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65
– 265화에 계속 –
265화 북방 개척운동
1895년, 1차 동아시아 전쟁 종전 이후 조선은 만주 영토를 확보했다.
압록강 너머 요동에 약 2만 2천 제곱킬로미터, 두만강 너머 간도에 약 3만 3천 제곱킬로미터.
영토를 확보하고 이선이 북방 시찰을 마친 이후, 정부는 적극적인 북방 사민(徙民) 계획을 구상했다.
“우리 왕조 초기, 세종 대왕께서 4군 6진을 개척하시고 백성들을 사민 시켰습니다. 그렇기에 압록과 두만은 조종의 확실한 영토가 될 수 있었습니다. 새로 확보한 북방 영토도 그 전례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무작정 사민을 추진했다가는 반발만 클 것입니다. 농민들은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라, 고향을 떠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자발적 이주자에게 미개척지를 불하하는 형태로 사민을 유도해야 합니다.”
정부는 북방개척위원회를 구성하고, 구체적인 사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선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귀국한 후, 세종 시기의 사민 정책, 러시아의 극동 이주 계획, 일본의 북해도 이주 계획을 참고하여 북방 사민이 실시되었다.
“기존에 월경하여 거주하던 우리 백성에게 경작권과 토지 소유권을 그대로 인정한다. 요동에 주둔하는 4여단과 간도에 주둔하는 5여단을 중심으로, 둔전을 실시한다. 향후 3년간, 북방 개척에 나선 자발적 이주자에게는 미개척지 불하와 면세 혜택을 부여한다.”
길림 동남부, 간도는 애초에 인구가 희박했고, 소수의 만주족 부재지주와 조선 월경자들이 대다수였다. 이 지역에는 별다른 조치 없이도 조선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청국령이었던 시절에 조선에서 간도로 이주한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범월죄인’이었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이들을 북방 개척의 선구자로 치켜세웠다.
이들은 대개 만주족 부재지주에게서 소작을 받아 황무지를 개척했으나, 수확을 올리게 된 이후부터는 청조의 지방관과 지주가 보낸 마름, 마적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국경 지대는 특히 청조의 지배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해 마적들이 들끓었고, 길림의 관리들은 백성 보호는 하지 못하면서 세금은 뜯어 가서 원성이 자자했다.
전쟁과 할양으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다. 부재지주들이 떠나게 된 빈자리를, 자영농은 정식으로 소유권을 인정받고, 소작농들은 부재지주들의 토지를 분배받았다.
요동 주둔 4여단과 간도 주둔 5여단은 본래 평안도 진위대와 함경도 진위대가 기반으로, 이들에게는 다른 부대와 달리 전방 수호와 둔전(屯田)의 의무가 하달되었다.
이 지역에 복무하는 병사들은, 퇴역 후에도 요동과 간도에 정착하길 원한다면 토지 불하의 우선권자가 될 수 있었다.
정부는 농민들에게 북방 이주를 권장했다. 특히 권장되는 곳은 요동이었다.
봉천 동남부, 요동 지역은 간도와 상황이 판이하였다.
이 지역은 봉금령이 해제되기 이전부터 청국 농민들이 흘러들어 왔던 곳이었다.
1870년대에 있었던 화북의 가뭄과 흉년은, 화북 주민의 만주 이주를 촉진시켰다.
1881년 공식적으로 봉금령이 해제되자, 더 많은 한족 빈농들이 만주로 향했다. 주로 요동의 바다 건너 산동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봉천 일대를 중심으로 정착을 시작했다.
본래 만주 거주가 허용되었던 만주족 기인(旗人)을 제외하고, 만주 지역의 민인(民人)에 해당되는 수는 1840년 166만, 1864년 319만, 1884년 474만, 1894년 540만으로 점차 증가했다.
한족의 만주 이주 행렬에 찬물을 끼얹은 건 1894년 동아시아 삼국 전쟁의 발발이었다.
특히 요동은 삼국 전쟁의 주된 전장이 되면서, 전쟁의 참화를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했다. 조선군과 일본군, 청군의 전투가 계속 이어지고, 청군이 청야전술을 구사하면서 파괴되지 않은 지역이 드물었다.
대부분 산동 출신으로 소작농인 청국 농민들은 전쟁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1895년 전쟁이 끝나자, 태자하(太子河) 이남 지역은 조선에 할양되었다.
조선 국경에서 봉황성, 천산산맥(千山山脈) 이남 지역은 한족 인구가 드물었다. 하지만 천산산맥 이북, 연산관과 마천령 이북 지역은 이미 한족 농민들이 들어와 정착을 시작한 곳이었다.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할양지를 천산산맥 이남 지역으로 국한하려 했으나, 이선은 안산 철광을 확보할 목적으로 태자하 이남까지 할양지를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되자 조선은 4군 6진 개척 이래 수백 년 만에, ‘이민족’ 인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전쟁 전, 조선이 확보한 영토에는 약 50만의 청국인이 거주했다. 소수의 만주족 부재지주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산동에서 온 한족 빈농으로, 주로 천산산맥 이북 평야 지대에 거주했다.
거주자 중 할양 이후에 조선에 잔류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대다수였다. 피난을 갔던 농민들이 하나둘씩 되돌아왔다. 이들에게는 영토의 주인이 만주족의 청나라냐 조선이냐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에서는 잔류자의 재산을 인정해 주기로 하였으므로, 조선 정부는 이들의 잔류를 일단 허용했다.
물론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만주족 지주들의 소유권은 일단 인정받았으나, 경작권은 새로 이주할 조선 농민들에게 우선시되었다.
경작권을 인정받은 한족 소작농들은 잔류가 허용되었으나, 인정받지 못한 대부분 소작농은 입국을 불허 받고 청국 영토로 추방되었다.
1897년, 광무 원년, 대한제국 정부는 잔류한 청국인들에게 칙령을 내렸다.
“북방 영토는 13도와 마찬가지로, 대한제국의 법으로 통치한다. 남성의 변발호복과 여성의 전족을 금지한다. 모든 거주민은 단발을 하라. 만주어와 한어(漢語) 사용 여부는 개인의 자유로 존중받으나, 관청의 공용어는 한국어로 통일한다. 또한 광무 4년부터는 북방 영토에도 국민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니, 자녀를 학교에 보내야 할 것이다.”
대한제국은 동화 정책을 빼 들었다. 과거 청나라에 이주한 조선 이주민들에게 변발호복과 한어 사용이 강제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국민 교육의 시행은 청국인 2세에게 한국인과 같은 교육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무엇보다 단발령의 시행은 청국인들에게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3도에서 시행되지 않은 강제적인 단발이 이뤄졌다.
만주족은 특별히 ‘변발세’를 내는 조건으로 변발호복을 허용받았으나, 한족을 상대로는 순검과 둔전병이 가위를 들고 돌아다니며 변발을 깎았다.
“조상 대대로 해 온 변발을 깎으라니, 이 무슨 법도인가!”
“애초에 변발이 만주족의 풍습이지, 한족의 풍습인가?”
“여러분이 대한제국의 법률을 존중하는 이상, 대한제국의 동등한 국민으로 대우받을 것이다. 옛 관습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청국으로 돌아가도 좋다!”
결국, 대다수가 단발과 변화를 받아들였다.
최종적으로 대한제국령 요동에 잔류한 구 청국인은 약 20만이었다. 정부는 이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고, 정식 주민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대한제국의 통치는 기존 청나라의 통치보다 훨씬 합리적이었다. 단발과 같은 강압적인 조처들이 뒤따랐다지만, 청나라의 일상화된 무능과 부패에 시달리던 농민들 입장에서 한국의 통치는 선정이라 할 만했다.
양복을 입고 외국어로 명령하는 이민족의 통치가 아니꼬운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만주인의 통치도 받아들였던 이들에게 한국인의 통치라고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
가난으로 인해 고향을 버리고 떠나온 한족 농민들에게 청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고, ‘중국 민족주의’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개념이었다.
“귀관이 반드시 명심할 사항이 있다. 구 청국인들이 대한국 잔류를 선택하고 통치를 받아들인 이상, 이들에 대한 민족적 차별을 가하지 말 것. 대한국의 통치에 반항하는 자들에게만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 그들의 낙후한 인습은 바로잡되, 고유문화를 존중할 것. 청나라의 통치에 비해 대한국의 통치가 얼마나 우월한지 선전할 것. 특히 젊은 세대,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도록 유도할 것. 이들이 자연스럽게 대한국에 충성을 바치도록 해야 한다.”
요동에 파견 나가는 군인, 순검, 관료에게는 황제의 주의 사항이 전달됐다.
승전 이후 청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경멸과 우월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과거에는 청국인을 ‘대국 사람’이라 부르며 존중했다지만, 이제는 야만적인 ‘북방 오랑캐’로 치부했다.
이선은 현지인과 접촉하는 관료들에게 우월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적 실패를 알고 있는 이선으로선, 그들의 실패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시동을 건 동화 정책에 이어, 북방 사민 정책이 본격화되었다.
조선 전기처럼 정부가 강제로 하는 것보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형태가 바람직했다.
특히 이주를 권고하는 충청, 전라, 경상 삼남 지방의 농촌에는 인구 과잉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갑신경장 이후 지조개정과 소작료 인하, 자영농의 증가와 생산력의 향상은 농촌 경제의 안정으로 이어졌다. 농촌 경제의 안정은 자연히 인구의 증대로 이어졌고, 잉여 인구가 발생했다.
1880년 약 700만, 1885년에 1,300만으로 통계가 잡혔던 인구는, 1894년 1,500만, 1899년에는 1,700만에 이르렀다.
이는 행정력의 비약적인 증대로 인해 누락 인구를 모두 호적으로 잡아낸 효과도 있었지만, 1890년대에 이른바 ‘베이비 붐’이 일어난 것과 관계가 있었다.
1890년대에 이르러 시작된 한국의 산업화와 도시화는 농촌의 잉여 인구를 임노동자 계급으로 흡수했지만, 막 형성되고 있는 단계의 산업화 그 자체만으로 인구 과잉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1895년 승전으로 확보한 영토를 개발하고 이주를 촉진하려는 정부의 욕망과 자기 소유의 넉넉한 토지를 보유하고 싶은 농민들의 욕망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이, 북방 개척이었다.
“진취적인 대한 국민이여, 만주에 그대들의 미래가 있다! 만주는 그대들의 손발이 닿기를 기다리는 처녀지가 가득하다! 가자, 만주로!”
정부의 적극적인 선전과 달리, 대다수의 농민은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고향을 떠나길 꺼렸다.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뜻밖에도 예외적인 집단이 만주 이주를 선도했는데, 이는 바로 동학이었다.
1898년, 교조 최시형으로부터 도통(道統)을 계승한 30대의 손병희는 기존의 교단 지도층과 달랐다.
2대 교조 최시형이 초대 교조 최제우의 사면과 동학의 합법화에 교단의 목표를 걸었고 이를 쟁취했다면, 손병희는 동학의 체계화와 근대화를 구상했다.
최시형은 교조사면과 만민평등을 부르짖은 것을 제외하면 비정치적이었고, 개화당 정부의 조처로 최제우가 사면되고 법적인 평등이 이뤄지자 향촌 사회의 종교인으로 남았다.
이에 비해 젊은 손병희는 시대의 변화를 직시했다. 그는 정부의 허락을 받아 일본과 미국을 시찰하며, 세계정세를 살폈다.
특히 손병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건 미국 서부의 개척이었다.
미국의 개신교 주류로부터 이단으로 몰렸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즉 모르몬(Mormon)교가 미국의 서부인 유타주에 정착하여 교세를 확대하는 것을 보고, 손병희는 상당한 영감을 얻었다.
최제우와 최시형은 ‘동학’을 내세우며 ‘서학’, 즉 기독교와 서양 문명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나, 손병희는 서양의 방식을 일정 부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비록 동학이 합법화되었다고는 하나, 유림과 지주들은 우리를 이단으로 여기며 사갈시하고 있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소. 향촌 사회에서 지주들을 굴복시키든가, 아니면 유림의 영향력이 없는 곳에서 우리의 이상향을 건설할 것인가.”
동학의 합법화 이후에도, 유림과 지주들은 기독교보다 동학을 더 이단시하고 혐오했다.
향촌 지배층 입장에서 기독교는 정부에서 부르짖는 서구화와 관계가 있었고, 사적 소유권의 인정이란 측면에서 마음에 들 요인이 충분히 있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 온 선교사들과 개종자들이 기독교 개종은 곧 ‘근대 문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외치며 지식인들을 공략했다.
기존의 기독교가 중하층 계급을 주로 공략했다면, 근대화의 진전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가톨릭 개종을 기화로 상층 계급에서도 기독교로 개종하는 수가 점차 늘어났다.
하지만 동학은 달랐다. 여전히 동학은 하층민, 특히 삼남지역 농민들의 믿음이었다. 합법화 이후 교세가 점차 확산하고 있었다지만, 향촌 지배층의 반발과 경쟁자인 기독교의 공세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손병희는 두 가지 전략을 취했다. ‘농민의 대변자’인 전봉준과 손잡아 농민협회를 창설해, 농민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농민협회가 커질수록, 지배층이 보내는 의심의 눈길은 더 강해졌다.
정치투사인 전봉준과 달리 종교인인 손병희는 이런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은퇴했던 최시형은 전봉준과 손을 끊으라고 손병희를 압박했다.
“기껏 오랜 노력 끝에 합법화됐는데, 반정부 세력으로 몰리면 곤란하다. 정부에서 북방 개척운동을 실시하고 있으니, 차라리 이쪽에 힘을 싣는 게 좋지 아니한가? 새로운 땅 북방에서 인내천과 후천개벽을 이뤄내자.”
손병희는 스승의 명을 받아들였고, 1899년 2월 동학 지도부를 평양에 불러 모아 집회를 열었다.
“북방은 인내천의 꿈을, 후천개벽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이상향이다. 올해는 교조께서 깨달음을 얻은 지 40년이 되는 해로, 새로운 전환의 시대가 온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도 이는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향촌 사회의 잠재적 갈등 요인이었던 동학이 만주 이주에 나서 준다면, 북방 개척과 정치 안정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이룰 수 있었다.
새로운 토지를 얻으리라는 사회 경제적 기대와 인내천의 이상이 이뤄지리라는 종교적 기대는 동학을 믿는 농민들의 북방 이주를 촉진하게 하였다.
1899년 한 해 동안, 삼남 지방에 거주하던 상당수의 동학교도가 만주 이주에 나섰다. 당국은 이들에게 미개척지를 불하하고, 독자적인 공동체의 형성을 허락했다. 그 수는 대략 30만에 달했다.
동학의 집단 이주는 이를 믿지 않는 농민들도, 특히 빈농들에게 자극을 주었고, 점차 북방으로 나아가는 달구지 행렬이 이어졌다.
본격적인 북방 개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