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00
– 300화에 계속 –
300화 중화 질서의 붕괴
1901년 10월 초, 이선은 평양을 방문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독립전쟁 7주년을 맞이하여, 평양 전투 승전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황제가 매년 평양을 방문하면서, 행재소를 대신할 황궁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아무리 일시적이라고 해도, 황제가 평안남도 관찰사의 관저에 머무르는 건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황성 경운궁의 석조전 공사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거늘, 어찌 백성에게 번거롭게 또 궁전을 짓겠는가? 이 일은 재론하지 말라.”
이선은 황궁 건설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는 보다 큰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북진이 국가의 정책으로 정해진 이상, 한양보다는 평양이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어울린다. 하지만 천도라는 건 워낙 사회적 비용이 큰일이니, 고려의 전례를 따라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양경을 구축하는 게 좋겠군.’
북진정책이 가시화되면서, 이선은 전통적인 조선 제2의 도시이자, 배후에 넓은 평야를 보유하고 있어 도시 개발이 용이한 평양을 근대화와 북진을 위한 부(副)수도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동양의 황제국은 전통적으로 양경(兩京), 즉 두 개의 수도를 만들고, 마침 고려도 서경을 구축한 전례가 있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일단 서경 구상은 미뤄 두고, 먼저 대한제국이 확보한 영토, ‘자치령’에 대한 법적 합의가 이뤄져야 했다.
평양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선에게, 청나라의 답변이 왔다.
“대청 황제께서는 대한 황제를 북경으로 정중히 초대하고 싶다 하십니다.”
“초대를 감사히 받아들이지요.”
광서제는 이선의 방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일본과 한국에서 신정(新政) 모델을 찾고 있는 광서제로선, 경장에 성공한 한국 황제에게 직접 자문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사양하지 않았다.
더욱이 한국군 덕택에 서안으로 끌려가는 걸 막을 수 있었으니, 요청을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선은 즉시 사절단과 함께 북경으로 향했다. 외무대신 김옥균과 근위사단장 박유굉 등, 청나라 파견 경험이 있는 소규모로 사절단을 구성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매년 북경에 사신을 파견했지만, 예전의 조천사(朝天使)나 연행사(燕行使)하고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조공국의 입조(入朝) 사절이 아니라, 대등한 국가 간에 파견되는 정상급 외교 사절이었다. 이는 동양보다는 서양의 의례에 가까웠다.
군함을 타고 남포항을 출발한 대한제국 사절단은, 직선거리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요동반도 여순, 러시아령 관동주에 도착했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겸 극동군 총사령관, 사실상 극동 총독이나 다름없는 알렉세예프 제독이 이선을 맞이했다.
“한국 황제 폐하께서 방문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제독과 긴히 말씀을 나눌 일이 있어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선은 북경에 가기 전, 여순에 들려 알렉세예프와 회담했다. 러시아 군부의 강경파를 대표하는 알렉세예프의 협조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알렉세예프는 이선과 손을 잡은 온건파 재무대신 비테의 구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니콜라이 2세가 비테와 이선의 조언을 받아들이면서 결국 물러서야 했다.
알렉세예프로부터 러시아 극동군이 협약을 준수하겠다는 확약을 받은 후, 사절단은 여순을 떠나 천진으로 향했다.
‘천진이라, 어느새 20년 만이군.’
천진에 도착한 이선은 감회가 새로웠다. 20여 년 전, 조선을 떠난 이선이 처음 도착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이선의, 아니 조선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년 만에 돌아온 천진은 예전과 달랐다. 지금의 천진은 연합군의 민정하에 있었고, 열강의 조계지도 대폭 확대되었다. 조계지를 차지한 10개국 중 하나가 대한제국이었다.
한국 최초의 해외 조계지, 천진 조계지에는 태극기가 휘날렸다. 이선은 주 천진 한국 상관장 송금덕을 회견했다.
“송 객주, 오랜만이오. 아니, 이제는 상관장이라고 불러야겠군.”
“황공하옵니다, 폐하. 폐하를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느새 머리가 희끗해진 송금덕이 이선을 맞이했다. 송금덕은 이선의 망명을 주선해 준 개성상인이자, 홍삼 판매를 대행한 경제 대리인이었다.
20년 가까이 무역에 종사해 온 송금덕은, 현재 한국의 대(對) 중국 무역을 관리하는 상관장이었다.
“무역 현황은 어떻소?”
“최혜국 대우를 받은 덕에, 홍삼을 비롯한 수출량이 급증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송금덕의 설명을 들은 이선은 기쁜 표정으로 격려했다.
“대한국의 상업과 무역은 앞으로 더욱 발전하게 될 것이오. 아직은 열강과 경쟁할 능력이 못 되지만, 중국 시장은 우리에게도 소중하오. 특히 이 천진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겠지. 무역 최일선에서 활동하는 상인들의 노고가 크오. 앞으로도 정부는 상인들을 적극 지원할 것이니, 애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 정부에 건의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대한제국은 중국 시장, 주로 화북 지역과의 무역에서 상당한 흑자를 보고 있었다.
한국의 상공업과 대외 무역은 열강과 비교하면 태동 단계에 불과했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식산흥업과 무역입국 정책에 따라 상승 추세였다.
앞으로 중국 시장은 한국 상공업의 판로로 우선시될 곳이었다.
이선이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역시 열강의 중국 영향력이 감소될 세계대전 이후였다.
대한제국 사절단은 천진을 떠나, 파괴되었다가 복구된 경진선 열차를 타고 북경으로 향했다. 의화단이 파괴한 경진선은 결국 청나라가 배상하여 복구되었으니, 헛된 파괴와 살육만 벌인 꼴이었다.
북경도 마찬가지였다. 연합군의 점령과 약탈은, 청 조정이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의화단의 재앙으로 중국이 반(半)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판단만을 내린 결과였다.
“한때 천하에 군림하던 중화제국이 어찌 이런 꼴이 되었는지.”
“변화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옛 세상에 잠들어 있으면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사절단은 너나 할 것 없이 혀를 끌끌 찼다. 한국인들 대부분은 ‘중국’에 대해 더 이상 존중이나 경외감이 없었다. 묘한 우월 의식과 경멸감이 더 강했다.
이선은 관료들에게 중국인, 특히 청 황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고 강조했다.
“나라가 망해 갈수록, 체면과 자존심에 더 집착하는 법이오. 그건 국가든 개인이든 전혀 다를 바가 없지. 부자도 망하면 옛 영광에 집착하는데, 하물며 한때 천하에 군림했다고 생각하는 청 황실이라면 말하나 마나. 속으로 뭐라고 생각하든, 겉으로는 최상의 예우를 갖춰야 할 것이오.”
대한제국이 연합국 중 청나라에 대해 가장 온건한 태도를 취하고, 청 황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건, 결코 청나라가 옛 종주국이라든가 ‘중국을 존숭’해서가 아니었다.
서양인들은 중국인, 특히 황실이 얼마나 ‘체면’과 ‘형식’에 집착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이득을 얻기 위해 굴욕과 모욕감을 줄 뿐이었다.
다른 그 어떤 조항보다도, 청나라가 황족을 독일에 파견해 카이저 앞에 사죄하라는 제1조만은 막으려고 한 것도 결국 체면과 형식 문제였다. 결국, 독일의 압박에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 재풍이 유럽으로 떠나야 했다.
오랫동안 중국을 상대해 온 한국은 잘 알았다. 한국은 전형적인 ‘좋은 경찰’ 역할을 맡아, 윽박지르는 연합국 사이에서 청나라의 체면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공사 살해에 대한 사죄사를 한국에도 보내야 했지만, 한국은 청의 부탁을 받아들여 황족이 아닌 대신의 사죄사 파견을 허용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그래도 국가 간의 예의와 존중을 아는 건 조선뿐’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광서제가 한국에 대해 더욱 우호적인 입장을 갖게 되는 이유였다.
‘바닥에 떨어진 위신과 체면을 좀 세워 주는 대가로 실리를 얻는다면, 얼마든지 그리해 줄 수 있지.’
이선은 광서제와 회담하기 전, 이홍장과 실무 회담을 가질 생각이었다.
“근래 중당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총리대신 경친왕 전하께서 외교를 전담하고 계십니다.”
“저런, 안타까운 일이군요. 중당의 쾌유를 빕니다.”
나이 79세, 늙은 이홍장의 기력은 크게 쇠하여 있었다. 북경 조약을 체결한 후, 열강의 반식민지 처지가 된 심리적 고통이 병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이홍장은 여전히 병석에서 경친왕에게 조언을 했지만, 쉽게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이선은 경친왕 혁광과의 회담에 김옥균을 보냈다. ‘황제’인 자신이 ‘친왕’인 혁광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없다는 명분이었지만, 광서제와 이홍장 사이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경친왕을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선은 주청 영국 공사 맥도널드를 만났다.
“공사, 북경 공사관 전투를 공사가 지휘하며 우리 공사관에도 많은 배려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공사는 일전에 주한 공사로 재임하며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니, 이에 대한제국 훈장, 대훈위 이화대수장을 수여하는 바입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선이 친히 훈장을 수여하니, 맥도널드가 기뻐하며 받았다. 주청 공사로 재임하기 전, 주한 공사를 역임했던 맥도널드는 이선과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우리의 동료, 홍영식 공사는 고든 장군과 함께 고결한 희생을 바쳤습니다. 저는 동료 외교관으로서 그에 대한 깊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아, 홍 공사와 고든 장군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픕니다. 홍 공사는 애국자요, 고든 장군은 군대 창건의 공로자입니다. 나는 고든 장군을 기념하는 동상을 서울에 세울까 합니다만, 공사의 생각은 어떤지요?”
“폐하의 배려에 참으로 감격할 따름입니다.”
“외국인으로서 동상을 세우는 건 처음입니다. 이처럼 양국의 관계는 특별합니다.”
이선은 맥도널드에게 실컷 립서비스를 해 주었다.
훈장을 주고 동상을 세우는 건, 영국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닳고 닳은 영국 외교관이, 겨우 훈장과 동상만으로 외교 정책을 정할 리는 없었다.
이선은 보다 중요한 실무를 논했다.
“대한제국은 언제나 국제법을 중시합니다. 만주의 자치령은, 바로 얼마 전에 성립된 그리스 크레타 자치국을 선례로 삼고 있습니다.”
크레타 자치국(Kritiki Politeia)은 1898년에 성립한 자치국이었다. 1897년, 오스만령 크레타섬에서 독립과 그리스 왕국과의 연합을 외치는 그리스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오스만의 무슬림 군대가 가혹하게 진압하자, 그리스 왕국이 전쟁을 선포했으나 오히려 오스만 군대에 패배했다.
그때 열강이 개입했다.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열강은 국제 연합군을 결성해 크레타를 점령해 오스만 군대를 몰아내고, 자치국을 수립했다.
크레타 자치국은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주권하에 있었으나, 크레타의 그리스인이 통치하는 자치국이었다. 이선과 함께 오쓰 사건에서 니콜라이를 구한 그리스의 요르요스 왕자가 열강의 지지를 얻어 크레타 자치국의 고등 판무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리스 사례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이선은, 영국이 주도한 크레타 자치국을 만주 자치령의 모델로 제안했다.
보다 중요한 건, 자치국이라는 형식보다 실질적인 문제였다.
이선이 강조한 건 결코 자신이나 대한제국이 ‘러시아의 하수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겠다는 걸 누차 강조했다.
황제인 이선에게 친히 설명을 들은 맥도널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본국에 보고드리겠습니다.”
“예, 그리해 주십시오.”
광서제와의 회담은 10월 15일, 자금성 건청궁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중국의 제후’가 입조한 적은 있었어도, ‘외국 군주’가 자금성을 방문하는 건 처음이라, 그 형식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서양 외교관이 황제를 알현할 때도 형식 문제가 있었다. 왕족이나 외교관은 정중히 목례하는 것으로 대체했지만, 군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이선과 한국은 형식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았지만, 청 황실은 지독하게 형식을 따졌다. 결국 결단은 광서제가 내렸다.
“한국 황제를 동등한 황제의 예로 대우한다. 짐의 결정이니 재론하지 말라.”
황제의 결단이 내려졌으니, 더 이상 따질 사람도 없었다.
회담은 서양 군주의 정상 회담을 전례로 삼아 진행될 예정이었다.
10월 15일, 이선은 대표단을 거느리고 건청궁으로 나아갔다.
예전 같았으면, 조선 사신은 청 황제를 알현하게 되면, 황제를 향해 조아리고 절을 올려야 했다. 이는 조선의 국왕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그 또한 황제의 신하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옛 질서가 무너진 걸 상징하듯, 옥좌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광서제는 한국 황제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다.
“대한국 황제가 대청국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대청국 황제가 대한국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선이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자, 광서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맞잡았다.
한국 황제와 청국 황제는 동등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황제가 다른 이와 악수를 하는 건, 청나라 역사상, 아니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차마 그 광경을 보지 못해 고개를 돌리는 신료와 궁인들이 있었다.
17세기 중반,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한 굴욕이 조선에게 충격이었다면, 반대로 이번에는 청나라에 충격적인 순간이었다.
20세기 전환기, 중화 질서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이 한 장면으로 압축할 수 있었다.
악수 후에는 사진 촬영이 있었다. 청 황실에서는 반발했으나, 광서제가 수락하면서 언론에 비공개를 전제로 촬영이 이뤄졌다. 이미 광서제는 얼마 전 관례를 깨고 서양 사절단과 사진을 촬영한 바 있었다.
34세의 이선과 31세의 광서제는 한창 나이로, 동년배였다.
프로이센 군복을 본 딴 대한제국 육군 원수의 복장을 입고 있는 이선과 만주족의 전통적인 용포를 입고 있는 광서제는 시각적으로 자연히 비교가 되었다. 더욱이 훤칠한 용모에 강건한 신체를 지닌 이선과 인물은 좋지만 병약하여 마르고 왜소해 보이는 광서제는 비교가 안 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광서제는 개의치 않다는 듯, 이선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먼 길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의 높은 명성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폐하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폐하를 뵙고 싶은 지 오래였습니다.”
통역을 맡은 외무부 아주국장 오세창(吳世昌)을 제외하고, 한국 사절단은 모두 물러났다. 이선과 광서제의 단독 회담이었다.
이선은 이 자리에서 만주의 운명을 결정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