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50
– 250화에 계속 –
250화 만민공동회
1897년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로 하여, 한국에는 정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독립협회, 건양협회, 광무협회, 헌정연구회, 협성회, 자강회 등 황성을 중심으로 이런 저런 회(會)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회에 모여 시국을 논의하고, 새로운 제국의 미래에 대해 토론했다.
이런 회의 활성화는 한국 정치 문화의 일신을 의미했다. 기존까지 정치는 군주와 대신, 더 나아가 봐야 사대부가 논의하는 사항이었다. 조선 백성들에게 정치란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국민 교육과 국민 개병의 시행, 정부와 국민이 일심단결하여 거둔 ‘독립 전쟁’의 승리는 새로 형성된 ‘한국인’의 국민 의식을 크게 함양시켰다.
자신들이 독립 전쟁 승리와 대한제국 선포에 기여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더 이상 과거의 백성이 아니었다.
이런 ‘회’들 중에서 민중에게 가장 인기를 얻고 있는 건 단연 독립협회(獨立協會)였다.
1895년 독립 전쟁 승전 이후 서재필, 서광범,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안경수 등 미국 유학파와 외교관 체류 경험자들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미국의 민주 공화정과 정치 문화를 높이 평가했고, 자주독립 이후 가장 시급한 건 국민을 계몽하고 정치의식을 함양시키는 일이라 생각했다.
독립협회 지도부는 대개 개화당 소장파들이었다. 이들은 개화당과 같은 길을 걷고 있었지만, 승전 이후 국가 방향성을 놓고 개화당 주류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독립협회는 헌법 제정, 의회 설립, 정당 정치 확립 등 서구식 자유주의 정치를 목표로 한 단체였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문 건설을 주도했다. 독립신문은 국한문 혼용체를 쓰는 다른 신문들과 달리 순 한글 신문으로, 쉬운 글을 써 학식이 낮은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했다.
“자, 오늘 신문을 읽어 봅시다. 오늘의 세계는…….”
국민 교육 이후에도 여전히 문해율은 낮았으나, 정치에 관한 열의는 문맹자도 함께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신문을 낭독해 주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신문이 나오면 지역별로 사람들이 모여 낭독회가 열리는 건 이제 익숙한 풍경이었다.
독립협회는 매주 토요일 오후마다 협회 본부에 모여 토론을 개최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수십 명으로 시작된 토론회는 점차 사람이 불어나 수백 명을 넘겼으며, 천여 명이 관람하는 대형 토론회가 개최되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우리 대한에 가장 필요한 것이라 무엇이라 생각하오?”
“자주와 독립이오.”
“자주독립을 위해서라면 우리 대한인민은 무엇을 해야 하오?”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대한인민이라면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것이오.”
“그렇소. 충군애국이 대한인민의 도리요. 애국은 나라에 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오. 우리 대한인민의 충군애국이 널리 전해지도록,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집시다.”
“옳소!”
“대한국 만세!”
1897년 초, 구미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유길준, 서재필, 윤치호 등이 헌정 조사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들은 ‘벨 에포크’의 전성기를 맞이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번영을 보며 자유주의 정치에 관한 더욱 큰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역시 우리는 장기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선진국을 본받아야 하오. 러시아와 같은 낡은 전제 체제로는 뒤떨어질 따름이오.”
“완화군 대감, 아니 새로 즉위하신 성상께서는 이 나라의 누구보다 진보적이고 영명한 분이시니, 입헌 대의 정치(立憲代議政治)의 큰 뜻을 이해해 주실 겁니다.”
“하지만 대원군이 용인할 리가 없을 터인데.”
“무엇을 염려하시오? 대원군은 이미 지는 별이요, 성상은 뜨는 별이오이다.”
“그렇소.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헌법 제정과 의회 설립 운동을 시작합시다.”
광무 원년, 독립협회는 헌법 제정과 의회 설립 운동을 시작했다.
이는 이선이 승전 이후 국가 구상과 즉위 교서를 통해 약속한 바였다. 이선의 구상대로라면 광무 2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4년에 의회를 개설할 예정이었다.
다만 헌법이 어떤 방향으로 제정되느냐, 의회에는 어떤 권한이 주어지느냐, 투표권은 어디까지이냐, 정당에는 어떤 대표성이 있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독립협회는 황성 민중의 지지를 내세워, 본격적인 정치 운동을 개시했다.
1898년 2월, 대원군의 죽음은 명백히 구시대의 퇴조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독립협회는 드디어 새로운 시대로 가는 길이 열렸다고 생각했다.
독립협회는 대원군의 국상을 애도하고 황제에게 위로를 보낸 후, 지도부 이하 수천 명의 연명으로 장문의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했다.
“독립협회의 목적은 자주독립 국가로서 주권을 지키며, 군주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등은 대한국의 앞날을 오랫동안 논의하고 염려해온바, 감히 성상께 아룁니다…….”
건백서는 천부 인권론과 사회 계약론에 근거해 국민 자유권과 국민 평등권, 소극적이나마 국민 주권론을 제기했다. 헌법 제정, 법 앞에 모든 국민의 평등, 정치 결사체로서 정당 설립, 투표권 부여, 선거 실행, 의회 개설 등 서구를 모범으로 한 입헌 대의 정치의 확립을 요청했다.
기존의 조선 정치를 보면 놀라울 정도로 급진적인 내용의 건백서였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건백서를 읽고 깜짝 놀랐다.
“개화당 연소배(年少輩)들이 또 분수를 모르고 나서는구나. 성상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나 됐다고, 결국 왕권을 제약하자는 이런 내용의 건백서를 올리는가? 도대체 김옥균은 내무대신이 되어서 이런 자들도 단속 안 하고 뭐 하고 있는 건지.”
어찌 됐건 건백서도 황제에게 바치는 상소인지라, 김홍집은 건백서를 전달했다.
“폐하, 독립협회를 자처하는 자들이 천지 분간을 모르고 나서고 있습니다. 하필, 국상 기간에 이런 건백서라니요. 신이 따끔히 훈계하겠습니다.”
이선은 건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어 본 후, 뜻밖의 대답을 했다.
“이들의 주장이 실로 급진적이기는 하나, 이 또한 충성하고 애국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오. 아무리 광망(狂妄)한 말일지라도, 언로를 여는 것은 국초 이래 오랜 관행이었소. 하물며 민권이 상승하고 있는 작금과 같은 시대야 오죽하겠소? 일단 이들의 건백서는 가납(嘉納)하고, 답은 국상이 끝난 후에 천천히 하겠다고 하시오.”
황제의 관대한 답변에, 김홍집은 고개를 조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독립협회는 황제의 반응에 환호성을 보냈다.
“과연, 우리 황제께서는 영명하시다!”
“암, 황제께서 계셨기에 경장도 승전도 독립도 가능했지. 이제 우리를 헌정과 대의 정치로도 인도하실 것이오.”
“황제께선 잠저(潛邸) 시절부터 그 누구보다 진보적이셨으니, 가슴 속에 품은 성지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오. 다만 대원군과 보수파들, 원로대신들을 고려해 때를 가늠하시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제 대원군께서는 돌아가셨으니, 시대에 뒤떨어진 노인들을 더 배려할 건 없소.”
“그렇다면 우리가 황상의 힘이 되어드립시다. 대한인민의 힘이 하나로 모이면, 황상께서도 헌정을 시행하기 더욱 수월해질 것이오.”
독립협회는 황제의 뜻을 지레짐작하고, 민중 대회를 준비했다.
그러던 차에, 언론에 러시아 공사가 절영도 조차를 요구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독립신문은 이를 대서특필했고, 신문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들은 이들은 분개했다.
“러시아가 대한의 영토를 노리다니?”
“더욱이 우리 황제께서는 정중히 거절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러시아 공사는 집요하게 국상 중인 황제 폐하를 찾아뵈어 부득불 답을 강요했다는 것이오.”
“일개 공사가 우리 황제께 어찌 이토록 무례하단 말인가!”
“동지들, 이는 국가의 치욕이오. 신하 된 자로서 어찌 군주에 관한 불경을 참을 수 있겠으며, 인민 된 자로서 어찌 국가의 치욕을 참을 수 있겠소?”
“참을 수 없는 일이지요!”
“황제 폐하께서는 조종의 영토를 한 뼘도 외국에 넘길 수 없다 하시었소. 그렇다면 우리가 힘이 되어 드려야 하지 않겠소?”
“옳소! 거리로 나갑시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갑시다!”
“인민의 힘을 보여 줍시다!”
1898년 3월 10일.
본래 이날은 헌법 제정과 의회 설립을 촉구하기 위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종로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공사의 절영도 조차 요구가 알려지면서, 영토 보전과 국권 수호를 결의하는 자리가 되었다.
독립협회 회원들뿐만 아니라, 분노한 황성 시민들도 모여들었다. 상인은 상점을 닫고, 노동자는 생계를 접어 두고 참석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모여든 이가 1만을 훌쩍 넘겼다. 구름 같은 인파였다. 인구 30만의 황성에서, 이는 엄청난 숫자였다.
정치적 집회를 위해 일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단일 장소에 이렇게 모여든 건, 조선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러분! 대한국은 세계만방에 공표된바, 자랑스러운 자주독립국이외다. 그런데 어찌하여 러시아는 부당한 요구를 한단 말이오? 러시아는 분명 대한국의 가장 좋은 우방이었거늘, 이렇게 대하려고 그동안 속여 왔단 말인가?”
“황제 폐하께서 이리 말씀하셨다 하오. 조종의 영토는 단 한 뼘도 외세에 내줄 수 없다!”
“옳으신 말씀!”
“그런데도 공사는 물러나지 않으며, 우리 황제 폐하께 불경을 저질렀다 하니, 어찌 참을 수가 있겠소!”
“절대 참을 수 없는 일이외다!”
“우리 대한인민의 결의를 저들에게 보여 줍시다!”
민중대회에서 시민들은 쌀장수 현덕호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자주독립과 국권수호를 천명했다.
이날 집회에서는 현공렴, 홍정후, 조한우, 문경호 등이 격정적으로 연설했는데, 이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연사들의 연설이 이어진 후, 민중은 평화적으로 해산했다. 이들은 각국 공사관이 모여 있는 정동 방향을 향해 구호를 외치는 걸 잊지 않았다.
“충군애국!”
“국권수호!”
“충군애국!”
“국권수호!”
만민공동회의 진행을 러시아 공사는 물론, 다수의 외국 공사들과 외국인들도 지켜보았다.
절영도 조차 요구 소식을 듣고 대한제국 외무부를 찾아 긴급히 저지하려던 영국과 일본 공사는, 만민공동회의 진행을 보고 본국의 훈령을 요청한 뒤 잠시 대응을 기다렸다.
그날 밤, 대한제국 정부는 긴급 각의를 개최해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거부했다.
“대한국 황제 폐하의 정부는 인민의 충성스러운 뜻을 깊이 가납하여, 러시아의 요청을 정중히 거부하는 바이다.”
밤에 나온 발표에, 시페이에르는 깜짝 놀랐다. 급히 입궐하여 황제를 알현하길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병침(丙枕)하셨습니다. 내일 다시 오시지요.”
“아니, 폐하께서는 늘 새벽 늦게 취침하시는 걸로 압니다. 취침하시기에는 이른 시간 아닙니까? 알현을 허용해 주십시오.”
이선이 불면증이 있고, 새벽 늦게까지 업무를 보는 건 유명했다.
“공사, 이 무슨 불경입니까? 황상의 숙면을 방해하지 말고 이만 물러가십시오.”
시종원경은 단호하게 공사를 물리쳤다. 시페이에르는 하릴 없이 물러가야 했다.
물론, 이선은 아직 잠들지 않고 있었다. 공사가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독립협회는 승리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들은 결과에 만족하고, 이제 다시 본래 목적인 헌법 제정 운동을 논의했다.
그런데, 3월 12일 개최된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서울 남촌(南村)에 거주하는 평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졌다.
삼삼오오 모여든 시민들의 수는, 3만에 육박했다. 황성 시민의 10분의 1이었다. 사회 풍토상 정치에 참여하는 게 성년 남성인 점을 감안하면, 이들 대부분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포 여러분! 황제 폐하께서는 우리 인민의 뜻을 깊이 가납하시어,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한의 영토를 노리는 이들이 러시아뿐이랍니까?”
“아니오!”
“그렇습니다! 일본도 있습니다. 일본이 월미도 석탄 저장고를 조차한 것이 러시아의 요구에 빌미가 된 것입니다. 이들이 5년 계약이 끝나자 다시 재계약을 요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이렇게 우리 대한인민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그 어떤 외세도 우리 영토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옳소!”
자발적으로 등단한 연사들이 격정적인 연설을 쏟아 냈다.
“모든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견고히 합시다!”
“옳소!”
“우리 대한인민이 얼마나 군주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지 세계를 향해 보여 줍시다!”
“옳소!”
“대한국 만세!”
연사들의 격정적인 연설이 쏟아질 때마다, 민중은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다. 3만의 군중은 마치 하나로 뭉친 것과 같았고, 전에 없는 정치의식이 싹텄다.
2차 만민공동회에는 더 많은 외교관과 외국인들이 관전했다. 그들은 한국 민중의 정치적 성장에 모두 큰 충격을 받고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마치 런던 하이드 파크나 파리 뤽상부르의 정치 집회를 보는 것 같군.”
“언제부터 저들이 저토록 정치적으로 성숙해졌단 말이오?”
“분명 엊그제까지는 정치적 의견이라곤 없는 백성들이었지. 한국인들은 참으로 빠른 시기에 많은 걸 배우는군.”
여론이 일치단결하자, 정부는 국민 여론을 수렴하여 천명했다.
“대한국 황제 폐하의 정부는 앞으로 어떠한 외국이라 할지라도, 군사적 요구와 관련된 영토 조차는 일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결국, 러시아는 두 차례의 만민공동회의 결의와 각국의 반응을 고려하여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한제국 정부와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 절영도 석탄 저장고 설치 제안은 공식 철회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외교적 결례 역시 정중히 사죄하는 바이다.”
러시아 정부는 시페이에르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선은 은밀히 주 러시아 공사관을 통해 시페이에르의 교체를 요청했고, 니콜라이 2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후임 공사는 베베르와 같이 이선과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연해주 국경 위원 마튜닌이었다.
정부는 러시아에 이어 일본에도 월미도 석탄 저장고 계약 연장을 거부하고 조속히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대한제국이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한 이상, 일본 역시 명분상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월미도 조차지를 포기하고, 조기 반환하기로 했다.
이로써 대한제국 영토 내의 모든 외국 군사 기지가 사라지고, 앞으로도 대한제국은 단호하게 거부할 터였다.
이는 분명 만민공동회가, 대한제국의 민중이 쟁취해낸 승리였다.
이 승리는 옛 조선의 수동적 ‘신민’에서 새 한국의 능동적 ‘국민’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이었고, 앞으로 더욱 정치의식을 함양한 ‘시민’ 계급의 형성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