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0
– 30화에 계속 –
30화 알현
겨울 궁전.
러시아 제국의 차르,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황실 외교 자문관 알렉산드르 조미니 남작의 알현을 받았다.
알렉산드르 조미니는 외교관으로서 러시아를 위해 수십 년간 봉직했고, 그 부친 앙리 조미니는 알렉산드르 2세의 황태자 시절 군사교육을 맡았다. 비록 지금은 은퇴했지만, 황제는 스승의 아들이자 오랜 신하의 의견을 존중했다.
남작은 청나라와의 회담에 대한 황제의 자문에 응한 후, 이선을 만난 일을 보고했다.
“그 소년이 조선의 왕자라는 게 확실한가?”
“예, 폐하. 6등 문관 베베르가 말하길, 틀림없는 조선 국왕의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그거 흥미롭군. 수교도 없는 조선의 왕자가 유람하러 러시아로 온 것은 아닐 터이고.”
“본인을 조선 국왕의 비공식 특사라 하였습니다.”
남작은 이선이 했던 말과 제안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조선 국왕이 러시아 황제에게 제공하는 책략이라? 짐을 만나지 않으면 이야기할 수도 없다고?”
“황공하오나 그렇습니다.”
올해 62세, 근엄하게 수염과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는 제국의 황제는 껄껄 웃었다.
“그 왕자, 올해로 나이가 몇이라 했나?”
“베베르의 말에 따르면 동양 역법으로 황룡의 해에 태어난, 즉 1868년생이라고 합니다.”
“1868년? 그럼 니콜라이랑 나이가 같군.”
황제의 장손, 황태손 니콜라이 대공이 올해로 12세였다.
“조선 국왕은 특이한 사람이군. 나라면 니콜라이를 외국에 보내는 특사로 보내지 않을 텐데 말이야. 동양에서 이런 전례가 있나?”
“예,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10여 년 전에 일본의 쇼군이 동생을 파리 박람회에 특사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 3세, 빅토리아 여왕,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네덜란드의 빌럼 3세 등을 알현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10대의 소년으로, 각국 왕실에서는 공작에 준하는 예우로 대했습니다.”
1867년,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는 13세의 동생 아키타케(徳川昭武)를 파리 만국박람회의 일본 대표로 보낸다. 아키타케는 나폴레옹 3세의 환대를 받았고, 유럽 각국 국왕을 알현하여 ‘일본국 태자’ 예우를 받으며 프랑스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 막부가 멸망하면서 아키타케는 귀국 길에 올라야 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기억하네. 쇼군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인물이 있군. 전임 일본 공사가 쇼군의 신하 아니었나?”
“그렇습니다. 에노모토 공사는 본래 쇼군의 신하였으나, 일본 신정부에 의해 등용되어 외교관이 되었습니다.”
에노모토 타케아키(榎本武揚)는 막부의 신하이자, 일본 최초의 유럽 유학생으로 해군 전문가였다. 막부의 패망 이후에도 홋카이도까지 퇴각하여 에조 공화국을 세운 에노모토는, 결국 유신 정부에 의해 패퇴하여 수감되었다. 에노모토의 능력을 높이 산 유신 정부는 재등용했고, 해군 중장이자 외교관으로 1874년부터 78년까지 러시아 공사로 재임했다.
1875년 당시 러시아는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놓고 일본과 협상을 했는데, 사할린은 러시아로, 쿠릴 열도는 일본으로 귀속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회담 당사자였던 에노모토를 높이 평가했고, 황제가 직접 초청해 융숭히 대접한 적도 있었다.
“에노모토는 유능한 외교관이었지. 평생 외교관을 지낸 남작이 보건대, 조선 왕자에게서 뛰어난 자질이 보이던가?”
“어리지만 총명함이 남달라 보였습니다.”
“그런데 기르스 남작은 어찌하여 조선 왕자를 만나길 거부했다던가?”
외무차관 기르스는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조선의 왕자가 러시아를 비공식적으로 방문했다면, 구태여 국경 회담을 앞두고 ‘러시아가 조선과 독자적으로 뭔가를 꾸민다.’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다는 외교관 특유의 조심성을 발휘하여 회동을 보류했다.
“제 후임자를 비판하고 싶지 않지만, 기르스 남작은 너무 소심합니다. 폐하께옵서 조선 왕자를 만나는 일이 어떻게 청을 자극하는 행동이 되겠습니까?”
청나라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기르스와 달리, 그의 전임자였던 조미니는 좀 더 강경했다. 기르스는 러시아 극동의 취약한 경제력을 우려해 청나라와 마찰을 빚고 싶지 않아 했으나, 조미니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부설하여 극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르스 남작의 우려도 아주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그 정도 일을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마침내 황제는 수락을 했다.
“좋소, 그렇다면 만나 보지. 나 역시 조선 국왕의 제안이 무엇인지 궁금하군.”
“그럼 조선 왕자에 대한 예우는 프랑스가 도쿠가와 공작을 대했던 선례를 따르면 되겠습니까?”
외교 의례는 복잡하고 전례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참조하도록 하게. 그런데 도쿠가와 공작은 공식 사절로 프랑스에 파견된 것이 아닌가?”
“특명전권대사는 아니었으나, 만국박람회의 대표 자격이었습니다.”
“그럼 조선 왕자는 비공식 특사니까 짐 역시 비공식적으로 만나겠네.”
황제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조선 왕자가 니콜라이랑 나이가 같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곧 니콜라이의 영명축일일세. 겨울 궁전에서 가족들과 축하를 가질 예정인데, 그때 조선 왕자를 초대하지. 어떤가?”
영명축일(靈名祝日)은 기독교 문화로, 세례명에 해당되는 성인의 축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정교회의 영향력이 강했던 제정 러시아에선 영명축일을 생일 못지않게 중시했다.
“묘안이십니다, 폐하. 이는 황실 가족 간의 행사이니 공식적이진 않지만, 외국 귀빈을 초대하기에는 적절한 행사입니다.”
“그럼 조선 왕자에게 그리 전하도록. 그때 보자고.”
“예, 폐하.”
초대가 결정되고 알현까지 한 달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 기간 동안 이선은 조미니 남작으로부터 복잡한 황실 예법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래도 조선 왕실 예법보다는 덜 복잡하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선이 황제에게 내밀 수 있는 카드들이었다. 이선은 이를 매우 세심하게 선별하고 다듬었다.
1880년 12월 6일. 러시아 제국에서 사용하는 율리우스력으로는 11월 24일이었다. 이날은 성 니콜라우스의 날로, 니콜라우스(러시아식 니콜라이)라는 세례명을 받은 이들의 축일이기도 했다.
이선은 러시아에 당도한 지 달포 만에, 마침내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를 알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선을 태운 마차가 도착하자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겨울 궁전의 웅장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러시아 제국의 부와 권력이 집중된 겨울 궁전 내부는 극도로 화려했다. 이선은 그 가장 내밀한 심장부에 도달한 셈이었다.
초대를 받은 사람은 일행 중 오직 이선뿐이었으므로, 황실 가족과 측근이 모이는 이 자리에 동양인은 오직 그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자연히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밀리에 알현하자니까, 뭐 이렇게 부담스럽게 황족들 모아 놓고…….’
그나마 조미니 남작이 이선을 에스코트해 주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귀띔을 받을 수 있었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십니다. 오늘의 주빈이시지요.”
10대 초반의 소년이 사람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미래에는 차르가 되실 몸이시지. 역사대로라면, 마지막 차르겠지만…….’
니콜라이 대공은 황태손으로 러시아의 차차기 지배자였고, 실제로 14년 뒤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차르가 된다.
역사대로라면 러시아 제국 마지막 차르가 될 니콜라이 2세는, 이때만 해도 이선과 동갑인 12세의 소년에 불과했다.
이선이 조미니 남작과 함께 니콜라이 대공의 앞으로 나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선에게 집중되었다.
“전하, 영명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남작. 황제 폐하의 원로대신인 남작의 축하를 받아 기쁩니다.”
니콜라이 대공은 점잖은 태도로 축하를 받았다. 이어 조미니는 이선을 소개했다.
“대공 전하, 이분은 동방의 조선에서 온 사절로, 이선 공입니다.”
니콜라이의 호칭은 ‘대공(Velikiy Knyaz, Grand Prince)’이고, 이선의 호칭은 ‘공작(Knyaz, Prince)’이라 미묘하게 달랐다. 러시아는 이선을 공작의 예에 준하여 예우하기로 결정한 터였다.
“Your Highness, it is a great honor to meet you. I’m Li sun, Corean Prince. (전하, 뵙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저는 이선, 조선의 왕자입니다.)”
러시아 황실에서는 보통 프랑스어를 썼지만, 영어가 훨씬 익숙한 이선을 배려해서 영어 사용을 허락했다. 니콜라이 본인도 영어가 유창했으므로 반갑게 화답했다.
“반갑습니다, 공작. 러시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또한 제 영명축일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인 황제로부터 ‘조선 왕자’를 환대하라는 귀띔을 받은 니콜라이는, 이선을 정중하게 예우했다.
“이는 모두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의 배려가 있으신 덕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러시아와 조선은 이웃 나라인데,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는 건 참된 기독교인의 정신이지요. 우리는 공작의 방문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지만…….’
러시아는 조선이 그들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몰랐다. 갑작스럽게 북방의 대국과 국경을 접한 조선은 당혹감과 두려움을 느꼈으나, 점차 익숙해지면서 중국과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로 여기게 된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욱 감격스럽습니다. 양국 간의 우호가 이 순간부터 시작되어, 대를 이어 이뤄지길 바랍니다.”
니콜라이와 인사를 마친 후, 이선은 황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황제의 동생, 아들, 조카, 기타 등등. 이들은 모두 직책을 맡고 있었고, 특히 군부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컨대 황제의 동생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해군 원수이자 황제의 개혁을 뒷받침한 인물이었고,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육군 원수이자 페테르부르크 총독이었다.
‘이들이 바로 러시아를 지배하는 로열패밀리렸다.’
전제 군주국인 러시아는 유독 황족의 정치 참여 비중이 높았고, 로마노프(Romanov) 황가는 사다리와 같은 러시아 제국의 신분 지배 체제에서 최고의 정점에 있었다.
황제가 이선을 이런 자리에 초대한다는 것은, 상당한 호의를 베풂과 동시에, 로마노프 왕조의 권력을 ‘조선 왕자’에게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시종장의 외침과 함께,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좌중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의를 표했다.
“신의 은총에 의해…….”
시종장이 황제에 대한 의례적인 찬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황제는 손을 들어 막았다.
“공식 석상도 아닌데 그럴 필요 없네. 제군! 오늘은 내 손자 니콜라이의 영명축일이니, 편하게 즐기시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폐하!”
황족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알렉산드르 2세는, 손짓으로 조미니 남작을 불렀다. 조미니는 이선을 대동하고 황제에게 향했다.
알렉산드르 2세.
러시아 제국의 12대 황제이자, 최후의 개혁 군주.
‘유럽의 헌병’으로서 반동 정치로 일관한 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정책이 크림 전쟁의 패배로 한계에 부딪히자, 러시아의 후진성을 절감한 알렉산드르 2세는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한다.
19세기까지 지속되었던 비인간적이고 비효율적인 농노제를 폐지하였고, 행정·재정·군사·사법·교육·산업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를 총체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이른바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이다.
알렉산드르 2세의 통치는 대외팽창으로도 이어져, 오스만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독립을 쟁취했다. 염원하던 발칸 반도로의 진출은 영국의 방해로 중단되었지만, 영토의 확장은 엄청났다.
투르키스탄 국가들을 병합해 중앙아시아를 확보하고, 극동으로 나아가 태평양으로 진출하고 조선과 국경을 접하기에 이르렀다.
한반도의 100배 크기에 이르는 2천 3백만 제곱킬로미터의 광활한 영토와 1억 5천만 신민의 통치권을 맡고 있는 군주.
바로 이선의 눈앞에 선 사내, 러시아의 차르(царь)였다.
긴장감을 느낀 이선은 심호흡을 했다.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준비하던 순간이 온 것이다.
‘자, 이제 국제 정치를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