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81
– 281화에 계속 –
281화 구원(救援)
소녀 이사(李四)는 원래 이름이 없었다. 그저 이씨네 넷째 딸이라고 해서 이사였다. 대를 이을 아들을 원했던 어른들은 넷째마저 딸이라는 데 실망했다. 어른들은 아이에게 이름도 지어 주지 않았고, 그저 ‘넷째’라고만 불렀다. 이듬해에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넷째는 어릴 적부터 어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이사는 하북의 가난한 농촌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자랐다. 먹을 것이 극도로 부족한 환경에서, 식사의 우선순위는 바깥일을 하는 사내들, 대를 이을 남자아이들이었다. 천덕꾸러기 넷째는 언제나 마지막이었다.
이사는 늘 배가 고팠다. 배고픈 것은 참기 힘들었다. 배고픔을 달래 주기 위해 풀을 씹어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왜소한 체구의 이사는 내성적이었고, 언니들하고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친구도 없었다. 소녀는 대신 혼자 공상하는 걸 좋아했다.
이사는 어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 여주인공들처럼, 자신의 삶은 언젠가 바뀔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날은 오고야 말았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이 있을지니!”
“저 양귀놈, 뭐라고 떠드는 거냐.”
“양귀들의 신인 야소인가 뭔가를 믿으라잖나.”
“흥, 어림도 없는 소리.”
마을 근처에 교회라는 게 생겼다. 검은 옷을 입고 얼굴에는 수염이 가득한 털복숭이 백인과, 역시 검은 옷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무리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교회로 나오라고 떠들고 다녔다.
어른들은 무시했지만, 아이들은 좀 달랐다.
교회에 나가면 먹을 걸 줬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해 설명하겠어요. 예수님은 천주님의 독생자로서,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성경 이야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애들은 대부분 졸거나 딴 짓을 했다. 끝나고 줄 밥과 과자만을 생각하며 버텼다.
이사는 좀 특이했다.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궁금한 점이 있으면 해결해야 했다.
“신은 오직 한 분이라는 거죠? 근데 동시에 셋이기도 하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좋은 질문이에요. 자연스럽게 삼위일체 이야기로 넘어가죠. 성부, 성자, 성령은 일체이니…….”
이사는 기뻤다. 질문을 하면 칭찬을 하고, 수업이 끝나면 먹을 걸 줬다. 어른들은 그녀가 질문을 하면 귀찮게 여기고 집안일이나 하라고 구박했다. 하지만 교회에서만은 그녀를 존중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는 갈수록 어렵고, 지루해졌다. 교회에선 처음처럼 먹을 걸 많이 주지 않았다. 교리 문답을 통과해야 먹을 걸 줬다. 남자애들은 오래 못 버티고 교회 나가는 걸 포기했다.
이사와 여자애 몇 명만이 교회를 계속 다녔다. 그 중에서도 이사는 독보적이었다. 집에서는 교회를 다니는 걸 싫어했다. 이사는 집안일을 마치면, 아이들과 놀러 다니는 척하면서 교회로 빠져나갔다.
“훌륭하다, 얘야. 이제 너는 하느님의 자녀가, 우리의 형제자매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세례를 받아 보는 게 어떻겠느냐?”
“세례를 받으면 뭐가 좋나요?”
“네 모든 죄를 사하고, 새로운 이름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다.”
“새 이름을 얻는다고요?”
이사는 정말로 기뻤다. 마침내 자신이 이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세례명은 마리아로 골랐다. 여러 성녀가 있었지만,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가 가장 높은 사람 같았다.
다음 일요일, 이사는 신부가 집전하는 엄숙한 세례식을 경험했다. 세례식은 그녀의 기억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새로운 딸, 이마리아가 교회의 일원이 된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씨네 넷째 딸은 이마리아가 되었다. 그녀는 열네 살이 되어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되었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넷째야, 네가 양귀의 신도가 되었다는 말이 참이냐?”
“네.”
“허어, 양귀에게 정신이 홀리더니만, 결국 이 지경이 되고 말았구나!”
“저 양귀들은 중국을 망하게 하려고 온 놈들이다! 그런데 양귀의 앞잡이가 되다니?”
“저 녀석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매우 쳐라!”
어른들은 이사, 아니 마리아를 두들겨 팼다. 흠씬 두들겨 맞고도 배교를 거부한 마리아는 창고에 갇혔다. 이를 불쌍히 여긴 어머니와 언니들이 새벽에 몰래 풀어 주었다.
마리아는 교회로 도망쳤다. 신부는 얻어터진 마리아의 몰골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상황을 짐작했다.
“신부님, 저 이제 집에 못 돌아가요. 집에 돌아가면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저를 다른 곳으로 보내 주세요.”
“그러자꾸나. 그게 주님의 뜻이라면…….”
신부의 주선으로, 마리아는 프랑스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떠나게 되었다.
마리아는 수녀들을 도와 고아들을 돌보는 한편, 교회에서 세운 부설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했다.
똑똑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마리아는 얼마 안 되어 수녀들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마리아는 점차 교회를 위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중국 아이들을 위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저도 수녀님들의 나라인 법국으로 가서 공부하고 싶어요.”
“마리아, 네가 높은 뜻을 품고 열심히 공부하면 주님께서 인도해 주실 게다.”
가톨릭교회에서 미래가 유망한 아이들을 위한 장학금이 있었다. 여기에 선발되면 가톨릭계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가장 우수한 아이들은 프랑스로 유학도 갈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성직자와 선교사 양성을 위한 과정이었으므로, 가뜩이나 경쟁이 치열한데 여자에게는 매우 희박한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새로운 삶은 그녀에게 희망을 주었다.
조선의 초기 기독교 전파가 하층민과 여성을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된 건, 기독교가 신 앞에서의 평등과 내세의 영생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있었고, 마리아는 그 전형적인 상징이었다.
균형 잡힌 식사를 하면서 지체되었던 마리아의 육체가 빠르게 성장하고, 정신은 더욱 빨리 성장했다. 그녀는 교리와 프랑스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마리아는 자신의 삶에 희망이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련은 머지않아 닥치고야 말았다.
“수녀님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권비들이 도처에서 교회를 불태우고 형제자매들을 학살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개척한 이곳을 버릴 수는…….”
“아이고, 그러다 진짜 죽습니다. 권비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이에요. 특히 서양인은 더욱 용납하지 않습니다. 안전한 북경으로 도망쳐야 해요. 거긴 서양 군대가 보호한다는군요.”
의화단이란 권비(拳匪)들이 교회를 불태우고, 신자들을 학살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수녀들도, 의화단을 피해서 도망치는 신자들이 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하자 가혹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얼마 뒤, 북경교구에서도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피난을 권하는 소식을 전했다.
결국 수녀들도 그동안 일구었던 수녀원을 포기하고, 고아원의 아이들과 함께 북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수녀들은 정체를 감추기 위해 중국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맸다.
혼란 상황 속에 난생 처음 먼 길에 오른 아이들을 보살피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열다섯 살의 마리아는 수녀들을 보좌하며 아이들을 이끌었다.
“북경이다!”
“우와, 문도 엄청나게 커!”
“그럼, 황제께서 살고 계신 곳인걸!”
고된 여정 끝에 마침내 북경에 도착한 마리아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깡촌에 살던 아이들이 황제가 살고 계시는 황도에 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북경은 듣던 대로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였다. 북경의 모습에 감탄하기도 잠시, 새로운 위협이 닥쳐왔다.
“궈, 권비다!”
“목소리 낮춰! 교인이 아닌 척 하라고!”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북경은 안전하다며? 왜 권비들이 북경에도 이렇게 많은 거야?”
소식을 알아보러 간 신도가 얼마 뒤에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왔다.
“큰일 났어요. 조정이 의화단과 한 패가 돼서 외국 공사를 죽였대요!”
“황실의 단군왕이 서양인에게 현상금을 걸었답니다. 서양 남자는 은 50냥, 여자는 40냥, 아이는 30냥! 서양인과 기독교인을 죽여야 한다고 온 북경이 난리에요!”
“오, 주여!”
“빨리 공사관 구역으로 도망쳐야 합니다. 거기는 호위병이 있어서 안전하다는 군요.”
“수녀님들은 머리를 꽁꽁 싸매고 고개를 숙이세요. 절대로 서양 사람인 걸 들키면 안 됩니다.”
수녀들과 교인들은 중국 백성인 척 하고, 몰래 공사관 구역으로 접근했다.
공사관 구역의 길이는 약 3.2km, 폭은 1.6km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안에는 12개국 공사관과 교회, 400여명의 외국인이 거주했다.
공사관 구역이 유일하게 안전하다는 소문을 듣고, 외국인들은 물론이고 중국인 기독교 신자들도 몰려들었다.
“양귀들과 양귀들에게 빌붙은 자들은 모조리 죽여라!”
“양귀 남자를 잡으면 50냥, 여자를 잡으면 40냥, 아이를 잡으면 30냥이다!”
“와아아아!”
“殺! 殺! 殺!”
괴이한 복장에 변발을 흩트리고 구호를 외치는 의화단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했다. 북경 시내에는 폭력과 광기가 난무했다.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 거지? 왜 우리를 모두 죽인다는 거야?’
마리아는 너무나 두려웠다. 도대체 왜 저들이 이렇게까지 서양인과 기독교도들을 증오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들키지 않고 공사관 구역으로 진입하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공사관 구역은 이미 포위 상태였다.
“양귀다! 양귀가 있다!”
“양귀 계집들이다!”
“야소교 무리들이다!”
“죽여라!”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난망하던 차에, 결국 정체가 탄로 나고야 말았다.
“아아, 주여!”
“여긴 우리가 막을 테니까, 수녀님과 아이들은 빨리 도망쳐요!”
“어서, 빨리!”
권비들이 창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자, 사내들이 앞을 막아섰다.
“수녀님, 빨리! 애들아, 어서 도망쳐!”
“으아아앙!”
“저쪽, 저쪽으로 도망치자!”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수녀들과 마리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성벽 쪽으로 필사의 도주를 했다. 성벽이 무너진 부분에는 방어용으로 설치된 바리게이트가 있었다. 그들은 바리게이트를 향해 도망쳤다.
하지만 여자와 아이들이 그렇게 오래 도망칠 수는 없었다. 머지않아 권비 무리들이 그들을 따라잡고야 말았다.
“양귀년들아, 너희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호오, 여기 양귀 계집이 둘이나 있다!”
“흐흐, 그럼 은 80냥인가?”
“꺄아아악!”
“오, 주여, 주여, 제발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수녀들은 공포로 부들부들 떨면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중국어를 조금 할 줄 아는 나이든 수녀가 외쳤다.
“우리는 죽이더라도, 제발 아이들은 살려 주세요!”
“닥쳐라, 양귀년! 너희 양귀와 한패인 야소교 무리가 아니냐!”
“아 아이들은 모두 중국인입니다!”
“그래? 어이 너! 야소교인이냐, 아니냐?”
권비들은 아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마리아를 지목했다. 마리아는 공포로 떨렸지만, 수녀들을 쳐다보았다. 그들만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수녀님들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부디 용서해 주세요!”
“네 이년, 중국인이 되어서 침략자 양귀들 편을 들어? 분명 네년도 야소교인이렸다!”
“그래요, 나는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 마리아예요. 하지만 저 아이들은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살려 줘요. 수녀님들이 순교한다면 나도 따라 죽겠어요!”
“마리아, 마리아!”
마리아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 또래에 신앙을 지키다 죽었다는 성녀 아가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신앙을 배신하고, 교회를 배신하고, 수녀를 배신하고 혼자 살 수는 없었다.
“저 세 계집은 끌어내!”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천주님, 천주님, 제발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저버리지 마세요!’
물론 신은 기도에 응답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마리아도 자신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살아남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탕! 탕! 탕!
바리게이트 너머에서 총알이 쏟아졌다. 총알은 정확하게 창칼을 빼든 권비들을 맞췄다. 날아오는 총알을 막는다는 의화단이 픽픽 쓰러졌다.
“돌격!”
“와아아아!”
서양 군복을 입은 동양인들이 바리게이트 너머에서 뛰쳐나와 의화단을 공격했다.
의화단의 습격으로부터 수녀와 아이들을 구출한 군인들은, 즉시 바리게이트 안으로 그들을 끌어넣었다.
“來! 來! 快! 快!”
구사일생한 마리아는 자신의 기도가 들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천주님께서 내 기도를 듣고 구원을 보내셨구나!’
젊은 군인 한 사람이 수녀들에게 안부를 묻고 나선, 프랑스어로 마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Parlez-vous français?”
“Oui, oui, un peu.”
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중국어를 잘 못하지만 프랑스어는 조금 하거든요. 몸은 어때요? 괜찮아요?”
“네, 네! 여러분이 구해 주신 덕에! 프랑스 사람인가요?
군인은 갑자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렇게 보여요? 나도 동양인인데. 난 대한제국군 장교입니다.”
“L’Empire de Daehan?”
마리아가 프랑스어로 말한 ‘대한제국’을 이해 못 하자, 장교는 중국어로 대신 말했다.
“大韓帝國, 朝鮮.”
“아, 조선! 프랑스어로 그렇게 부르는군요.”
마리아는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녀님 이야기를 들으니 아가씨 용기가 대단하더군요. 나도 천주교인입니다.”
“역시 그러셨군요! 천주님께서 형제님을 보내 주셨군요! 저는 마리아, 이마리아예요!”
마리아는 기뻐하며 성호를 그었다. 장교도 씩 웃으면서 성호를 그었다.
“나는 토마스, 안토마스입니다. 마리아라니 반갑군요. 제 모친의 세례명도 마리아이신데.”
“아, 가족이 모두 천주교인이군요! 한국은 교회를 박해하지 않나요?”
“한 30년 전에는 그런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종교의 자유가 있지요.”
“아, 부러워라. 토마스 형제님은 한국의 장교인 거죠?”
“그렇죠. 대한제국 해군육전대 파견북경호위대 안중근 참위입니다.”
22세의 청년 장교 안중근은 자부심을 갖고, 공사관 구역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