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01
– 300화에 계속 –
301화 만주 협약
“폐하, 북경 입성 과정에서 우리 군이 습득하게 되었던 청 황실의 보물과 서적을 돌려드립니다.”
이선의 명에 오세창이 반환 유물 목록을 전달했다. 광서제가 살펴보니 과연 잃어버린 청나라의 보물들이었다.
“오오, 과연 열성조의 보물입니다.”
“서양인들로부터 동양 문명을 보호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이긴 했으나, 우리 군이 귀국의 보물을 약탈한 셈이 되었으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송구하다니요, 별말씀을요. 열국 연합군이 북경에서 무수히 많은 보물을 약탈해 갔지만, 선뜻 돌려주겠다고 한 건 귀국이 처음입니다. 역시 왕화와 도덕을 아는 건 귀국뿐입니다!”
광서제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고마워했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이 모두 반환한 것은 아니었다. 습득 보물을 청대 이전과 이후로 분리해서, 한·당·송·명 등 청대 이전의 유물은 ‘정통 중화를 계승한 한국이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새로 건설 중인 박물관으로 향했고, 청대의 유물만 돌려준 것이었다.
하지만 광서제 입장에서는 청나라 선조의 보물을 돌려받게 되었으니, 충분히 기뻐할만 했다.
사실 빼앗아 갔다 돌려준 것이니 한국 입장에서는 잃은 게 아무 것도 없었는데, 광서제는 굉장한 호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폐하께서 기병대를 보내어 짐을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짐은 꼼짝없이 역적들에게 붙들려 서안에서 허수아비 노릇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폐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말로 그렇게 될 운명이었는데 구원을 받게 된 광서제의 솔직한 감사에, 이선이 정중히 화답했다.
“이웃 나라의 군주로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군주께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쁩니다.”
“폐하께서는 참으로 겸손하십니다. 폐하는 낡은 국가에서 경장을 실시하고, 부국강병을 이뤄 냈습니다. 폐하는 일본의 명치 천황과 더불어 실로 동양의 명군이자 영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폐하께 그 비결을 여쭙고 싶었습니다.”
광서제는 메이지보다는 동년배인 이선을 모범으로 생각했다.
정적인 법적 모친과 싸워 승리하고, 낡고 수구적인 유교 국가를 물려받아, 경장과 부국강병을 이뤄 냈으니, 비슷한 환경에서 좌절을 거듭한 자신과 달리 본받을 만한 대상이었다.
광서제는 황제의 체면에 집착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적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유신의 비결을 묻고 고문관으로 초빙하고 싶었던 것처럼, ‘옛 번국’의 군주에게 배우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더욱이 이선은 서태후의 마수로부터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었다. 서태후나 황실의 수구파들보다는, 차라리 외국인인 이선에게 더 호감이 갔다.
“짐은 이웃 나라의 군주이니, 귀국의 일을 조언하는 게 도리에 맞을까 싶습니다마는…….”
“부디 편히 말씀하십시오. 폐하께서는 아라사 황제 폐하와 절친한 벗이고,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짐도 벗처럼 생각해 주십시오.”
이선이 일부러 한 발을 빼자, 광서제가 매달렸다. 대청 황제가 ‘벗’이라고 부르겠다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었다.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짐이 이제부터 드리는 말씀은 귀국을 위한 일이지만, 동시에 동양 평화와 한국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이선은 처음에는 보편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부터 설명했다. 광서제는 귀를 세우고 통역을 통해 들었다. 어떻게 근대화와 개혁을 이룰 수 있는지를 논의하다가, 청나라의 특수성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한국과, 어찌 보면 일본도 마찬가지인데, 이 두 나라가 청국보다 수월하게 경장을 이뤄 낼 수 있었던 건, 역설적으로 그 크기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의 결단력과 지배층의 일신, 백성의 단합으로 충분히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국은 그 크기가 너무 거대하고, 인구도 너무나 많습니다. 지역과 계층, 사람마다 이해관계가 너무나 다르고 복잡합니다. 이는 폐하의 신정이 지방에서 명령이 이행되지 않는 것에서 드러나지 않습니까?”
“으음…….”
1901년 1월, 광서제는 변법과 신정의 재개를 선언했다. 기해정변으로 중단된 신정이 재개되었으나, 대내적으로는 국가 행정의 붕괴, 대외적으로는 열강의 압박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개혁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폐하의 지적은 실로 통렬합니다. 하지만 열성조께서 물려준 영토를 저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단일 민족으로 국민 국가를 이룬 한국과 달리, 청국은 다민족 국가입니다. 유럽의 예로 비교하자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와 오스만의 차이입니다. 어느 쪽이 더 부강한지는 잘 알고 계시겠지요. 특히 만주인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고 있는 청국은 더 특수한 상황이지요. 과거에는 대청 황실이 중화의 천명을 받아 통치하였으나, 민족주의가 득세한 현재는 매우 통치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이선의 지적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으나, 광서제는 입을 다물고 계속 들었다.
“강유위와 변법파의 조언을 떠올려 보십시오. 폐하께 변발을 자르고, 의복을 바꾸며, 남경으로 천도하라고 권하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랬지요. 그 조언으로 인해 수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왜 그랬겠습니까? 변법파는 진정한 만한일체(滿漢一體)를 위해 제안했다고 하겠으나, 수구파의 우려도 일정 부분 타당합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대청과 만주인의 정체성은 영원히 사라지게 됩니다. 한족 민족주의가 발흥할수록, 청 황실이 설 자리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의화단 무리조차도 처음에는 반청멸양을 외쳤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한족 민족주의자들, 혁명파들은 멸만흥한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미 혁명파들은 변법파와 결별하고, 작년부터 무장봉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앞으로 10년 이내로 혁명파의 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으음…….”
“북양대신 이홍장이 ‘변방’의 이권을 내주어 ‘중화’를 지켜 내겠다는 건, 과연 실용주의자와 같은 훌륭한 대응입니다만, 결국 그 역시 안휘 출신 한족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변방이란 만주족에게도 변방일까요? 한족과 만주족의 입장은 다릅니다. 어쩌면 폐하께서는 곧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받을지 모릅니다. 변발을 자르고 압도적 다수인 한족의 일원이 될 것인가, 만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국가를 이어 나갈 것인가. 어느 쪽이 폐하의 통치와 대청의 종묘사직을 지켜 낼 수 있겠습니까?”
니콜라이 2세를 현혹시킨 이선의 현란한 정세 분석과 미래 예측이 이어졌다.
광서제는 자신의 신하들에게서 한 번도 이런 상세하고도 흥미로운 분석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겉으로는 높이 떠받드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꿍꿍이가 있는 자들이었다. 강유위를 제외하면 구중궁궐 속에서 오랫동안 혼자 고립되어 있던 황제였다.
하지만 한국 황제는 자신을 정말 오랜 벗처럼 대했다. 때로는 정밀하게 분석하고, 때로는 신랄하게 비판하며 할 말을 다 했다. 그는 한국을 위해 자신에게 조언하는 것이라 솔직히 말했다. 오히려 그런 점이 더 신뢰가 갔다.
이선의 분석과 예측, 조언과 제안은 흥미롭고도 위험한 부분까지 계속되었다. 광서제는 고민 끝에 결국 동의를 표했다.
“폐하의 조언을 듣고 나니 실로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고, 눈이 밝게 떠지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고마울 따름입니다.”
“짐의 조언이 폐하께 도움이 되었다면 기쁩니다.”
“물론입니다. 짐을 역적들의 마수로부터 구해 주신 폐하께서 하신 약속을 지키시리라 믿고, 짐 또한 약속하겠습니다. 당면한 만주 문제에 대한 해결은 폐하의 조언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현명한 성단이십니다. 대청과 대한, 아라사와 일본, 동양 평화를 위해 좋은 선택입니다.”
“짐도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대청과 대한은 이웃 나라요, 만주인과 조선인은 오랜 형제와도 같습니다. 두 나라, 두 민족의 우정은 그 선조부터 따지면 천 년이 넘습니다. 비록 근래의 불행한 일로 관계가 나빠졌다고는 하나, 짐은 형제와도 같은 관계를 회복하고 싶습니다.”
이선은 청국과 한국의 관계가, 단순히 옛 종주국-번속국의 관계가 아니라, 고려·조선과 여진, 고구려·발해와 말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임을 상기시켰다. 한국계 민족과 퉁구스계 민족이 단결해야 한다는 한국 일각의 범민족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형제 민족’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짐과 폐하의 우정이 두 민족의 우정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폐하께 조언을 구할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짐이 황성을 자주 비울 수는 없겠지만, 공사와 특사를 파견하여 폐하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라사 황제 폐하께도 그리하고 있습니다.”
“폐하의 배려에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선과 광서제는 다시 정중하게 악수를 나눈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건청전 밖으로 나온 이선은, 통역을 맡은 외무부 아주국장 오세창을 격려했다.
“오 국장, 수고했네. 어려운 말이 많았는데 모두 통역하느라 힘들었겠어. 과연 경의 가문이 그래 왔던 것처럼, 대한 최고의 중국어 실력자답네.”
오세창의 가문, 해주 오씨는 대대로 유명한 역관 가문이었다. 오세창의 부친이 바로 당대 최고의 역관 오경석(吳慶錫)으로, 박규수·유대치와 더불어 개화사상의 비조(鼻祖)로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오세창 역시 개화당의 중진이자, 부친의 뒤를 이어 뛰어난 외교관이자 서예가, 수집가가 되었다. 반환 유물을 분류한 것도 그의 몫이었다.
“과찬이십니다, 폐하. 제가 감히 말씀을 아뢰어도 되겠습니까?”
“편히 말하게.”
“통역을 하면서 저는 폐하께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어찌 중국의 내밀한 사정을 이토록 잘 알고 계시며, 미래의 일을 예측하실 수 있단 말인지, 어리석은 신은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하하, 비밀일세. 오늘 짐이 청국 황제와 나눈 대화는 짐과 경만이 아는 극비여야 하네. 경의 선친께서 30년 전 영국 공사관과 나눈 밀담을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말이야. 결코 다른 사람은 몰라야 하네. 알겠는가?”
“예, 예!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선의 말에 오세창이 고개를 숙였다.
개화당의 비조인 오경석은 북경을 매년 드나들었고, 그 누구보다 먼저 개항의 필요성을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는 본국의 허가도 없이 1870년대 초 주청 영국 공사와 비밀리에 개항을 논의했다. 이는 박규수와 유대치를 비롯한 극히 일부만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고, 조선 조정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알고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물론 황제와 친밀한 김옥균이 알려 줬을 수도 있었다. 과거에는 역적으로 몰리기 십상이지만, 지금 오경석은 개화의 비조로 칭송받고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오늘 성상께서 청국 황제에게 제안한 바는, 선친이 영국 공사에게 제안한 일과는 비견할 수 없다. 성상의 구상대로 역사가 움직인다면, 동양 정세가 크게 흔들리겠구나…….’
정치가들이 눈앞의 이익에 급급할 때, 황제는 10년 뒤, 20년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진면목을 본 오경석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광서제의 허락이 떨어지니, 후속 협상은 손쉽게 진행되었다.
한국 대표자인 김옥균, 러시아 대표자인 폰 기르스, 청국 대표자인 이홍장과 경친왕이 다시 회담장에 섰다.
10월 25일, 일전에 논의했던 러·청·한 만주 협약 12개조가 약간의 변형을 거쳐 체결됐다.
“만주가 청국 주권하에 있음을 인정하되, 동청철도의 보호를 위해 러시아군은 당분간 주둔한다. 주둔 기간은 3년을 넘기지 않으며, 3차례에 나눠 철수한다. 1902년까지 러시아령 관동주를 제외한 봉천성, 1903년까지 길림성, 1904년까지 흑룡강성. 봉천성 동남부에 한국 자치령을 설치하고, 한국이 이를 보호한다. ……”
러시아군 철수 기한을 조약 체결 후 3년으로 줄였다. 만주, 더 나아가 몽골과 신장 일대에서 러시아의 세력권임을 인정하되, 세력권 확대는 재정적인 측면에서 평화적으로 이뤄질 것을 약속했다.
한국은 실리를 얻었다. 자치령 약 7만 제곱킬로미터를 확보해, 분리되어 있던 한국령 요동과 간도를 연결하고, 무순의 탄광과 본계의 철광을 확보했다는 점이었다. 아직은 그 명성이 잘 알려지지 않지만, 한국 산업화에 꼭 필요한 유연탄과 강철을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자치령은 1898년 크레타 자치국의 선례를 따라 한국에서 고등판무관을 파견하고, 주민에게 ‘자치’를 맡기기로 했다. 이는 한국이 최신 국제법 사례를 준수한다는 것을 보여 줘, 다른 열강의 동의를 얻기 위함이었다.
프랑스와 독일은 재빨리 자치령을 승인했고, 미국도 동의했다. 영국과 일본은 묵인했다.
이들 국가 모두 청나라와 점령지 조차 조약을 논의하고 있었으니, 자치령을 선례로 삼을 수 있었다.
‘말이 좋아 자치령이지, 결국에는…….’
이선은 빙긋 웃었다.
크레타 자치국은 1908년 자발적으로 그리스와의 통합을 결의했고, 1912년 발칸 전쟁을 틈타 그리스에 공식 합병된다.
1912년 무렵에는 동아시아에도 대변혁이 있을 터였다. 이선은 그때를 기다리며, 남만주의 인구 구조를 변화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황제 폐하의 외교적 승리! 피 흘리지 않고 방대한 영토를 손에 넣다!”
“요동과 간도는 곧 현재의 대한이요, 자치령도 미래의 대한이다. 가자, 북으로!”
만주협약이 발표되자 대한제국의 여론은 환호했다.
1895년에서 1901년에 이르기까지, 대한제국은 남만주에 약 55,000㎢의 ‘북방 영토’와 약 70,000㎢의 ‘자치령’, 약 125,000㎢의 영토를 확보했다. 이는 한반도 약 22,0000㎢의 절반이 넘는 면적이었다.
많은 피를 흘렸던 지난 전쟁과 달리, 이번에는 거의 희생조차 없이 방대한 영토를 외교적 수완으로 얻는 데 성공했다.
본격적인 근대화에 나선 지 채 20년이 되지 않은 국가, 열강들 사이에서 끼인 처지였던 약소국으로선 대단한 성과였다.
‘20년이라. 아직 부족하다. 앞으로 20년 뒤에는 당당한 열강의 반열에 오를 나라를 만들어야 해.’
그동안 얻은 성과를 지켜 내고, 앞으로 더 많은 성과를 얻어 내기 위해서, 이선은 다음 행보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