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62
– 262화에 계속 –
262화 중추원(中樞院)
1898년, 광무 2년 가을.
청나라에서 변법파와 수구파의 정치 투쟁이 한창 진행될 때, 대한제국은 순조롭게 정치 개혁이 진행되었다.
1898년에는 중추원 의관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선은 중추원을 첫 근대적 선거의 장으로 삼으려 했다.
중추원은 국정 자문 기관으로, 의관의 수는 100명, 임기는 5년이었다. 중추원 의관 100명 중 70명은 전국 13도와 황성에서 5명씩 선출했고, 30명은 군주가 임명하는 칙선(勅選) 의원이었다.
중추원 의관 선출은 간선제로, 부·군 향회에서 도 향회를 선출하고, 도 향회에서 5명씩 중추원 의관을 선출하는 구조였다.
지방 향회는 지방관의 통치를 자문하는 일종의 지방 자치 기관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각 지방의 유지들이 차지하는 자리였다. 거기서 선출되는 중추원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중추원과 향회 자체가 공의 정치(公議政治)를 내세워, 개화에 부정적인 지방 사대부들을 체제 내로 포섭할 목적으로 만든 기관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오, 김 의원. 고향 사정은 어떤가?”
“성군을 만나 태평성대지, 하하하. 정부에서 권유하는대로 상업 작물을 재배했더니 대박이야, 대박.”
“하하, 과연 태평성대로다! 나는 황성에 가서 성상을 보좌하고 싶네. 다음 중추원 의관 선출에 나서려고 하는데, 잘 부탁하네. 우리 도를 대표해 열심히 활동하겠네.”
“아, 그럼. 우리 도를 대표할 만한 사람으로 박 의원만한 인물이 없지.”
허울뿐인 향회 의원이 되는 것만으로 그간 벼슬길이 막혀 있던 지방 사대부의 명예욕을 충실히 만족시켰고, 중추원 의관은 실질적인 권한이 없을 지라도 최고의 영예였다.
“오랫동안 칩거하시던 면암(勉庵, 최익현) 선생님께서도 이번에 중추원 의관 선거에 나서신다는군.”
“오, 그래? 경기도 향회 의원으로 선출되시고도 활동은 하지 않으셨잖나. 중추원이든 향회든 개화당 정권의 앞잡이에 불과하다고.”
“개화당 무리가 조선을 오랑캐의 나라로 만드는 데 분노하시어, 포천에서 유학의 도를 지킬 후학을 기르셨지. 하지만 지나보니 개화당은 양반일세.”
“하긴, 이젠 더 무지막지한 민당(民黨)의 무리까지 등장하지 않았나? 몰려 다니며 지엄한 군주와 대신들을 겁박하는 꼴이라니.”
“민당에 반대한답시고 황국협회에 부화뇌동하는 사대부들 행태를 보니 선생님께서 얼마나 한숨이 나오셨겠나. 면암 선생님께서는 민당의 행태를 통렬히 비판하는 상소문을 준비하고 계시네. 이제 더 이상 침묵하지 않으시겠다는 게야.”
“아아, 그러면 마땅히 우리 유생들이 선생님을 중추원으로 모셔야지.”
그동안 개화에 반대하여 지방에서 칩거하던 위정척사파의 대표 최익현, 유인석(柳麟錫)이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 유학자의 오랜 숙원인 청나라를 격파하고 북벌을 성공시켰으니, 더 이상 현 정부를 ‘서양 오랑캐의 앞잡이 정권’으로 규정할 수도 없었다. 완화군과 개화당에 반대하던 유림들도 북벌 성공만큼은 눈물을 흘리며 환호성을 내질렀던 것이다.
“마침내 인묘(仁廟, 인조)와 효묘(孝廟, 효종)의 원수를 갚았도다!”
“우암(尤菴) 선생님께서 그토록 고대하시던 존주대의와 복수설치를 이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만청 오랑캐를 무찔렀으니, 조선이야말로 진정한 중화가 아니겠는가?”
북벌 성공에 만족한 유림들은, 이제 완화군과 개화당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뒤이은 완화군의 ‘찬탈’도 큰 저항 없이 용인했다. 대군주가 오랑캐 청나라에 밀서를 보냈다는 게 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림들도 청나라를 몰아낸 완화군이 황제에 즉위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위정척사파들은 이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이름을 던져 버렸다. 정치를 바로 잡고 삿된 것을 몰아낸다는 위정척사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대신 성리학의 정통과 왕권을 수호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이제 가장 보수적인 유학자들도 체제 밖에서 농성전을 벌이지 않고, 체제 내에 들어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성상의 은혜로 백성의 삶이 그 언제보다 풍요롭습니다. 하오나 토지 문제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성상의 치세에 누가 될까 우려가 됩니다.”
“전 의관, 말이 지나치오. 그쯤 합시다.”
“전 의관은 농민협회 단속이나 잘 시키시오. 그대가 농민협회의 실질적인 지도자 아니오?”
“농민을 긍휼히 여기시는 건 성상의 높은 뜻입니다. 그래서 지조개정을 하고, 양안과 토지조사를 하는 것 아닙니까?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활동은 괜찮으면서 농민협회의 활동은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몰라서 묻는 거요? 농민협회는 이리저리 몰려 다니며 토지 분배 운동, 소작료 인하 운동을 벌이며 정당한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소.”
“쯧, 적당히 좀 해야지.”
전라북도 향회에서 중추원 의관으로 선출된 전봉준은 극히 예외적인 존재였다.
의관의 절대 다수가 향촌 지주와 사대부를 대표하는데, 전봉준만은 확고히 농민을 대표했다.
양안(量案) 위원회, 북방사민(北方徙民) 위원회에 농민 대표 위원으로 참가한 전봉준은 농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양안과 사민을 주장했다. 자연히 지주 출신들은 전봉준에 거부감을 가졌다.
중추원의 보수성에 실망한 전봉준은, 중추원 의관 선거에 재출마 하는걸 포기했다. 애초에 전라북도 향회에서도 그를 다시 선출할 생각도 없었다.
“중추원에 대한 기대는 접었소. 대신 앞으로 민의원이 설립될 예정이니, 여기에 기대를 걸어 봅시다.”
전봉준은 중추원 대신 광무 4년으로 예정된 민의원(民議院) 선거에 기대를 걸었다. 민의원은 중추원보다 훨씬 민의를 대표할 기관이 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문제는 선거법을 제정할 정부와 중추원의 주류가, 농민에게까지 투표권을 확대하는 것에 지극히 인색하다는 점이었다. 민의를 대표한다는 독립협회조차 부정적이었다. 투표권은 상층 계급에만 주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전봉준은 농민협회의 방향을 경제 운동에서 참정권 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고심했다. 민의원에 농민 대표자가 있어야 토지 문제의 해결이 용이할 것이라 생각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이선은 의회를 수립하기로 했다. 중추원은 영국의 귀족원(상원), 민의원은 서민원(하원)을 모범으로 삼아 설립될 예정이었다.
9월 2일, 먼저 중추원 관제가 개편되었다.
제 1조. 중추원은 다음 사항을 심사하여 논의해서 정하는 처소로 한다.
일, 법률·칙령의 제정·폐지 혹 개정에 관한 사항.
이, 내각에서 논의를 거쳐 상주하는 일체 사항.
삼, 칙령으로 인하여 내각으로부터 자문하는 사항.
사, 내각으로부터 임시 건의에 대하여 자문하는 사항.
오, 중추원에서 임시 건의하는 사항.
육, 인민이 헌의(獻議)하는 사항.
제2조. 중추원 임원은 다음으로 구성한다. 의장 1인, 부의장 2인, 의관 97인, 참서관 3인, 주사 5인.
제3조. 의장은 대황제 폐하께옵서 성간(聖簡)으로 칙수(勅授)하시고, 부의장은 중추원 공천에 의해 선출한다.
제4조. 의관 중 3할은 정부에서 국가에 공로가 일찍이 있는 자로 회의에 추천하고, 7할은 각 도 향회 의원 중 30세 이상인 사람으로 정치·법률·학식에 통달한 자로 투표 선거한다.
제5조. 중추원의 임기는 5년이며, 연임이 가능하다. ……
“중추원을 양원제에서 법률의 심의를 논하는 상원으로 정하고, 영국과 일본의 귀족원이나 독일 연방참사원의 역할을 수행한다.”
입법권을 행사할 예정인 민의원과 달리 중추원의 역할은 법률의 심의와 국정 자문으로 한정되었다.
보수주의자들과 지방의 여론을 수렴하고 대표하는 기관으로 삼되, 그 이상의 권한은 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중추원에게는 법률 거부권이 있지만, 정부나 민의원에서 재의결하면 거부권이 무력화되었다.
정부의 거수기 역할을 하게 되는 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큰 권한이 없는 중추원이지만, 광무 2년의 3대 중추원 선거는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정부에서 논의하여 제정할 대한국 헌법과 민의원 선거법 등, 향후 대한제국의 국가 방향을 정할 여러 법안의 심의를 3대 중추원이 맡을 예정이었다.
더욱이 이선은 이번 중추원 선거에 대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였다.
“3대 중추원 선거는 황성에 한하여, 간선제가 아닌 직선제를 실시한다. 칙선 의원 30명 중 20명을 황성에서 직선제 의원으로 선출한다.”
1900년에 실시될 전국 선거에 대비하여, 가장 근대화가 잘 진행된 황성에 한해 직선제를 도입했다.
이선은 황제가 임명하는 칙선의원 30명 중 10명을 헌법조사위원회의 몫으로 남겨두고, 20명은 직선제 몫으로 양보했다.
이에 따라 황성 대표 중추원 5명에 20명을 더해 25명이 대한제국 최초의 직선제를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황은으로 협회에서 주장하던 직선제 선거가 도입되었으니, 참으로 감읍할 따름이오.”
“중추원 그 자체에는 큰 권한이 없으나, 내후년 민의원 선거에 대비하여 세력을 결집시킬 필요가 있소.”
“민의원 선거의 전초전이라고 생각하고 선거 운동에 돌입합시다.”
올해 황성의 정치 운동을 양분했던 독립협회와 황국협회는 지도부 핵심이 외국 공사로 전출되었으나, 여전히 대중 조직은 살아 있었다. 이들은 중추원 선거전에 돌입했다.
“성상께서 헌정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시니, 우리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소.”
“이제 개화당을 정식 정당으로 개편합시다.”
“김홍집 대감과도 연대를 해야 할까요?”
“그래야겠지. 성상께서 그걸 바라시는 것 같던데.”
“김홍집 대감도 바라던 바일 거요. 정부 고관들은 많이 있어도, 개화당과 달리 대중 조직이 없으니까.”
개화당이 소장파의 독립협회와 주류파로 분열되자, 개화당은 동도서기파와 연대하는 길을 택했다.
양 정파의 지도자 김옥균과 김홍집이 논의한 끝에, 헌정협회(憲政協會)가 출범했다.
“헌정협회는 위로는 성상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민의를 대표하여, 대한국에 이성적인 입헌 정치가 실현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헌정협회 총재는 총리대신 김홍집, 부총재는 외무대신 박영효, 사무총장은 내무대신 김옥균, 재무총장은 탁지대신 어윤중이 맡는다.”
“동지들, 대한국의 입헌 정치를 위하여!”
헌정협회는 출범과 동시에 사실상 정부 여당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헌정협회 지도부는 대부분 내각의 고관들이었고, 정부 정책을 주도하는 이들이었다.
9월과 10월, 두 달에 걸쳐 선거인 명부가 정해졌다. 성년 남성으로서 만 25세 이상, 국세 연간 15원 이상 납부, 국민개병 제정 이후 병역 의무 해당자 중 의무 수행자, 범죄 경력 없는 자로 한하여 선거권이 주어졌다.
그 결과, 황성 시민 30만 중 약 1만 명이 선거인으로 확정됐다.
보통 선거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중추원의 구성 방식은 고관과 귀족들 중 칙임의원과 호선의원으로 선출되는 일본 귀족원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광무 3년 11월 5일, 대한국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다! 투표권이 있는 이들은 신성한 투표권을 행사하시오!”
겨우 25인을 선출하는 자리였으나, 민의원 선거의 전초전으로 여겨진 만큼 분위기는 과열되었다.
민의원 출마 예정자를 제외하고, 각 협회는 지도부 중심의 중추원 출마자를 결정했다.
“이성적인 입헌 정치의 시행을 위하여, 헌정협회를 선출하자!”
“자유와 민의를 대표하는 정치를 위하여, 독립협회를 선출하자!”
“지엄한 군상대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황국협회를 선출하자!”
대부분 무소속으로 구성된 지방 의관들과 달리, 황성은 협회 간의 치열한 선거전이 벌어졌다.
단, 농민협회는 중추원 의관 선거를 포기하고, 전국 조직을 구축해 다가오는 민의원 선거를 준비하기로 했다.
11월 5일, 황성에서 중추원 선거가 시행되었다. 1만 여명의 유권자들 중 무려 98%가 투표권을 행사했다.
이틀 뒤인 11월 7일, 황성부는 투표 결과를 발표했다.
“광무 2년 황성부 중추원 선거 결과를 발표합니다. 헌정협회 13석, 독립협회 8석, 황국협회 4석.”
투표 결과는, 황성이 역시 전국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걸 보여 주었다.
정부 여당인 헌정협회가 13석으로 과반을 차지했으나, 진보 야당인 독립협회가 8석으로 그 뒤를 달렸다.
헌정협회는 근대화를 추진한 정부 여당이고, 독립협회는 최대 지지 기반이 근대화와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도시민이니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었다.
황국협회는 지방에 기반을 두고 있고, 폭력 사태를 주도한 만큼 4석이나 얻은 것도 선방이었다.
“만족스러운 결과요. 내후년 민의원 선거에서도 압도적 과반을 달성합시다.”
“만약 투표권이 더 확대되었더라면 독립협회가 더 많은 득표를 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민의원 선거는 다를 것이다. 전국선거를 시행하면 황국협회에 유리하다.”
각 정파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선거 결과를 해석했다.
1899년, 광무 3년 1월 2일.
제3대 중추원이 소집되었다.
만민공동회의 급진적인 청년 운동가로부터, 옛 위정척사파의 최익현과 유인석에 이르기까지 그 정치적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의장으로는 조병세 공이 칙수되고, 부의장으로는 최익현 공과 유길준 공이 선출되었습니다.”
황제는 의관 중 최연장자인 72세의 원로대신 조병세를 의장으로 임명하고, 의관들의 투표로 부의장은 최익현과 유길준을 선출했다.
위정척사파의 대표인 성리학자 최익현과 변법개화파의 대표인 자유주의자 유길준이 부의장석에 나란히 앉는 것만으로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듯 했다.
“면암 대감과 동렬에 서게 되어 영광입니다. 함께 성상의 성총을 잘 보좌해나갔으면 합니다.”
최익현은 ‘민당’의 우두머리인 유길준은 서양 오랑캐와 다를 바 없다 여겼으나, 유길준이 먼저 인사를 하니 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골에 살던 편벽한 늙은이가 뭘 알겠소? 단지 성상께 충성을 다하고자 하오.”
다만 최익현은 유길준이 청하는 악수는 응하지 않았다. 유길준이 머쓱해하며 목례하자, 최익현은 그때서야 답례했다.
“황제 폐하께서 중추원에 친림하시었습니다. 일동, 기립!”
의관 전원은 황제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여 예의를 표했다.
이선은 답례하고, 의장석 위에 마련된 황제의 자리에서 선포했다.
“짐은 중추원 관제에 의거하여, 제3대 중추원의 제1회 회기를 선포하는 바이다.”
일제히 박수가 쏟아졌다.
이로써, 상원으로 개편된 중추원의 회기가 시작되었다. 의회 정치의 역사도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