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83
– 283화에 계속 –
283화 천명의 종식
청나라의 태도 전환에는, 역시 9국 연합군의 진격과 관계가 있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미국, 일본, 한국 9개국은 연합군 편성에 동의했다.
하지만 현격한 거리의 문제로 인해, 연합군의 중국 진격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5만 이상으로 합의된 연합군 주력이 당도할 때까지, 원정대는 근거리에 있는 병력이 동원되었다.
북경 진격이 실패로 끝나고 천진으로 퇴각한 시모어의 1차 원정대에 더해, 대련 주둔 러시아군, 홍콩 주둔 영국군, 필리핀 주둔 미군,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과 일본군, 한국군이 2차 원정대로 편성되었다.
러시아군 2,500명, 일본군 2,000명, 한국군 1,000명, 미군 900명, 영국군 800명, 프랑스군 600명,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 200명으로 총 8,000여 명이었다.
2차 원정대는 연합군이 점령한 대고 포대를 떠나, 천진으로 향했다.
“2차 원정대의 목표는, 연합군 주력이 북경으로 원활히 진격하기 위해, 북중국 최대 항구인 천진을 확보하는 것이오.”
“가능하면 우리만으로 북경을 함락시키면 더 좋겠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할 필요도 없을 거고.”
모든 열강의 연합군이 구성된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지만, 치명적인 단점도 있었다.
통일된 지휘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모든 게 제각각이라는 점이었다.
천진 전투에서는 임시로 러시아군의 아나톨리 스테셀(Anatoly Stessel) 장군과 영국군의 아서 도워드(Arthur Dorward) 장군이 공동 지휘관을 맡았지만, 통일된 지휘권을 갖는 건 아니었다.
“청국놈들 수준이 형편없는 건 말하나 마나. 천진 함락에 단 하루면 충분할 것이오.”
“꼭 그렇게 볼 일이 아닙니다. 천진은 여러 번의 전쟁으로 인해 청국에서도 그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요새가 보강되어 있고, 천진 수비대는 청군 중에서는 정예라 할 수 있는 북양군입니다.”
“정예라고 해 봤자 삼류 군대 중의 정예일 뿐이지. 북양군이라고 해 봐야, 이미 일본군과 한국군에게도 대패했던 군대가 아니오? 우리 연합군에게는 상대할 가치도 없소.”
서양 연합군은 청군을 극도로 멸시하고 과소평가했다.
5년 전에 직접 청국 본토에서 전쟁을 치러 본 경험이 있는 한국과 일본은 청군에 관해 더 잘 알고 있고 좀 더 조심스러웠지만, 서양 열강에 비해 발언권이 떨어졌다.
“천진을 사수한다. 적에게 순순히 내주지 않을 것이다.”
천진 방위 사령관 섭사성(聂士成)은 비장한 태도로 사수를 결정했다. 이홍장의 측근으로 양무파인 섭사성은 의화단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직례에 침입한 의화단을 대대적으로 토벌해 왔다. 그는 연합군과 싸우는 일이 무의미한 짓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시모어 원정대와 교전하기도 거부했었다.
섭사성을 향해 서양에 혼을 판 매국노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전투를 결심했다. 북경의 외항인 천진을 싸워 보지도 않고 내줄 수는 없었다.
섭사성이 지휘하는 병력은 북양군의 무위전군(武衛前軍)으로 약 1만. 이들은 대부분 옛 회군 출신이었다. 청군 중에서는 정예라 할 만했고, 무기의 질도 연합군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동복상의 감군 2천이 원군으로 왔다. 서양 열강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 찬 감군은 전투 의지가 왕성했다.
전투의지가 왕성하기로는 약 2만의 의화단도 있었으나, 섭사성은 이들을 경멸했고 전력으로 유의미하다고 판단하지 않았으므로 전투에서 제외했다.
“나는 갑오년에 평양 전투에서 참패한 바 있다. 그때 조선이 방어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지휘했는지, 전쟁의 전환점으로 삼았는지 직접 경험했다. 천진 방어전에서 적에게 최대한 많은 희생을 강요할 것이다.”
섭사성은 삼국전쟁 당시 평양 전투에서 참패했던 당시의 사령관이었다. 그때만 해도 무능한 지휘로 졸전을 거듭했지만, 평양에서 깨달음을 얻은 섭사성은 근대전에 어느 정도 눈을 뜬 상황이었다.
높이 6m, 두께 5m의 천진 성벽은 방위군의 요새 역할을 했다. 1만 2천의 청군은 천진의 요소를 따라,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들은 요소에 기관총과 대포를 설치했다.
7월 14일 오전, 9국 연합군의 천진 공격이 시작되었다.
“전군 공격!”
“단숨에 함락시켜라!”
영국군, 프랑스군, 미군, 일본군은 적의 주력이 있는 천진 남문 방향으로, 러시아군, 독일군, 오스트리아군, 한국군은 동문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쏴라!”
“적이 성문을 넘지 못하게 하라!”
동아시아의 여름은 우기였다. 그 날도 갑자기 비가 내려 시야가 가렸다. 포장되지 않은 중국의 도로는 질척거리기 시작했고, 천진 성벽으로 향하는 길은 진흙 범벅의 늪지대로 변해 버렸다.
“젠장, 대포를 끌고 갈 수가 없다!”
“부대별로 분산하여 진격하라!”
“미군이 멋대로 돌출하고 있습니다!”
“뭐야? 빨리 전령 보내!”
“대장님, 프랑스군이 뭐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 개구리 놈들, 뭐라고 하는 거야? 영어 쓰라고 해 영어!”
“저 야만인 양키들은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국제어)인 프랑스어도 할 줄 모르나?”
“너희가 너무 돌출되어 있다고, 이 머저리들아!”
2차 원정대는 1차 원정대 못지않은 난국이 재현됐다. 통일되지 못한 지휘권, 통신의 미비, 각국 부대 간에 원활하지 못한 소통, 조정되지 못한 진격, 적에 대한 과소평가는 실수를 반복했다.
콰앙! 콰앙!
탕! 탕! 탕!
타다다다다다다당!
연합군에게는 불행히도, 북양군은 의화단과 달리 마우저 소총과 맥심 기관총, 크루프 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돌출되었던 일본군과 미군에게 포화가 집중되었다. 특히 진한 파란색 군복을 입은 미군은 진흙탕 속에서도 적에게 눈에 띄는 표적이 되어 주었다.
“9보병연대! 돌격! …… 으윽!”
“연대장님!”
“내 죽음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사격하라.”
미군 제9보병연대장 리스컴 (Emerson H. Liscum) 대령이 전사한 기수를 대신해 연대기를 들고 돌격하다가, 청군의 포화에 노출되어 전사했다. 리스컴 대령의 유언은 ‘계속 사격하라’였다.
저녁까지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지만, 연합군은 청군의 격렬한 저항에 막혀 진흙탕 속에서 제대로 된 진격을 하지 못했다. 성벽 위에서 총알은 마치 우박처럼 쏟아졌다.
“작전을 바꿔야 합니다. 특공대와 공병대를 파견해서 먼저 성문부터 뚫어야 합니다. 그리고 적의 퇴로를 끊어서는 안 됩니다.”
“맞습니다. 청군은 갇히면 죽음을 각오하고 전멸할 때까지 싸울 겁니다. 하지만 퇴로를 열어 두면 퇴각할 겁니다. 우리 목표는 천진의 함락이지 적의 전멸이 아닙니다.”
일본군의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正) 소장과 한국군의 박유굉(朴裕宏) 참장이 마침내 발언권을 높였다. 두 사람은 삼국전쟁의 참전 경험이 있었고, 특히 요새에서 방어하는 청군과 격전을 벌여 본 경험은 연합군 지휘관 중에서 이들뿐이었다.
마침내 서양 연합군 지휘관들도 후쿠시마와 박유굉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7월 15일 새벽 3시, 남문에는 일본군 특공대가, 동문에는 한국군 특공대가 침입했다.
“이 한 목숨, 천황 폐하를 위해 바치니 아까울 것이 없도다! 제군, 야스쿠니에서 다시 만나자!”
청군이 성문 폭파를 여러 차례 저지하자, 일본군 특공장교가 자폭 공격을 감행했다. 목숨을 걸고 성문에서 다이너마이트 신관을 터트렸다. 그는 폭발로 산산조각이 났지만 문을 뚫는 데 성공했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성문이 뚫리고야 말았다.
“전군, 돌격!”
“와아아아!”
일본군을 필두로, 남문 방향의 연합군이 천진 성내로 쇄도했다.
자연히 남문의 폭파는 동문의 작전 수행에 도움을 주었다.
“적이 혼란스럽다! 지금이 기회다!”
“공병대, 폭파!”
콰앙!
한국군 공병대도 뇌관을 연결한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켜 동문을 뚫는 데 성공했다.
“돌격! 남문에 뒤처지지 마라!”
“우리가 먼저 적 본진을 점령한다!”
두 개의 성문에서 연합군이 일제히 쇄도했다. 방위자의 유리한 위치를 상실한 청군은 전투 의지를 상실했다.
“총병! 퇴각하시지요! 후일을 기약해야 합니다!”
“아, 대청의 사직이 위태롭다! 기약할 후일이 있겠는가? 어쩌다 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그래도 장수가 한 명이라도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자리가 내가 바로 죽을 자리다!”
콰아아앙!
섭사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포탄이 그의 주변에 떨어졌다. 파편 조각은 섭사성의 몸을 조각냈다. 섭사성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서양과의 전쟁에 부정적이었던 섭사성이 분전하다 전사한 것과 달리, 입만 열면 서양을 토벌하자고 떠들던 자들은 앞다투어 도망치기에 바빴다.
청군과 의화단 대부분은 북문과 서문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그동안 의화단이 저지른 만행의 대가는, 애먼 천진 백성들이 대신 치러야 했다.
가뜩이나 의화군의 만행으로 적대감이 가득한 상황에서, 전투의 사상자로 인해 연합군은 분기탱천한 상황이었다. 연합군은 천진에서 250명의 전사자와 5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상자의 대다수는 공세가 집중되었던 남문 방향의 연합군이었다. 물론 청군의 피해는 그 몇 배에 달했지만, 이런 희생을 예상하지 못했던 연합군은 격분해 있었다.
“전사한 전우들의 복수를 하자!”
“학살당한 동포들과 기독교도의 원수를 갚아라!”
천진이 함락되자 서양 연합군은 약탈자로 돌변했다. 열강의 정예라고 명성을 떨치던 부대들도 예외가 없었다. 앞으로 북경에서 벌어질 일의 예고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군은 절대 동요하지 말고 대열을 유지하라! 살인, 방화, 약탈, 강간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한다!”
이선으로부터 약탈과 살육 행위에 일절 끼어들지 말라고 훈시를 받은 한국군만이, 군기를 유지한 채 천진에 입성했다. 박유굉은 적장 섭사성의 유해를 수습해서 장례를 치러주는 관용도 내보였다.
천진 함락 소식은 북경에도 전해졌다. 연합군은 천진에 이어 북경도 같은 운명을 맞으리라는 경고를 했다.
강경 일변도였던 청 조정은, 연합군의 결성과 천진 함락으로 북경 진격이 머지않았다는 경고를 받게 된 것이었다.
서태후의 최측근이자 기해정변의 주역으로 배외주의자인 북양대신 영록조차도 공격을 반대했다.
‘만약 공사관 구역이 함락된다면, 미치광이 권비들은 그 안의 서양인들을 모두 죽이고 말 것이다. 그럼 뒷감당은 누가 다 지겠는가? 서양은 반드시 몇 십 배의 복수를 하려고 들 것이다.’
강경한 반서양파인 영록조차도 현실을 인지했다. 하지만 후회를 하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의화단을 받아들이고 서양과 전쟁을 선포한 건, 결국 서태후와 청 조정이었다.
전쟁을 중단하라는 압력은 외부에서만 오는 게 아니었다. 내부에서도 쏟아졌다.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망할 판이오. 우리는 북경의 전쟁 선포가 불법적이라고 확신하오.”
“북경에서 나온 포고는 황상의 뜻일 리가 없소. 역적들이 황권을 찬탈하려는 거짓 명령을 반포한 것이오. 이를 따를 수 없소.”
“서양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 나라를 망조로 몰고 있는 의화단과 만주 권귀들이 역적이오.”
“외국에 강남은 전쟁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합시다.”
청 조정이 지방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건, 강남의 총독들이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양강총독 유곤일, 호광총독 장지동, 양광총독 이홍장. 양무파의 ‘삼두’는 서양에 대한 전쟁을 거부했다.
이들은 철로독판 성선회(盛宣懷)를 내세워 연합국과 독자적인 교섭에 나섰다.
“우리는 각 성의 최고 당국자로서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이며, 관할 지역 내에서 권민을 반드시 진압하겠다. 대신 열강은 군대를 파견하여 중립을 선포한 지역으로 진입하지 않는다.”
세 총독의 대리인 성선회는 상해 주재 영국 영사 워렌(Pelham L. Warren)과 협상하여 별도의 협정을 체결했다. 이른바 동남호보장정(東南互保章程)이었다.
여기에 민절총독 허응규(許應揆)도 동남호보에 동의함에 따라, 동남 전역이 북경에 반기를 들었다.
양강총독 유곤일이 관할하는 강소와 강서, 안휘, 호광총독 장지독이 관할하는 호북과 호남, 양광총독 이홍장이 관할하는 광동과 광서, 민절총독 허응규가 관할하는 절강과 복건은 동남호보에 따라 중립을 선언했다.
이들 지역은 오히려 열강과 협력해, 외국인을 보호하고 의화단의 남방 진출을 저지했다.
“연합국은 동남호보선언을 존중하며, 이 지역의 중립과 주권을 인정한다.”
9국 연합국도 동남호보장정을 추인했다. 열강 입장에서도 남방까지 전쟁이 확전되지 않고, 북방에만 한정할 수 있는 건 바람직한 일이었다.
“실로 국가의 안위가 위태롭습니다. 의화단을 진압하고, 열국에 사과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여 속히 전쟁을 끝내야 합니다.”
총독들은 단순히 중립만 선언하지 않았다. 북경 조정에 조속히 종전을 선언하라고 압력을 행사했다.
동남호보를 선언한 9개성 외에도, 산동, 하남, 사천, 귀주 4개성의 순무도 휴전 촉구에 동참했다.
지방의 압력에 총리아문은 휴전을 제의하고, 일시적으로 공세를 중단했다. 그리고 이홍장에게 열강과 협상하라고 훈령을 내렸다.
하지만 열강은 북경 조정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이미 연합군이 결성된 이상, 북경 함락으로 결판을 낼 생각이었다.
중국 본토 18개 성의 절반에 달하는 9개 성, 그것도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들이 북경 조정에 동조하지 않고 독자 행동에 나섰다는 점은, 청조의 지방 통제력이 완전히 붕괴했음을 의미했다.
지방의 이탈과 북경의 함락 위기.
청조의 천명(天命)은 경각에 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