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98
– 298화에 계속 –
298화 민의원 총선거
대외적으로 의화단 전쟁, 만주 점령, 북경 조약이 진행되는 동안, 대한제국 국내에서도 특별한 변화가 있었다.
바로 총선거 실시와 민의원(民議院) 개설이었다.
광무 3년(1899)의 헌법 선포 이후, 예정대로라면 광무 4년 하반기에 민의원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의화단 전쟁 발발과 동원령, 북진과 만주 점령, 선거법 문제로 인해 총선거 실시는 6개월 연기되었다.
“초대 민의원 선거는 광무 5년 5월에 실시한다.”
선거 연기를 반대하는 정파는 없었다. 각 정파는 민심을 확보하는 데 시일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의회정치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약간 연기하는 건 큰 문제가 없었다.
“이번 선거는 오당(吾黨)에 가장 유리하기는 하나,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오.”
현시점에서 헌정협회가 사실상의 정부 여당이라 할 수 있었다.
1898년 김홍집, 박정양, 어윤중 등 동도서기파 대신들과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 문명개화파(개화당 주류) 대신이 연합한 헌정협회였다.
1900년, 헌정협회는 초대 민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당으로 개편했다. 정당명은 헌정협회를 그대로 계승한 헌정당(憲政黨)이 논의되었으나, 일부 이견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일본 집권 여당 이름이 헌정당 아닙니까?”
“헌정이란 말이 일본에서 독점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못 쓸 이유는 아니지 않소?”
“같아서 문제라기보단, 헌정당이 분당해서 정권을 잃지 않았습니까. 불길한 전례를 따를 이유가 없지요.”
정당 정치를 외치던 오쿠마 시게노부의 진보당과 자유 민권을 외치던 이타카키 다이스케(板垣退助)의 자유당이 연합하여 헌정당이 탄생, 1898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을 구성했다.
일본 헌정당은 선거법 개정과 정치 개혁 등 여러 가지 유의미한 개혁을 이뤄 냈지만, 아모이 파병 문제로 인해 좌초하였다. 그 과정에서 진보당파와 자유당파가 분열하였고, 오쿠마의 ‘헌정본당’과 이타카키의 ‘헌정당’으로 쪼개졌다.
일본 정치를 주도하던 삿초 번벌 세력은 정당에 대해 냉소적이었으나, 정당 정치의 필요성을 느낀 이토 히로부미가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를 결성하여 옛 자유당 세력을 대거 흡수해 제1여당이 되었다. 헌정당은 다시 만년 야당의 처지로 돌아갔다.
“그도 그렇긴 하군.”
“그리고 우리가 현재 헌정협회라고는 해도, 사실상 개화당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 이름을 포기할 필요가 없지요.”
1880년대 이래, 정식 정당은 아니었지만 개화파의 조직은 ‘개화당’이라 불렸고, 신정부는 ‘개화당 정부’라고 통용되었다. 그 이름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현실적 이유가 제기되었다.
결국 헌정협회는 ‘입헌’과 ‘개화’를 내세워, 입헌개화당(立憲開化黨)이란 정당으로 확립되었다.
총재로는 박정양이 추대되었으나, 하부 조직과 대중 동원은 옛 개화당 조직에 의존하고 있으니 실질적인 지도자는 김옥균이라 할 수 있었다.
입헌개화당은 황제의 신임, 정부 여당의 위치, 전국적 조직, 북벌의 성공이라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판세에서 민의원 선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어차피 이번 선거는 개화당이 승리하겠지. 하지만 우리 독립협회는 진정한 입헌 정치와 자유 민권의 기수로서 의회에서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성상께서는 향후 영미와의 관계 개선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영미와 연결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1898년에 전개된 만민공동회 이후 세력이 위축되었던 독립협회는, 역시 민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당으로 개편했다. 독립협회는 그 이름을 그대로 계승하여 독립당(獨立黨)을 창당했다.
유길준, 서광범, 서재필 등 자유 민권파(개화당 소장파)와 윤치호, 남궁억, 정교 등 만민공동회 지도부가 연합해 독립당 지도부가 되었고, 만민공동회 활동을 통해 정치의식이 깨어난 도시민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현실적으로 입헌개화당의 우세는 인정했지만, 독립당은 자유 민권과 영미식 자유주의를 내세웠다. 이들의 모델은 영국 자유당(휘그)이었다.
주영, 주미 공사 재임을 마치고 돌아온 서광범과 서재필은 영미와의 관계 개선도 역점으로 두었다.
이들은 개화가 진행 중인 황성과 주요 도시의 지지를 받았다.
“근왕만 내세워서는 민심을 얻을 수 없소. 현실적으로 성상의 신임을 받는 건 개화당이니까. 그렇다고 향촌 사대부들만 대변했다가는 대중적 지지는 포기하겠단 의미지. 대신 우린 다른 방향을 고려해야 합니다.”
“북벌 성공으로 그 어느 때보다 애국적 열망이 높소. 이를 이용합시다.”
1898년의 정치 투쟁에서 패배한 황국협회는, 확고한 지지기반이 있는 개화당이나 독립당에 대해 불리한 점이 많았다.
대원군 계열 보수파와 향촌 사대부들, 보부상들이 연합하여 보수 세력을 구축했지만 시대착오적인 연합이라는 게 드러났다. 무엇보다 근왕을 내세우는 이들이, 황제의 진보성과 대립한다는 건 모순이었다.
의화단의 참사를 보면서 보수파도 문명개화의 깃발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대신 이들은 새로운 조류, 애국주의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주일, 주불 공사를 마치고 돌아온 이준용과 홍종우는 각국의 우익 대중 운동을 연구했다.
독일의 범게르만주의 운동, 이탈리아의 ‘미수복 영토’를 되찾자고 주장하는 ‘이탈리아 수복주의(Irredentismo Italiano)협회’가 이들의 모델이었다.
황국협회 조직을 기반으로 제국당(帝國黨)이 결성되어 대외팽창과 ‘미수복 고토’의 회복을 주장했다.
시대착오적인 수구 세력에서 대중적 기반을 노리는 우익운동으로의 전환이었다.
“어차피 이번 선거는 큰 의미가 없소. 우리는 외곽에서 토지 개혁과 선거법 확대를 압박합시다.”
“본국의 여론도 만인대의 활약으로 큰 자극을 받고 있소.”
농민협회는 주류가 모두 북방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초대 민의원 선거에는 불참하기로 했다. 어차피 선거법은 농민들에게 불리하게 짜여 있었다.
만인대의 활약으로, 전봉준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농민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사심 없는 혁명가로, 국가주의자들에게도 국토의 팽창을 이끌어 낸 애국자로 인식되었다.
만인대가 해방시키고 황제에게 바친 영토가 대한제국이 요구하는 자치령의 기초가 되었으니, 좌우를 막론하고 인기를 끌 만했다. 국제적 명성도 높아져, 전봉준은 ‘동양의 가리발디’로 지칭되었다.
만인대를 해산하고 돌아온 전봉준에게 입헌개화당, 독립당, 제국당 모두 영입을 제안했다. 중추원에서 외톨이나 다름없었던 예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다른 대우였다.
하지만 전봉준은 영입 제안을 거절했다. 그에겐 의원 자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이선이 임명한 북방개척위원회, 토지조사위원회에 복귀했다. 전봉준의 다음 목표는 토지 개혁을 이룩하는 것이었고, 이를 암시했던 황제의 약속을 믿었다.
“중추원 의결로 민의원 선거법을 제정합니다.”
오랜 진통 끝에, 1900년 말 초대 민의원 선거법이 확정되었다.
개화당과 제국당은 선거권을 제한하려 하였다. 이들은 영국 옛 선거법, 프로이센의 신분제 선거법, 일본선거법을 참조해 소수에게만 투표권을 주려고 했다.
“우리보다 먼저 선거를 실시한 일본도, 1890년 초대 중의원 선거에서 투표권을 얻은 건 전체 4천만 인구의 1%가량인 50만 명이었습니다.”
“왜 꼭 일본 사례를 참고해야 합니까? 대한이 아시아의 진보를 선도하면 안 됩니까?”
“아직 대한국은 문명개화가 확립되기 전이기 때문에 제한적 선거법이 필요합니다.”
“이는 국민을 무시하는 발언입니다!”
“그럼 보통 선거라도 하자는 겁니까? 그건 전 세계에서 하는 나라가 공화국인 프랑스밖에 없소! 대한은 제국이오!”
“하긴, 무지한 농민들에게 투표권을 줄 수는…….”
독립당은 선거법 확대와 선거권 나이 조정을 주장했지만, ‘무지한 농민’들에게 투표권을 줄 수 없다는 건 같았다.
결국 정원 200명, 국세 연간 15원 이상 납부하는 성년 남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제한적 선거, 소선거구제, 선거권 만 25세, 피선거권 30세로 하는 선거법이 중추원에 통과되었다.
‘무지한 농민’에 대한 지배층의 불신이 얼마나 강한지, 이는 차차 개선되어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이선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선거권 확대가 아직 이르다는 데에는 짐도 동의하지만, 이래서야 대표성이 얼마나 되나? 짐은 민의원에 대표성이 있길 바라오. 그리고 선거권 연령도 너무 높지 않소. 다시 논의하시오.”
대한국 헌법으로 입헌 정치가 확립되었지만, 황제에게는 입법권과 거부권이 있었다. 황제가 거부하면 그 법은 통과될 수가 없었다. 중추원은 부랴부랴 선거법을 재론했다.
정원 200명, 국세 연간 10원 이상 납부자에게 투표권을 주는 제한적 선거, 소선거구제, 선거권 23세, 피선거권 25세로 조정되었다.
약간의 조정만으로 유권자 수는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이선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동의했다.
최종적으로 1,720만 대한제국 등록 인구 중 98만 명이 유권자로 확정되었다.
전체 인구의 약 6%로, 제한적 선거였으나 1900년 당시 시대적 기준과 비교하면 진보적이라 할 수 있었다.
아시아에서 두 번째, 실질적으로 최초로 입헌 정치와 총선거를 실시한 일본이 1890년 초대 중의원 선거에서 선거인은 4천만 인구 중 약 50만이었다.
최근 오쿠마 내각의 개혁으로 선거인 수가 두 배로 증가, 98만 명이 되었으나 4,300만 인구에서 약 2% 정도였다.
일본 인구의 절반에 못 미치는 한국에서 유권자 수는 동등하니, 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선거법이라 할 수 있었다.
초대 민의원 선거는 광무 5년 5월 5일로 결정되었다.
“5·5 총선거! 입헌 정치로 가는 길이 열리다!”
“투표는 애국민의 의무! 기권은 국민의 수치!”
초대 총선거를 앞두고 선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현실적으로 투표권자는 전체 인구의 소수이고, 여당인 입헌개화당의 압승이 예상되었지만, 수천 년 한국 역사상 최초로 있는 국민 선거에 열광적인 반응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대황제 폐하께서 신임하는 당, 정부를 이끄는 당, 대한의 자주독립과 승리, 입헌 정치와 문명개화를 이끄는 당! 입헌개화당!”
“국민의 진정한 민권, 진정한 의회 정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위해 독립당에 한 표를!”
“만주를 수복하자!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를 수복하자! 제국당과 함께 북진으로!”
“정당들이 번지르르한 정책을 내세워도, 결국 우리 지역을 잘 아는 건 지역 출신 후보뿐이외다. 소속과 상관없이 동향인에게 현명한 한 표를!”
전국정당은 실질적으로 입헌개화당 하나뿐이라, 독립당은 도시 위주, 제국당은 농촌 위주로 선거 전략을 구사했다.
세금 납부액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도시에는 상공인을 중심으로 한 유권자 계층이 존재했으나, 농촌은 실질적으로 지주와 부농만이 투표권을 가졌다.
소선거구제의 특성상, 지역 출신 정치인들이 강세였다. 아직 향촌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지방은 더욱 그러했다.
‘개화당 정부’에 반감을 갖고 있던 향촌 사대부와 지역 유지들도, 의원 자리를 얻기 위해 입헌개화당에 입당 신청을 내거나, 아니면 본래 성격에 맞게 제국당에 입당하거나, 그도 아니면 무소속 출마를 했다.
입헌개화당이 워낙 대세라 의원직을 노리는 유지들은 대부분 개화당에 입당 신청을 냈으나, 공천을 못 받은 자들은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다.
대망의 선거일, 광무 5년(1901) 5월 5일 일요일.
유권자 98만 명 중 무려 97%가 투표에 참여했다. 첫 선거라는 상징성, 소수의 유권자라는 자부심,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에서 명령하면 따라야 한다’는 정서가 깔려있었기 때문에 투표를 참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강했다. 먼 거리를 마다치 않고 투표하러 오는 이들로 투표소가 북적였다.
전국 1부 13도 95만의 투표가 이뤄진 가운데, 결과 발표까지는 시일이 걸렸다.
교통과 통신이 불편한 지방에서 이뤄지는 선거의 표까지 모두 합산하여 집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5일 뒤인 5월 10일, 선거를 주관한 내무부는 초대 민의원 총선거 결과를 발표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초대 민의원 총선거 결과를 발표합니다. 입헌개화당 126석……”
“오오!”
내무대신 박영효의 발표를 듣던 김옥균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압도적 승리였다. 박영효가 눈을 흘기자, 김옥균이 씩 웃으면서 계속하라고 권했다.
“독립당 25석, 제국당 17석, 무소속 32석. 구체적인 득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상대로 입헌개화당의 압승이었다. 입헌개화당은 의석수 과반을 훌쩍 넘어, 3분의 2에 근접할 정도였다. 무소속 몇 명을 영입하면 개헌선까지 가능했다.
자유주의를 내세운 독립당은 황성과 인천, 부산, 원산 등 도시의 진보적 여론을 중심으로 당선자를 냈고, 제국당은 애국주의를 내세웠음에도 도시에서 외면받고 삼남 농촌과 북진정책에 공감하는 국경 지방에서 당선자를 냈다.
유권자들 대부분은 개화 정책의 수혜를 받은 사람들이었고, 처음 하는 선거에 ‘관당(官黨)’을 지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관당이란 곧 개화당이었다.
문명개화란 측면에서 개화당은 독립당보다 유리했고, 애국주의란 측면에서도 승전과 북벌을 이룩한 정부 여당인 개화당은 제국당보다 유리했다.
결국 입헌개화당은 전국적으로 고른 득표를 하며 소선거구제도에서 압승했다.
대한제국은 프로이센식 입헌 군주정을 선택해서 황제가 총리와 내각의 지명권을 가졌기에,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황제가 총리를 지명할 수 있었지만, 이선은 자신이 신임하는 입헌개화당이 압도적인 1당을 차지한 것에 만족했다. 표면적으로 민의에 기초한 정당 중심의 내각이 이뤄진 것이었다.
“짐은 역사적인 대한국의 첫 선거가, 순조롭고 평화롭게 진행된 것에 기쁘게 생각한다. 이로써 대한국은 당당한 입헌 국가, 민의를 대변하는 의회 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짐과 너희 국민은 한마음으로 국가를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다.”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헌법 만세!”
광무 5년, 1901년. 아시아에서 오스만 제국과 일본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대한제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어 하원이 성립되었다.
첫 선거를 치르고 해산당한 오스만 의회, 삿초 번벌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리는 일본 의회와 비교하면, 대한제국은 명실상부 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의회 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20세기의 초엽, 대한제국은 ‘국권’에 이어 ‘민권’의 확립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