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51
– 251화에 계속 –
251화 백가쟁명
만민공동회의 성공적인 결과는, 대한제국의 정치 구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동안 ‘민(民)’이란 ‘관(官)’의 지배와 통제를 받는 존재였다. 백성을 기르는 관리란 뜻의 목민관(牧民官)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백성은 통치자가 온정주의적 입장에서 선정을 베풀고 이끌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인민은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민교육과 국민개병으로 동질 된 국민의식을 갖게 되고, 정부와 국민이 단합되어 이끈 독립 전쟁의 승리는 주권의식을 갖게 했다. 언론의 발달과 각종 ‘회(會)’의 참여, 활발해진 토론 문화로 주체적 정치의식이 함양되었다. 대한제국에 근대적 시민 계층의 맹아(萌芽)가 싹트기 시작했다.
수만의 인민이 자발적으로 모여 정치적 구호를 외쳤고, 끝내 이를 관철시켰다. 단합된 민중의 승리를 한 번 경험한 이들은 더 이상 옛날의 백성이 아니었다. 정치 참여의 욕망에 눈을 뜬 시민이었다.
“만민공동회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효과를 거두었소.”
“솔직히 자발적으로 조직된 사람들이 3만이나 모일 줄은 우리도 몰랐지.”
“당초 계획대로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만으로 모였다면 그렇게 모이지 못했을 것이오. 그만큼 대한인민이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하고, 외세에 주권을 침해당하는 일에 반감이 커서 그런 것 아니겠소?”
“그렇소. 하지만 이렇게 확보한 대중의 원동력을 단발성으로 꺼지게 할 수 없지.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 선거 실시에 우리 협회의 총력을 걸어야 합니다.”
독립협회 지도부는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민중의 뜨거운 반응에 놀랐다. 독립협회가 처음 만민공동회를 조직했지만, 2차 만민공동회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것이었다.
만민공동회 직후 독립협회에 신규 가입자가 쇄도하여 그 수가 5천을 넘겼다. 독립협회 회원임을 상징하는 휘장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독립협회 지도부는 이번 기회에 서구, 특히 영국식 자유주의 입헌군주제 국가를 모델로 한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 운동, 통칭 ‘자유 민권 운동’으로 방향성을 틀었다.
대원군의 국상을 치른 후, 4월 하순 독립협회는 다시 만민공동회를 조직했다.
독립협회 지도부에 속한 유길준은 법무대신 겸 헌법 조사 위원이었고, 서광범·서재필·윤치호 등도 장·차관급 각료들이었다. 이들은 동료 관료들과 중추원 의관들을 만민공동회에 초대했고, 만민공동회의 성과에 놀란 이들이 참석했다.
부총리인 참정대신 박정양 등 민중의 정치 참여에 우호적인 일단의 관료들이 만민공동회에 참석하면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참정대신 박정양 공, 내무대신 김옥균 공, 외무대신 박영효 공, 군무대신 홍영식 공, 내무협판 김가진 공, 외무협판 민영환 공, 군무협판 한규설 공, 중추원 의관…… 등등, 다수의 고관께서 참석하셨습니다.”
“와아아!”
“대한국 만세!”
관료들의 입장에 만민공동회 참석자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이번에도 수만이 넘는 인파가 모여들었다. 독립협회 회장 서재필은 개회사를 선언한 후, 관을 대표해 박정양에게 개회 연설을 부탁했다.
“개국 500년 이래 이렇게 관민이 동등하게 마주 앉아 국가의 일을 논의하는 건 처음이외다. 나는 초대 주미 공사를 지내며, 미국의 정치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소. 미국의 놀라운 점은 국민의 광범위한 정치 참여였소이다. 오늘날 대한에서도 이러한 일이 발생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랍소이다.”
이윽고 민을 대표해 백정 출신 박성춘(朴晟春)이 연단에 올랐다.
“이놈은 백정 출신으로, 대한에서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식합니다. 그러나,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제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방도는 관리와 인민이 마음을 합한 뒤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정서를 생각하면, 고관과 백정이 한 연단에 오르는 일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갑신경장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 인식 속에서 백정에 관한 사회적 편견이 사라지지 않았다. 정부 칙령만 믿고 옛 양반들과 똑같이 입고 돌아다니다 구타를 당하는 일도 빈번했다.
제중원 의학 교장 에비슨으로부터 치료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한 백성춘은, 신 앞에서의 평등을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정작 양반 출신 교우들이 자신을 천대하는 것에 실망했다. 박성춘은 백정 해방 운동을 조직했고, 독립협회에 참여했다.
법무대신 유길준은 박성춘의 탄원을 받아들여, 백정들에 관한 차별을 완전히 금지하는 칙령을 건의했다. 이선은 칙령을 반포했다.
“백정 차별에 관한 완전한 폐지를 재확인한다. 백정 또한 짐의 백성이오, 대한의 국민이다. 사사로이 백정을 괴롭히고 폭행하는 자들은 순검이 체포하여 사법부가 엄벌할 것이다!”
“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백정들은 종로 거리에서 춤을 추며 황제 만세를 외쳤고, 새로운 날의 도래를 환호했다.
백정 해방 운동을 이끈 박성춘은 하층 민중의 대변자로 부상했고, 만민공동회의 주요 인사로 떠올랐다.
그는 아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박서양(朴瑞陽)으로 개명한 아들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경신학당에 입학했고, 제중원 의학교에 들어가 의사가 되는 게 목표였다.
“저 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자면 힘이 부족하지만 많은 장대로 힘을 합친다면 그 힘은 매우 튼튼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관리와 인민이 힘을 합하여 우리 대황제의 훌륭한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영원토록 무궁하게 합시다!”
“그렇지!”
“말 잘한다!”
박수가 쏟아졌다. 박성춘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대중을 향해 절을 했다.
이윽고 독립협회 부회장 윤치호가 연단에 올랐다.
“동포 여러분! 우리 대한인민은 하나로 뭉쳐 자주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우리 인민의 성숙한 단결력은, 정치에 참여하기에 충분하다는 걸 입증하였습니다. 이제 헌법을 제정하여 전 국민의 의무와 권리를 확립하고, 의회를 개설하여 인민의 뜻을 대의(代議) 해야 합니다. 충성스러운 우리 대한인민이 직접 대황제 폐하의 통치를 보좌합시다!”
“옳소!”
연사들이 연단으로 올라가 연설을 이어 나갔고, 민중은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환호로 보답했다.
관민공동회는 평화롭게 끝이 났다. 민중은 자발적으로 해산한 후, 구호를 외쳤다.
“충군애국!”
“국권수호!”
“헌법제정!”
“의회개설!”
“선거실시!”
“자유민권!”
민중은 커다란 성취감과 기대감을 맛보며 집으로 돌아갔다. 당장이라도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열릴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가 관민공동회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만민공동회 다음날, 총리대신 김홍집은 각의에서 동료 대신들을 질책했다.
“박 공, 내각의 이인자인 참정대신이 어찌하여 만민공동회에 참석하여 저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단 말입니까?”
“저들이 무슨 말을 하나 들어 보려고나 했지요.”
“그래, 저들의 말을 듣고 나니 만족하십니까?”
“그들의 충군애국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너무 성급한 게 아닐지 저어되더군요. 여긴 서양이 아니거늘…….”
“그렇습니다. 이자들은 대한이 무슨 미국이나 법국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외다. 만민공동회를 주도하는 이상재는 참정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 아닙니까? 저들이 더 이상 과격하게 나가지 못하도록 단속해야 합니다!”
“으음…….”
김홍집은 박정양에 이어 개화당 인사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을 한 사람씩 호명하며 지칭했다.
“제공은 모두 개화당 출신이오. 성상께서 잠저 시절 개화당을 이끄셨기에 공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알지만, 도가 지나치지 않소? 성상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나 되었소? 벌써부터 왕권을 제약하자는 말이 나오다니, 공들이 그러고도 신하의 도리를 다하고 있소?”
“그 무슨 말씀입니까? 군민공치는 세계의 대세이거늘, 영명하신 성상의 뜻을 가늠하고 하는 일입니다.”
유길준의 반박에 김윤식과 어윤중이 김홍집을 지지하고 나섰다.
“독립협회의 거동이 지나치기 짝이 없소. 각료들까지 초대하여 압박하고, 저 무지한 군중의 힘으로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겠다는 것이오? 대체, 그럴 거면 정부는 왜 존재한답니까?”
“서양식 헌정은 시기상조요. 일본도 유신 이후 헌정을 도입하는 데 20년 이상이 걸렸소. 우리는 제국을 선포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이 난리요? 군민공치도 국민의 수준이 높이 이르러야 가능한 일!”
그때, 침묵하던 궁내부대신 이준용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종친들과 사대부의 불만은 더욱 크다는 걸 알아 두십시오. 아주 불만이 자자합니다. 민당(民黨)의 무리가 지엄한 왕권과 조정을 능욕하고 있다고! 대한은 황제의 나라이지, 서양처럼 공화국이 아닙니다. 군중은 독립협회만 동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상께 누가 될까 봐 참고 있을 뿐이지.”
김옥균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독립협회의 방법이 과격하기는 하나, 그들의 충군애국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개설하는 건 성상께서도 즉위 교서에서 발표하신 바와 같습니다. 성지(聖旨)를 받드는 게 신하된 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홍집은 딱 잘라 말했다.
“바로 그거요. 신민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상의 마음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성상께서 이미 교서를 통해 큰 뜻을 밝히셨으니, 우리 신료들은 차분히 헌법을 기초하여 성상의 반포를 기다리면 됩니다. 군중을 동원해서 헌법의 내용을 뜯어고치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오!”
결국 대의(大義)도 중요하지만, 신생 대한제국의 정치적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 새로운 제국의 근간이 될 헌법을 어떻게 제정하느냐를 놓고, 그동안 합심해 왔던 정부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대원군 계열 보수파는 조직화에 들어갔다. 궁내부대신 이준용을 중심으로 한 종친들, 중추원 의장 조병세를 비롯한 원로대신들, 시종원경 이범진, 중추원 의관 홍종우 등 ‘근왕(勤王)’을 부르짖는 왕당파들이 손을 잡았다.
“백번 양보해서 개화당까지는 참을 수 있어도, 민당의 무리들이 지엄한 왕권을 침해하는 건 용납할 수 없소. 대원왕께서 훙서하신 지 얼마나 됐다고, 민당이 왕권을 위협하면 하늘에서 얼마나 원통해 하시겠소?”
“성상께서 신민을 사랑하시기에 오냐오냐해줬더니만, 민당의 무리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가 성상을 대신해서 악역을 맡아야 합니다.”
“저들이 협회와 정당을 만든다고 한다니, 우리도 만듭시다. 전국의 충의지사들은 우리를 적극 지지할 것이오.”
“대한은 황제의 나라이다! 절대왕권을 수호하자! 대황제 폐하 만세!”
이들이 원하는 건 동양식 전제 군주정이었다. 굳이 서양을 모범으로 삼더라도, 러시아식 차리즘(Tsarism)을 희망했다. 이선은 그럴 능력을 충분히 가진 황제였다.
근왕파의 지도자로 급부상한 홍종우는 최초의 프랑스 유학파였지만, 대한제국에 어울리는 건 러시아식 전제 군주정이라 판단했다.
이범진과 홍종우를 중심으로 근왕과 황권 수호를 외치는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조직했다. 오랫동안 대원군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보부상들이 적극 협력했다. 보부상 출신으로 근대적 금융가로 변신한 대한천일은행장 이용익(李容翊)이 황국협회의 자금줄 역할을 했다.
김홍집과 온건 동도서기파들도 세력을 결집했다. 참정대신 박정양, 탁지부대신 어윤중, 학무대신 김윤식 등 정부 고관의 다수가 이들을 지지했다. 중추원에는 이들의 지지자가 많았다.
“우리가 대한의 이성(理性)과 균형을 지켜야 하오. 헌법을 제정하여 헌정을 실시하되, 속도를 조절해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합시다.”
“일본이 헌법을 제정할 때 프로이센의 사례를 참조했다고 하니, 동양에 가장 적합한 체제는 프로이센식 입헌 군주정입니다.”
‘동양의 도와 서양의 기술로 국가를 운영하는’ 동도서기파가 이상으로 여기는 건, 조선 전기 정도전이 구상했던 왕권과 신권의 조화, 군신공치의 재상 정치였다.
서양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헌법과 의회는 존재하되 통치권의 주체가 아니라 자문의 역할을 할 뿐이고, 군주와 군주가 임명한 재상이 정치를 책임지는 프로이센식 외형적 입헌 군주제를 희망했다.
만민공동회는 민중의 힘을 보여주어 정치 문화를 바꿨지만, 그동안 사실상 집권 정당 노릇을 하던 개화당의 분열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도 정치 구도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김옥균·박영효·홍영식·김가진 등 개화당 주류와, 서광범·서재필·유길준·윤치호 등 개화당 소장파가 국가의 방향성을 놓고 분열한 것이다.
“성상은 영명하시고 전 국민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민권이 성장했다고는 하나, 이는 개화된 황성과 경기 일대에서나 그렇다. 지나치게 민권을 강조하면 근왕파, 보수파가 단결하여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충분하다. 우리는 성상을 중심으로 헌정을 실시해 대한의 국가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개화당 주류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입헌 체제를 구상했다. 프로이센식도 선호했으나, 개화당의 지도자 김옥균이 보다 선호하는 건 프랑스식 ‘자유 제정’이었다.
“우리 성상께서는 젊은 나이에 국가를 이끌게 되어 국운을 크게 상승시켰으니, 가히 동양의 나폴레옹이라 할 만하네. 성상은 우리를 계속 승리로 이끄실 지어니, 국민이 함께 떠받들며 전진하는 것이지.”
김옥균에게는 대한제국과 이선이 프랑스 제국과 나폴레옹처럼 ‘국민의 황제’가 되는 게 이상적이었다. 국민적 지지와 함께 하는 보나파르티즘(Bonapartism)적 체제였다.
동도서기파의 군신공치, 개화당 소장파의 군민공치를 섞은 듯 한 황제 중심 거국일치 체제라 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의 백년대계를 놓고, 온갖 다양한 의견이 백가쟁명(百家爭鳴)처럼 분출했다. 조선 건국 이래, 아니 한민족의 역사 이래 이렇게 활발한 정치적 논의가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는 이선이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내가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시작했지만, 아래로부터의 근대화도 함께 가야 한다. 국력 상승, 부의 증대, 기술 진보, 군사력 강화가 중요하지만 국민의식의 변화도 중요해. 외형적 근대화에만 집착하다간 일본 제국주의처럼 폭주할 수 있지. 전국적으로 조선의 백성이 대한의 시민으로 변화할 때, 진정한 근대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새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민교육으로 처음 씨앗을 뿌리고, 만민공동회로 맹아가 싹텄다. 이제 그 새싹을 튼튼한 묘목으로 지켜 내고, 땅에 깊이 뿌리박힌 거목으로 성장하여 풍성한 과실을 누리길 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