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55
– 255화에 계속 –
255화 제국과 민국
이선은 지금껏 의도적인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정기적으로 제국익문사의 보고를 받는 이선으로선,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김홍집이 상주하기 전, 이미 김옥균이 협회 해산을 건의한 바 있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점차 과격해지고 있습니다. 하오나 신의 생각으로는,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황국협회의 행보입니다. 이들은 개화로 인해 쇠퇴한 세력을 다시 긁어모으고 있습니다. 영선군 이준용이 이들을 내세워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게 아닌지…….”
이선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결국, 신생 대한제국의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투쟁일세. 독립협회가 민의로 포장하려 한다면, 황국협회는 황제에 대한 충성으로 포장하려고 하지.”
“역시 폐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군요. 그런데 어찌하여 저들을 내버려 두고 계신지…….”
“짐은 오히려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고맙다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선은 냉소를 지으며, 그동안 감추어 두었던 속내를 마침내 드러내었다.
“짐이 장차 누구와 함께 정국을 이끌어야 할지, 누구와 같이 갈 수 없는지, 알아서 판별해 주고 있지 않나? 독립협회는 이상은 좋아도 대책 없는 관념론자들일세. 짐도 서구식 자유주의가 장기적으로는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대한에서 당장 이룩하겠다는 건 환상이야.”
이선도 장기적으로 자유주의 헌정 체제로 전환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럴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려면, 최소 20년의 시간은 필요하다고 보았다.
“서구라고 하루아침에 바뀐 줄 아나? 서구에서도 자유주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과 시민 혁명이 필요했네. 하지만 이 나라에는 시민 계급이 존재하기나 하나? 부르주아지 없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니,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이선은 서구식 자유주의 체제를 절대 선으로 여기고, 서구의 발전 사례를 무작정 접목하려 한 독립협회의 환상에 냉소를 보냈다. 그들이 서구의 발전상에 심취한 동기 자체는 이해하지만, 대한제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 관념론적이고 도식적 접근이었다. 그들에게 권좌를 내주기에는 20년은 일렀다. 민의를 내세우는 진보 야당의 역할이 한계였다.
“과연 폐하께서는 영명하십니다. 신도 그들과 개화당의 동지들이었지만, 같은 이유로 자연히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다들 30대의 젊은이들이니, 세상사에 좀 더 경험을 쌓으면 시야가 더 넓어지겠지. 마치 고균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네. 30대의 고균도 굉장히 급진적이었는데 지금은 원숙해지지 않았나.”
“하하, 일찌감치 폐하를 주군으로 모신 덕에 시야가 한층 넓어질 수 있었지요.”
김옥균은 새삼 이선의 원숙함에 감탄했다. 이선은 이미 10대 시절부터 성인의 지도력을 보였고, 30대가 된 지금은 세상만사에 정통한 초인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새삼스럽게 궁금할 따름이었다.
“영선군과 보수파들은 더 착각하고 있지. 짐은 그들을 정치적으로 재기시켜 줄 마음이 추호도 없어. 단지 개화로 인해 기득권을 빼앗기고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그릇 역할을 기대했네.”
이선은 황국협회의 시도에는 더 냉정했다.
이준용과 보수파, 사대부와 보부상들이 연합하는 걸 용인한 이유는, 그들이 부르짖는 것처럼 근왕 세력을 키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근대화로 인해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특권을 상실하고 좌절감을 느끼는 계급을, 체제 밖에서 불만분자로 남겨 놓는 대신 의회라는 합법적 공간 안에서 이견(異見)을 제시할 수 있는 관제(官製) 야당으로 키우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황제의 뜻을 빙자하여 파당을 형성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 하다니. 근왕을 내세우면 짐이 용인해 줄 것 같나?”
하지만 야심만만한 이준용과 기득권을 되찾으려는 사대부들은, 보수파를 결집해 장차 집권을 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근왕을 내세워 왕권을 침해하려는 ‘역적’의 무리를 제거하면 황제도 신임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폐하께서 이미 그렇게 판단하고 계시니, 신은 더 아뢸 것이 없나이다. 그럼 어찌하오리이까?”
“잠시 내버려 두세! 그래도 충분하네. 머지않아 그들은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공멸하려 들겠지. 특히 황국협회는 무력을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터이니, 그때 해결하면 될 거야.”
이선의 예측대로, 황국협회는 보부상을 동원해 무력을 과시하려 했다.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지방 보부상들의 상경과 무장을 용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성상께서 민의를 존중하시기에, 내무대신께서도 순검을 동원하지 않고 민당의 망동을 내버려 두시는 거로 압니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저들은 더욱 급진화될 것입니다. 공께서도 프랑스 민당 무리의 난동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대한과 프랑스는 다르지. 그래서요?”
“정부 대신 황국협회가 나서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오. 경무청은 관여하지 않겠소. 단, 황성의 치안에 해가 되는 무질서한 행위는 피해야 할 것이오. 그리되면 순검을 동원하지 않을 수가 없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오직 황은에 보답하고, 성상의 통치를 보좌하기 위함입니다.”
“좋다.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면, 황국협회는 정부도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해결하는 황제의 친위 세력이 될 것이다!”
황제와 정부의 묵인을 얻었다고 판단한 황국협회 지도부는, 향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만민공동회 무력 습격을 자행했다.
그렇게 자처하고 싶어 했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폭력 사태에 가담한 자들은 대부분 체포되었고, 지도부는 경운궁으로 소환되는 처지였다.
광무 2년(1898) 6월 27일. 이선은 먼저 독립협회를 만났다.
독립협회 지도부와 회원 200여 명이 인화문(仁化門) 앞에 운집했다. 황제의 양옆으로는 내각 대신들과 외국 공사들도 있었다.
“짐은 충성스러운 너희 신민을 조유한다. 너희 모두는 짐의 말을 들을지어다.”
“예, 폐하!”
독립협회 회원들은 일제히 부복하며 신하의 예를 갖췄다.
“짐은 조칙을 내려 헌법 제정, 의회 개설, 선거 실시의 계획을 밝혔고, 실제로 정부에서는 헌법 제정을 논의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은 순차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짐의 뜻을 살피지 못하고, 짐의 정부를 규탄하며, 황성에서 파당을 모아 충돌을 벌이기에 이르렀는가? 너희들은 한번 그 죄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라.”
“…….”
독립협회 지도부는 변명거리를 생각해 두었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놓지는 못했다.
“그러나 너희 신민이 충군애국하는 마음으로 나섰다면, 어찌 너희들만의 죄가 되겠는가? 오늘 이전까지의 일에 관해서는, 죄가 있건 죄가 없건 간에 경중을 계산하지 않고 일체 용서해 주겠다.”
이선은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내밀었다.
“짐은 너희에게 다시 한번 다짐한다. 헌법 제정, 의회 개설, 선거 실시는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지 말며, 정부를 함부로 비난하지 말라. 너희는 짐과 정부를 믿고 기다리도록 하라.”
이선은 더욱 위엄 있는 어조로 말했다.
“대한은 제국(帝國)이지만, 동시에 민국(民國)을 지향한다. 임금은 민(民)이 아니면 누구를 의지하며, 민은 임금이 아니면 누구를 받들겠는가? 민회의 사람들도 모두 짐의 적자(赤子)이다. 임금과 신하, 상하가 단결하여 믿음을 가지고 의리를 지키자. 온 나라에서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구하며, 무식한 자의 의견에서도 좋은 생각을 가려서 받아들일 것이다. 그게 바로 제국이자 민국이 아니겠는가?”
위엄이 가득하면서도 인민을 아끼는 황제의 칙유에, 독립협회 회원들은 감격을 표하며 머리를 거듭 조아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지극한 성심을 따르겠사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독립협회를 내보낸 후, 이선은 황국협회 지도부와 폭력에 가담하지 않은 회원 200여 명을 만났다.
“너희가 근왕을 빙자해 파당을 형성하여, 황성에서 소요를 일으키고 폭력을 불사하기에 이르렀다. 너희의 죄를 알겠느냐?”
황국협회를 대표해 홍종우가 머리를 조아렸다.
“감히 성심을 어지럽히고 난리를 일으켰으니, 실로 신등의 죄가 죽어 마땅합니다. 하오나 폐하, 신등이 죽기 전에 아뢰게 해 주시옵소서.”
“아뢰도록 하라.”
“신등이 황국협회를 세운 것은, 황실을 숭상하고 임금에게 충군애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신등은 저 민당의 무리가 사익을 지나치게 도모하고 임금을 우러르지 않기에, 이를 깊이 우려하였습니다.”
“짐과 짐의 정부가 민회를 내버려 둔 것은, 다 뜻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짐의 뜻을 감히 예단(豫斷)하고 소요를 일으키는가? 그 죄를 처벌하지 않을 수가 없으나, 짐은 너희의 충군애국만큼은 믿는다. 너희 또한 짐의 적자이다. 특별히 이번 한 번 만큼은 용서하는바, 황성에 적을 둔 자는 생업에 복귀할 것이요, 지방에서 상경한 자는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이선은 이번에도 능수능란하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내밀었다.
“장차 의회가 개설되면 언로가 크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사대부로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한다면, 파당을 형성하고 폭력을 행사할 게 아니라 의회와 언론을 통해 준열하게 이치와 의리를 따져가며 논쟁을 하도록 하라. 그게 조선의 아름다운 전통과 대한의 개화가 만나는 지점이 아니겠는가?”
이선은 황국협회의 사대부들에게 정치 참여 기회를 말하며, 관제 야당의 위치를 받아들이라 암시했다.
“또한, 너희 보부상이 정부의 식산흥업에서 배제되고 있는 처지를 짐도 안다. 농상공부에 명해 너희가 생업에 편히 종사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경제 구조가 바뀌었거늘, 어찌 옛 방식만 고수하려 하는가? 천일은행장 이용익을 보라. 대한은 더 이상 상인을 천시하지 않으며,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의 나라이다. 그러니 너희들의 이익만 따지지 말라.”
이선은 시대에 뒤떨어져 가는 보부상에게도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동시에 대한천일은행장 이용익을 상인의 모범으로 치켜세우면서, 황국협회의 자금을 대는 정경유착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암시를 넣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황국협회 회원들도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외쳤다.
이선은 이윽고 독립협회 지도부와 황국협회 지도부를 한 자리에 불러 세웠다. 협회 지도부는 서로를 사갈시(蛇蝎視)하듯 쳐다보았으나, 이선은 악수를 강권했다.
“짐은 식언하지 않으니 지극한 뜻을 잘 받들어, 자애롭고 사이좋게 손을 잡고 함께 돌아가 각기 생업에 안착하라. 향후 국권을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황명을 받드옵니다.”
“지극한 성심을 받들겠사옵니다.”
황제의 명에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지도부는 어색한 자세로 악수를 나누었다. 이선은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다음날 신문에 배포되도록 했다.
“호외요! 호외! 황제 폐하께서 소요를 일으킨 독립협회와 황국협회를 친견하시고, 점잖게 타이르시다!”
“폐하께서는 어쩌면 이렇게 신민을 아끼고 관대하시단 말인가.”
“황제 폐하께서 친견하시고 그렇게 간곡하게 타일렀으니, 알아서 자중해야겠지.”
“암! 솔직히 그동안 너무 막 나갔어. 충군애국하겠다는 자들이 어찌 황명을 거역하겠는가?”
단 반나절의 정치적 이벤트로, 이선은 모든 걸 얻어 냈다. 민심은 확고히 황제의 편이었다. 주도권을 잡으려고 경쟁하던 두 협회는 황명에 복종할 뜻을 밝혔다.
6월 29일, 황명으로 새로운 조칙이 내려졌다.
“헌법은 국가의 새로운 백년대계이기에, 졸속으로 만들지 아니할 것이다. 정부와 중추원 심의를 거쳐 광무 3년에 반포한다. 선거법을 마련하여 광무 4년에 전국 선거를 실시, 민의원을 개원한다. 올해 하반기의 중추원 선거는 민의원 선거에 대비해 기존의 간선제에 직선제의 요소를 가미할 것이다.”
올해 중추원(상원) 선거, 내년 헌법 반포, 후년 전국 선거와 민의원(하원) 개설로 단계적으로 입헌 체제를 구축할 뜻을 천명했다.
정치 개혁 전망에 자유주의자들은 환호했다.
이윽고 이틀 뒤인 7월 1일, 내각의 개각과 외교관 임명이 있었다.
“총리대신 김홍집, 참정대신 박정양, 내무대신 김옥균, 외무대신 박영효, 탁지대신 어윤중, 군무대신 한규설, 법무대신 김윤식, 학무대신 민영익, 농상공대신 김가진, 궁내대신 이재순.”
기존 내각에서 거의 변동이 없는 소폭의 개각이었지만, 특이사항은 독립협회파와 황국협회파가 장차관급에서 모두 교체되었다는 점이었다.
“주미공사 서재필, 주영공사 서광범, 주독공사 안경수, 주법공사 홍종우, 주아공사 이범진, 주일공사 이준용, 주청공사 홍영식.”
주청 공사로 임명된 홍영식을 제외하면, 전원 독립협회와 황국협회의 지도자들이었다. 각료직에서 외교관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합법적인 국내 정치 배제였다.
이들은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을 앞두고 갑작스러운 외국행에 당혹감을 느꼈지만, 황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애초에 폭력 사태의 책임을 묻지 않은 것도 관대한 조치였다.
“경들은 짐이 외교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잘 알 것이오. 각자 대한의 국익을 대표해 각국에서 충실하게 임무를 다할 것이라 믿고 있소. 각국에서 배워야 할 점을 갖고 대한으로 돌아올 날을 기대하겠소.”
“삼가 황명을 받드옵니다.”
이선은 내각의 두 축이자 각 정파의 지도자인 김홍집과 김옥균을 불러들여 신임을 표명했다.
“짐이 경들을 신뢰하고 있음을, 경들은 잘 알리라 생각합니다. 짐은 이성과 균형으로 제국을 통치해 나가길 원합니다. 경들은 짐의 뜻을 잘 이해하여 내각을 운영해 나가길 바랍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선은 동도서기파와 개화당 주류의 연정을 제안하여, 새 내각을 확립했다. 극단을 배제하여 중도파를 국정 파트너로 삼고, 이들이 주장하는 프로이센식 입헌 군주정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한 셈이었다.
헌법과 의회로 민의를 대표하되 통치의 주도권은 황제에게 있었다.
이선의 구상 하에 새 국가는 ‘제국이자 민국’으로 나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