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73
– 273화에 계속 –
273화 녹두장군 전설
광무 4년 4월의 화창한 봄날.
북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봄에 접어든 황성을 뜨겁게 달아올랐다.
“호외요! 호외! 만주 회인에서 만인대가 청군을 격파!”
“녹두장군 전봉준, 청의 길림군을 격파!”
신문은 경쟁적으로 회인 전투의 승리를 보도했다.
만인대는 패배를 위장해 지리적으로 유리한 협곡으로 청군을 유인했고, 혼강(渾江)과 오녀산(五女山) 사이의 협곡에서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녹두장군이라 불리는 전봉준은, 독립전쟁에서 몇 달간 하사관 교육을 받은 게 전부이다. 하지만 타고난 군재(軍才)로 만청을 상대로 빛나는 승리를 이끌었으니, 그 지략은 가히 을지문덕에 비할 만하다!”
전봉준과 만인대에게 낯뜨거운 찬사가 쏟아졌다. 사실 그 자신이 알면 당치도 않다,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신문들은 회인 전투가 일방적인 만인대의 압승으로 묘사했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혼강을 넘은 길림군은 무작정 오녀산 협곡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 일대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에, 길은 소로라서 대군을 운용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만인대의 거듭된 퇴각에 승세를 잡았다고 착각한 길림군은, 기껏 가져온 대포와 기관총까지 속공에 방해된다고 후방에 놔둔 채 진격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는 전봉준의 유인책이었다. 만인대는 분지에 포위망을 형성했다.
서전에서 만인대의 규모를 과대평가해서 졌다면, 이번에는 만인대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해서 패배를 자초한 것이다.
“적군이 보인다!”
“적이 완전히 포위망에 들어오면 그때 사격하라!”
탕! 탕! 탕!
“니미, 망할 놈들! 명령 없이는 쏘지 말라고 그리 말했건만!”
“젠장, 그냥 공격해!”
전봉준의 전략과 달리, 이번에도 만인대의 손발은 맞지 못했다. 길림군의 선봉이 포위망에 걸려들자 일부 부대가 무작정 탄환을 쏟아 냈는데, 이게 의외의 역효과를 발휘했다.
“함정이다! 적군이 매복해 있다!”
“협곡에 포위된 것 같다!”
“어쩐지 지형이 좋지 못하니 조심해야 한다고 그리 말했는데……!”
“퇴각하라, 퇴각!”
선봉에 섰던 길림군 기병대가 포위망이 닫히기 전 무작정 기수를 돌려 후방으로 퇴각했는데, 좁은 길을 따라 진격하던 본대 행렬에 부딪히며 엄청난 병목 현상이 발생했다.
공포에 질린 말이 후방을 향해 미친 듯이 날뛰면서, 길림군의 진격로에는 아비규환이 발생했다.
“으아악! 기병대가 미쳐 날뛴다!”
“미친놈들아, 진정해! 우리끼리 다 죽겠다!”
“선봉대가 패해서 도망친다! 모두 도망쳐라!”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길 나가야겠어!”
집단의 공포는 빠르게 전염된다. 이를 극복할 수 있으면 제대로 된 군대라고 할 수 있겠으나, 유감스럽게도 길림군은 그러지 못했다.
길림군은 도망치기 위해 자기들끼리 짓밟고 찌르고 쓰러트리는, 초유의 추태를 보였다.
만인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엥? 저놈들 왜 저러는 거야?”
“아무튼, 공격! 공격하라!”
“와아아아!”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길림군은 만인대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참패했다.
길림군의 완벽한 자멸이었다. 만인대가 직접 사살한 수보다, 길림군이 자기들끼리 짓밟고 쓰러트린 수가 훨씬 많을 정도였다.
승세를 잡은 만인대는, 길림군의 뒤를 추격해 버리고 간 무기들을 노획하고, 회인과 통화를 다시 탈환했다.
전의를 상실한 길림군은, 만인대의 진격을 저지하기는커녕 무조건 동북쪽을 향해 패주를 하고야 말았다.
실상은 길림군의 자멸에 가까웠으나, 이로써 녹두장군의 전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황성신문 호외! 본지 특파원의 독점 취재 종군기 연재!”
호외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가장 주목받는 건 황성신문 기자 신채호(申采浩)의 만주 종군기였다.
“대한국과 만주 – 대한국과 한 줄기 강으로 떨어져 한국 화복(禍福)의 기관을 만드는 지방이 있다. 그 땅은 어디인가? 바로 만주다. ……”
성균관에서 한문학과 역사학을 익힌 신채호는, 민족주의 역사학을 학습한 1세대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유려한 필력과 폭넓은 지식으로 한국과 만주의 역사에 관해 설명했다.
“……지금까지 대강 기록한 만주 역사를 보건대, 한국과 만주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가? 한민족이 만주를 얻으면 한국이 강하고, 다른 민족이 만주를 얻으면 한민족이 쇠약하며, 북방민족이 만주를 얻으면 한국은 그 세력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오호라! 이는 사천 년 이래 바꾸지 못할 정해진 전례가 되었다.”
신채호는 이윽고 지난 독립전쟁의 승리와 만인대의 만주 진격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설명했다.
“본조(本朝)는 오백 년간 만주를 외면하였으나,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성무(聖武)하시어 청국을 격파하고 북벌의 대업을 이루시었다. 이는 고려 태조의 북진, 윤관의 여진 정벌, 최영의 요동 정벌, 효종 대왕의 북벌을 계승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바야흐로 대한국의 흥성은, 만주 진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회인에는 혼강(渾江)과 오녀산 기슭에 쌓은 산성이 있는데, 신채호는 이곳을 졸본성으로 비정(批正)했다.
“오늘날 만인대는 우리 조상의 터전을 수복하고 있다. 만인대가 역사적 승리를 거둔 회인현에는 오녀산성이 있다. 고구려의 동명왕 주몽이 처음 도읍을 정한 졸본성이 바로 이곳으로 추정된다. 그 후에 대무신왕, 광개토가 이어서 일어나 칠천리 강토를 넓히고 큰 제국을 세웠으니, 비록 총명예지한 군주의 웅도대략(雄圖大略)에서 나온 바이지만, 또한 그 근거지의 형세가 있었기 때문이니, 만주는 진실로 한국과 중대한 관계가 있는 지방이다!”
사실이 어쨌든 간에, 만인대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지칭한 것은 정치적으로 굉장한 효과를 낳았다.
전봉준과 만인대 지휘부는 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만민평등을 부르짖는 농민운동 지도자에 가까웠지만,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정치적 필요성을 깨달았다.
통화를 확보한 만인대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압록강변의 집안(集安)을 점령했다. 이는 바로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이 있는 곳이었다.
“만인대, 집안으로 입성! 광개토대왕비 앞에서 승리를 자축! 압록강 너머 우리 국민, 만인대의 진격을 열렬히 환영!”
압록강 너머 평안북도 만포와 강계의 주민들은, 만인대의 진격을 환영하며 강을 건너왔다.
이 역시 호외로 보도되면서, 압록강에서 멀리 떨어진 본토의 민족주의적 열기에도 불을 붙였다.
“만인대는 의용군이라지? 나 역시 만인대에 합류하여 고토 수복에 힘을 보태겠다!”
“동포들이여! 가자, 북으로!”
만인대에 합류하겠다는 열혈 청년들이 쏟아졌다. 경의선 기차를 타고 북방으로 몰려들면서, 의주역에는 만인대에 지원하려는 청년들로 들끓을 정도였다.
‘녹두장군’의 전설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특파원을 보내 전봉준과 만인대를 취재하게 했고, 특히 자유민권을 지지하는 야당 성향의 정당과 언론에서 사람을 여럿 보냈다.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특파원을 보내 전봉준과 만인대를 취재했다.
전봉준은 만인대가 언론과 지나치게 접촉하는 걸 꺼렸지만, 꼭 필요하다면 받아들였다.
전봉준을 인터뷰한 프랑스 신문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은, 전봉준의 초상화와 함께 취재 내용이 실렸다.
“전봉준 – 동양의 가리발디?
전봉준의 행보는 위대한 혁명가 가리발디를 연상시킨다. 전봉준의 만인대는 가리발대의 천인대(Spedizione dei Mille)를 연상시키며, 모두 백의를 입고 있는 만인대는 천인대의 붉은 셔츠를 떠올리게 한다. 가리발디가 천인대를 지휘하여,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해방시키고 그 영토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바쳐 이탈리아의 통일(Risorgimento)을 이끌어 냈듯이, 전봉준은 만인대를 이끌고, 만주의 농민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이 주장하는 고토를 수복하고자 한다. 참으로 흥미로운 역사의 재현이 아닐 수 없다. 본지 기자가 전봉준을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혁명가, 가리발디(Garibaldi)와 전봉준을 비교한 일뤼스트라시옹의 보도는 서양에서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전봉준의 대내외적 명성은 하늘을 찌르는 듯했고, 녹두장군의 전설이 형성되고 있었다.
전봉준과 만인대의 행보는 대한제국 정부와 군부의 계산을 완전히 벗어났다. 이들은 당혹감을 느꼈다. 그리고 반성했다.
“반성합니다. 정부가 만인대와 전봉준을 너무 얕본 것 같군요.”
“반성합니다. 군부는 길림군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습니다.”
이선 역시 계산이 틀렸다고 반성의 대열에 합류했다.
‘만인대는 단순한 장기 말이 아니었다. 졸(卒)이 멋대로 움직여 마와 포를 잡고, 장군까지 외칠 기세로군.’
충격적인 참패 소식을 들은 청 조정은,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총리아문은 주청 한국 공사 홍영식을 불러 거칠게 항의했다. 홍영식으로선 한국과 만인대의 유착 관계에 관해서 금시초문이라고 강하게 부정했다.
“만인대를 자처하는 난군의 배후에 귀국 정부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즉시 철수시키지 않으면 전쟁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주한 청국공사 서수붕이 한국 외무부를 찾아 격렬히 항의하자, 외무대신 박영효는 손사래를 쳤다.
“천만에요. 만인대는 귀국의 의화단과 비슷한 무리입니다. 조정을 거역하고 자기들 멋대로 움직이는 집단이지요.”
“대청은 의화단에 신식 무기를 제공해 주지 않소이다!”
“동학에 심취한 일부 상인들이 멋대로 무기를 사들여 전해 준 것입니다. 귀국에도 의화단에 심취한 자들이 그리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순무급 고위 관료들도 협조한다던데. 적어도 대한에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근래 점차 세력을 넓혀가는 의화단의 배후에 청 황실이 있다는 소문은 거의 기정사실이었으므로, 서수붕은 ‘의화단과 만인대가 비슷하다’는 논리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어찌 되었건 대청은 의화단을 통제하려고 노력합니다. 귀국도 만인대를 통제해서 철수시켜주길 바랍니다. 조속히 철수하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대군을 동원해 저들을 반드시 토벌하겠습니다.”
“예, 노력하겠습니다.”
청나라의 항의는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만인대의 배후에 대한제국이 있다는 열강들의 의심은 풀어야 했다.
외무대신 박영효는 각국 공사를 초청하여 해명했다.
“소위 만인대를 자처하는 무리들은, 그 국적은 대한제국이나 국가 정책과는 전혀 무관한 자들입니다. 비교하자면 의화단과 비슷한 무리지요.”
“하지만 만인대는 한국군의 지원을 받아 무장하지 않았습니까?”
“일부 일탈한 장교와 상인들이 무기를 거래하여 넘긴 것입니다. 청국의 일부 관리들이 의화단을 지원하는 것처럼. 의화단이 부청멸양을 외치나, 실상은 폭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인대가 대한제국을 자처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의화단은 중국 내의 서양인이나 기독교를 박해하려고 앞장서고 있지만, 만인대는 오히려 교회를 습격한 만주의 폭도 무리로부터 교인들을 지킨 바 있습니다.”
“동학의 교리가 기독교랑 비슷하다는 말도 있던데.”
“어찌 되었건 만인대는 청국 영내에서 철수해야 합니다. 더 이상 과열되면 안 됩니다.”
“대한국 정부는 만인대를 통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이들을 곧 되돌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청국도 조속히 의화단을 통제해야 할 터인데.”
이선의 지시를 받은 박영효는, 만인대를 비난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의화단 문제를 끌어들였다.
열강은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는 만인대보다, 노골적으로 서양을 적대하고 잔혹한 폭력 행위를 불사하는 의화단을 훨씬 경계했다.
만인대를 해명한 자리는, 결국 각국 공사가 의화단에 관한 우려를 표명하는 자리로 바뀌어 버렸다.
이선 역시, 만인대의 지나친 과열을 원치 않았다. 이선이 바라는 건 의화단의 확산과, 역사대로 서태후가 의화단을 내세워 열강에 선전 포고 하는 것이었다.
정치적, 외교적으로 확실한 명분을 쌓은 후에 청국과 일전을 벌일 생각이었지, 만인대와 같은 방식으로 열강의 주목을 끌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민병대가 청군을 무찌르고 고토를 수복하고 있는데, 대체 군대는 뭘 하고 있는 건가?”
“요동의 4여단과 간도의 5여단이 출병하여 만인대를 도와야 한다! 길림을 시작으로 고토를 수복하자!”
이선은 본국의 확전 여론을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진위대 장병 중 단 한 명이라도 국경을 넘는다면, 그자는 군법재판에 회부해 처단할 것이다! 군대는 동요하지 말고 현재 임무에 충실하라!”
이제 해야 할 일은 사태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선은 만인대와 전봉준에게 밀사를 보냈다.
만인대는 통화를 지나 유하(柳河)에 이르렀다.
만인대는 동북의 여러 현을 통제했다. 지배 영역 내에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현청의 통치를 대체했다. 집강소는 경자유전과 만민평등을 선언했다.
“탐관오리에게 징벌을, 빈민에게는 식량을!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만민평등! 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다! 형제들이여, 우리와 함께 싸우자!”
만인대의 선전에 한인들은 물론이요, 청국인들까지 만인대에 합류하겠다고 몰려들었다.
만인대의 숫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역설적으로 전봉준의 골치는 더 아파졌다.
식량을 공급하는 문제도 컸고, 숫자가 늘어날수록 통제받지 않는 자들도 많아졌다.
“만주 권귀의 앞잡이들을 처단하자!”
“사람들이 굶어 죽건 말건 제 배만 불리는 지주 놈들, 모조리 죽여라!”
일부 만인대 가담자 중에는 사적인 복수를 벌이는 자들도 늘어났다.
“사적 제제는 엄격히 금지한다! 우리는 의를 위해 싸우는 정의로운 군대지, 개인의 복수를 위해 싸우는 도적 떼가 아니다!”
전봉준은 사적 제제를 엄금하겠다고 포고령을 내리고, 일탈자를 처벌해 치안 유지에 힘을 썼다.
직접 경험해 보니, 통치라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군대를 이끌고 싸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몇 개 군현과 수십만의 주민을 다스리는 것도 어려운데, 2천만 국민을 다스린다는 건…….’
전봉준은 다시 군사적 상황에 집중하기 위해, 지도로 눈길을 돌렸다.
유하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길림성의 성도 길림이요, 서쪽으로 향하면 봉천성의 성도 봉천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청군도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전봉준은 현실을 직시했다. 오합지졸 길림군은 운 좋게 격파했지만, 봉천군은 만인대가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었다.
지도를 보며 고심하던 전봉준에게 사람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