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8
– 28화에 계속 –
28화 접촉
이선은 최고급 호텔에서 더없이 편하게 지냈다. 베베르의 엄포 덕인지, 지배인과 직원들은 이선을 깍듯이 모셨다.
투숙객에게 제공하는 음식도 입에 잘 맞았다. 매일 호텔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즐기는 게 중요한 일과였다.
‘러시아에 와서 느낀 건데, 일단 빨리 키부터 커야겠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워낙 키가 작아서 이걸 후천적으로 극복하려면 서양식 식습관밖에 없다!’
이선은 어머니로부터 미모를 물려받아 인물은 준수했지만, 할아버지 대원군과 아버지 고종이 단신(短身)이어서 성장을 못 할까 걱정되는 마음이 들었다.
‘표트르 대제는 키가 2미터가 넘었다지? 이홍장도 180센티미터가 넘겠던데. 나도 앞으로 그 정도는 커야지.’
이 시대 동양인들 중에 드물게 키가 큰 이홍장은 서양인들 사이에 서도 체격이 밀리지 않았다. 그러니 더욱 위압감을 주었던 것이다.
러시아에 온 후에야 마음껏 양식을 먹을 수 있게 된 이선은, 유제품과 육류 중심으로 열심히 먹었다.
‘성장기에 잘 먹어서 빨리 크자.’
“대감은 서양 요리가 입에 맞으시나 봅니다.”
“내가 적응력이 좀 빨라서. 여기서 내놓는 식사는 서양에서도 고급이니 맛있게들 먹어요.”
양식이 익숙하지 않은 안영흠이나 장무영과 달리, 이선은 능숙한 나이프와 포크질로 포식을 했다.
디저트로 나온 밀푀유와 홍차까지 러시아식으로 먹으며 정찬을 마쳤다.
“아, 잘 먹었다. Хорошо! вкусно! спасибо! (좋아요! 맛있어요! 고마워요!)”
양복을 입은 동양 소년이 실컷 포식한 후에 어설픈 러시아어로 말하니 사람들도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호텔 안에선 영어가 제법 잘 통했지만, 앞으로 언어가 문제였다. 러시아에서 영어는 프랑스어나 독일어보다 안 쓰이는 언어였다.
그래서 베베르에게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익히려 했지만, 6주 만에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익힌다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프랑스어 독해가 어느 정도 되는 이선인지라 회화도 쉽게 배우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진전이 별로 없었다. 망망대해에서 움직이는 배 안에서는 집중도 잘 안 되고, 제대로 된 교재도 없으니 효과적이지 않았다.
‘어설프게 불어로 말하다 망신당하느니 차라리 영어로 하는 게 낫겠네.’
무조건 달달 외우게 하는 베베르의 낡은 교습 방식은 금방 이선의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베베르도 외국 귀빈에게 강요하거나 혼낼 수도 없어서 점차 설렁설렁 가르쳤다.
‘쳇, 차라리 예쁜 아가씨에게 배웠더라면 의욕도 생기고 좀 나았으려나.’
이선은 문득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시대에 와서 지금껏 내가 어울린 건 모두 나이 많은 아저씨들뿐이잖아.’
이선은 지금껏 의도를 갖고 사교를 했기에, 왕족, 정치가, 외교관, 군인하고만 어울렸던 것이다.
이선은 불과 13세의 소년에 불과했으나, 그 본체는 30대의 이선우였으니 젊고 예쁜 아가씨를 보면 눈이 돌아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욕망을 절제하려고 노력했으나, 특히 러시아에 오고 나니 자연스럽게 눈 돌아갈 미인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났다.
‘아냐. 내가 겨우 13세의 소년, 그것도 조선의 왕자라는 걸 잊지 말자…….’
하지만 어린 나이와 조선의 왕족이라는 체면으로 인해 이선은 감히 나서지 못했다. 지금도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이미 시선을 한 몸에 받는데, 여인들과 사교하면 말할 것도 없었다. 쓸데없이 구설에 오를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지학(志學)이라 배우고 익힐 시기이니, 공부나 열심히 하자.’
단발해서 양복을 입고, 유럽행 배에 올라탄 시점에서 이선은 강한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이선은 사교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고, 호텔 카페에서 홍차를 마시며 러시아어 단어장을 펼쳤다.
하지만 공부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젠장, 여기까지 와서 무슨 공부냐. 밖에 나가서 일이나 합시다.”
이선보다 더 넋 놓고 여인들을 쳐다보던 30대의 홀아비 안영흠은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텔로 오기로 약속한 베베르가 오지를 않자, 이선은 직접 만나러 나섰다.
호텔에서 외무부 청사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이선이 나타나자 당연히 경비병이 제지했다.
“6등 문관 천진 영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를 불러 주십시오. 동양에서 온 중요한 일입니다.”
잠시 후, 베베르가 미소를 띠고 청사 밖으로 나왔다.
“공께서 직접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호텔로 진작 찾아가 보려고 했는데, 청나라와의 협상 문제로 요 며칠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선도 웃으면서 답했다.
“아닙니다. 그러실 것 같아서 직접 왔습니다.”
“추운데 서서 이야기하기도 뭐 하니,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지요.”
이선은 외무부 청사의 1층 로비에 앉았다.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초상화가 근엄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귀국 외무부의 비공식적 초청을 받았으니, 책임 있는 위치의 분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책임 있는 위치라 하시면?”
“외무대신이시지요.”
“현재 외무대신 각하께서는 와병 중이시고, 차관께서 장관을 대행하고 있습니다.”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더욱이 차관께서는 아시아국장을 겸임하여 아시아 문제를 전담한다고 들었습니다만.”
러시아 외무대신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A.M.Gorchakov) 공작은 베를린 회의에서 외교적 패배를 당한 후 병석에 누워 있었고, 차관 겸 아시아국장 니콜라이 기르스(N.K.Girs) 남작이 대리로 실질적인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예, 그런데 차관께서는 지금 많이 바쁘십니다.”
“영사께서 저를 러시아로 데려오라고 훈령을 내리신 게 차관 아니십니까?”
“현재 청나라와의 회담 문제로 다른 일은 도저히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아무리 바빠도, 잠시 만나는 것도 안 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베베르는 난감해했다. 청나라와의 회담이 시작되자, 기르스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조선 왕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기르스가 거절한 표면적인 이유는 ‘조선 왕자’의 신분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속내는 청나라와 중요한 회담을 하는데, 북양 대신 이홍장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이선을 따로 만나 청나라의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기르스에겐 미지의 나라 조선보다 청나라가 훨씬 중요한 협상 대상이었다.
베베르가 그런 사정을 설명하진 않았지만, 이선은 대략적인 이유가 짐작이 됐다.
“좋습니다. 차관께서 청국과의 회담 책임자라 저를 기피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실 거면 저를 왜 부른 겁니까?”
“송구합니다. 조선도 러시아의 중요한 이웃이니만큼, 회담이 마무리되면 면담하실 겁니다.”
‘회담이 2월에야 끝날 텐데, 그때까지 뭐 하고 있으라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게 국경 협상 아닙니까.”
“그동안 천천히 러시아 구경이라도 하시면……. 페테르부르크를 다 보시면 모스크바에 가 보심이 어떻습니까?”
“전 여기 관광하러 온 게 아닙니다. 조선 국왕 폐하의 비공식 특사로 왔단 말입니다. 저는 책임 있는 러시아 당국자를 만나 조선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선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비공식 특사 운운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이선의 신분은 상당한 설득력을 주었다.
‘기르스가 안 된다면, 다른 루트를 타야겠군.’
이선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수첩을 꺼내 보았다. 1880년 청-러시아 협상 당시 러시아 당국자들의 목록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 둔 것이었다.
“기르스 공이 안 된다면, 다른 분이라도 좋습니다. 전 외무차관 조미니란 분은 어떻습니까?
“오, 조미니 남작을 아십니까?”
“예, 이름이 특별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혹시 앙리 조미니 장군과는 무슨 관계인지…….”
조미니(Antoine Henri Jomini)는 스위스 출신 군인으로, 프랑스 제국 나폴레옹의 참모이자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1세의 보좌관이었다. ≪전쟁술≫의 저자로, ≪전쟁론≫의 클라우제비츠와 더불어 19세기를 대표하는 전략 이론가였다. 이름이 특별해서 이선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알렉산드르 겐리호비치 조미니 남작께서는 바로 그 앙리 조미니 장군의 아드님이십니다. 외무차관을 지내다 은퇴하고 지금은 황실 외교 자문관을 맡고 계시지요.”
‘어쩐지. 알렉산드르 조미니가 앙리 조미니의 아들이었군. 황실 외교 자문관이라면 오히려 더 잘 됐다. 황제와 접촉하기 더 쉬워질 수 있겠는데.’
“그런데 공께선 어떻게 조미니 장군을 알고 있는 겁니까?”
“저는 서양의 군사 이론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조미니 장군이 집필한 전쟁술도 탐독했었지요. 그 아드님을 만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베베르는 조선 왕자의 폭넓은 지식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알선을 흔쾌히 수락했다.
“전쟁술이 동양에서도 유명하다니, 남작께서 들으시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럼 제가 자리를 마련해 보지요.”
며칠 후, 이선은 베베르와 함께 조미니의 저택에 초대받았다.
알렉산드르 조미니 남작은 러시아로 귀화한 앙리 조미니 장군의 아들로, 아버지와 달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신임을 받아 외무차관으로 오래 재직하며 러시아의 외교 정책을 이끌었다.
외교관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황실 외교 자문관으로 임명되어, 간간히 황제에게 조언을 하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카를 이바노비치(베베르). 그리고 동양에서 온 귀빈.”
올해 66세의 조미니 남작은 이선의 예상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남작 각하, 조선에서 오신 프린스 이선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조선에서 온 이선입니다. 전략가로 이름 높은 조미니 장군의 후예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베베르로부터 이선이 조선의 왕족이고, 부친의 전쟁술을 감명 깊게 읽어 보았다는 귀띔을 받은 조미니 남작은 크게 기뻐하며 흔쾌히 초대를 했다. 그리고 손님을 위해 특별히 선물을 준비했다.
“내 부친의 저작이 동양에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건 귀공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앙리 조미니의 친필 사인이 적혀 있는 전쟁술 원본이었다.
“영광입니다. 저 역시 남작께 준비해 드린 선물이 있습니다.”
이선은 흥선 대원군의 석파란을 전해 주었다.
“제 할아버님께서 그린 동양화입니다. 남작께 드립니다.”
그림에 적힌 한문을 읽지 못하는 조미니는 그저 아름답다며 찬탄을 표했지만, 한문을 읽을 수 있고 동양 정세에 대해 잘 아는 베베르는 놀라운 표정이었다.
“프린스라는 의미가, 문자 그대로 그 ‘프린스’였단 말입니까?”
베베르도 이선이 고위 왕족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대원군의 손자라는 건 곧 조선의 왕자를 의미했다.
“그렇습니다.”
이선이 빙긋 웃었다.
“그럼 진작 말씀하시지 그랬습니까.”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면 밝히려 했지요.”
신분을 과시하고 싶을 만도 하건만, 어리지만 침착한 이선의 자제력에 베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미니와 베베르, 이선은 자리에 착석해서 다과를 곁들여 비공식 회담을 했다. 이들은 이선을 배려해서 영어로 말했다.
“귀공께서는 조선의 왕족이자, 조선 국왕께서 보내시는 비공식 특사라고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게 조선 국왕께서 제 신분을 증명해 주는 문서입니다.”
바로 완화군을 책봉하는 교지였다. 베베르는 새삼 한 번 더 놀라며, 조미니에게 이선의 신분을 알려 주었다.
“이분은 틀림없는 조선 국왕의 아들이십니다.”
“그럼 왕자란 말이오?”
“예, 그렇습니다. 이제 제가 조선 국왕께서 러시아로 보낸 특사라는 걸 믿을 수 있으신지…….”
조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제 믿겠습니다. 이 머나먼 나라에 왕자를 보낼 정도면 중요한 문제겠습니다.”
“하하, 조선과 러시아는 이웃 나라가 아닙니까. 국경을 접한 지 20년, 이제 수교를 논의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부왕께서는 러시아와의 수교 여부를 타진하기 위해,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내가 조선 왕자라는 걸 알게 된 이상, 러시아는 내가 특사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확인할 거야?’
이선은 청나라에서는 하지 않았던 사기를 쳤다. 조선과 교류가 깊은 청에서는 이선의 거짓말이 언제든 들통날 수 있지만, 조선과 수교가 없는 러시아는 확인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이선의 예상대로, 조미니와 베베르는 이선이 정말로 조선 국왕의 비공식 특사라고 믿게 되었다.
“왕자님을 러시아로 파견한 조선 국왕 폐하의 뜻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이 자리에서 계신 분들만 알아주십시오. 아니, 비록 공식적인 문서는 아닙니다만, 조선 국왕께서 러시아 황제 폐하께 보내는 말씀이니, 그분은 아셔야 합니다.”
이선의 의미심장한 말에 조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황실 외교 자문관입니다. 중요한 사안이라면 반드시 황제 폐하께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선 국왕 폐하의 뜻은…….”
이선은 목소리를 낮추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