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94
– 294화에 계속 –
294화 이합집산(離合集散)
열강의 중국 분할 논의가 가속되는 상황에서, 일본은 북수남진의 기회를 잡았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라며 아직도 정한(征韓)을 부르짖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는데, 이는 한국을 넘어 러·프·독 삼국과 전쟁을 벌이자는 것과 같다.”
“그렇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자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 지금 각국이 공동으로 중국에서 사냥감을 찾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먼저 남쪽의 토끼를 잡아야 한다. 일찍이 요동을 반납하고 위해위를 포기한 것은, 동아의 대세를 살피고 국력의 정도를 고려하여 북수남진의 국시를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남방의 경영을 온전하게 하고, 복건과 절강의 요지를 점거해야 한다.”
이토 히로부미와 마쓰가타 마사요시 등 정부 주도 세력은 물론이요, 오쓰 사건의 책임을 지고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 후에도 배후에서 군부를 움직이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조차도 북수남진을 주장했다.
정부와 육·해군, 조슈와 사쓰마가 모처럼 한마음이 되어 야심 차게 추진한 아모이 점령은, 영국의 지속적인 압박을 받게 되었다.
영국은 일본이 단순히 아모이 확보로 끝나려는 게 아니라, 복건과 절강을 일본의 세력권으로 얻을 목적이라는 걸 간파한 것이다.
“동남호보를 선언한 중국 동남 연해 지역은 외부 세력의 침입을 결코 용인하지 않겠소.”
“그럼 일본은 외부 세력이고, 자기들은 외부 세력이 아니란 말인가?”
영국의 단호한 압박에 반발한 군부는 새로운 작전에 돌입했다.
“중산 선생, 일본은 중국 혁명을 지원하겠소.”
“고맙습니다. 일본이야말로 중국 인민의 유일한 벗입니다.”
대만총독 고다마 겐타로는 손문의 무력 봉기 계획에 원조 의사를 밝혔다.
일본의 아모이 점령과 복건 세력권 인정을 조건으로, 손문의 흥중회(興中會)가 계획한 광동 혜주(恵州) 삼주전(三洲田) 봉기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대만총독부가 흥중회의 봉기를 지원하는 건, 물론 이들의 혁명 정신에 공감해서가 아니었다.
지원의 대가로 흥중회가 아모이 점령을 인정하고, 영국의 세력권인 광동으로 열강의 시선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속내가 검은 일본의 지원 외에도, 진심으로 중국 혁명을 꿈꾸는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 등 일본 아시아주의자들이 봉기에 참여했다.
“동지들! 어리석은 청 조정은 의화단에 놀아나 열강의 무력 개입을 초래함으로써, 중국 전역을 고통에 몰아넣었소. 이는 미증유의 국난이라 하겠으나, 혁명의 기회이기도 하외다!”
“청조를 개혁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결국 의화단의 참사만 불러일으켰소. 오직 남은 가능성은 혁명뿐이오. 중화 민족의 부흥을 위하여, 청조를 타도합시다!”
1900년 10월 8일, 흥중회가 삼주전에서 봉기했다. 이들은 광동을 시작으로 청조 타도와 중국 혁명을 부르짖었으나, 그 세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중국에 임박한 현실은 혁명이 아니라, 분할의 위기였다.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이들 열정 넘치는 혁명가가 아니라, 주판알을 돌리고 있는 열강의 몫이었다.
“일본이 너무 막 나가는군. 이 시점에서 누가 상위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줘야겠소.”
“만약 아모이에서 철수하지 않고, 반란 세력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지 않으면, 대영제국이 개입할 것이오.”
영국의 통첩에 일본은 결국 굴복했다. 오쿠마 내각은 아모이에서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는 정부의 뜻이 아니라, 일부 과격한 군부의 모험주의자에 의한 점령이었습니다.”
총리 오쿠마 시게노부는 책임을 대만총독부에 돌렸다. 하지만 이는 애당초 정부와 군부 간에 합의하여, 천황의 재가도 받은 사항이었다.
“굴욕 외교 촉발한 오쿠마는 즉각 물러나라!”
당연히 군부는 반발했고, 원로들의 신뢰도 잃게 된 오쿠마 내각은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오쿠마 내각은 총사퇴하였다.
일본 최초의 정당 주도 내각으로, 선거권 확대를 실시하는 등 국내 정치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 오쿠마 내각이었으나, 결국 대외 정책의 실패로 실각하고 말았다.
후임 총리에 취임한 건 다시 이토 히로부미였다. 열강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이토가 수습에 나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네 번째 총리직에 취임한 이토는, 아모이 철수를 단행하고 흥중회에 대한 지원을 끊어 버렸다.
“일본이 지원 약속을 깼습니다. 그들을 믿고 봉기를 일으켰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일본의 지원이 끊어지자, 삼주전에서 봉기한 흥중회는 고립되고야 말았다. 영국의 동의를 얻은 이홍장은 흥중회의 봉기를 강경히 진압하라 명했고, 수적으로 절대 불리한 봉기군은 패퇴하고야 말았다.
손문은 대만으로 가서 총독 고다마에게 약속 이행을 요구했으나, 냉정한 거절만 받을 뿐이었다.
“내각이 교체되면서 외교 방침이 변경되었소. 이토 총리께서 중국 혁명을 지원하는 건 결코 안 될 일이라 하셨소.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소이다.”
군부를 확실히 통제하지 못했던 오쿠마와 달리, 이토는 대만총독부에 확고하게 불허 명령을 내렸다.
결국, 손문은 눈물을 삼키고 삼주전 봉기의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흥중회 지도부는 가까스로 포위를 뚫고 홍콩으로 도주했다.
“내가 어리석었다. 혁명은 외세를 믿고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당장 보이는 이익에 눈이 멀어 섣불리 일을 꾸몄구나. 혁명은 인민의 단결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일본을 중국 혁명의 배후 기지로 삼으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이로써 손문의 외세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했다. 멈추지 않는 혁명가, 손문은 다른 형태의 혁명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수만의 병사를 파병하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니, 군부의 불만이 자자하오. 이러다간 북수남진 정책 자체가 실패할 것이오. 북진과 정한은 어려워진 상황이니, 이리되면 외통수요. 총리께서는 대안을 마련해야 하외다.”
“열강과 긴밀히 협의해 대안을 준비하겠소.”
이토가 열강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상대적 온건파이기는 하나, 그 역시 제국주의자인 건 같았다. 팽창을 열망하는 일본 군부와 여론의 동향을 무조건 막았다가는 그 열기가 어디로 튈지 몰랐다.
야마가타의 경고를 받은 이토는 군부와 함께 대안을 준비했다.
“강소, 절강, 복건, 광동은 영국이 용인하지 못하겠다는 걸 분명히 했고. 산동은 독일이 용인하지 않을 것이고, 요동은 러시아가 움켜쥐고 있지. 그럼 남은 건 결국…….”
“메이지 28년(1895)에 점령을 고려했던 해남도입니다.”
해남도(海南島), 즉 하이난. 청조일 삼국전쟁 당시 일본이 대만과 함께 점령을 고려했던 곳이었다. 요동반도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하이난 점령을 고려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관리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에 따라 배상금을 더 받는 것으로 포기했다.
하지만 북수남진과 해양 세력으로 방향을 잡은 일본은,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남양군도의 경영도 실시하고 있었다. 하이난이라고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이난이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긴 해도, 아모이보다 수백 배 크고 대만과 비슷한 면적의 큰 섬이었다. 이를 얻으면 북수남진의 명분은 충분히 세워졌다.
문제 되는 건 청나라가 아니라, 열강의 반응이었다. 이토는 먼저 영국과 교섭에 나섰다.
“중국 동남 연해 전역을 영국의 세력권으로 인정하고, 이를 침범하지 않겠습니다.”
“하하, 역시 이토 총리께서는 대국을 볼 줄 아시는군요.”
“하지만 이대로 출병의 성과를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여론의 압박을 견뎌 내기가 힘듭니다. 귀국도 여론의 압박으로 주산군도를 점령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내가 물러난다면 더 강경한 군부 인사가 총리에 취임할 겁니다. 이는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신 1895년에 확보하려고 했던 하이난을 얻고자 합니다. 이는 괜찮겠지요?”
“으음…….”
영국은 계산을 돌렸다. 하이난은 프랑스의 세력권에 속하는 광주만의 지척이었다.
영국 입장에선 전통적인 숙적 프랑스,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에 한 방 먹이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일본이 우리의 우위를 인정하는 대신, 프랑스와 대립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좋소, 묵인합시다. 프랑스는 반발하겠지만, 뭐, 상관없겠지.”
“영국이 동의했다. 육·해군은 해남도로 진격하라.”
영국의 묵인을 받은 이토 내각은, 하이난 점령을 명령했다. 육·해군이 즉각 출병, ‘해남도의 치안 안정’을 목적으로 깃발을 꽂았다.
1895년 일본의 점령에 격렬히 저항했던 대만과 달리, 현지의 저항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반발은 멀리 파리에서 터져 나왔다.
“하이난은 명백히 우리 공화국의 세력권인데, 일본이 어찌 이를 침해한단 말인가?”
“건방진! 영국은 무섭고, 우리는 안 무섭단 말이냐?”
프랑스는 격분했다. 1898년 광동 남부 광주만(Kouang-tchéou-wan)을 조차 받은 프랑스는, 중국 본토에는 큰 야심이 없었다.
베트남을 비롯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안정이 가장 중요했다. 광주만 조차, 운남과 광서의 철도 부설권 확보는 모두 베트남의 지배와 관계가 있었다.
1896년 청나라가 프랑스에 차관을 빌리는 대가로, 프랑스는 하이난의 할양을 제3국에 불허한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하지만 일본이 하이난을 점령하는데도, 청 조정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프랑스에 막아 달라고 하소연하는 게 전부였다.
“이는 1896년 청·프랑스 조약을 위반한 것이오. 즉각 하이난에서 철수하시오!”
“그런 밀약은 우리는 모릅니다. 일본은 중국 남부 해안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하이난에 진주하였으며, 청나라와 정식으로 교섭할 예정입니다.”
아모이 때와 달리 일본은 못 나가겠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프랑스는 일본의 배후에 영국이 있다는 걸 직감했다.
“공화국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영국 놈들이 조종한 게 틀림없소.”
“일본이 영국의 앞잡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우리도 지원군을 키워 줘야겠군.”
프랑스는 예전부터 노리던 광주만 서쪽의 개항장인 북해(北海, 베이하이)항을 점령했다.
영국의 항의가 있었지만 프랑스는 가볍게 무시했다.
“귀국이 주산군도를 점령한 전례를 따른 것뿐이오.”
이로써 프랑스는 하이퐁(Hải Phòng)-북해-광주만을 잇는 통킹만(Golfe du Tonkin) 세력권을 구축했다.
그리고 하이난 점령의 반발에 대한 수혜는 뜻밖의 국가로 향했다.
“공화국의 동맹, 러시아의 우호 세력인 한국은 우리에게 있어도 친구의 친구다.”
“한국 황제는 가톨릭의 선교를 허용하고, 의화단의 프랑스인 선교사와 기독교도 학살을 막은 신의 있는 인물이다.”
“한국을 키워 영국과 일본의 야합을 막는다!”
영국이 일본을 막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오해한 프랑스는, 만국박람회에 맞춰 파리 금융 시장에 등장한 대한제국 국채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대외 투자에 적극적인 프랑스 금융자본이 한국에 투자했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는 본격적인 국채 매입과 차관 제안이 이어졌다.
대한제국 국채를 홍보하기 위해 노력하던 이강과 대한제국 대표단으로서는 뜻밖의 횡재였다.
“아, 프랑스의 선택에 정말 경의를 표하고 싶네. 아니, 그 전에 일본의 선택에 감사해야겠군.”
세계 각지의 보고를 받고 있던 이선은 웃음을 흘렸다. 그 역시 일본이 아모이 점령의 실패가 북수남진의 실패로 이어져, 어디로 방향이 튈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아모이 점령 실패가 북수남진 정책의 종말과 정한론의 부활로 이어진다.
하지만 실제 역사와 달리 한국의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입지가 훨씬 강했기에, 일본은 구태여 러·프·독과의 대립을 각오하며 북진 정책의 재개로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일본의 하이난 점령은 프랑스의 숙적, 독일의 카이저를 만족시켰다.
카이저는 독일의 동맹인 삼국동맹, 즉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는 동아시아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걸 아쉽게 여겼다.
대신 그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동아시아 정책의 균형을 맞추려 했고, 러시아의 만주 점령도 은근히 후원했다.
하지만 공사 살해를 명분으로 마음껏 날뛰고 있는 독일군은 열강 모두의 눈총을 받고 있었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던 카이저에게 한국의 남만주 점령과 일본의 하이난 점령이 눈에 들어왔다.
“독일, 한국, 일본은 모두 폭도들로부터 외교관이 살해당한 공통점이 있소. 우리가 단결하여 청나라로부터 대가를 받아 내야 하지 않겠소?”
카이저의 동아시아 대리인, 발더제 원수가 전권대사 김옥균과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를 초청하여 협력을 제안했다.
명분은 독일 공사 케텔러, 한국 공사 홍영식, 일본 서기관 스기야마가 살해당한 ‘의화단의 최대 피해국’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는 선에서, 독일은 산동, 일본은 하이난, 한국은 묵던(봉천) 일대를 세력권으로 확보하면 어떨까 하는 게 우리 황제 폐하의 생각이시오.”
“예, 본국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일이 산동을 단독 세력권으로 규정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반발할 가능성이 크니, 비슷한 피해를 본 한국과 일본을 ‘소(小)동맹’으로 끌어들여 반발을 줄여 보겠다는 계산이었다.
“독일의 제안이 그럴싸하긴 하지만, 덥석 받아들이면 다른 열강과의 관계는 어찌하겠는가? 하지만 단호히 거절하면 카이저 성격상 기분 나빠할 테니, 검토하겠다고 시간을 끌라.”
이선은 독일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다. 독일의 제안은 그럴싸해 보여도, 독일의 하위 파트너가 되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
하지만 독일의 제안 중 한 가지는 받아들였다.
“공사 살해가 최대의 피해라는 건 공감하는 바이다. 이 문제에 관해선 독일, 일본과 긴밀히 협력하도록 하라.”
명분상 전권공사 살해만큼 열강과 청나라로부터 양보를 얻어 내기 좋은 것도 없었다. 그래서 독일이 저렇게 광분하는 것이었다. 한국은 날뛸 필요도 없이 독일에 적당히 묻어가면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어차피 중요한 협상은 러시아나 영국과 해야 할 터이니. 일단 러시아와의 협상부터 마무리해야지.”
이선은 만주를 단독 점령하려는 러시아 군부의 강경한 태도를 누그러트리기 위해, 니콜라이 2세를 열심히 설득하는 중이었다. 러시아 군부의 반발로 인해 차르도 흔들렸지만, 이선에게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비장의 논리가 남아 있었다.
1900년 말, 중국의 분할을 놓고 열강 간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이 한창이었다.
극동의 세력 구도, 영·미·일 대(對) 러·프·독이라는 구도도 깨졌다.
오직 이익을 얻기 위해 협상과 협잡을 거듭하는, 각국의 이전투구와 이합집산이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