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66
– 266화에 계속 –
266화 사상누각(沙上樓閣)
대한제국이 헌법 반포까지 순조롭게 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청나라는 무술변법(戊戌變法)으로 무너져가는 국가를 살리기 위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광서제와 변법파가 아무리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한다 한들, 이미 청조의 힘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대내외적인 상황은 악재만 거듭하고 있었다.
변법파가 서구화 개혁을 할수록,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침탈당한 민심은 더욱 흉흉해져 갔다.
1899년, 광서 25년 초, 광서성(廣西省).
베트남과 국경이 접한 광서는 프랑스가 세력권으로 여기는 곳이었고, 청·불 전쟁 당시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흑기군이 준동하여 치안이 불안정한 곳이었다. 흑기군은 청 조정의 무장 해제 요구를 거부하고 광서와 계림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광서에서 프랑스 선교사 두 명과 천주교도들이 폭도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폭도들은 잔혹하게 난도질한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이는 마치 1899년의 대혼란을 예비하는 사건이었다.
“선교사의 순교를 보상하라! 청국 정부는 선교사의 안전을 보장하라!”
가톨릭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프랑스에게, 선교사 살해만큼 좋은 명분이 없었다. 프랑스는 청 조정을 압박해 광주만(廣州灣)을 조차하고, 반복되는 선교사 살해에 관해 대책을 취하라고 요구했다.
프랑스에 이어 독일, 영국, 미국도 중국 전역의 선교사를 보호하는 특단의 조치를 가하라고 압박했다. 배상금 지불과 근대화 개혁에 필요한 막대한 외채를 빌리고 있는 청 조정은 열강의 압박을 이기기 힘들었다.
“중국 전역의 천주교 선교사에게 관함(官銜)의 지위를 부여한다.”
1899년 3월, 청 조정은 열강의 요구대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중국 전역의 선교사들에게 지방 통치자와 동급의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주교는 총독이나 순무와 같은 반열에 서고, 신부와 선교사도 부현(府縣)의 장관과 같은 지위를 누리게 했다.
이 조치는 천주교 선교사들에게 허락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최혜국 대우에 의하여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도 같은 대우를 해 주게 되었다.
서양 외교관과 상인에 이어 선교사에게까지 특권을 부여하니, 당장 이들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각지의 선교사들은 지방 병력의 호위를 받을 수 있었다.
서양과 기독교가 청 조정보다 위에 있다는 게 명확히 드러나자, 조정의 권위는 더욱 실추했다.
기독교를 믿는 중국인은 대개 사회의 하층민이 많았다. 신 앞에서의 평등을 약속했고, ‘교회 밥’을 제공했다. ‘교회 밥을 먹는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교회에서 빈민에게 자선을 제공하는 건 좋은데, 문제는 금전적 이유로 기독교를 믿게 된 신자 중에는 이익을 노리는 기회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교회를 등에 업고 이웃을 괴롭히고 법망을 피했다.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하늘이 두렵지도 않으냐!”
“그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천주님께서 이미 죄 사함을 내리셨다!”
“미친놈, 개소리 작작 해라!”
“아니꼬우면 너도 천주님 믿던가?”
기독교도와 일반인 사이에서 분쟁과 소송이 발생하면, 선교사들은 당연히 기독교도 편을 들어주었다.
“오, 요셉 형제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얼마나 신실하고 훌륭한 주님의 자식인지 아십니까?”
선교사들은 관함 지위를 이용해 지방관에게 영향력을 행사했고, 만약 거절당하면 본국의 외교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게 싫은 지방관들은 대개 들어주기 마련이었다.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에 대한 증오는 지방의 향신이나 하층 농민을 가리지 않았다.
아편전쟁 이래 60년간 누적된 상처와 치욕이 점차 표면으로 드러났다.
반(反)서양, 반기독교 여론은 더욱 강경해져 갔다.
“저 사악한 서양 귀신 놈들에게 빌붙은, 더러운 앞잡이 놈들.”
유교적 정통을 자부하는 향신들은 기독교를 중국의 전통을 파괴하는 이단으로 여겨 혐오했다.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향신들에게 기독교는 공존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여겨졌다.
“중국의 모든 불행은 저 양귀 놈들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하층 농민의 증오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중국 땅에서 특권을 자랑하며 우쭐거리고 돌아다니는 외교관,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 선교사, 자신의 사리사욕만 챙기려는 상인들은 가난한 농민의 복수심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의 경제적 위기는 사회 불안을 가속시켰다.
불평등 조약 체제에서 청나라는 관세를 5% 이하로 고정했고, 외국 수입 상품의 대량 진출을 허용했다.
면포만 해도 중국 무명 가격의 3분의 1 정도였다. 이러니 경쟁이 될 리 만무했다.
중국 시장을 지배하는 외국 수입 상품은 가내 수공업을 무너트렸고, 수많은 노동자가 실직했다.
청조는 양무운동 시기에 산업 육성을 위해 노력했지만, 미약한 중국의 산업은 서양의 산업에 도저히 경쟁이 될 수가 없었다.
서양 열강은 시장 규모가 작은 일본이나 조선과 달리 중국이 독자적인 산업화를 이루는 걸 원치 않았다. 중국은 열강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거위가 황금알 낳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위해 쓰려 한다면, 거위 주인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려 줘야지.”
서양이 원하는 중국이란 거대한 시장, 막대한 원료 공급처였다. 서양이 중국에 가하는 외압은 일본이나 조선에 가하는 외압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변법파는 양무운동의 실패를 깨닫고 근본적인 개혁을 하려고 시도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청조가 근대화를 위해 노력할수록, 더 심한 위기에 시달렸다.
1899년 현재 중국의 무역 적자는 7,000만 냥에 달했고, 예산 적자도 2,000만 냥에 달했다. 청 조정의 1년 세입은 8,900만 냥이었으나, 각종 지출은 1억 800만 냥이었다. 여기에 막대한 외채의 이자도 있었다.
조·청·일 전쟁의 패전 이후 청나라가 지불해야 할 막대한 배상금도 재정 적자의 한 원인이었다.
적자에 관한 균형은 세금 증대로 이어졌고, 이 부담은 결국 백성들의 어깨로 짊어져야 했다.
뿐만 아니라 서양이 부설한 철도는 중국의 전통적인 교통수단이었던 대운하를 무력화시켰고, 연안 도시의 수많은 사람이 직업을 잃게 만들었다.
가내 수공업은 파산하고, 농촌 경제는 몰락했으며, 국내 상업은 나날이 쇠퇴했다. 수많은 사람이 현실을 저주했다.
“이게 사람이 사는 건가? 더러운 세상.”
“확 뒤집혀 버렸으면 좋겠다.”
“이게 다 양귀 놈들과 이에 굴종하는 조정 때문이다.”
심하게 착취당한 백성들은 비밀결사로 위안을 얻었는데, 바로 이 비밀 결사들이 청조를 위협할 세력으로 떠오를 예정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필 이 무렵에는 자연재해까지 빈발했다.
유사 이래 수없이 물줄기를 바꾼 황하는, 1852년 하남에서 산동으로 물길이 바뀌었다. 이후 황하는 자주 범람했고, 황하의 치수 문제는 심각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1898년, 황하는 다시 대규모로 범람해 산동의 마을 수백 개를 잠기게 했다. 재해의 피해자만 해도 100만이 넘었다.
수해는 장강과 회하에서도 발생해 사천, 강서, 강소, 안휘 등에서도 논밭을 침수시켰다.
수해로 1년 농사를 완전히 망쳤으니 기아가 덮쳤고, 굶주리고 위생은 최악이니 역병도 함께 도래했다. 그중에서도 광범위한 타격을 입은 산동의 피해가 가장 컸다.
“백성들은 굶주리는데, 대체 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
“왜 이런 재앙이 잇달아 벌어지는 줄 아나? 하늘이 노했기 때문일세!”
“양귀들이 이단사교를 선전하고 공자와 부처, 조상 숭배를 못하게 막으니 신령들께서 어찌 노하지 않으시겠는가?”
“하늘만 노했는가? 땅도 마찬가지일세. 양귀들이 그 철도라는 걸 부설할 때, 땅에 사는 용맥을 훼손시키고, 광물을 얻으려고 산을 파헤쳐 산의 기운을 몰아내지 않았는가!”
“바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파괴했기 때문에, 이런 재해가 발생하는 걸세!”
“양귀를 이 땅에서 몰아내지 않는다면, 이런 재해는 계속 반복되겠지!”
재해와 재난은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을 심고, 유언비어에 취약하게 만든다.
온갖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중국인들은 미신에 심취하는 이들이 많았고, 하층민일수록 더욱 그랬다. 이들은 손쉽게 증오의 대상을 찾아냈다. 주된 증오의 대상은 양귀(洋鬼), 즉 서양이었다.
서양을 몰아내야 한다는 배외감정이 폭발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들의 막강함은 북경을 함락시킬 정도였고, 그 강대해 보였던 청조마저 굴복시켰다.
군사적으로 서양을 이길 수 없다는 현실성의 재기는, 미신이 압도해 버렸다.
“중국은 천지신령이 보우하는 나라다.”
“역사상 중국에는 얼마나 많은 영웅이 있었는가? 이들의 혼백이 우리와 함께한다.”
산동을 중심으로, 비밀 결사와 무장 폭도를 결합한 의화권(義和拳)이 퍼져 나갔다.
의화권은 이미 가경 연간에 대반란을 일으킨 백련교의 분파, 팔괘교에서 갈라져 나온 결사였다.
의화권이라고 해 봐야 실상 칼을 찬 건달들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미신과 배외감정을 선동하여 그 세력을 급속도로 넓혀 갔다.
의화권을 믿는 ‘권민(拳民)’들은 백성들은 선동했다.
“옥황상제, 무예의 신 관우, 지략의 신 제갈공명, 서초패왕 항우의 영혼이 우리와 함께한다.”
“100일간 훈련하면 총상을 입지 않을 수 있고, 400일간 훈련을 하면 하늘을 날 수 있다.”
“열심히 수련하고 정진하면, 이들의 혼백이 우리 몸에 깃들 것이다. 주문을 외우고 의식을 행하면 천병과 천장이 하늘에서 강림할 것이다!”
그야말로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선동이었지만, 의화권은 절망에 빠진 수많은 민중의 참여를 불러일으켰다.
의화권은 산동의 대도회(大刀會)와 결합하여 세력을 더욱 불렸고, 의화단(義和團)으로 개칭하여 서양 선교사와 기독교 신도들에 대한 공격을 선동했다.
“외국 놈들은 대모자(大毛子), 중국인으로 기독교를 믿고 양무에 종사하는 앞잡이들은 이모자, 서양 물건을 쓰는 자들은 삼모자. 이 모자들은 모조리 죽여 없애야 한다.”
“한 마리 용, 두 마리 호랑이, 삼백 마리 양을 모조리 잡겠다고 맹세하자!”
한 마리 용은 곧 광서신정을 주도한 광서제, 두 마리 호랑이는 양무와 변법을 대표하는 이홍장과 강유위, 삼백 마리 양은 서구화를 추진 중인 북경의 조정 관료들을 의미했다.
서양 열강과 기독교에 굴종적으로 구는 청 조정은 이제 더 이상 충성의 대상이 아니었다.
의화단은 옛 비밀 결사의 반청복명(反清復明),에서, 반청멸양(反清滅洋)을 들고 나왔다.
대반란의 조짐이 시작되었다. 1898년 말에서 1899년에 이르기까지, 잇달아 산동과 하북 각지에서 난동과 교회 습격 사건이 벌어졌다.
북경의 광서제와 변법파 조정은, 민심의 이반(離反)에 관해 알고 있었다.
서태후와 수구파들은 ‘이게 다 변법파가 중국의 강상과 전통을 무너트렸기에’ 발생한 일이라고 비난했다. 서태후와 수구파는 아무것도 안 하고 비난만 하는 것만으로 여론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그동안 누적된 막대한 재정 적자와 자연재해는 집권한지 채 1년도 안 된 광서제와 변법파의 책임이 아닌, 이전 정권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현재 집정자는 분명히 그들이었고, 결국 책임소재도 그들의 몫이었다.
이제 변법과 신정은 무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황이었다. 멈춰서 내렸다간 잡아먹히기 십상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정의 영이 지방에서 서지 않는다는 것이오.”
“의화단이란 폭도 무리가 산동에 횡행하는 것도, 산동 순무가 조정의 명을 거역하고 제대로 진압을 하기는커녕 은근히 싸고돌기 때문 아니오!”
“이랬다간 열강의 더 큰 간섭을 받게 될 것이오.”
“조정의 명을 무시하는 지방관부터 교체해야 합니다.”
의화단에 우호적이었던 산동 순무 장여매(張汝梅)가 파직되었다.
이윽고 변법파는 황제가 불과 작년에 재임명한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 이홍장을 멀리 떨어트리려 했다.
직례의 군권을 가진 이홍장이 황제와 서태후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 준 덕에 변법파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홍장은 시간이 갈수록 변법파의 개혁에 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홍장은 변법파의 조급성을 수차례 비판했다.
점점 이홍장이 변법과 거리를 두자, 광서제는 보다 변법에 우호적인 인사로 북양대신을 교체하고 싶어 했다.
“법국이 광주만을 점령하고 광서, 광동의 민심이 계속 혼란스럽소. 법국과 협상을 잘 이끌어 내고, 혼란스러운 민심을 잠재울 만한 사람은 중당밖에 없소. 부디 짐의 청을 들어주길 바라오.”
“…… 신 이홍장, 삼가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양광총독 담종린은 변법에 부정적인 인사였다. 프랑스와 분란을 일으키고 광서와 광동의 민심을 다독이지 못한 죄로 담종린을 경질한 광서제는, 이홍장을 양광총독으로 전임시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다.
말이 전임이지 좌천이나 다름없는 인사에 이홍장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여전히 청조에 대한 충심이 남아 있는 노신으로선 황명이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광동으로 떠나면서, 이홍장은 어쩌면 다행이지 싶었다.
‘분명히 올해가 가기 전에 변란이 일어난다. 북양대신 자리에 남아 있더라면 결국 선택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북경에 멀리 떨어진 남방에서 차분히 정세를 조율하는 게 차라리 낫다.’
77세의 노쇠한 이홍장은, 제당과 후당 사이에서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황제와 변법파 애송이들에게 이대로 계속 정권을 맡겼다간 나라가 망할 판이지만, 그렇다고 태후와 만주 권귀들이 다시 집권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늘은 끝내 대청을 저버리려고 하는가?’
남쪽으로 향하는 배 위에 서 있는 이홍장은 근심에 잠겼다. 태평천국을 진압하고 양무운동을 이끌던 장년 시절의 패기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가 오랫동안 충성을 바쳐 온 청조의 쇠락이 눈으로 보였다.
중앙 권력의 형해, 지방의 이탈, 민심의 이반, 경제의 붕괴, 외세의 간섭, 거듭되는 자연재해, 반란의 조짐.
전 중국이 폭발 직전이었다. 누군가 불씨를 당기면 터질 상황이었다.
한때 천하를 제패하고 군림했던 대청제국은 이제 사상누각(沙上樓閣), 모래 위의 성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