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97
– 297화에 계속 –
297화 북경 의정서
이홍장과 경친왕은 러시아와 대한제국이 제시한 12개조 조약을 수락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단, 러시아군의 철군 기간을 기존의 5년에서 3년 이하로 줄여 달라는 요청을 했다. 러시아와 한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만주 협약은 체결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대청이 이 조약을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러시아는 만주를 돌려줄 생각이 없습니다!”
“만일 중국이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한다면 분할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영국은 장강 유역을 차지할 것이고, 독일은 산동 전체를 점령할 것입니다!”
양강총독 유곤일과 호광총독 장지동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청 조정 내에서 경친왕과 이홍장 다음가는 위치인 이들의 반대에 당혹스러웠다.
물론 이들의 배후에는 영국이 있었다. 장강 하류 강소·절강·강서의 총독인 유곤일은 영국의 영향을 받았고, 장강 중류 호북·호남의 총독인 장지동도 마찬가지였다.
이홍장이 러시아와 한국을 끌어들여 변방을 내주는 대신 ‘중국 본토’의 분할을 막으려 한다면, 유곤일과 장지동은 영국과 일본을 끌어들여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막으려 했다.
청 조정의 분열상은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해졌고, 지방이 북경의 명령에 불복하는 건 이제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졌다.
“열강은 연합군과 북경 조약을 체결하기 전까지 러시아와 단독으로 조약을 체결하지 말라고 합니다.”
“영국의 압력이 가장 크고, 미국, 일본,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모두 단독 조약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홍장이 12개조 조약 체결을 강행하려고 하자, 영국은 조약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청 조정을 압박했다. 이토 내각 수립 후 영국의 하위 파트너 역할을 하는 일본이 반대하고, 중국 영토의 보전을 외치는 미국도 반대했다. 카이저도 갑자기 태도를 바꿔 반대했다. 독일이 반대하니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도 같은 태도를 보였다.
만주 협약을 지지하고 나서는 건 러시아의 동맹이자 한국의 우호국인 프랑스 정도였다.
“만약 우리가 제시한 조약을 거부한다면, 향후 만주 문제에 있어서 러시아와 한국의 협력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조약 체결을 거부하겠습니까?”
“거부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일단 북경 조약이 체결된 후까지 좀 연기하자는 것이지요.”
비테의 압박에 이홍장은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만주 협약은 북경 조약의 체결 이후로 연기되었다.
“역시 영국이 문제로군. 훨씬 완화된 조항을 제시했고, 러시아군도 가급적 빨리 철군하겠다는데도?”
이선은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영국이 원망스러웠다. 그동안 러시아의 강경한 행보를 잠재우려고 노력하고, 영국·미국·일본을 설득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이선이었다. 각국의 주한 공사들은 이선의 외교적 행보에 호의를 표했지만, 호의가 곧 외교 정책의 변화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선은 고든과 홍영식 살해 사건을 이용해 영국을 집중적으로 공략했고, 한국이 연합군의 충실한 동맹으로 활동하면서 분명 영국과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영국도 ‘한국이 만주와 특수한 이해관계’가 있음은 이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방해하고 나서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냥 러시아가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는 건 무조건 싫다 이거지?”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는 영국은, 러시아가 이득을 보는 건 훼방을 놓고 싶어 했다. 특히 현재 정부를 이끌고 있는 보수당은 자유당보다 그런 경향이 훨씬 강했다.
이선은 이제 외교 정책을 재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서 타협과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건 어려워 보이는군. 어느 한쪽의 편을 확실히 들어야 한단 말인가?’
이선은 일단 만주 협약을 북경 조약 체결 이후로 미루는 데 동의했다.
“한국은 열강의 뜻을 존중하여, 북경 조약 체결 이전까지 청국과 별도의 조약을 체결하지 않겠습니다.”
한국의 조치에 열강, 특히 영국과 미국이 만족감을 표했다.
결국 북경 조약 체결이 급선무가 되었다.
주청 스페인 공사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합국과 청나라의 협상은 계속 지연되었다. 겉으로는 ‘중국의 주권 보호와 영토 보전’을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하나라도 더 뜯어 가려고 열강 간에 이전투구가 계속되고 있는 탓이었다.
영국은 중국 시장의 독점을 유지하려고, 러시아는 만주 패권을 이루려고 안달이었고,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북경 함락에 아무것도 기여한 바 없는 독일군은 1901년 초까지 화북 일대에서 군사 원정을 벌이며 행패를 이어 나갔다.
“전쟁 배상금은 대략 4천만 파운드면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12개국이 나눠 가져야 하는데, 턱없이 적습니다. 최소 6천만 파운드는 되어야지요.”
“청국의 지불 능력을 감안해서 요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4천만 파운드여도 은으로 2억 7천만 냥에 달하는데.”
“시모노세키 조약에서도 청이 지불한 배상금이 2억 5천만 냥입니다. 지불 능력이 안 되면 분할 납부 기간을 늘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자원과 수입을 담보로 걸고.”
배상금 문제에 있어 독일이 가장 강경했고, 미국이 가장 온건했다.
배상금 총액도 총액이지만, 각국이 누가 더 많이 가져갈 건지를 놓고도 이전투구가 계속되었다.
“독일은 보호를 받아야 할 전권공사가 살해되는 충격적인 피해를 겪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받아 낼 겁니다.”
“재산의 피해로 볼 때는 러시아가 가장 큽니다. 동청철도 부설에 3년간 10억 루블이 들었어요. 근데 절반 이상 파괴됐단 말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기존 중국 무역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게 영국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입은 영국 상공인들의 손해가 막심합니다.”
“복서들의 폭동은 기독교인 학살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선교사의 국적이 어딘지 아실 텐데요? 바로 프랑스의 주교, 신부, 수녀들이었습니다.”
“잠깐, 여러분이 모두 간과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이번 전쟁에 얼마나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군비를 소모했는지도 살펴야지요. 일본은 2만 2천의 병력을 신속히 파병하고, 북경 함락 과정에서도 가장 많은 전사자를 냈습니다.”
서로 이전투구를 벌이다가도, 청의 협상 책임자인 이홍장이 배상금을 줄여 달라고 요청하면 똘똘 뭉쳐 반대했다.
“의화단의 난동과 전쟁 선포로 인한 배상금 지불은 물론이고, 이 전쟁으로 파병되어 주둔하고 있는 연합군의 점령 비용도 중국이 부담해야 하오.”
1900년 7월을 기준으로 약 1년의 점령 비용이 더해지니, 배상금은 계속 불어났다.
5월 7일, 12개국은 배상금을 총 7,500만 파운드, 고평은 5억 냥으로 규정하는 데 합의했다.
말기에 접어든 청나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지만, 열강은 이를 강제했다.
“5억 냥이라니요, 도저히 지불 능력이 안 됩니다.”
“아, 걱정 마십시오. 그래서 39년간 분할하도록 하겠습니다. 즉 1940년까지 배상하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 낫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과합니다.”
“대신 연리 4%가 부과됩니다.”
“그, 그러면 총액이 대체 얼맙니까?”
“다 합치면 1940년까지 10억 냥이 넘겠군요.”
“너무합니다! 후세에게까지 지나친 부담을 주는 게 아닙니까?”
“애초에 그러기에, 폭도의 난동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킨 귀국 정부의 책임 아닙니까?”
‘모든 책임은 전쟁을 도발한 중국에 있다’, 열강의 합의 앞에 청나라의 발언권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다음에 문제가 되는 건 할양 문제였다. 연합국은 ‘청조의 주권 인정, 중국의 영토 보전’에 합의했지만, ‘조차(租借)’는 별개 문제였다.
일단 북경 공사관 구역과 천진 조계에 대해서는 합의가 빨리 이뤄졌다.
북경 공사관 구역은 완벽한 치외법권 지역으로 규정되었다. 열강은 저마다 공사관 경계를 정하고 배타적인 권리를 지니고, 열강은 공사관 호위대를 주둔시킬 수 있었다. 즉 청의 수도 북경에 ‘국가 안의 국가’를 설치하게 된 것이었다.
기존의 천진 조계는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의 공동 조계였다. 천진 점령 기간 동안 영국, 독일, 일본이 조계지를 확대하고,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벨기에, 한국이 추가로 조계지를 개설했다.
이로써 천진 조계는 대한제국 최초의 해외 조계가 되었다. 천진에서 대청 무역에 종사하던 한국의 상인들은 조계지에서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었다.
“기타 영토 조차 문제는 각국이 청국과 별도의 협약을 체결하도록 합시다.”
영국은 절강의 주산(저우산)군도를, 독일은 산동의 연대(옌타이)를, 프랑스는 광동의 북해(베이하이)를, 일본은 해남도(하이난)을, 러시아와 한국은 만주를 점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지역의 조차는 중국 해안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건 우리가 할 소리요! 귀국이야말로 중국의 안정과 평화를 해치고 있지 않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각국 간 이견이 워낙 심해, 조차 문제는 별도 협약으로 연기되었다. 단 공통의 제약은 있었다.
“할양이 아니라, 조차 형태로 이뤄져야 할 것. 조차 기간은 러시아의 여순 조차를 기준으로 삼아, 최대 25년을 넘겨서는 안 된다.”
결국 어정쩡한 합의를 이루긴 했으나, 열강은 서로를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며 청나라로부터 하나라도 더 뜯어낼 준비를 했다.
배상금과 영토 문제를 대충 봉합하니 더 이상 협상에 제약이 없었다.
12개국은 북경 점령 1년 이내로 조약을 체결하겠다는 데 합의하고, 1901년 8월 14일 최종 조약을 확정했다.
북경의정서, 혹은 신축(辛丑) 조약은 총 12개 조항과 20개의 부록으로 정리되었다.
제1조. 중국은 황족과 대신을 독일, 한국, 일본으로 파견해 독일 전권공사, 한국 전권공사, 일본 서기관의 살해를 사죄한다. 외교관의 살해를 추모하는 기념물을 세운다.
제2조. 중국은 전쟁 범죄자 13인의 왕공대신과 기타 책임자들을 처벌한다.
제3조. 중국은 향후 3년간 무기와 탄약 수입을 금지한다. 이 기간은 연장될 수 있다.
제4조. 권민이 저지른 서양인 무덤 파괴를 복원하고, 피해자에 대해 보상한다.
제5조. 중국은 7,500만 파운드, 은 5억 냥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제6조. 북경 공사관 구역은 불가침의 존재이며, 각국은 상설 공사관 호위대를 주둔시킬 수 있다.
제7조. 대고 포대를 비롯해, 북경과 천진 사이의 모든 통로의 포대를 철거할 것.
제8조. 각국은 북경과 천진, 산해관 사이의 해로와 철로 연변에 병력을 주둔시킬 권리가 있다.
제9조. 중국인의 배외운동을 철저하게 진압하여야 하며, 만일 지방관이 진압하지 못하면 즉시 파면하고 영구히 등용하지 말아야 한다.
제10조. 권민이 기승을 부린 지역에서 5년 동안 과거시험과 관리 임용을 중단한다.
제11조. 기존의 통상조약에 대해 각국이 요구하면 중국은 이에 협상해 수정할 수 있다.
제12조. 청국은 총리아문 대신 외교부를 설치해 6부의 위에 두며, 각국에 호의를 제공한다.
제5조의 부록. 배상금 액수와 지불 방식에 대하여.
배상금 지불 기간은 39년(1940년까지)이며, 연리 4%의 이자를 적용한다. 배상금은 은이 아니라 파운드로 납부해야 하며, 환전 비용은 청국이 부담한다. 납부 기간 동안 관세, 내지 통과세, 염세를 담보로 한다. 배상금 지불의 실현을 돕기 위해 현행 관세 3.2%를 5%로 올린다.
배상금의 분할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 130,000,000 냥. (전체 액수의) 26%.
독일. 90,000,000 냥. 18%.
프랑스. 70,000,000 냥. 14%.
영국. 50,000,000 냥. 10%.
한국. 40,000,000 냥. 8%.
일본. 38,500,000 냥. 7.7%.
미국. 36,500,000 냥. 7.3%.
이탈리아. 30,000,000 냥. 6%
오스트리아. 9,500,000 냥. 1.9%
벨기에. 4,500,000 냥. 0.9%
네덜란드. 850,000 냥. 0.17%
스페인. 150,000 냥. 0.03%
1901년 8월 14일, 광서 27년 7월 1일
스페인·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미국·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일본·한국 전권대사와 청국 전권대신이 서명함.
연합국 대표, 스페인 왕국 전권대사 베르나르도 콜로간(Bernardo J. de Cologan)
대영 제국 전권대사 어니스트 메이슨 사토우(Ernest Mason Satow)
러시아 제국 전권대사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폰 기르스(Mikhail Nikolayevich von Giers)
프랑스 공화국 전권대사 폴 부(Paul Beau)
독일제국 전권대사 알폰스 폰 뭄-슈바르첸슈타인(Alfons von Mumm-Schwarzenstein)
미합중국 전권대사 윌리엄 우드빌 록힐(William Woodville Rockhill)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권대사 모리츠 폰 발보른(Moritz von Wahlborn)
이탈리아 왕국 전권대사 주세페 살바고 라지(Giuseppe Salvago Raggi)
벨기에 왕국 전권대사 모리스 주스텡( Maurice Joostens)
네덜란드 왕국 전권대사 프리돌린 마리누스 크노벨(Fridolin Marinus Knobel)
일본 제국 전권대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
대한 제국 전권대사 김옥균(金玉均)
청국 흠명전권대신 경밀친왕 애신각라 혁광
청국 흠차전권대신 문화전대학사 북양통상대신 직례총독 숙의백작 이홍장
경친왕과 이홍장은 조건의 완화를 위해 최후의 노력을 했지만, 열강의 연합 앞에 손을 쓸 길이 없었다. 결국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당장 청조가 멸망하거나 중국의 영토가 분할되지는 않았지만, 중국은 완벽한 반식민지 상태에 놓였다.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지위는 비참할 정도로 추락해 버렸다.
청조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예속되어 그 위신이 밑바닥까지 추락되었지만, 보다 심각한 건 경제적 문제였다. 청나라 전체 세입의 6년 치가 넘는 은 5억 냥, 1940년까지 이자를 포함해 총 10억 냥이 넘는 막대한 배상금은 이른바 ‘경자·신축년의 배상’으로 불리며 중국 경제의 발전을 가로 막는다.
의화단 전쟁의 결말, 북경의정서 체제하에서 청조는 만신창이요, 중국은 열강의 반식민지에 불과했다.
이는 곧 중국의 분할과 청조의 종말을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