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48
– 248화에 계속 –
248화 제국익문사
흥선헌의대원왕 이하응의 훙서.
이선과 대한제국에 있어 비통한 고별이었으나, 동시에 옛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존재 자체만으로 보수파를 단결시켰던 대원군의 퇴장으로, 보수파는 구심점을 상실했다.
갑신경장 이후 정부는 급진 변법개화파, 온건 동도서기파, 대원군 계열 보수파의 연립 정권이었다. 그나마도 대원군의 은퇴 이후, 이선이 전권을 잡게 되면서 개화파 쪽으로 무게 추가 크게 쏠려 있는 상황이었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보수파의 세력 자체가 퇴조하고 있었다. 이들은 위정척사파처럼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고 향촌 깊숙이 들어가든가,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대원군 사후 운현궁의 궁주(宮主)는 완흥군(完興君)으로 봉해진 황제의 백부, 이재면이었다. 하지만 이재면은 능력이나 야심, 모든 면에서 대원군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실질적으로 운현궁을 계승하게 된 건, 대원군이 능력이나 기질 면에서 자신을 닮았다고 여겨 아꼈던 손자 이준용이었다.
영선군(永宣君)으로 봉해진 29세의 이준용은 야심만만한 청년이었다. 젊기도 하거니와 해외 유학 경험도 있기에 근대화의 물결을 받아들이면서도, 통치는 황제와 황실이 주도해야 한다는 대원군의 정치관을 계승했다.
대원군은 이준용에게 운현궁은 황제를 향해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치라 유언을 내렸고, 이준용은 그 뜻을 받아들여 충성을 맹세했다.
“황제 폐하,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신, 이준용과 운현궁은 할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황상과 황실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고맙네, 영선군. 경은 대원왕의 손자이자, 짐의 사촌으로서 특별한 책무를 갖고 있다는 걸 잊지 말게.”
“예, 황권을 높이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대원군은 이선을 위해 자신이 운용했던 정보 조직을 그대로 넘겨주었다. 이른바 ‘천하장안’, 즉 천희연(千喜然)·하정일(河靖一)·장순규(張淳奎)·안필주(安弼周)으로 대표되는 조직이었다.
천하장안은 대원군이 정권을 잡기 전부터 활동해 40년 역사를 자랑했다. 이들은 국내 정보 탐지, 민심 파악, 여론 조작, 정치 공작 등 대원군의 정권을 뒷받침했다.
천희연 등은 이미 늙어 은퇴하거나 세상을 떠났지만, 대원군은 그 후속 세대를 양성하여 운현궁의 정보 조직으로 삼았다.
“신등(臣等)은 운현궁의 뜻을 받들어, 황제 폐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음. 그대들은 지금껏 운현궁을 위해 활동했으나, 대원왕의 유지에 따라 짐과 국가를 위해 활동해야 할 것이다.”
“예! 견마지로(犬馬之勞)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선은 이들을 선별하여 능력이 확인된 인물들을 황제 직속의 정보기관에 합류시키도록 했다.
광무 2년 현재, 대한제국의 공식 정보 조직은 정부 산하인 경무청 경위국(警衛局), 외무부 외사과(外事課), 군부 산하인 원수부 정보국 등이었다.
경위국은 국내 정보를, 외사과는 해외 정보를, 정보국은 군사 정보를 담당하고 있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역할을 다했지만, 지금껏 일원화된 정보기관이 없었다.
이선은 제국 선포를 전후하여 황제 직속의 정보기관을 구상했다.
이선이 가진 역사적 기억이라는 특수한 정보력에 따라 움직이려면, 정부 산하의 기관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자신과 최측근이 운용하는 기관이 필요했다.
“고균, 짐이 경을 처음 만난 게 임오년이던가?”
이선의 물음에 김옥균이 지난 일을 회고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임오군란 직후입니다. 신이 처음 뵙는 그날부터, 충성을 다짐하게 됐지요.”
“하하, 기억나네. 개화당 비밀 조직을 들켜 얼굴이 창백해지던 고균의 모습이 말이야.”
“아, 그때만 해도 모골송연했지요. 그토록 보안을 잘 유지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탄로가 났는가 하고. 과연, 운현궁의 정보력이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대원군이 아끼는 손자에게 들켰으니, 끝장났다고 생각했죠.”
“물론, 그런 일은 없었지만.”
“제가 섬겨야 할 주군을 알아본 덕이지요, 하하.”
그 이후, 이선이 개화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김옥균은 이선의 충실한 참모였다.
“경은 개화당과 충의계를 은밀히 이끌어 본 경험이 있지. 나는 경의 능력과 충심을 믿네. 내가 중요한 일을 한 가지 맡겨 볼까 하는데.”
이선의 말에 김옥균은 웃음을 거두고 답했다.
“무엇이든 하명해 주십시오.”
“황제 직속으로 새로운 정보기관을 창립할 생각이네.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고, 대한과 세계에서 짐의 눈과 귀가 되어줄 사람들이 필요하네. 물론 극비여야 하지. 표면적으로는 통신사처럼 운영할 것이네.”
김옥균은 순간 긴장하여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치, 이선과 처음 만날 때 같았다.
“짐은 경에게 통신사의 운영자를 맡기고 싶네. 해 볼 수 있겠나?”
이선은 황제 직속 정보기관의 운영자로 김옥균이 적격이라 판단했다. 김옥균은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효율적으로 이끌어 본 경험이 있고, 자신에 대한 충심도 믿을 만했다.
“폐하께서 신을 이토록 믿어 주시니, 어찌 목숨을 다해 충성하지 않겠습니까? 성심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김옥균은 이선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좋네. 그럼, 이제부터는 짐과 경만 알아야 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야. 경의 가장 가까운 동지들, 개화당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네. 비밀 결사를 이끌어 본 경이라면 그 의미를 잘 알고 있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죽는 날까지 무덤 속으로 비밀을 가져가겠습니다.”
“하하, 벌써 죽음을 논하기엔 이르지. 그렇다면 이제 구체적인 사안을 논해 보세.”
광무 원년(1897) 6월, 이선은 내무대신 김옥균에게 비공식적으로 정보기관의 조직을 명했다.
김옥균은 각 기관에서 능력과 충심이 입증된 이들을 한 사람씩 접촉해 포섭했다.
경찰이나 군부, 외무부 소속의 인물들은 자연스럽게 퇴직해서 신설 ‘통신사’에 합류했다.
개화당 비밀 조직인 충의계와 운현궁 비밀 조직인 천하장안에서도 선별하여 뽑았다.
외국어 능력이 뛰어난 관립 외국어학교 졸업생은 통신사의 ‘통신원’으로 활용하기에 적격이었다. 이들 중 첩보원의 자질이 있는 이들을 뽑아 훈련하는 것도 김옥균의 몫이었다.
최종 결정은 물론 이선의 몫이었다. 이선은 김옥균의 보고서를 면밀히 살피며 요원들을 최종 선발하여 임무를 할당했다.
광무 2년 3월. 대한제국 황성에서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가 출범했다.
제국익문사는 표면적으로 국립 통신사였다. 영국의 로이터(Reuter), 프랑스의 AFP, 미국의 AP 통신처럼 국내외의 뉴스를 신문사에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통신사는 국내외의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보하고, 해외에 통신원을 파견할 수 있기에 정보기관이 위장하기에 적합했다.
“작금의 시대는 정보의 시대입니다. 제국익문사는 서양의 통신사를 모범으로 삼아, 대한국에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국내외의 소식을 공급하고자 합니다.”
익문사의 초대 ‘사장’을 맡은 김옥균은 설립 취지를 그렇게 밝혔다.
사람들은 새로운 통신사의 출현을 반겼다.
익문사는 서양 통신사와도 접촉했다. 로이터와 계약을 맺어 세계의 외신을 공급받고 동양의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동양의 신흥 통신사였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김옥균이 참고한 제국익문사의 모델은 러시아 내무부 공안 질서 수호국, 즉 오흐라나였다. 러시아 공사를 지낸 바 있는 김옥균은 황제의 적을 분쇄하는 오흐라나의 활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오흐라나의 주된 역할은 반정부 세력을 분쇄하는 걸세. 대한국은 혁명의 위협이 가시적으로 보이는 러시아와는 경우가 다르네. 대한국의 가장 큰 위협은 외세야. 그리고 현시점에서는 일본이라고 할 수 있겠지. 대외 첩보와 방첩이 주된 사무가 되어야 하네.”
“예, 알겠습니다.”
이선은 익문사의 목적이 국내 정치 경찰의 역할이 아닌 대외 첩보와 방첩이 우선이라는 걸 밝혔다. 현시점에서 정치경찰의 역할은 경무청 경위국으로도 충분했다.
김옥균은 제국익문사의 규정집인 비보장정을 작성해 이선에게 바치고, 통신원들에게 열람하여 숙지시켰다.
제국익문사 비보장정(帝國益聞社秘報章程)
제1조. 본사는 제국익문사라 칭하여 사무소를 황성 중앙에 둔다.
제2조. 본사는 매일 비보(秘報)를 작성하여 오로지 성총(聖聰)을 보좌하는 것을 주의로 한다.
제3조. 본사가 비밀히 탐지하는 사항은 4종으로 나누어 일이 아직 드러나지 않거나 이미 드러난 것을 물론이고, 비밀로 조사하되 이미 드러난 일은 근저를 쫓아 탐득하고 드러나지 않은 일은 시작과 끝을 미리 정리하여 황제께 보고한다.
제4조. 4종의 관할구역은 황성, 내지 13도, 개항장, 외국(청국,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
제5조. 황성에서 비밀히 탐지할 사항을 세분한다.
제6조. 내지에서 비밀히 탐지할 사항을 세분한다.
제7조. 항구에서 비밀히 탐지할 사항을 세분한다.
제8조. 외국에서 비밀히 탐지할 사항을 세분한다.
제9조. 본사의 비보를 황제께 보고할 때는 글을 쓰지 말고, 화학 비사법(秘寫法)을 정서해서 비밀히 어람하심을 편의하게 한다.
제10조. 비보를 진정할 때는 인장을 봉투에 찍어 표준한다.
……
제 15조. 통신원은 5종으로 나누어 통신 사무에 복종케 하여 그 비치와 정수를 아래와 같이 하되 상황에 따라 그 수를 증감한다.
상임통신원 16인 : 본사 통신 업무 3인, 내지 13도 및 수복영토 관할 13인. 지방 내사(內査) 담당.
보통통신원 15인 : 황성 각 지역 관할. 황실, 정부, 군부, 정치결사, 종교, 외국인 클럽 등. 중앙 내사 담당.
특별통신원 21인 : 각국 공사관 및 외국인 거주지. 전국 8곳의 개항장. 대외 방첩 담당.
외국통신원 25인 : 청국 북경, 천진, 상해. 일본 도쿄, 오사카, 나가사키.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블라디보스토크, 여순. 영국 런던, 홍콩. 프랑스 파리. 미국 워싱턴. 지부별로 1~3인. 대외 첩보 담당.
임시통신원 : 상황에 따라 증원.
……
제 24조. 본사를 설립하고 충성을 다하여 성심에 보답하기로 깊이 맹세한다.
극비인 비보장정은 익문사의 활동 방향을 담았다.
황제에게 보고할 때는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무늬에 성총보좌 네 글자가 적힌 봉투에 담는데, 내용은 오직 황제만이 볼 수 있었다.
일반 글씨가 아니라 화학 비사법으로 특별히 제작된, 특수 화약 약품을 써야 쓰고 볼 수 있는 글로 비밀을 엄수해야 했다.
책임자인 독리 1인, 분야별로 보좌하는 사무(司務)·사기(司記)·사신(司信) 3인, 정규 통신원 77인 등. 총 81인이 제국익문사의 창립 인원이었다.
황성, 내지, 개항장, 외국은 항목별로 세세하게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예컨대 외국 담당인 제8조에서는, 각국의 대한(對韓) 정책은 물론이고 회의 법안 의결 상황, 정치적 동향, 각국의 협상과 동맹, 육·해군의 동태, 군함의 이동을 모두 파악하여 보고해야 했다.
모든 첩보 항목을 세부화하고 철저한 과학적 방법에 따라 기밀을 지키는, 근대적 정보기관의 탄생이라 할 수 있었다.
“음, 훌륭하네. 이렇게만 운영된다면 국내외의 정보를 획득하는 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네.”
이선이 만족감을 표명하자 김옥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간 통신원들을 철저히 훈련했고, 기대한 대로 움직여 줄 겁니다.”
“좋아. 특히 대외 정보 습득에 만전을 기하도록.”
“청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서양 각국까지 정보를 파악하시려는 폐하의 의지가 대단하십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우방도, 완전한 적도 없거든. 언제든 미리 대비해 두는 게 좋네.”
“옳으신 말씀입니다.”
김옥균은 황제의 철두철미함에 새삼 감탄했다. 이선이 보유한 방대한 정보력의 근원이 짐작이 간다 하고 싶을 정도로, 정보 확보에 쏟는 열정이 대단했다.
이선이 대외 정보 습득에 특별히 관심을 두고 제국익문사를 설립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때, 세계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이 시기 이선이 특별히 관심을 두고 바라보는 지역은 청국과 일본, 스페인령 필리핀이었다.
“무지한 중국 야만인들이 우리 독일 선교사를 살해했다! 저들에게 문명의 힘을 보여 주어라!”
1897년 11월, 독일 선교사 살해를 명분으로 삼아 빌헬름 2세는 산동반도 교주만과 청도를 점령을 명령했다.
“이번 기회에 오랫동안 고대했던, 극동의 부동항을 확보한다.”
이어서 1897년 12월에는 러시아가 요동반도 대련만과 여순을 점령하여 요새를 구축할 의사를 분명히 했다.
“독일과 러시아가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고 있소.”
동시에 이뤄진 독일과 러시아의 공격적인 행보에, 영국은 두 나라의 견제를 위해 산동반도 위해위 점령을 논의했다.
“이대로 가다간 망국이다. 조속히 변법을 이뤄 내지 못한다면…….”
“저 오랑캐들의 욕심이 한도 끝도 없구나. 중국에서 몰아내야 한다!”
청국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국의 분할에 당황했고, 광서제와 개혁적 관료들은 하루라도 빨리 변법자강을 이뤄 내면 안 된다는 긴박감에 시달렸다. 반대로, 서태후와 수구파들은 서양 세력과 결별하고 일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국에는 개혁과 반동의 본격적인 정치 투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동양 평화를 위해 요동반도를 반환하라더니, 인제 와서 러시아가 점령한다고?”
“어차피, 일본은 섬나라. 대륙보다는 해양으로 나아가야 하니, 대륙의 일에 일희일비하지 마시오.”
일본은 러시아의 여순 점령에 격분했다. 특히, 육군의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현재 정부를 이끄는 총리 마쓰가타 마사요시와 사쓰마 파벌, 특히 해군은 대륙에 관심을 끄고, 북수남진론을 기반으로 대만 경영에 매진했다. 이들의 관심사는 북방 요동보다 대만의 남방, 바다 건너 필리핀에 있었다.
스페인 제국에게서 독립을 원하는 필리핀 독립운동 세력은 일본 해군 정보부와 은밀히 접촉하고 있었다.
“미국이 대양으로 진출하는 것은 명백한 운명이다. 이제 미합중국의 힘을 보여 줄 때가 왔다.”
지금껏 먼로주의에 입각해 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던 미국도, 스페인과의 갈등이 시작된 1898년을 기점으로 태평양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려고 했다.
1898년, 무술년, 광무 2년.
동양, 아니 세계의 운명이 격랑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