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69
– 269화에 계속 –
269화 이상향 만주
청나라에서 발생한 서태후의 정변은 대한제국과 세계에 전해졌다.
열강은 개혁적이고 서양에 우호적인 광서제와 변법파의 몰락에 아쉬움을 느꼈지만, 청나라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는 않았다. 이미 서태후에게 대세는 기울어졌던 것이다.
이선도 ‘500일 유신’의 종결에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일이라 놀랍진 않았다.
“오히려 짐의 생각보다 오래 갔네. 그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500일이나 변법이 진행됐으니.”
“이제 서태후와 수구파들이 정권을 장악했으니, 서구화에 관한 반동으로 분명히 배외 정책으로 일관할 것입니다. 장차 큰 분란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김옥균의 우려에 이선이 쓴웃음을 흘렸다.
“일어나겠지. 머지않아.”
“그렇다면 미리 대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삼국 조약 6조에 따르면, 각국에 내란 발생 시 동맹국은 개입할 의무가 있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이 6조에 해당하지 않을까요?”
“아니, 지금은 아니지. 명목상 서태후가 황제와 조정을 내세워 장악한 상황이니, 내란 상황이라 할 수 없네. 아직까지는 지방 총독들도 서태후에게 복종하고 있고.”
“조약 당사자인 러시아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러시아도 지금 당장 개입할 생각은 없네. 차르에게 때를 기다리라고 권했지.”
이선은 이미 러청조 조약의 당사자인 니콜라이 2세와 조율을 맞춰 두었다.
섣부른 개입은 오히려 일을 망칠 수 있었다.
“머지않아 청국 전역에 대규모 내란이 발생할 것이네. 의화단이라는 폭도 무리가 더욱 세를 불려 산동과 하북을 넘어 북경까지 진출하겠지. 서태후와 수구파들은 서양에 맞설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될 거고. 그들이 마음껏 깽판치도록 내버려 두세. 열강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과연…….”
“청국에 내란이 발생하면,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대한국의 지리적 이점이 빛을 발하게 될 테니까.”
이선은 다가오는 광무 4년(1900)이 동양 정세에 결정적인 한 해가 되리라 예측했다.
변혁은, 예상외로 만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무렵, 대한제국령 요동과 간도에는 한국인의 이주가 한창 진행되었다.
특히 동학교도들의 대규모 이주가 진행되면서, 한구인 인구가 희박했던 한국령 만주에 대거 인구가 증가했다. 삼남 지방에서 이주한 약 30만의 동학교도들이 요동에 정착했다.
정부는 동학의 조직적인 이주를 환영했다. 공고한 대로 미개척지를 불하하여 분배하고, 개척 후 일정 기간 동안의 면세를 약속했다.
동학의 3대 교주, 대도주(大道主) 손병희의 지휘 아래 동학의 조직을 이주에 그대로 활용했다.
각 지역의 접주(接主)들을 중심으로 이주할 지역을 결정했고, 마을과 자치 조직을 건설했다.
“열심히 일하여, 신천지 만주에서 후천개벽 인내천의 세상을 만들어 보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종교적 이상과 사회 경제적 욕구가 결합된 동학교도들은, 만주에서 이상향을 건설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했다.
동학의 놀라운 전환에는 3대 교주 손병희의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순방하며 근대 문명을 체험한 손병희는, 기존처럼 ‘동’을 강조해 ‘서’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동학의 인본사상과 서양의 합리성을 조화해 근대적 종교로 발전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1898년 도통을 계승한 손병희는 ‘무술(戊戌) 혁신운동’을 일으켜 30만 동학교도들의 단발을 이끌었고, 동학 조직을 농민운동으로 전환했다.
동학 농민운동의 급진성이 정부와의 충돌로 이어질까 우려한 2대 교주 최시형의 개입으로 농민운동은 중단되었으나, 정치 감각이 기민한 손병희는 만주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았다.
동학의 핵심인 삼남 지방에서, 동학은 관(官)과 향촌 유림들의 불신과 갈등을 빚는 천덕꾸러기 신세였으나, 조직적인 이주로 인구가 희박한 한국령 만주에서는 단숨에 주류 집단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손 선생과 동학교도들이 정부 시책에 충실하여 앞장서서 이주와 개간을 이끌고 있으니, 다른 농민들의 이주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관리사 입장에서도 아주 환영할 일입니다.”
“지극한 성은에 보답하고, 만주에서 대한의 위세를 떨치기 위함이지요. 관리사께서 도와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대한제국령 요동 관리사(管理使) 겸 4여단장 권동진(權東鎭) 참장(參將)은 동학의 이주를 반겼다.
1895년 할양 이후, 요동과 간도에는 5년 기한으로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다.
군정은 조선에서 전례가 드문 일이었으나, 전례를 따지면 조선 전기 4군 6진의 지휘관들이 하는 일과 비슷했다.
보다 가까운 건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과 군정지사(генерал-губернатор) 제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관리사의 역할은 러시아 군정지사와 거의 흡사했다.
4여단장이 요동 관리사를 겸하고, 5여단장이 간도 관리사를 겸해 국경 방위와 둔전, 사민 정책과 행정을 지휘했다.
1898년에 요동 관리사로 취임한 권동진은 계획대로라면 마지막 군정 관리사가 될 예정이었다. 군정이 종료되면 본토 13도에 준한 행정 체계가 설립되고, 화인(華人, 한족)과 만인(滿人, 만주족)으로 분류된 구 청국인도 대한제국의 국민이 될 예정이었다.
군정이 끝나기 전, 권동진은 대한제국의 지배를 확고히 굳혀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동학의 이주는 바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마침 1861년생으로 동갑내기인 권동진과 손병희는 의기투합했고, 한국령 만주의 미래에 관해 논의했다.
“손 선생, 내가 보기에 요동에는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있소. 첫째는 국방 문제. 국경선이 길어서 정규군만으로 국경을 다 방어하는 데는 한계가 있소. 국경 너머에는 마적들이 날뛰는데 말이지. 둘째는 사민 문제. 그동안 이주가 적어 개척이 용이하지 않았지. 셋째는 화인과 만인의 존재. 이들을 대한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오.”
“그렇다면 우리가 관리사께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동학 조직을 사민과 개척에 활용하고, 자체적으로 무장하여 군의 방위에 협력하면 어떻겠소? 화인과 만인에게는 동학의 믿음을 전파해서, 그들이 동학교도가 된다면 동질의식을 갖게 되어 다스리기가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싶소.”
“하하, 내가 생각하는 바와 같소. 그럴 수 있겠소? 손 선생께서 힘써 주신다면, 적극 도와드리리다.”
“물론이지요. 동학이 대한국의 변경을 지키는 첨병이 되겠소.”
권동진은 정부에 동학을 활용한 계획에 관해 보고했다.
북방 개척에 동학을 활용한다는 것에 정부 일각에서는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적잖았으나, 사민 정책을 총괄하는 내무대신 김옥균은 권동진에게 그대로 추진할 것을 승인했다.
이로써 동학은 요동 관리사 권동진의 도움을 받아 자체적인 개척 조직을 형성하고, 마적의 침입에 대비해 마을별로 무장까지 할 수 있었다. 동학의 전도사들은 한인 마을을 넘어, 화인과 만인 마을에도 동학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동학 중심의 이주가 한창 진행될 무렵, 만주의 변혁을 이끌 제3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전 중추원 의관, 북방 개척위원 전봉준이었다.
1898년 중추원 재선을 포기하고 농민협회를 설립해 농민운동에 돌입한 전봉준은, 손병희의 동학과 연대하여 조직과 세력을 확대했다.
하지만 최시형의 압력을 받은 동학이 농민협회에서 탈퇴하고, 북방 이주를 감행하자 전봉준으로선 황망할 따름이었다.
3대 중추원은 민의원 선거법에서 농민을 참정권에서 배제할 의사를 분명히 드러냈고, 전봉준은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정부 여당인 개화당과 헌정협회, 지주와 사대부 중심의 황국협회는 물론이고, 진보 야당을 자처하는 독립협회조차도 농민 문제에 관해서는 배타적이었다.
프로이센식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개화당은 지조개정과 조세 개편, 소작료 인하로 분명 농촌 경제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농민에 관해서는 ‘세금을 내라, 군대를 가라, 그리고 닥쳐라!’는 프로이센식 지배를 유지했다.
영미식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독립협회의 지향점은 기본적으로 도시민과 상공인 중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였다. 이들에게 농민은 논외의 존재였다.
“분명히 개화 정책으로 도시는 훨씬 부유해지고, 농촌도 확연히 진보했다. 하지만 농민의 대다수는 여전히 가난하다. 빈농들이 도시로 들어와 도시 빈민이 되고, 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해결책은 경자유전 원칙의 토지 개혁으로, 자작농을 육성해 농민 경제를 튼튼히 하는 것이다.”
전봉준에게 있어 농민 참정권은 토지 개혁을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농민이 참정권을 얻어야 정부든 의회든 농민을 위한 정책을 추진할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나 의회는 당분간 농민에게 참정권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고, 농민들도 딱히 참정권에 관한 욕구가 없었다.
“아니, 나랏일은 다 높으신 분들이 하는 거지, 우리 같이 땅이나 파먹던 놈들이 어떻게 나랏일에 간섭하나요.”
“우리 임금님이 성군이셔서, 예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소?”
“내 소유의 땅이 생기면 좋기야 하겠죠. 근데 땅 가진 양반들이 그냥 내주겠어요?”
“의관 나리처럼 우리를 대표할 사람이 있으면 고맙죠. 근데 의관 나리가 분투해도 정부나 중추원 나리들이 말을 듣기나 하나요?”
농민 대다수의 무관심에, 전봉준은 더욱 좌절감을 느꼈다.
정부와 정치 조직들이 농민협회를 따돌리고, 여기에 동학까지 나가 버리니 농민운동을 이끌 동력이 확연히 떨어졌다. 협회를 통한 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전봉준이 좌절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황제에 대한 충심과 믿음 덕이었다.
동학의 탈퇴로 농민협회가 힘을 잃고 고심에 빠져 있을 때, 이선은 전봉준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전 의관, 짐이 듣기로 그동안 농민협회를 이끄느라 노고가 많았더군. 근황은 어떠하오?”
“성상의 은혜로 무탈하오나…….”
전봉준이 차마 입을 떼지 못하자, 이선이 먼저 말했다.
“동학교도들이 북방으로 이주한 일로 실망이 큰가 보군.”
“황공하옵니다.”
“분명 전 의관도 북방 사민위원회의 일원이었지. 이번 기회에 경도 만주에 가보는 게 어떻겠소?”
“예? 하오나…….”
“만주에는 미개척지가 많소. 본토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서 토지 개혁을 손쉽게 시행하기가 어렵지. 하지만 만주라면 이야기가 다르오. 만주에서는 토지 분배가 가능하고, 실제로 진행되고 있소. 경이 직접 참여하여 농민들을 위해 제대로 집행될 수 있도록 하고, 장차 대한국의 토지 개혁에 참고했으면 하는군.”
“폐하, 그 말씀은……!”
순간 전봉준은 눈을 빛냈다.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대한국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짐의 치세에 토지 개혁을 단행할 생각이오. 그러기 위해 그동안 진행되었던 양안과 토지 조사였지.”
“폐하……!”
전봉준이 감격한 듯 고개를 조아리자, 이선은 웃었다.
“하하, 하지만 말했다시피, 수많은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에 단숨에 시행할 수 없소. 경제적 기득권을 조정하는 건, 정치·사회적 기득권을 조정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지. 그러니 무언가 확실한 계기가 필요하오.”
“확실한 계기라 하오시면?”
“지난 독립전쟁의 승전과 같은, 모든 국민이 만족할 만한 대외 원정의 승리를 거둔다면, 토지 개혁을 진행할 원동력을 얻게 될 것이오.”
대외 원정의 승리는 전국적으로 민족주의와 애국적 열망을 폭발시키고, 토지 개혁을 통한 기득권의 반발을 최소화로 누를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짐의 생각으로, 그때는 멀지 않았소. 그러니 경은 만주로 가서, 대한국의 모범이 될 만한 토지 정책을 이끌어 주었으면 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신 전봉준, 성상과 대한국을 위하여 목숨을 다 바쳐 충성하겠나이다.”
전봉준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과연 우리 황제께서는 성군이시다. 정부와 중추원이 감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모든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신다. 성상이 아니면 누가 토지 개혁을 고려하겠는가?’
전봉준은 본래 유학을 익힌 사람이었다. 동학과 교류하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고, 근대화의 영향으로 서양 사상도 익혔다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세계관은 유학에 기반했다.
맹자의 왕도 사상과 주나라의 정전제(井田制)를 모범으로 토지 개혁을 구상했던 전봉준은, 점차 사상의 영역을 확대해 근대적 사상을 받아들였다. 러시아 인민주의(Narodniks)의 토지 분배론과 미국 지공주의(地公主義, Georgism)의 토지 공개념에도 영향을 받았다.
황제로부터 북방 개척위원으로 임명된 전봉준은, 만주에서 이상향을 개척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요동으로 향했다.
북방 개척위원으로 요동에 도착한 전봉준은, 요동 관리사 권동진 참장과 간도 관리사 이범윤 참장에게 협조하고 견제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전 공, 요동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황성과 삼남에서 못다 했던 일을 이곳에서 이루고자 왔습니다.”
“바라던 바입니다.”
갑작스러운 농민협회 탈퇴로 전봉준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던 손병희는 전봉준의 만주행을 환영했다. 손병희와 전봉준은 다시금 손을 잡았다.
황제가 친히 임명한 북방 개척위원은 관리사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라, 전봉준은 북방 사민 정책의 주요 사항에 관여했다.
본래 ‘농민의 대변인’으로 명망이 높은 데다, 동학과도 관계가 있는 전봉준은 단숨에 대한제국령 만주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아, 군왕은 어질고 신하는 올곧으며, 백성은 충성하며 힘껏 일하니, 바야흐로 왕화(王化)의 천도(天道)를 이끌 수 있지 않겠는가!”
1899년의 첫 수확이 이뤄지자, 전봉준은 기뻐하며 외쳤다.
그 스스로 정체성을 조선의 농민으로 여기는 전봉준에게, 북방의 미개척지를 개척하고, 황무지에 씨앗이 싹트게 하는 것은 크나큰 기쁨을 주었다.
만주는 그가 꿈꿨던 이상향으로 나아가는 첫 시도였다.
가을의 수확이 이뤄질 바로 그 무렵, 중국에서 발생한 격동이 만주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격동의 폭풍이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