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64
– 264화에 계속 –
264화 헌법과 민권
대한국 헌법은 군주가 제정하는 형태의 흠정헌법이므로, 황제의 제복을 입은 이선이 직접 칙유(勅諭)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대한국 대황제는 칙유한다. 짐은 조종(祖宗)의 유업을 계승하여 자주독립을 이룩하고 천명을 받들어 제위에 올랐다. 아! 너희 충량(忠良)한 신민은 열성조께서 성덕으로 다스린 신민이요, 곧 짐의 친애하는 신민, 대한의 국민임을 깊이 헤아리는 바이다…….”
이선은 8월의 무더운 날씨에도 단 위에서 칙유문을 엄숙히 낭독했다.
“군상대권은 짐이 조종으로부터 이어받아 이를 자손에게 전하는 바이다. 짐과 짐의 자손은 장래 이 헌법의 조문에 따라 이를 행함에 있어 그르침이 없을 것이다. 짐은 우리 국민의 권리를 귀하게 여기고, 이를 보호하여 이 헌법과 법률의 범위 안에서 그 향유를 완전하게 하리라.”
문무백관과 중추원 의관은 부동자세로 칙유문의 낭독을 들었다.
“짐과 정부 대신은 이 헌법을 시행하는 의무를 가지며, 현재와 장래의 국민은 이 헌법에 대하여 영원히 준수의 의무를 가진다. 짐과 정부, 국민은 일심동체로 조종의 유업을 계승하고, 대한의 자주독립과 헌정을 공고히 하여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 나가자. 짐은 대한국민을 깊이 신뢰하는 바이다.”
이선은 환구단 밖에 있는 국민을 향해 외치듯이 말했다.
“이에 광무 3년 8월, 헌법을 제정하여 그 뜻을 밝히고, 짐의 후사 및 국민과 그 자손들에게 영원히 순행(循行)하는 바를 널리 알린다.”
칙유문의 낭독이 끝나고, 이선은 헌법 제정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선은 흠정 대한국 헌법 전문을 내각 총리대신 김홍집, 중추원 의장 조병세에게 전달했다.
정중한 자세로 헌법을 받아든 김홍집과 조병세는 돌아서 문무백관과 중추원 의관을 향해 외쳤다.
“대한국 만세!”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헌법 만세!”
“대한국 헌법 만세!”
문무백관과 중추원 의관들이 일제히 만세 삼창을 외쳤다.
이는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899년, 19세기의 끝자락에, 대한제국은 동양에서 두 번째로 헌법을 제정했다. 이로써 입헌 군주국과 헌정 체제의 시작을 알렸다.
바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다.
개국기원절인 8월 14일은 공휴일이었고, 이튿날인 15일도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전국민과 헌법 반포의 기쁨을 함께 누리기 위함이었다.
헌법 제정은 개화파와 민권파를 막론하고 크나큰 기쁨이었다.
각 언론은 호외를 발행해 헌법 제정의 역사적 의의를 알렸다.
“호외요! 호외! 대한국 헌법 제정!”
“황제 폐하, 대한국 헌법을 환구단에서 반포하시다!”
자유주의 성향의 ≪황성신문(皇城新聞)≫은 이날의 기쁨을, 사장 남궁억(南宮檍)이 집필한 사설을 통해 묘사했다.
헌법이란 무엇인가? 국가의 근간이며 기초다. 오로지 이 근간과 기초가 있기에 국가를 비로소 국가로 칭할 만하고, 인민을 비로소 인민이라 칭할 만하다.
만약 이 헌법이 없다면 국가는 무너지기 쉬운 흙더미에 불과하며, 인민은 잡다한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헌법이란 반드시 군주와 인민의 대표자가 서로 논의하고 참여한 끝에 공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대한국 헌법에서도 민의원을 소집하여 공포하기로 한 것이다.
황제 폐하의 성덕과 황실의 번영을 무궁히 보존하고, 인민의 복지를 영원토록 다지기 위해서는, 군주와 인민이 정말로 일심동체가 되었다는 증거를 천하와 후세에 보여 주어야 한다. 바로 이 증거가 인민의 대표자인 민의원의 헌법 비준이다.
황제 폐하께옵서 장차 소집될 민의원에 친림하시어, 민의원은 폐하께 상주하고, 폐하께서는 이를 재가하시어 헌법을 공포하신다면, 대한 역사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 우리 2천만 동포는 오늘의 일을 깊이 기억하여, 황제 폐하의 지극한 성은에 보답하고 대한국 헌법을 지켜 나가자!
동문학을 졸업해 서양 언어를 익히고, 유럽에서 외교관으로 재직한 남궁억은 다양한 사상을 접했다.
멀리는 영국의 정치 철학자 로크,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루소, 가까이는 일본 민권론자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남궁억은 유려한 필치로 헌법의 역사적 의의를 논했다.
헌법이야말로 근대적 입헌 국가의 성립, 천부인권과 자유민권의 첫걸음이라 생각했던 자유주의자들에게 이날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헌법 만세!”
헌정협회, 독립협회, 황국협회, 농민협회, 혹은 어떤 협회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도 거리로 나아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이오! 어찌 이런 날 술잔을 높이 올리지 않겠소?”
“개국기원절과 헌법 제정을 축하하며, 마십시다!”
“주모! 여기 탁주 한 사발! 아니, 있는 술 다 가져오쇼!”
“이것 봐요! 거 지난 외상값도 다 갚지 못하면서 그 무슨 허세야?”
“어허, 이런 경사에 무슨 외상 타령이야! 때 되면 다 갚게 될 거라니까!”
“흥! 그 핑계로 또 돈 떼어먹으려고!”
“아니, 여보, 오늘만은 괜찮소. 나 김 모는 일개 술장수에 지나지 않으나, 국가의 경사가 무엇인지는 안다오. 오늘 손님들 술은 모두 내가 대접하겠소. 함께 마음껏 취하며 즐깁시다!”
“하하! 역시 김 형은 애국자요.”
“암, 차기 민의원에 출마하셔야지! 으하하!”
“으이구, 저 모자란 양반! 대체 헌법인지 뭔지가 우리랑 무슨 상관이라고!”
“어허, 헌법은 우리 국민 모두가 기뻐할 일이오! 주모도 그만 투덜거리고 술이나 마시쇼.”
헌법의 역사적 의의에 진심으로 감격하여 기뻐하는 지식인이든, 그저 나라에 경사가 있다고 하니 의미가 무엇이든 함께 즐거워하는 평범한 백성들이든, 전국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8월 15일, 경운궁에서는 헌법 제정 기념 축연이 열렸다.
황실과 정부 고관, 각국 외교관이 축연에 초대를 받았다.
“폐하, 헌법 제정을 축하드립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명실상부한 헌정 국가가 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은 실로 근대 문명의 충실한 계승자요, 동양 여러 나라의 모범입니다.”
각국 외교관은 헌법의 제정을 축하했다.
대한국 헌법이 여러 헌법을 방대하게 참조하여 제정했고, 이는 헌법의 모범이 된 각국으로선 기쁜 일이었다. 주된 참고 대상이 된 프랑스, 독일, 일본 공사가 특히 만족함을 표했다.
외교관들이 더욱 감탄하는 건 헌법의 진보성이었다.
대한국 헌법은 흠정헌법이라 서양의 민정헌법보다는 보수적이지만, 10년 먼저 제정된 메이지 헌법보다 더 진보적이었고, 모태가 된 서양의 흠정헌법에 더 가까웠다.
“불과 얼마 전까지 헌법은커녕 근대적인 법률조차 없었던 나라인데, 제국 선포 직후에 입헌 체제까지 확립할 줄이야.”
“한국인의 빠른 습득에 새삼 감탄할 따름이오.”
“황제께서 그만큼 진보적이고 적극적이니.”
서양인들의 찬사에 개화파 인사들은 기뻐했다.
이는 이선과 개화파가 근대적 헌정의 도입을, 단순히 근대화의 이상만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현실적인 이유도 상존했다.
“이제 우리도 인치가 아닌 법치를 갖춰야 하네.”
“근대적 법치 체계를 갖추어야, 진정한 자주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
서양 열강이 강요한 불평등 조약 체제하에 있는 동양 국가들은, 조약 개정을 열망했다. 그럴 때마다 열강은 동양의 법 제도가 미비하여 치외법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형법이 미비하니 영사 재판권을 철폐할 수 없고, 민법과 상법이 미비하니 관세 자주권을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게 이들의 논리였다.
이 억지를 불식시키려면 강한 국력과 근대적 법치 체계를 갖춰야 했다.
1894년, 조선은 공식적으로 대명률과 대전회통을 폐기하고 형법대전(刑法大全)을 반포했다.
갑신경장으로 이미 자의적인 법 집행을 막고 사법의 독립을 천명했고, 10년의 고심 끝에 형법이 반포된 것이다.
법무대신 유길준과 이준을 비롯한 법학 유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근대적 형법을 대륙법을 기반으로 한 근대식 형법으로 고쳤다.
형법 시행은 사법의 독립과 ‘원님 재판’의 종식을 의미했다.
형법 반포와 재판소 구성법에 따라, 전국적으로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황성과 전국 13도, 10곳의 개항장에 지방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재판소가 없는 곳에는 최소한 순회 재판이 이뤄지게 했다.
황성과 평양, 부산에는 고등 재판소가 설치되어 상고심을 맡았다.
1898년, 최종적으로 황성에 최상위 법원인 평리원(平理院)이 설치되어 대법원 역할을 수행했다.
이로써 근대적 법치가 시작되었고, 열악하기 짝이 없었던 사법 제도가 일신되었다.
형법에 이어 기본법인 헌법 제정까지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헌법을 제정한 다음에는, 민법과 상법을 제정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동안 조선의 기본법 역할을 했던 경국대전도 신헌법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국가의 여러 개혁 조치 중에 백성 입장에서는 가장 와닿는 것이, 바로 조세 제도의 개편과 사법 제도의 일신이었다.
“예전에는 사또 마음대로 처벌했었는데, 이젠 절대 그럴 수가 없게 됐네.”
“덕분에 억울한 사람들이 확 줄어들었지. 법치가 전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말이야, 이제 알겠어.”
물론 근대적인 형법이 제정되었더라도, 여전히 옛 양반들, 부유한 자와 지식인이 유리한 구조였다. 이들이 새로 형성된 재판관과 검사를 독점했고, 변호사는 아직 극히 드문 직종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는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형법대전과 대한국 헌법은 모든 국민에게 법 앞의 평등을 약속했고,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부여했다.
1884년 갑신경장으로 공식적인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신분제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국민개병과 국민 교육이 점차 사람들의 의식을 전환시키고, 이는 독립전쟁의 승리와 대한제국 선포로 결실을 맺었다. 승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모두 자신이 새 제국에 일정 지분이 있다고 믿었다.
“옛날 최진사댁 덕쇠 말이야. 자원입대해서 공을 세웠더니 지금은 어엿한 진위대 장교일세.”
“전장에서 전공을 세웠으면 그럴 만도 하지.”
“장 서방이 개항장에 나가서 그렇게 성공했다며? 돈을 긁어모은다던데.”
“캬, 진짜 이제는 출세와 돈이 주인인 세상이 왔구만. 양반님네들도 다 소용 없어.”
옛 노복 출신으로 전장에서 공을 세워 장교로 진급한 이가 금의환향하는가 하면, 하층민 출신으로 부를 축적해 옛 양반을 부리는 자들도 있었다.
평민이지만 옛 ‘과거’에 해당하는 관리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출세의 가도를 타는 이도 있었다.
아직 이런 사례는 아직 드물었지만, 누구나 노력하면 신분에 상관없이 ‘입신출세’ 할 수 있다는 신화는 교육열을 불타오르게 했다.
특히 급격히 팽창하는 근대적 관료 조직과 신흥 부르주아 계층은 신분과 관계없이 능력 위주로 출세했기에, 본인의 재능과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었다.
“함부로 때리지 마십시오! 나리도 국민이지만, 저도 국민입니다!”
“뭐야? 이놈이 감히 건방지게! 누가 네놈에게 그렇게 가르치더냐?”
“황제 폐하께서 그리 정하셨다고, 협회에서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 황제 폐하의 신민이자 헌법이 보장하는 대한국의 국민이라고!”
“이런, 어휴……. 정말 말도 안 되는 시대가 왔구만.”
황제라는 말에 양반도 감히 어쩔 수가 없었다.
향촌 사회에서는 여전히 양반의 지배력이 강하다고 해도, 옛날처럼 아랫사람을 함부로 막 대할 수는 없었다.
1890년대 후반에 국민 교육이 완전히 정착하고, 민권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 전국적으로 ‘협회’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사람들의 의식도 변화해 갔다.
사람들은 점차 법이 부여한 권리를 인식하게 되었고, 점차 인치를 받는 ‘백성’에서 법치를 받는 ‘국민’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선은 느리지만 확고히 변화해 가는 시대적 흐름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갑신경장 이래로 15년간 차분히 노력해 왔던 결과가 마침내 결실을 맺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한국 헌법, ‘광무 헌법’이라 불릴 첫 헌법을 아시아에서는 가장 진보적으로, 하지만 자신의 원래 생각보다는 훨씬 보수적인 흠정헌법으로 결정했다.
“시대적 흐름을 선도하는 건 좋지만 너무 앞서 나가는 것도 곤란해. 급진은 언제나 반발과 반동을 부를 수 있지. 국민의 의식을 향상시켜 차근차근 토대를 쌓아 나가야 한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선은 최측근인 김옥균에게만 속내를 드러냈다. 한때 급진개화파의 선두주자였던 김옥균도, 오래 정부 일을 맡으면서 점차 현실에 집중했다.
“나는 새 헌법의 수명을, 20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네. 앞으로 20년이 지나 1919년이 되면, 민권의식이 함양된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여 성장해 나갈 것이야. 그때가 되면, 진정한 민의에 근거한 헌법을, 국민 국가의 완성을 창출해 낼 수 있겠지.”
이선은 언제나 역사의 진보와 시대의 흐름을 고려했다.
1899년에 확립된 헌법과 헌정 체제는, 약 20년에 걸쳐 시험을 할 생각이었다.
20년이 지나 1919년이 되면, 비로소 이선이 구상하는 국민 국가의 완성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9세기의 끝자락, 지금은 바야흐로 헌법과 민권이 태동하는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