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59
– 259화에 계속 –
259화 변법자강(變法自疆)
1895년 1차 동아시아 전쟁 종전 이후, 조-청 관계는 사대조공 관계에서 동등한 주권 국가 간의 관계가 되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사대 관계는 완전히 폐기되었고, 모스크바에서 러-청-조 삼국 밀약을 맺어 최초로 동등한 관계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1882년의 조청상민장정이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폐기됨에 따라, 새로운 통상 조약이 필요로 했다. 1896년에 체결된 새 통상 조약은 상호 주권을 존중한, 완전히 평등한 조약이었다.
하지만 청조의 수구파들은 ‘제후국인 조선이 종주국인 대청과 동등한 관계를 맺는 건 당치 않다’라는 시대착오적인 논리로 조약의 비준을 거부해 왔다. 기존의 주차위원을 주권 국가의 격에 맞게 전권공사로 올리자는 제안도 거부했다.
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하자 수구파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조약 비준과 전권공사 파견을 거부하고, 망령되게도 감히 황제를 참칭한 조선과 관계를 당장 단절해야 합니다!”
대한제국은 좋을 대로 하라면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왜 주권 국가인 대한이 청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가? 대한이 청국 말고 상대할 나라가 없는 줄 아는가?”
조청 간의 무역 규모를 생각하면, 조약 비준이 연기되어 무조약 상태로 있는 건 청나라 입장에서도 손해였다.
1898년 개혁을 결심한 광서제가 본격적으로 친정을 나선 후에야, 상황은 정리되었다.
“통상 조약을 비준하고, 상호 간에 흠차대신을 파견하도록 하라.”
이로써 대한국·대청국통상조약(大韓國大淸國通商條約)이 비준되어 국서를 교환했다. 한국주차 흠차대신(전권공사)로 파견된 서수붕(徐壽朋)은 ‘대청국 대황제는 대한국 대황제에게’ 보내는 국서를 전달했다. 이제 완전히 동등한 관계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대한제국은 홍영식을 주청 특명전권공사로 파견했다. 개전 직전 피랍되어 전쟁 기간 내내 청나라에 부당하게 억류되어 있던 홍영식으로서는 특별한 귀환이었다.
이선이 홍영식을 주청 공사로 파견한 건, 풍부한 경험을 특별히 사서였다.
1년의 억류 기간 동안 홍영식은 중국어 공부에 매진했다. 그 결과 홍영식은 한국의 고관 중 드물게 중국어 회화가 유창했다. 원래 유학을 익힌 관료들은 한문을 통해 중국인과 필담이 가능했지만, 홍영식은 대화도 가능해진 것이다. 어디든 그렇듯이, 언어 구사 능력은 상대의 호감을 사는 요인이었다.
한편으로는 은밀히 청나라 양무파 고관들과 관계를 맺었다. 패전에 격분한 수구파가 화풀이로 홍영식을 처형하려 했을 때, 공친왕 혁흔과 이홍장이 힘껏 말려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금석, 지금 청국은 실로 중대한 전환점에 놓여 있네. 이 중요한 시기에 경을 북경으로 보내는 이유를 알겠나?”
“청국에서 대한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현재 청국은 황제를 중심으로 대개혁에 나서려고 하네. 하지만 그만큼 수구파의 반발도 크겠지. 두 세력 간에 누가 승자가 될지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렵네.”
“황제가 결심한 이상, 청국도 대한과 일본처럼 변혁으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글쎄. 청국은 대한이나 일본과 달리, 지나치게 광대하고 무수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네. 덩치가 크면 움직임이 그만큼 제한되지.”
‘역사대로라면 광서제는 이른바 변법자강, 백일 유신을 시행하다가 서태후와 수구파의 반격에 밀려 100일 만에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이미 역사가 상당히 틀어진 상황이라, 어떻게 될지 나도 장담할 수 없군.’
이선은 청국의 정치 변동이 향후 동양 정세에 중대한 변화가 오리라는 걸 직감했다.
“앞으로 경은 청국 황제, 변법파, 양무파 관료들과 두루 친분을 맺되, 모든 사안은 짐에게 신속히 보고하고 훈령을 받도록 하게. 현지의 우리 요원들이 경을 도울 예정일세.”
“예, 알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로 경에게 내릴 명령은…….”
이선은 홍영식에게 상세한 지침을 내려 주었다.
1898년 여름, 청나라는 대대적인 변법운동의 소용돌이에 있었다. 그 중심인물에는 광동 출신 개혁가 강유위(康有爲)가 있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마침 회시(會試, 과거시험 최종 단계) 응시를 위해 북경에 체류 중이던 강유위는, 천여 명에 달하는 동료 응시자들을 조직하여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
표면적으로는 조약 거부와 천도 항전을 부르짖었지만, 상주문의 핵심은 대대적인 변법(變法, 정치 개혁)과 서구식 근대화의 시행이었다.
“열국병립지세에 의해 천하를 다스려야지, 일통수상지세에 의해 천하를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일통수상지세(一統垂裳之勢), 즉 교화를 통해 주변이 중화를 흠모하게 하여, 오직 중화만이 천하를 일통하여 유일한 문명이라 여기는 기존의 천하관을 부정한 것이었다. 마지막 제후국이었던 조선의 이탈과 자주독립은 중화 천하관의 붕괴였고, 주권국가 간 조약에 의거한 근대적 국제 질서로의 이행이었다.
강유위는 더 나아가 서양을 본받아 일본처럼 변법을 시행하고 부국강병에 나서자고 제안했다.
비록 강유위의 상주문은 황제에까지 닿지 못했지만, 그는 일약 전국적 명사로 떠올랐다. 강유위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제자 양계초(梁啓超)와 함께 강학회를 조직하고, 전국을 돌며 개혁 운동을 설파했다.
1897년 독일의 산동 점령 이후 열강이 중국 침탈이 잇따르자, 지배층과 지식인을 막론하고 중국의 분할이 임박했다고 두려워했다.
강유위는 위기의식을 이용해 거듭 황제에게 변법을 촉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은 절차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되었지만, 그 내용은 북경에 파다하게 퍼졌다. 광서제의 스승인 호부상서 옹동화가 강유위의 주장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광서제는 호기심을 느껴 강유위를 불러들이려 했지만, 4품 이하의 관리는 황제를 알현할 수 없다는 공친왕의 반대에 부딪혀, 총리아문에서 대신들에게 대신 접견하라고 명했다.
1898년 1월, 강유위는 마침내 청조의 대신들 앞에서 자신의 개혁을 홍보할 기회를 얻었다.
강유위가 변법의 정당성을 설파하자, 서태후의 심복이자 수구파를 대표하는 만주족 군기대신 영록(榮祿)이 벌컥 화를 냈다.
“조상의 법도는 함부로 고칠 수 없는 법이다!”
“조상의 법도로 조상의 영토를 다스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 조상의 영토를 지킬 수 없게 되었으니, 그 법도를 어디에 사용한단 말입니까?”
강유위의 달변에 영록은 분개했다. 그동안 잠자코 듣고 있던 이홍장이 물었다.
“어떻게 법도를 고치는가?”
“법률과 관제를 모두 고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모든 제도와 법을 폐지하자는 말인가?”
“오늘날 각국은 병립하고 있는 시대이지, 중국에 의해 통일되어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지금의 법률과 관제는 중국을 약하게 하고 망조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폐지해야 하며, 일시에 모두 폐지할 수 없으니 심사숙고해 개정하여 신정을 실시해야 합니다.”
한나절 동안 계속된 논쟁은 강유위의 독무대였다. 보수파 영록은 분노를 표명하며 자리를 떴고, 양무파의 거두 이홍장도 혀를 차며 강유위의 급진성에 우려를 표명했다. 강유위의 의견을 황제에게 전하는 옹동화조차도 고민할 정도였다.
‘관직도 없는 자가 대신들 앞에서 대놓고 조정을 폐지하자고 하다니. 저놈 미친 거 아닌가?’
하지만 보고서를 받은 광서제는 기뻐했다. 혐오하는 서태후파인 영록은 말할 것도 없고, 양무파 공친왕과 이홍장도 나라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는 광서제에게, 이들을 거침없이 공박하며 변법을 외치는 강유위는 꼭 마음에 들었다.
“만일 변법을 하지 않으면 대청은 명나라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겁니다. 황상께서는 평민이 될 기회조차 잃을 것이며, 숭정제처럼 비참하게 생을 마감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정녕 죽고 싶은 게냐?”
강유위의 극언에 옹동화조차 대역죄라고 격분했지만, 오히려 광서제 본인은 감동을 받았다.
“오직 진정한 충신만이 목숨을 걸고 이런 진언을 할 수가 있다! 그동안 짐의 주위에는 입에 발린 소리만을 하는 간신들만 가득했다. 그 결과가 무엇이냐? 서양은 물론이고, 섬나라 오랑캐라 우습게 여기던 일본과 번국이었던 조선에 패배하는 국치를 당하고야 말았다. 황제인 짐조차 변법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어찌 대신들은 이해하지 못하는가?”
광서제가 기뻐했다는 소식을 들은 강유위는 거듭 상주문을 올렸다.
강유위는 총 8차례 상주문을 올렸고,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대개혁을 추진하라고 건의했다. 강유위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기, 메이지 유신의 기록, 서양 각국의 개혁을 담은 소책자를 바쳤다. 매일 이 책자들을 읽은 광서제는 변법을 실시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5월 29일, 지난 40년간 위기 시마다 국가의 중대사를 책임진 공친왕 혁흔이 서거했다. 향년 56세.
공친왕의 죽음은 양무파의 퇴조를 의미했다. 광서제는 즉각 변법을 실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6월 16일, 강유위는 마침내 광서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사방의 오랑캐가 동시에 압박해 오고 있으니, 중국의 분할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멸망할 날이 머지않을 것입니다.”
광서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정말 변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오.”
“이른바 변법이라는 것은 법률 제도로부터 차례로 개정하는 것입니다. 신의 소견에 따르면…….”
기회를 얻은 강유위는 자신의 개혁 계획을 상세히 아뢰었다. 광서제는 크게 기뻐했다.
“그대의 경장 계획은 참으로 상세하다. 짐이 원하는 바와 꼭 같다.”
“황상의 현명함이 이미 이를 알아차리셨는데, 어찌하여 진작 행하지 않으셨습니까?”
광서제는 병풍 너머를 휙 둘러본 후, 탄식하며 말했다.
“사방에서 방해하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병풍 너머는 곧 서태후를 의미했다. 섭정 시기, 서태후는 황제의 병풍 너머에서 국정을 다스렸다. 공식적인 섭정은 끝난 지 오래지만, 서태후는 여전히 이화원에서 웅거하며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황상의 지엄한 권한으로 경장할 수 있는 것을 행하시옵소서. 비록 모든 분야를 경장할 수 없어도 핵심만을 해낸다면 중국을 구하기에 충분합니다. 저 조정 대신이란 자들은 모두 늙고 보수적이며, 외국에 관한 일을 모릅니다. 황상께서 그들에게 의존하여 변법을 하려는 것은 마치 나무 위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낚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강유위는 거듭 변법을 촉구했다. 광서제는 마치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듯 지혜를 갈구했다.
4시간의 만남 동안, 광서제는 강유위에 관한 확고한 신뢰를 갖게 되었다.
알현이 끝난 후, 강유위는 즉시 총리아문의 장경으로 임명되었다.
1898년 6월 19일, 광서 24년, 무술년 5월 1일.
강유위는 총리아문을 통해 변법을 국가 정책으로 채택하고, 제도국(制度局)을 설립해 대대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광서제는 즉각 반응을 보였다.
“오늘로써 변법이 시작될 것이다. 제도국을 개설하여 유능한 관리를 임용하고, 사민의 자유로운 상소를 허용한다. 중국의 전통과 도덕을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모든 신민은 외국의 유용한 지식을 배우라. 상업을 진흥하고, 신식 학교를 설치하며, 복제를 개혁한다. 각 성에는 민정국을 창립하고 지역별로 변법을 준비하도록 하라.”
광서제와 강유위를 중심으로, 청조 최후의 위로부터의 개혁 운동, 변법자강과 신정(新政)이 시작되었다.
7월에 홍영식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청나라는 이러한 상황이었다.
김옥균, 박영효와 함께 한국의 변법개화파 ‘삼두(參頭)’로 불리는 홍영식이 주청 전권공사로 부임하자, 강유위는 환영의 뜻을 보냈다.
“홍 공은 한국의 변법개화를 대표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분이 이 중요한 시국에 북경으로 오다니 기쁠 따름입니다. 부디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한국과 청국의 상황이 달라 변법의 양상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첫 주청 특명전권공사로서 양국의 우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유위는 멀리는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가까이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자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은밀히 조선의 사례도 참고하자고 있었다.
대청의 자존심으로 인해 옛 제후국인 조선을 배우자는 말은 대 놓고 할 수 없으나, 청나라의 조건은 러시아나 일본보다는 오히려 조선과 더 유사했다.
오랫동안 유교가 국시인 국가, 사대부로 대표되는 보수파의 저항, 법적으로는 절대 군주이나 기득권의 반대에 부딪히는 왕권, 군주의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여인, 외세의 침탈 시도, 오직 군주의 신임 외에는 미약한 개혁파 등.
“조선, 아니 한국 공사를 환대하여 그들의 변법 성공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한국이 옛 번국인 것은 열국병립지세인 이 시점에선 중요치 않습니다. 공자께서는 어린아이에게도 지혜를 물으라 하셨거늘, 하물며 국가 간의 일이겠습니까?”
“음, 그리하리다.”
위로부터의 개혁을 구상하는 광서제에게, 한국의 성공 사례는 분명히 자극되는 일이었다.
광서제의 나이 스물여덟, 이선은 서른한 살로 나이도 비슷했다.
이선은 자신을 억압하던 계모 민씨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아 보수파를 제압하고 개화파를 중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뤄 냈다.
권력을 움켜쥔 계모 서태후와 오랜 갈등을 빚고, 보수파를 제압하고 변법파를 중용하여 개혁을 하려는 광서제로선 이선의 성공 사례에 이입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중화의 황제라는 자신은 여전히 이룬 바 없이 허수아비 신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데, 소국의 왕자로 태어난 이선은 변법과 경장을 추진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국가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자연히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도 해냈거늘, 짐이 못할 게 무엇이랴? 반드시 변법을 성공시켜 대청의 중흥을 이뤄 내리라.’
광서제는 결심을 굳혔다.
1898년, 분명히 중국은 변화하고 있었다. 맨 꼭대기 황제로부터, 변법자강이라는 이름으로 위로부터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변화의 방향성이 어디로 갈지는 아직 예측 불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