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47
– 247화에 계속 –
247화 흥선헌의대원왕
태상황이 대원군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아소당에 온 것은, 물론 효성을 지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유교적 법도를 따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었다.
아들, 이선의 간곡한 설득이 있었던 덕이었다.
“태상황 폐하, 대원군은 제 조부이시며 폐하의 생부이십니다. 폐하께서 그분께 한이 많은 것을, 소자라고 어찌 모르겠습니까. 대원군께서도 부자 관계가 어찌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너무나 한스럽게 생각하십니다.”
“…….”
아버지의 중병 소식에도 돌처럼 굳어 있던 태상황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하오나 생전에 이를 풀지 못한다면, 폐하께서 얼마나 후회가 되는 일이겠습니까. 어찌 돌아가시는 분께 여한을 남기려 하십니까? 부디 저와 함께 아소당으로 가 주시옵소서. 국태공의 임종 전에 뵙고, 마지막 말씀을 나누시옵소서.”
“…… 그리합시다.”
태상황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끝내 아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죽어 가는 부친을 만나러 갔다.
“대원군을 홀로 뵙고 싶다. 모두 물러나 주길 바라네.”
“그리하시옵소서.”
태상황은 아소당으로 들어가 단둘이 만났다. 오랜만의, 마지막 부자 상봉이었다.
이선은 이재면과 이준용, 어의와 궁인들을 대동하고 멀찍이 떨어져 밖에서 기다렸다. 오직, 두 사람만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다 하기 위함인지, 부자(父子)의 대화는 길어졌다.
죽음을 앞둔 대원군은 마지막 힘을 짜내듯, 간간이 큰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었고, 이선은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오롯이 두 사람만의 대화였다.
46년을 함께해 온 부자의 기억.
아버지와 아들로서, 섭정과 소년 왕으로서, 실각한 권력자와 청년 군주로서, 재집권한 섭정과 실권한 군주로서, 후계자에게 나라를 맡기고 명예롭게 은퇴한 국태공과 퇴위의 굴욕을 당한 태상황으로서.
흥선군이 있었기에 소년 이재황은 왕이 될 수 있었다. 대원군이 권력을 잡았기에 소년 왕은 무너져 가던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은 자신의 정당한 몫인 왕권을 되찾고 싶어 했고, 아버지로부터 이를 회수했다. 그리고 격렬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하나뿐인 권좌를 놓고 벌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투쟁이.
끝내, 승리자는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왕비로 삼았던 며느리를 제거하고, 왕으로 세웠던 아들을 밀어내고, 후계자로 삼은 손자가 끝내 제위에 오르는 걸 보았다.
지나간 세월이 길고, 수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부자의 애증은 길고도 격렬했다.
그 기나긴 애증의 고리는, 임종 전 마지막 대화만으로도 부족하리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방문이 열렸다. 방에서 나온 태상황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순간 비척거리며 기둥을 잡았다.
“폐하!”
궁내부 시종들이 태상황을 부축했지만, 그는 손을 내저으며 아들을 불렀다.
“황상, 대원군께서 황상을 찾으시오. 아무래도 마지막 말씀을 하실 것 같소.”
이선은 황급히 아소당으로 들어갔다. 대원군은 마지막 기력을 쏟아부은 듯,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황상이 오셨는데도 일어서지 못하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닙니다. 부디 편히 누워 계십시오.”
“황상의 은혜로 상황, 내 아드님과 마지막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아, 이 얼마 만인지. 대원군과 임금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로서 하는 대화였습니다. 이제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두 분이 화해하실 수 있어서 소손도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두 분이 대원군과 임금이 아닌 부자로 대화를 나눈 것처럼, 소손 역시 손자로 대해 주십시오.”
“알겠다, 그리하도록 하마.”
대원군은 문득 아소당(我笑堂)의 현판 휘호(揮毫)를 가리켰다.
“이곳은 애초에 내가 생의 마지막으로 선택한 장소이다. 묫자리도 봐 두었지. 그런데, 왜 이름이 아소당인 줄 아느냐?”
뜻만 놓고 보면, 스스로 웃는다는 장소였다.
“알려 주시옵소서.”
“내가 늙어 은퇴하여 아소당에 은거하면서 쓴 시이다.”
대원군은 느릿한 어조로 시를 읊었다.
吾負吾身任不輕 退公閒日酒樽傾
從知往事皆吾夢 惟愧餘年任世情
理屐山村俚談好 聞蟬溪柳古詩成
細論百歲安排地 我笑前生又此生.
나의 짐, 나의 몸 맡은 일 가볍지 않아, 나랏일에서 물러나 한가히 술잔만 기울이네.
지난 일 모두 꿈같이 허무하고, 여생을 세상 인정에 맡기니 부끄럽구나.
나막신 신고 산촌을 걸으니 백성들 얘기 듣기 좋고, 냇가 버들의 매미 소리 시흥을 돋우네.
백년의 내 삶을 자질구레하게 따져 보니, 전생이나 이승이나 다 헛된 웃음뿐이로구나.
대원군답지 않게 씁쓸한 자조와 허무가 담겨 있는 시였다.
이선은 시를 들으며 더욱 비애의 감정이 강해졌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좋은 사람은 되지 못했다. 권력을 잡은 후에 수많은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혔다. 특히, 병인년에 천주교도를 수없이 죽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하지만 결코 내가 원한 일은 아니었다. 부인이 천주교를 가까이했기에, 정적들이 공격할 여지를 막기 위함이었지.”
“그렇다면, 후회하십니까?”
순간, 대원군은 특유의 냉소를 흘렸다.
“후회? 전혀. 권좌에 앉은 자들은 언제든, 내키지 않더라도, 손에 억울한 자의 피도 묻힐 수 있어야 한다. 그 덕에 국론을 단결시켰고, 나라를 공고히 할 수 있었으며, 왕권을 바로 세웠다. 나라 전체를 볼 때는 이득이다. 권력자는 대(大)를 위해선 언제든 소(小)를 희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
희생되는 소의 입장에선 분노할 말이었으나, 대원군은 개의치 않았다.
“내가 택한 며느리를 죽음에 몰아넣은 것도, 그와 같은 논리다. 나는 후회 같은 건 하지 않는다.”
“…….”
“그러나, 너의 시대는 다르겠지. 너는 인민의 지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손에 무고한 자들의 피를 묻힐 필요도 없이, 이 할아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치적을 쌓으며 대업을 완수할 것이다.”
대원군은 냉소를 거두고, 손자를 전에 없이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네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꿈꾸었던 대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후계자인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스스로 웃으면서 지난날을 후회하다가 외롭게 죽고 말았을 것이다.”
실제, 역사의 대원군은 을미사변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경험하고, 끝내 아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쓸쓸하게 죽었다. 그가 중흥을 꿈꿨던 조선의 운명도 불과 12년 뒤에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선의 존재로 인해, 대원군은 생전에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경험하고 여한 없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지금껏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네가 있어 주어 고맙구나.”
대원군의 마지막 진심이었다. 순간, 이선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저야말로 고맙단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할아버님이 없었더라면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할아버님은 진정한 제 가족입니다. 할아버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 또한 이선의 진심이었다. 21세기의 기억이 있는 그에게, 과거는 낯선 세계였다. 19세기 조선을 살아가면서도,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이선에게 애정을 준 가족이었다. 이선은 이하응의 애정을 받으며 자신이 조선 왕가의 일원이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 사람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들조차도 정치적 이용물로 쓰는 대원군, 수천 명을 희생시키는 것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 철두철미한 패도 정치가 대원군이, 자신의 손자에게만은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넌 내 가족이다. 사랑하는 나의 맏손자고, 자랑스러운 나의 후계자고, 위대한 나의 황제다!”
대원군은 마지막 힘을 주어 이선의 황색 용포를 손으로 쥐었다. 마치 용을 잡으려는 것처럼.
“나는 경진(庚辰)년 생이고, 너는 무진(戊辰)년 생이다. 무진은 곧 황룡(黃龍)이니, 왕가에서 황제의 운명을 타고난 게지. 나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로 끝났으나, 너는 마침내 황룡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대원군의 육체는 대한제국 황성에 있으나, 정신은 이미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아! 천하가 네 앞에 펼쳐져 있다. 감히 누가 네 앞길을, 황룡이 날아가는 걸 막으랴? 너는 천하를 얻을 것이다. 반드시 그리될 것이다. 나는 저세상에서 기쁘게 지켜보겠다. 나의 손자, 나의 후계자, 나의 황제가, 나의 꿈을…….”
마지막 회광반조였다. 순간, 용포에 힘을 쥐었던 대원군의 손이 스르르 빠져나왔다.
“할아버님? 정신을 차리시옵소서, 할아버님!”
온기를 잃은 손의 차가움. 이선은 순간 섬뜩함과 깊은 슬픔을 느꼈다.
“국태공이 혼절하시었다! 태의는 당장 안으로 들어오라!”
왕실 주치의 독일인 분쉬 박사, 제중원 의학교장 미국인 에비슨, 전 군의부장 서재필 등, 대한제국 최고의 의료진이 부랴부랴 들어왔다.
대원군의 용태를 살피던 의료진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서재필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국태공께옵서는…….”
“어찌 되셨는가?”
“조금 전, 훙서하시었습니다.”
이선은 주룩 눈물을 흘리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살아 숨 쉬던 할아버지를 향해 절을 올렸다.
“국태공 저하!”
곡소리가 이어졌다. 밖에 있던 태상황 이재면, 이준용과 일족들도 뒤따라 들어왔다. 모두 하나같이 땅을 치며 곡을 했다.
1898년, 광무 2년 2월 22일. 무술년 2월 2일 오후 10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아소당에서 훙서(薨逝)했다. 향년 79세.
“대원군께서 음력 2월 2일 술시(戌時)에 훙서하셨으니, 애통한 마음을 어떻게 비유하겠는가? 국태공은 실로 우리 국가의 큰 어른이시니, 상사(喪事)를 행하는 데 있어 소홀함이 없게 하라.”
황제의 명에 장례원경(掌禮院卿) 김영목(金永穆)이 아뢰었다.
“흥선대원군의 상사와 관련하여 4일 동안 정조시(停朝市) 하도록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조시란 애도를 표하기 위해 관청은 공무를 보지 않고, 시장은 철시하는 것이었다.
“그리하라. 짐은 온 나라의 백성과 함께 슬픔을 이겨 내고자 한다.”
사흘째 되는 날, 이선은 성복(成服)일을 맞이하여 빈전이 설치된 운현궁에서 망곡(望哭)했다. 태상황과 황족들, 문무백관도 뒤따라 망곡했다.
장례는 7일장으로 치러졌다. 대원군과 부대부인의 유해는 임시로 아소당 뒤뜰에 매장되었다가, 왕의 예로써 다시 장례를 치러 이장할 예정이었다.
이선의 뜻을 받들어, 내각은 흥선대원군의 장례를 대한제국 첫 국장(國葬)으로 삼아 만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히 치르기로 결의했다.
“우리 왕조를 지킨 흥선대원군의 위대한 공은 열성조의 업적에 비견될 만하다. 후손된 이로서 마땅히 추숭(追崇)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왕으로 추존하고자 하니, 내각은 대행왕(大行王)의 시호를 의정하라.”
이선은 법적으로 문조의 손자로서 그 법통을 계승했으므로, 대원군에게 묘호까지 올리기에는 문제의 소지가 있었지만, 시호라면 문제 될 게 없었다.
황제의 명에 총리대신 김홍집이 각의를 주최하여 시호를 의정하여 상주했다.
“대행왕의 시호를 흥선헌의(興宣獻懿) 네 글자로 받들고자 합니다. 시법(諡法)에 따르면, 훌륭한 계책을 크게 떨침을 흥(興)이라 하고, 정사와 교화를 널리 폄을 선(宣)이라고 합니다. 총명하고 예지가 있음을 헌(獻)이라고 하며, 성스럽고 신성하며 훌륭하고 아름다움을 의(懿)라고 합니다.”
“실로 대행왕의 업적에 부족함이 없다. 아뢴 대로 하라.”
이로써 이하응은 살아서는 대원군이었으나, 죽어서는 왕이 되어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었다. 자연히 여흥부대부인 민씨도 왕비로 추숭되어, 순목대원비(純穆大院妃)가 되었다.
“흥선헌의대원왕과 순목대원비의 국장은 길일을 정밀히 택해, 음력 3월 26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하도록 하라. 국장의 전례는 선대왕의 예법을 따르도록 하되, 새로운 예를 첨가하라.”
국장 사흘 전, 운현궁에서 진헌(進獻)을 거행했다. 이선은 직접 제문을 써 대원왕의 업적을 기렸다.
“태상황께서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대원왕은 황제의 생부로서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보필했던 일을 떠맡았다. 구족(九族)을 돈목하게 하고 사색당파를 평등하게 기용하였으며, 언론의 통로를 열며 침체된 사람들을 발탁하고 세도가들을 물리쳤다. 오래 묵은 적폐를 청산하여 백성의 삶을 윤택이 하고, 침략자를 격퇴하여 국권을 수호하였다. …… 아, 후손된 이로서 대원왕의 공적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선은 대원왕과 대원비의 영좌(靈座) 앞에 제문을 낭독하며 눈물을 흘렸다. 차마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황족과 신료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광무 2년 4월 16일, 음력 3월 26일.
대한제국 최초의 국장이 거행되었다.
대원왕 부부의 거대한 상여와 더불어 수많은 깃발이 황성 하늘을 수놓았다.
황성부 서강방 공덕리를 떠난 대원왕의 유해는, 경기도 고양군 대덕리 흥원(興園)에 매장될 예정이었다.
상복 차림의 상주 이재면을 필두로, 이준용과 황실 인사들이 뒤를 따랐다.
황제 또한 상복 차림으로 상여 행렬과 함께했다.
제복 차림의 황실 호위대가 행렬의 선두에 서고, 뒤이어 군악대가 슬픈 장송곡을 연주하며 행진했다. 근위사단 기병대가 행렬을 호위하고, 포병대는 조포(弔砲)를 쏴서 조의를 표했다.
전통 복장 차림의 상여꾼은 상여 소리를 비가(悲歌)로 부르고, 곡궁인(哭宮人)들은 너울을 쓰고 고개를 숙인 채 행진했다.
현재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보여 주듯, 전통과 근대가 뒤섞인 국장이었다.
국장을 지켜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황성부민의 대부분이 운집한 듯, 인파는 끝도 없이 많았다. 길 양편으로는 군중이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전통 방식으로 백립(白笠)과 흰 상복을 입은 중장년과 신식으로 검은색 양복을 입은 청년들이 보였다. 흰 소복에 장옷을 입은 여성들도 행렬에 있었다.
“운현궁 대감!”
“대원위 합하!”
“국태공 저하!”
“대원왕 전하!”
상여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곡을 하거나 고개를 숙이며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예를 표했다.
사람들이 부르는 고인의 호칭이 다양한 만큼, 그들의 기억하는 고인의 생전 모습도 다양했다.
왕족으로 태어나 천민들과 어울리는 걸 꺼리지 않았던 왕실의 파락호, 오랜 준비 끝에 아들을 왕에 올려 집권에 성공한 책략가, 10년 섭정으로 적폐를 청산했던 개혁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수호자, 아들과 다투고 며느리를 제거한 비정한 권력자, 손자를 아끼고 사랑한 할아버지, 백성들의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은 대원위, 후계자가 황제의 위까지 오른 걸 본 국태공, 죽어서 왕이 된 대원왕.
19세기 조선을 살아가며 온갖 입체적인 면모를 보인 문제적 인간, 흥선헌의대원왕 이하응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