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88
– 288화에 계속 –
288화 북경 정복
1900년 8월 15일, 북경.
북경의 함락이 눈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청 황실은 서안으로 파천(播遷)을 결정했다.
이 최악의 난국 속에서도, 서태후는 여전히 권력을 움켜쥐고 있기를 바랐다.
서태후는 모든 책임을 의화단을 끌어들이자고 했던 단군왕과 장친왕 등 배외주의자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이홍장에게 협상을 명해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러려면 황제를 장악하고 있어야 했다. 아무리 허수아비일지라도, 황제는 명분을 제공했다.
“짐은 북경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대청의 황성을 저버리고 황제가 어디로 간단 말이냐?”
“폐하, 황공하오나 양이들이 북경을 점령하고,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옥체를 보중하시기 위하여 잠시 파천하시옴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됐는데, 황제가 황성을 저버리면 저 양이들에게 더욱 마음대로 하라고 내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파천 결정에 광서제는 역정을 냈다. 지금의 이 난국을 불러일으킨 건 서태후와 만주 황족들, 배외주의자들이었다. 나라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선, 서안까지 끌고 가겠다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40년 전, 영국과 법국의 군대가 황성을 침범하였을 때에도, 문종(함풍제) 황제께옵서도 열하로 파천하시어 종묘사직을 이으셨습니다. 마땅히 선황의 법도를 따라…….”
“그리고 선황께서는 영원히 못 돌아오지 않으셨는가! 짐더러 서안에서 죽으란 소리인가? 짐은 공친왕의 선례를 쫓아 북경에 남아 열국과 협상할 것이다!”
1860년, 영불연합군을 피해 북경을 버리고 열하로 도주한 함풍제는, 별장에서 현실 도피를 하다가 끝내 젊은 나이에 죽었다.
북경에 남은 공친왕이 열강과의 협상을 이끌었고, 양무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광서제는 열강이 자신에게 동정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북경 함락은 비극이지만, 이번 기회에 서태후로부터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려면 북경에 남아서 버텨야 했다.
“황상께서 자금성에 남으시어 열국을 제어하고, 황권을 되찾아 친정하셔야 합니다. 그러려면 결단코 북경을 저버려서는 아니 됩니다.”
“짐을 이해해 주는 건 역시 그대밖에 없구려! 저 대신이란 자들은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으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있으니…….”
광서제가 총애하는 후궁, 각순황귀비 타타라씨(恪顺皇贵妃 他他拉氏), 즉 진비(珍妃)도 북경 잔류를 권했다. 광서제는 잔류로 마음을 굳혔다.
“황상! 저 무도한 양이의 무리가 황성을 침범했는데, 대청의 황제가 되어 포로가 되는 치욕을 감당하겠다는 겁니까? 정녕 대청의 사직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으신 겁니까?”
“태후께서는 서안으로 가십시오. 소자는 북경에 남아, 황제로서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광서제가 잔류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결국 서태후가 압박을 시작했다. 여러 번 설득에도 끝내 광서제가 고개를 젓자, 서태후는 결국 무력을 썼다.
“금군! 황상을 황성 밖으로 모시어라. 황상께서는 옥체 미령하시니, 각별히 모셔야 할 것이다!”
“예!”
“이 놈들,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네 이놈들, 이 역적 놈들아!”
기해정변 이래 금군은 황제가 아니라 태후에게 충성하는 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금군은 황제를 억지로 평복으로 갈아입히고 가마에 태웠다. 광서제는 북경에 자신을 따르는 군대가 없음을 절감하며 분루(憤淚)를 삼켜야 했다.
아직 자금성까지 적이 진입하기에는 시간이 남았다고 판단한 태후는, 마지막 숙청을 단행했다.
“황귀비 타타라씨는 너무나 아름다워 외적에게 능욕을 당할까 봐 두렵다. 황상의 총애를 받는 후비로 어찌 그런 치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자결하여 황은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태후 폐하! 어째서 제가 죽어야 합니까? 나라를 망친 건 제가 아니라 태후이십니다! 인제 그만 황상을 풀어 주세요!”
“저런 되바라진 계집, 네가 황상을 꼬드긴 걸 모를 줄 아느냐! 너희들은 뭣들 하느냐? 어서 귀비의 자결을 돕지 않고!”
진비는 격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한 황제조차 강제로 가마에 떠밀린 상황이었다.
서태후의 명을 받은 환관들은 진비의 ‘자결을 도왔다.’ 진비는 강제로 우물에 던져졌다.
향년 25세, 황제의 총애를 받은 여인의 비극적인 최후였다. 가마에 갇혀 있는 광서제는 미처 그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40년 전에도, 열하에서 돌아와 권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찌 이번에도 그러지 못하겠는가? 반드시 돌아와 이 치욕을 갚으리라!’
황제를 장악한 서태후는 화려한 만주 황태후의 의복에서 한족 평민 여성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참으로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살아남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기회는 있었다.
8월 15일 오전, 서태후는 황제를 볼모로 삼고, 소수의 호위병만을 거느리고 자금성을 탈출했다.
목적지는 옛 당나라의 수도, 서안이었다. 공식적인 명칭은 ‘서부 시찰’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상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도주였다.
여전히 서태후는 권력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고 믿었다. 전제 조건은 어디까지나 황제를 움켜쥐고 서안까지 무사히 피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정문을 돌파했습니다!”
“좋다! 진격하라!”
8월 14일 오후, 대한제국군은 안정문을 뚫고 내성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내성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지만, 한국군이 위치한 북쪽은 상대적으로 청군의 저항이 약했다. 청군은 공사관 지역과 자금성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집결되어 있었다.
안정문 바로 근처에는 공묘(孔廟)와 국자감(國子監)이 있었다. 중국의 4대 문묘(文廟) 중 하나로, 14세기 원나라 이래 수도의 문묘이자 최고 교육 기관으로 숭앙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유교를 국시로 내건 조선의 후예들은, 공묘와 국자감을 약탈에서 보호하도록 했다.
“문묘는 대한제국군이 보호한다! 우리 대한국은 동양 문명의 수호자로서 의무를 다할 것이다!”
급진개화파 박유굉은 유교 전통에 관해 냉소적이었지만, 1개 소대를 배치해 문묘를 보호하게 했다.
문묘 보호는 ‘동양 문명의 수호자’라는 프로파간다를 상징적으로 보여 줄 수 있었다. 청나라가 지키지 못한 공자의 문묘, 명나라의 황제들이 참배했던 문묘를 한국군이 지켜낸다면 그보다 더 좋은 대내외적 프로파간다가 없었다.
“우리에겐 중요한 임무가 있다! 약탈에 정신을 홀리지 말고,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라!”
“예!”
공사관 구역을 해방한 연합군은, 북경 시내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관 구역의 해방’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연합군은, 완전히 군기가 해이해지고 말았다. 청군의 저항은 지리멸렬해졌고, 연합군은 처음부터 목표가 북경 약탈이었던 것처럼 전투보다 약탈에 더 열중했다.
한국군에는 황제 이선이 특별히 내린 명령이 있으므로, 이를 수행하기 전까지 전투가 끝난 게 아니었다.
마차 여러 대에 나눠 타고 자금성의 서문인 서화문(西華門)을 빠져나온 서태후 일행은, 혼란에 빠진 내성을 지나 부성문(阜成門)을 통과해 서안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평민의 옷으로 위장한 태후 일행은 그저 피난길에 오른 북경 주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극도의 혼란 속에서 아무런 주목도 받지 않고 부성문에 도달했다.
“부성문입니다!”
“황명이다! 속히 문을 열도록 하라!”
북경의 혼란 속에서도,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서쪽은 명령이 통했다. 서태후 일행은 부성문을 통과해 북경을 막 벗어났다.
서태후에게 40년 전처럼 북경을 저버렸다는 치욕감과 적에게서 멀어졌다는 안도감이 교차했다.
그 순간, 갑자기 호위병의 다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부, 북쪽에 기병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옵니다!”
“뭐라? 양이의 군대냐?”
“양이는 아닙니다! 저, 저 깃발이 뭐지?”
“태극 사괘기다! 조선군입니다!”
“아아, 어서 피해야 한다!”
40년 전 몽진에 조선군이 왔다면 환영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결코 아니었다.
서태후 일행은 부랴부랴 도주하려고 했지만, 마차 여러 대에 황실의 금은보화를 잔뜩 싣고 온 행렬이 기병대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
“에, 에잇! 아깝긴 하지만 다 던져 버려라! 일단 몸을 피해야 하지 않겠느냐!”
태후의 명령에 황실의 금은보화가 북경 교외의 흙길에 쏟아졌다. 일반적인 군대였다면 그걸 줍느라 추격을 포기했겠지만, 쫓아오는 부대는 달랐다.
“대청 황제 폐하를 모시러 왔다! 황상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
“황제 폐하, 한국군이 폐하를 호위하겠습니다!”
기병대가 중국어를 큰소리로 외치며 황제의 안전을 물었다. 광서제는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짐은 여기에 있소! 부디 짐을 도와주시오!”
가마 안 광서제의 목소리가 한국군에 와닿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용케 아무런 치장도 되어 있지 않은 황제의 어가(御駕)를 알아보고 달려왔다.
“가마를 빼앗기면 안 된다! 목숨 걸고 지켜라!”
“돌파하라!”
황제의 가마를 놓고 한국군과 금군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아, 이제 어쩔 수 없구나!”
서태후는 한국군이 황제를 노리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자신마저 잡힌다면, 적인 한국군보다 진비의 죽음을 알게 될 황제가 어찌 나올지 몰랐다.
정권 수호에서 생명 보호로 목표를 하향한 서태후는, 한국 기병대가 황제의 어가를 놓고 교전을 벌이는 사이 소수의 호위병만을 이끌고 서쪽으로 도주해 버렸다.
탕! 챙! 푸쉭!
사방이 막힌 가마 안에서 광서제는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원래대로라면 외국군이 자신을 지키는 금군과 전투를 벌인다면, 금군을 응원해야 함이 옳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광서제는 내심 한국군이 승리하길 기다렸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쇳소리가 부딪혔다. 이윽고 핏자국이 가마까지 튀었다.
처음 경험하는 광경에 광서제는 질겁했지만, 정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은 황제였고, 황제로서 외국인들 앞에서 체면을 지켜야 했다.
잠시 후, 소리가 잦아들었다.
“황제 폐하! 대청 황제 폐하가 안에 계십니까?”
“그렇소! 짐이 밖으로 나가도 되겠소?”
“황공하오나 문을 열겠습니다!”
유창한 중국어이지만, 억양이 약간 달랐다. 광서제는 목소리의 주인이 중국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마의 문이 열리고, 광서제는 순간 밀려오는 8월의 뜨거운 햇빛에 시선을 돌렸다.
시야가 회복되자, 서양 제복 차림의 한 무리가 일제히 말에서 내렸다. 변발 호복 차림의 금군은 모두 제압된 후였다.
“외신(外臣)이 대한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삼가 대청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경황이 이러하여 무례함이 있더라도 용서하십시오.”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가 정중하게 거수경례하며 예를 표했다. 옛날 조선 사신처럼 황제에게 절하는 게 아니라, 서양식 경례였다.
뒤바뀐 처지에 광서제는 서글픔을 느꼈지만, 그는 표정을 풀고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소. 경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소?”
“외신은 대한국 근위기병연대 제1근위기병중대장, 노백린 정위라고 합니다. 대한 황제 폐하께옵서 대청 황제 폐하를 간적들로부터 호위하고, 정중히 모시라 명하셨습니다.”
“고맙소! 참으로 고맙소! 간적들에 의해 서안으로 납치될 뻔했는데, 경들의 노고로 북경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겠구려!”
광서제는 노백린의 손을 잡고 감사를 표했다.
이선이 근위여단에 내린 특명이 바로 광서제의 구출이었다.
박유굉은 휘하 근위기병대에 북경 서쪽 부성문과 서북쪽 서직문 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마차 여러 대가 나오면 황제로 판단하고 추격하라고 명했다.
이선의 예측대로, 광서제 일행은 서화문과 부성문을 통해 탈출하여 서안으로 향하려 했다.
부성문 앞을 지키던 제1근위기병중대장 노백린 정위가 황제 구출이라는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대청 황제 폐하를 북경으로 정중히 모셔라!”
노백린과 근위기병대는 사전에 명령받은 대로 광서제를 외국 황제의 예로 정중히 모셨고, 자금성으로 무사히 돌아가도록 호위했다.
이제 대청 황제는 대한제국의 소중한 귀빈이자 고귀한 포로가 된 것이다.
황제가 외국군에 의해 구출되고, 태후가 도주하는 동안, 북경은 무력하게 정복당하고 있었다.
최후까지 저항하던 감군 부사령관 마복록이 전사하고 황제가 항복을 명령하면서, 북경과 그 주변의 저항은 8월 16일 자로 종결되었다.
“저 오랑캐에게 황도를 내주었으니, 참으로 치욕스럽구나!”
“나라를 잘못 이끌어 멸망의 지경이 이르렀으니, 어찌 살아서 내일을 보겠는가!”
의화단을 끌어들여 전쟁을 선동했던 배외주의자들, 내각대학사 강의, 군기대신 유록, 산동순무 이병형 등은 치욕스럽게 자결했다.
하지만 죽음으로의 도피는 무책임하고 쉬운 길이었다. 그들이 불러일으킨 전쟁은 북경 주민들에게 참화를 안겨 주었다.
“복서들은 모조리 죽여라!”
“저들이 서양인과 기독교도들에게 했던 범죄를 그대로 돌려 주어라!”
연합군은 복수귀, 살인자, 약탈자로 돌변했다. 이들의 눈에는 의화단과 주민이 구분되지 않았다. 의심스러우면 무조건 의화단이요, 협조하지 않으면 반군이었다.
“저는 권민이 아닙니다! 살려 주세요!”
“그래? 네가 권민이 아니라는 건 네 재산으로 증명하면 된다!”
연합군의 약탈은 정부와 민간을 가리지 않았다. 관청이든 부호든 재산이 있다면 모조리 털리고야 말았다.
서양 연합군은 가치 있어 보이는 것들, 특히 금붙이라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어느 미국인 종군기자는 북경의 참상에 관해 한마디로 논평했다.
“피사로 이후 가장 거대한 약탈 원정대다.”
16세기 잉카를 정복하고 무자비하게 약탈한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이래 가장 거대한 약탈 원정대.
잉카의 황금 유물을 녹여 전부 금괴로 만들어 버렸다는 피사로 원정대.
연합군에게 딱 어울리는 평가였다.
역사상 북경이 함락된 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몽골군의 중도 함락, 명군의 대도 함락, 청군의 북경 함락도 이렇게까지 치욕적이진 않았다.
1900년 여름의 북경은,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정복을 당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