지 않았느냐?”
황제를 찾는 것으로 생각한 이재면이 답했다.
“아버님, 성상께서는 바로 엊그제도 오지 않으셨습니까. 오늘도 오실 예정이십니다.”
“명복이, 명복이 말이다. 내 막내아들 명복이 말이다!”
대원군의 외침에 이재면은 당혹스러웠다. 태상황은 부친의 위중함에도 여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황제에게 부탁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아소당 밖에서 분주한 소리와 함께 외침이 들렸다.
“태상황 폐하, 황제 폐하 납시오!”
“밖에서 뭐라고 하였느냐?”
“태상황께서 오셨다고 합니다. 제가 나가서 모시겠습니다.”
“오, 그래! 주상이 오셨구나, 명복이가 왔구나!”
대원군은 회광반조(廻光返照)라도 하듯, 희열에 가득 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