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299
– 299화에 계속 –
299화 국경일
민의원 총선거 후, 새로운 내각이 들어섰다.
“민의원 선거를 끝으로, 신은 이제 총리대신직에서 물러날까 합니다.”
선거를 앞두고 총리대신 김홍집이 사직 의사를 밝혔다. 1894년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한 이래, 3차례 내각 교체가 있었으나 쭉 총리직을 수행하던 김홍집이었다.
아니, 내각제도 이전에 의정부 체제에서도 마지막 영의정이 김홍집이었으니, 김홍집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10년째 유지 중이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도, 헌법을 제정한 후에도 총리는 계속 김홍집이었다.
그만큼 이선이 김홍집을 신임한다는 의미였다.
“이 나라에 경만 한 총리 적임자가 없거늘, 어찌하여 물러나려 한단 말이오?”
“노둔(老鈍)한 신은 능력에 비해 과분하게 오래 직을 수행해 왔습니다. 신의 나이가 어느덧 예순이라, 근래 들어 건강도 썩 좋지 못합니다. 대한에 총선거가 이뤄지는 역사적 순간이니, 다른 이가 새로운 시대의 대임을 맡는 게 좋겠습니다. 부디 사임을 윤허해 주소서.”
김홍집의 행정 능력과 정국 조율은 모든 관료 중 가장 탁월했고, 그렇기에 이선은 김홍집에게 국정을 일정 부분 위임하고 친정(親征)에 나설 수도 있었다. 이선의 신임을 받으며 김홍집은 여러 중요한 개혁을 이끌었다.
하지만 과로의 여파인지 60대에 접어든 김홍집의 건강은 근래 눈에 띄게 나빠졌고, 이미 사임 의사를 밝힌 지 여러 차례였다. 그때마다 이선과 대신들이 만류하여 직을 유지했다.
이선도 일 중독이라 할 만큼 만기친람으로 유명했지만, 똑같이 과로를 해도 30대인 이선과 60대인 김홍집의 체력이 같을 수가 없었다.
이선의 만류에도 김홍집이 거듭 사임 의사를 밝히자, 결국 사직을 허락했다.
“경의 뜻이 그러하다면, 사직을 윤허하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하지만 이 나라에는 여전히 경의 지혜가 필요하오. 경은 대한의 원훈이니, 계속 짐과 내각에 조언을 아끼지 말아 주길 바라오.”
“예, 폐하! 신은 대한의 신하로서 죽는 날까지 충심으로 성상을 보좌하겠습니다.”
김홍집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갈 나이는 아직 안 됐지만, 원훈(元勳) 칭호를 받고 중추원 종신 의관으로 임명되었다.
원훈은 일본의 ‘원로(元老)’, 이토 히로부미와 마쓰가타 마사요시처럼 정부의 위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국가의 원로로서 황제와 내각의 조언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김홍집의 사임이 결정됨에 따라, 입헌개화당은 차기 총리로 참정대신 박정양을 내세웠다.
“이 늙은이보단 고균이나 금릉위께서 차기 총리로 적격이 아니겠소?”
“아닙니다. 전국의 신망이 높은 대감께서 총리를 맡으심이 옳습니다.”
박정양은 오히려 김홍집보다 한 살 위로 환갑이었지만, 그간 김홍집 내각의 이인자로서 명망이 높고, 미국 공사 경험으로 입헌 정치와 의회에 대해 우호적이라 새 총리로 적격이라는 좌중의 지지가 있었다.
총선에서 승리한 입헌개화당은 황명으로 조각(組閣)을 준비했다.
“내각 총리대신 박정양. 참정대신 김윤식. 내무대신 박영효. 외무대신 김옥균. 탁지대신 어윤중. 군무대신 윤웅렬. 법무대신 민영익. 학무대신 신기선. 궁내대신 김규홍.”
새 내각은 인물만 보면 김홍집 내각과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입헌개화당 일색이었다. 보수파 황국협회 계열이었으나 궁내대신으로 임명된 시종원경 김규홍이 예외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의외의 인선은 이제부터였다.
“농상공부를 분리, 신설한 상공대신에 이용익.”
농상공부(農商工部)를 분리해서, 상업·무역·공업을 관장하는 상공부에 보부상 출신 이용익이 임명되었다. 보부상에서 시작해 근대적 자본가로 변신, 대한천일은행장을 역임한 경험을 높이 사서였다.
황국협회의 재정적 지원을 맡았었던 전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선의 경고를 받은 이후 이용익은 헌정협회로 전향하여 대신들과 인맥을 쌓았다.
함경도 보부상 출신으로 대신까지 오른 이용익만 해도 입지전적이라 하겠으나, 더 놀라운 인선이 있었다.
“농상공부를 분리, 신설한 농림대신에 전봉준.”
농업과 토지, 식량 문제를 전담하는 부처 농림부에 전봉준이 임명되었다.
전봉준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고는 하나, 이선의 대신 임명에 개화당은 난색을 표했다. 전봉준이 농민에게 유리한 토지 개혁 주창자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황제가 총리에게 조각을 명했다고는 하나, 완전한 입헌 군주제하고는 다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임명권을 행사하는 건 박정양이 아니라 이선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입각 제안을 받자, 전봉준은 처음에는 고사했다.
“신은 오랫동안 재야에 있었기에, 나랏일에는 무지하여 대신의 중책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부디 다른 현명한 이에게 맡겨 주십시오.”
전봉준의 사양에 이선이 직접 경운궁으로 불러들여 권했다.
“짐이 일전에 토지 제도의 변화를 암시했던 걸 기억하리라 생각하오. 전국의 양안과 토지 조사가 끝나고, 승전을 이루고 신영토를 개척한 지금이야말로 적기요. 경이 농림부를 맡아 진두지휘해 주길 바라오. 농민을 대변하는 데 있어 경만 한 적임자가 없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신명을 다해 지극한 성은에 보답하겠습니다!”
전봉준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전봉준이 고사하려고 했던 건, 개화당 일색인 내각에서 자신이 허울뿐인 자리를 맡게 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렇다면 그를 따른 농민들은 ‘대신 직에 눈이 멀어 농민협회와 만인대를 배신했다’고 실망할 터였다.
하지만 임명을 권한 건 개화당이 아니라 황제였고, 이선은 진지하게 토지 개혁을 할 의사가 있었다.
‘개화당은 결국 내 뜻을 따르긴 하겠지만, 그들 대부분이 명분 벌열 출신. 지주들과의 이해관계에 자유롭지 않지. 토지 개혁 책임자만큼은 농민 출신을 임명해야 한다.’
개화당도 토지 개혁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이들이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토지의 사적소유권 확립과 세수 증대였다. 자연히 지주에게 유리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선은 지주와 농민 사이에서 새 토지 제도가 균형을 잡히길 원했고, 농민의 대변자이자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전봉준만 한 적임자가 없었다.
그리고 이선에게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새로운 역사에서는 자신의 뜻을 펼쳐 보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김옥균과 김홍집이 문명개화의 뜻을 펼치고, 대한제국의 원훈이 된 것처럼.
광무 5년(1901) 7월 15일, 민의원이 개원했다.
역사적인 초대 민의원의 의장으로는 입헌개화당의 김가진이 선출되었다.
민의원 개원식에는 200명의 의원 외에도, 황제 이선과 내각총리대신 박정양 이하 각료들도 모두 참석했다.
의장석 위에는 대형 태극기와 황제의 어진이 배치되어, 황제-국가-국민을 일체화하려는 시각적 시도가 이뤄졌다.
“대황제 폐하께서 흠정(欽定)하시어 국민에게 반포하신 대한국 헌법에 의거하여, 민의원이 개원했음을 알립니다.”
의장 김가진의 개회 선원과 함께 초대 민의원의 회기가 시작되었다.
민의원은 첫 안건으로 대한국 헌법의 비준을 완료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완전한 입헌 국가, 대의 정치(代議政治)의 첫발을 떼게 되었다.
광무 5년 8월 14일, 북경 의정서 체결 소식이 대한제국에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 전역은 축제 분위기였다. 때마침 태조 이성계의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 개국기원절이었으므로 그 기쁨은 더욱 컸다.
“만청이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고 굴복했다! 대한국에 사죄 사절 파견 예정!”
“대한국이 승전국이 되었다!”
“이제 대한국은 자랑스러운 열강의 일원이다!”
“만청, 대한에 배상금 4천만 냥 지불! 이는 황제 폐하의 위엄, 고 홍영식 공의 희생과 우리 군대의 무훈으로 달성된 것이다!”
“만주 고토 수복이 멀지 않았다!”
대중의 열광에는 과장된 측면도 있었다.
분명 대한제국이 연합국 중 다섯 번째로 많은 배상금 4천만 냥을 받았지만, 이는 국력에 비례했다기보다는 특수한 상황에 기인해서였다.
독일 대표가 전권공사 살해에 가장 큰 책임을 요구했고, 배상금 증액을 요구했다. 그 결과 독일은 연합군에 대한 기여보다 훨씬 많은 9천만 냥의 배상금을 받아 냈다.
독일 덕택에 한국 역시 전권공사 살해에 대한 배상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고, 북경 공격에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일본보다 배상금을 더 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만주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축배를 들기에는 일렀으나 전국은 승전 분위기에 휩싸였다.
북경 의정서 체결 후, 약 10만에 달하는 점령군이 북경에서 순차적으로 철수를 개시했다.
러시아군과 일본군, 한국군이 연합군 중 가장 빠르게 철수했다. 가까운 지리적 위치도 있지만, 청국과의 영토 문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 우호적 태도를 취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한국군이 먼저 본국에 도착했다.
북경 파병 부대가 인천에 상륙하자, 자발적으로 나온 인파가 열렬하게 환호했다.
파병 부대가 경인선 열차를 타고 황성에 입성하여, 전승의 흔적인 각종 군기(軍旗)를 바치는 의식을 거행하자 열광은 절정에 이르렀다.
“대한국 만세! 대한국군 만세!”
“북경의 정복자들이여, 귀국을 환영합니다!”
광무 5년 9월 8일.
이날은 국경일로, 태상황의 생일인 만수성절이었다.
올해는 태상황의 보령이 쉰이 되는 해였으므로, 특별히 성대한 진연이 준비되었다.
각 신문의 1면에는 ‘太上皇陛下聖壽五十年萬壽聖節進宴(태상황 폐하 성수 오십 년 만수성절 진연)’이 큼지막하게 써졌다.
이는 국가와 황실의 권위를 높이고, 유교 국가 조선을 계승한 황제 이선이 태상황에게 효도를 다 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주상께서 이토록 효성을 다하니, 이 늙은 아비는 기쁨을 참을 길이 없소.”
태상황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선은 정중한 태도로 예우를 표했지만, 반은 효심이어도 반은 냉소였다.
이선은 태상황에게 넉넉한 연금, 창덕궁 중수,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길 거리를 주었다. 덕택에 태상황은 서양식 전각에서 커피를 마시고, 창덕궁으로 예인들을 초대하여 공연을 관람하고, 온갖 즐거움을 누렸다.
비록 왕위와 권력은 빼앗겼지만, 더없이 즐거운 나날이었다. 이제 태상황은 권력에 초연한 듯,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 정치는 아무것도 없었다.
국경일인 만수성절에 맞춰, 경희궁에서 관병식(觀兵式)이 개최되었다.
북경의 승리자, 근위사단 제1근위여단이 군을 대표해 보무당당하게 열병을 했다.
북경 승전을 기념하는 자리이니만큼, 각국 공사도 귀빈으로 초청되어 열병식을 함께 했다.
통수권자인 이선은 귀빈석 위에서 환영사를 했다.
“친애하는 대한국 육해군 장병 여러분! 짐은 그대들이 자랑스럽다! 그대들은 천진에서, 북경에서, 요양에서, 길림에서, 심양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대들이 거둔 승리는 대한국의 역사에 길이 빛나리라! 대한국 육·해군에 길이 영광 있을지어다!”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근위사단은 일제히 만세를 외치고, 열병을 시작했다.
대한제국군 최고 정예인 근위사단이니만큼, 그 엄정함은 열강의 군대에 못지않았다. 보병은 태극기와 소총을 들고 대오를 맞춰 행진하고, 기병은 기마술을 뽐내고, 포병은 최신 야포를 끌고 나왔다.
장병들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 황제를 향했다. 이선은 거수경례하며 행렬을 지켜보았다.
“우리 대한의 군대가 북경과 심양을 정복하는 날이 올 줄이야. 참으로 열성조가 하늘에서 기뻐하실 일이오!”
전 통수권자, 태상황은 감격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재위하던 시절에는 상상이나 할 뿐, 현실로 이뤄지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할 일이었다.
“진짜 10년 전만 해도 이 나라가 이렇게 성장할 줄 누가 알았겠소.”
“말석이라고는 하지만, 열강의 일원으로 함께하게 되었으니…….”
각국 공사들도 놀라움을 표했다. 특히 16년 전에 처음 조선에 와서, 잠시 본국으로 돌아간 기간을 제외하고 쭉 재임 중인 프랑스 공사 플랑시는 조선의 변화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변화한 시선에 자부심을 느꼈다.
“이제 대한국은 자랑스러운 열강의 일원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를 수복하자!”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열풍이 불고 있는 한국 국내에서도 이번 기회에 ‘고토를 수복하자’는 여론이 쏟아졌지만, 이선은 일축했다.
“한국이 진정한 열강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팽창의 기회는 이번만이 있는 게 아니다. 과잉 팽창은 반드시 뒤탈이 따른다. 현시점에서 필요한 확실한 실리만을 챙겨야 한다.”
이선은 차분하게 주춧돌과 벽돌을 쌓고, 집을 짓고 싶었다.
역사를 살펴봐도, 국력을 과신하고 팽창했다가는 반드시 패망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이선의 본래 구상은, 일단 1907년에 영러협상이 이뤄질 때까지 버틴다는 것이었다.
팽창을 원하는 열강 간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고, 세계대전의 발발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때까지 한국은 차분하게 국력을 쌓고 외교적 신뢰를 얻어, 동아시아에서 자유 행동권을 얻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세계대전은 열강에 재앙이겠지만, 한국에게는 다시없을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영러협상이 실제 역사처럼 이뤄진다는 보장이 없었다. 역사가 변화하는 바람에 당장 내년에 체결될 영일동맹의 가능성은 거의 없었고, 장차 영불협상과 영러협상도 어찌 될지 몰랐다.
‘영일동맹과 러일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지긴 했지만, 결국 어떤 형태로든 세계대전은 일어난다. 지금은 영국과 대립할 때가 아니다.’
1900년까지는 역사가 큰 변화 없이 이선이 아는 대로 진행됐다. 그런데 의화단 전쟁을 기점으로, 그동안 조금씩 변화하던 역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열강 간의 이합집산과 이전투구는 이선이 알고 있던 역사와 미묘하게 달랐다.
‘결국, 기존 지식을 활용해 얼마나 임기응변을 잘하느냐에 달렸군. 역사대로라면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가장 격렬히 반대할 일본이 북수남진론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잠잠하고, 영국은 그저 러시아의 이익이 싫어서 총대를 메고 반대하는 상황. 광서제는 한국에 우호적이다. 그 틈을 파고들어야겠군.’
이선은 만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북경으로 가서 광서제와 정상 회담을 계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