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80
– 280화에 계속 –
280화 구국 연합군
아편전쟁 이래 대중(對中) 무역에서 가장 큰 비율을 점유하고 있는 영국은, 중국 시장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여겼다. 의화단이 촉발시킨 중국의 혼란을 놔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1899년 10월에 발발한 2차 보어 전쟁(Boer War)으로 인해 남아프리카에 발목이 잡혀 있는 영국은, 단독으로 동아시아에서 전쟁을 벌일 처지가 아니었다.
“대영제국 정부는 청 조정과 복서의 폭거에 맞서, 폭도를 징벌하고 점증하고 있는 중국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연합군 결성을 제안한다.”
영국 정부는 열강 각국에 중국 원정 연합군 결성을 제안했다.
이에 공명하여 연합군 결성을 가장 목청 높이 부르짖은 이는, 독일 카이저 빌헬름 2세였다.
“중국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주권과 평화의 상징인 외교관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는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대 범죄이고, 독일의 신성함을, 짐의 권위를 공격한 것이나 다름없다!”
카이저는 예전부터 자신이 주장해 왔던 황화론이 현실로 드러났음을 주장했다.
국력이 크게 신장하고 있는 독일 제국의 위용을 대내외적으로 보여 주길 원하는 카이저에게,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과거의 영광에 취해 광기를 벌이는 중국에게 독일 제국의 힘을 보여 주자!”
“중국을 정벌하여 케텔러 남작의 복수를 하자!”
“서양, 백인, 기독교 문명은 단결하라!”
호전적인 독일의 여론도 카이저의 외침에 부응했다.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는 중국과 큰 이해관계가 없었으나, 제안을 받아들여 연합군 결성에 동의했다. 청조로부터 두 번이나 조차지 할양을 거부당한 이탈리아는 이번 기회에 조차지를 얻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파리에 있던 의친왕 이강이 살해당한 독일 공사 케텔러 남작의 조문을 위해 베를린을 방문하자, 카이저는 크게 환대했다.
“황제 폐하, 대한제국 황제께서는 케텔러 남작의 서거에 깊은 애도를 표하시고, 우리 공사가 희생된 비보에 동병상련을 느끼신다 하셨습니다.”
“짐 역시 비보를 들었소. 귀국 황제 폐하께 짐의 애도를 전해 주시오. 독일과 한국은 중국에 보낸 전권공사가 살해당했으니,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소. 반드시 중국으로 하여금 대가를 치르게 합시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의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카이저는 공사 살해를 명분으로 삼아 연합군의 주도권을 잡고 싶어 했으므로, 동일한 피해를 입은 한국에도 연합군 동참을 제안했다.
물론 한국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프랑스 공화국 정부는, 중국에서 사목(司牧)하는 성직자들의 참상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다. 잔혹한 범죄 집단인 복서를 징벌하여 프랑스인과 기독교도의 안전을 지켜 내겠다.”
현재 중국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는 바로 파리외방전교회였고, 프랑스인이 다수였다. 프랑스 성직자들의 희생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을 지켜만 볼 수 없었다.
세속주의를 내세우는 프랑스 공화국은 가톨릭교회와 반목을 빚고 있었으나, 선교사 살해를 프랑스의 세력 확장에 늘 활용해 왔다.
연합군 결성에 동의한 유럽 5개국과 달리, 러시아는 초기에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큰 피해를 입은 바도 없고, 무엇보다 청나라와 맺은 동맹 조약이 있다. 연합군 결성에 동의하면 이를 위반하는 게 아니겠는가?”
“오히려 조약 6조에 따르면, 내란 상황에 개입할 명분이 있으니 적극적으로 파병해야 하지 않는가?”
“선전 포고는 청국 황제와 그 정부의 명의로 발표되었는데, 내란 상황이라고 정의하기가 어렵다. 동청철도가 공격당하지 않는 이상 기다려야 한다. 영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에 러시아가 낄 이유가 없다.”
러시아는 이해관계가 만주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외무부는 만주에 의화단이 확산되지 않는다면 연합군 결성에 동의할 필요가 있냐는 반응이었다.
외무부의 반대로 연합군 결성에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차르 니콜라이 2세가 개입했다.
“중국은 이미 내란 상황이다. 저들이 독일과 한국의 공사를 살해하고 열강을 향해 선전 포고했는데, 뭘 유보한단 말인가? 의화단이 동청철도를 습격한 후에야 후회할 것인가? 만주 파병을 준비하라!”
주러 한국 공사 이범진은 이선의 밀서를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했었고, 차르의 결단에 영향을 미쳤다.
……황제 폐하, 바로 이런 상황에 대비해 동맹 조약에 내란 발생 시 개입을 명문화한 6조를 첨가한 것입니다. 이로써 러시아와 한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동청철도의 보호를 명분으로 삼아, 만주를 장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짐의 친우, 이선의 선견지명은 언제나 들어맞는군. 공사, 귀국 황제께 러시아는 준비를 마치겠다고 전하시오.”
“감사합니다, 폐하.”
차르의 명을 받아, 러시아령 대련과 극동에 주둔 중인 군대에 동원령이 내려졌다.
“미합중국 정부는, 혼란스러운 중국의 평화를 되찾고, 중국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위해 구호 원정대를 파견한다.”
미국은 연합군 결성에 동의했지만, 유럽 열강과는 시각을 달리했다.
미서일 전쟁으로 태평양에 교두보를 확보하여 ‘명백한 운명’으로 나아가고 있는 미국은, 필리핀을 토대로 중국 시장 진출을 노렸다.
독립적인 성향의 필리핀 제1공화국 정부는 미국이 조종한 쿠데타로 축출당하고, 미국의 보호를 받는 친미 괴뢰 정부가 수립되었다. 필리핀의 수석고문관이자 민정장관으로 임명된 미국 정치가 태프트(William H. Taft)가 실질적인 필리핀의 통치자였다.
미국은 유럽 열강에 비해 중국 진출이 늦었으므로, 세력 경쟁에 뒤진 자국의 입장을 만회하길 원했다.
1900년 7월, 국무장관 헤이(John M. Hay)의 명의로 ‘문호 개방 정책(Open Door Policy)’을 각국에 통지했다.
미국은 열강 각국이 중국에서 동등한 통상권을 획득하길 촉구하고, 의화단 전쟁을 명분으로 열강에 의해 중국이 분할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영토 보전도 촉구했다.
미국은 연합군에 합류하는 병력도 정벌군이 아니라 ‘중국 구호 원정대(China Relief Expedition)’라고 명명했다.
이는 미국이 정말로 중국 주권의 보호자라서가 아니라, 무능하고 유약한 정부에 의해 명목상 통일 국가를 유지하여, 단일 거대 시장에서 상업적 이익을 누리기 위함이었다.
“영국과 열강의 동의가 있다면, 일본은 청국에 군대를 파병할 용의가 있다.”
일본 역시 연합군 결성을 환영했다. 다만 먼저 나서지는 않고, 열강의 공식 요청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영국은 러시아가 연합군 참여를 내세워 만주로 진격, 만주 전역에 러시아의 권익 확대를 우려했다.
이를 신속히 견제할 수 있는 나라는 일본이라 판단한 영국의 솔즈베리 내각은, 일본에 3차례에 걸쳐 연합군 결성을 촉구했다. 일본의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은 파병에 동의했다.
“이번 기회에 아모이(廈門, 샤먼)를 점령하고, 복건을 세력권으로 확보한다.”
영국의 요청대로 일본은 1개 사단 이상을 파병하기로 동의했지만, 속셈은 달랐다.
미서일전쟁 이후 일본의 대외 정략은 북수남진으로 결정되었다. 정부와 해군은 물론이요, 대륙 진출을 열망하는 육군도 북수남진에 동의했다. 대만을 기반으로, 복건을 세력권으로 확보할 계산이었다.
영국의 희망대로 러시아에 맞서기보다는, 보다 손쉬워 보이는 사냥감을 선택한 것이다.
청나라를 정벌해야 한다는 거센 여론의 동향은, 대한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그 어느 나라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만청(滿淸)의 폭도들이 우리 공사를 참혹하게 살해하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대한은 이미 자주독립국이거늘, 만청은 아직도 대한을 속국으로 여기는가?”
“만청 오랑캐는 조선 삼백 년의 적이다!”
“만청 왕조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이야말로 우리 민족 삼천 년의 적인 것이다!”
“홍영식 대감의 원수를 갚자!”
“연합군과 함께 만청을 토벌하자!”
“심양과 북경을 점령해, 삼전도의 치욕을 완전히 씻고 효종 대왕의 숙원을 풀자!”
“북벌! 복수설치! 고토수복!”
성장하고 있는 한국의 민족주의는, 청 왕조를 넘어 ‘중국’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조선의 반청 의식은, ‘조선을 침략하고 중국을 찬탈한 만주 오랑캐’에 대한 거부감이자, ‘정통 중화를 계승’하자는 입장이었다. 이와 달리 대한제국의 근대적 민족주의는, 독립전쟁과 의화단 사건이 만들어 낸 강렬한 반중 의식으로 인해, 중국 그 자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문명을 내세웠다.
대한제국 정부 역시 가만히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홍영식은 김옥균, 박영효와 더불어 ‘개화당 삼두(參頭)’라 불렸던 인사고, 정부의 핵심 요인이었다. 이들도 홍영식의 복수와 징벌을 원했다.
“홍영식 공의 장례식은, 북경을 점령해 원수를 갚고 유해를 돌려받은 후에 엄숙히 치를 것이오.”
“열강 연합군이 결성되어 북경으로 진격하려 하오. 대한국에도 제안이 들어왔으니, 참전합시다.”
대한제국은 연합군 참전을 결정했다.
단, 그 시기는 서두르지 않았다.
“우리가 서두를 필요가 없소. 한 번에 수락하지 말고 우리의 몸값을 최대한 올려야 하오. 중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라는 유리함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터이니.”
이선은 일본이 그러는 것처럼, 열강의 제안을 받고 단번에 참전을 결정하지 않았다.
북경의 공사관 구역이 포위되어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지리적 위치상 한국, 일본, 최대 러시아가 주력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한제국에서 긴급히 병력을 천진으로 파송해 주십시오. 그리고 귀국 영토에 연합군을 위한 보급항 제공을 부탁드립니다.”
“파병을 준비 중이긴 합니다만, 시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열강과 달리, 전쟁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이 많지 않습니다. 전쟁 비용도 부족하고요. 아, 수송할 함대도 부족하고…….”
“함대는 연합국이 제공하겠습니다. 전쟁 비용이 문제라면, 차관을 제공하거나 보급항 사용에 관한 대가를 넉넉히 지불하겠습니다.”
한국 정부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참전을 주저하는 시늉을 하자, 열강은 애가 탔다.
독일과 프랑스에 이어, 마침내 영국도 전비 부담을 조건으로 대한제국의 참전을 종용하는 상황이 오자, 이선은 참전을 발표했다.
“대한제국군 중에서 최고 정예인 근위부대를 파병해 연합군과 함께할 것입니다. 또한 진남포항을 개방해 연합군을 위한 보급 기지로 사용하는 걸 허가합니다.”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연합군 참여에 동의했다. 근위부대 파병과 중국과 가까운 대동강 하류 진남포 항구를 연합군에 개방하여 보급을 도왔다. 그 비용의 대부분은 연합군이 부담할 예정이었다.
대한제국 군부는 은밀히 계획 중인 만주에 대한 공세는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오직 북경 진격에 합류할 연합군 참여만 발표했다.
이선은 현시점에서 만주 공세를 벌여 열강을 자극할 생각이 없었다. 의화단의 영향력이 만주에까지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니, 만주의 외국인이 위기에 처하면 결국 지리적 위치상 신속히 도움을 요청할 대상은 한국뿐이었다. 열강의 요청이 들어오면 그때 움직일 계획이었다.
“해군의 군함을 모두 천진에 파견, 연합군 함대에 합류시키겠습니다.”
1900년 현재, 대한제국의 해군은 태동 단계였다.
조선 해군은 1888년에 창설되었지만, 국방에 시급한 육군보다 우선순위가 밀렸으므로, 1894년 개전 당시에는 포함 1척과 어뢰정 5척이 전부였다.
1895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청나라로부터 배상금을 지급받은 후 비로소 해군 확장이 시작되었다.
1896년 이선이 사절단을 이끌고 유럽 방문을 하면서 군함 도입을 실시했다.
건함은 워낙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므로, 식산흥업과 육군력 강화에 사활을 걸고 있는 대한제국 정부와 군부는 군함 도입에 관해 모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선이 러시아와 조약 체결 이후, 차르를 설득해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장갑순양함 2척과 방호순양함 1척을 한국에 판매하게 함으로써 해군 예산 문제는 해결되었다.
새로 도입된 3척 중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 장갑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ii Donskoi)함은, 재개장을 거쳐 대한제국 해군 을지문덕(乙支文德)함으로 재탄생했다.
천진항에 대기하다 연합군 함대에 합류, 대고 포대 포격에 함께한 대한제국 군함이 바로 이 을지문덕 함이었다. 북경으로 파견된 육전대도 을지문덕 함 소속이었다.
신생 대한제국 해군의 목표는 연안 방위였고, 실질적인 교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최정예인 근위 여단을 천진에서 연합군에 합류시켜, 북경 진격에 일익을 담당할 것입니다.”
“북방의 2개 사단은, 만주 진격에 대비해 동원령을 내리겠습니다.”
1900년 현재, 전쟁이 임박한 대한제국의 육군은 6년 전 독립전쟁 개전 당시와 비교하면 크게 성장한 단계였다.
1897년, 이선의 명을 받은 군부는 징병령을 확대해, 1904년까지 완편된 7개 사단, 10만의 상비군과 20만의 예비군을 확보할 계획을 세웠다. 무기의 근대화와 훈련의 엄정함도 강조되어, 질과 양의 측면에서 모두 혁신을 꾀했다.
국가 예산과 청나라로부터 받은 전쟁 배상금의 상당액이 다시 군비 확충을 위해 쓰였다.
계획의 중간 지점에 도달한 1900년 현재, 대한제국군의 근대화는 착착 진행 중이었다. 의화단 전쟁은 대한제국군의 변화를 첫 시험할 무대였다.
1900년 7월, 마침내 대청 구국(九國)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미국이라는 세계 7대 열강에, 일본과 한국이 합류해 9개국 연합국이 결성됐다.
세계 패권을 놓고 대립하고 있는 열강이, 그간의 반목을 잠시 접어 두고 연합군을 결성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목표는 몰락의 황혼에 접어든 노(老) 제국, 청조의 수도 북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