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05
– 305화에 계속 –
305화 1차 토지 개혁
이선의 설득에 압도된 개화당 지도부는, 농림부의 토지 개혁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입헌개화당의 실질적인 지도자, 김옥균은 민의원 의원과 중추원 의관들을 만나 법안 통과를 설득했다.
“농지 개혁은 성상께서 오래 품은 뜻이시오. 위로는 성상과 아래로는 민심의 뜻을 받들어, 법안이 상정되면 통과시키는 게 옳소.”
입헌개화당 의원들은 대부분 근대화 정책으로 수혜를 입은 이들로, 지금까지 확고한 이선의 지지자였다.
이들은 토지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은 했지만, 소농 중심으로 토지를 분배한다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상공업이 아직 발전하지 못한 이 나라 대한에서, 부의 원천은 토지입니다. 그런데 대토지 소유를 제한한다면 대체 부를 어디서 축적하란 말입니까?”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성은을 많이 입었는지는 여러분도 잘 알 겁니다. 앞으로도 우리 개화당 정부는 성상의 명을 받들어 새로운 세기에 필요한 식산흥업 정책을 펼칠 것이오. 식산흥업 정책의 수혜를 누릴 게 누구겠소?”
김옥균의 설득에 의원들도 받아들였다. 사실 어차피 의회에서 부결시켜 봐야, 황제에게는 부결된 법안을 재심의해서 가결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러느니, 정부의 법안에 개화당이 다수인 의회가 통과시켜 주는 게 모양새도 좋았다.
‘그러니까 땅 투기하지 말고, 농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상공업에 투자하라는 거 아니냐. 부의 원천을 특정 계층들이 독점하겠다고? 먼저 공리주의에 대한 학습이 필요할 것 같군.’
지주 출신 의원들의 불평을 전해 들은 이선이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토지 개혁을 하려면 기존의 토호와 대지주도 해체해야 할 판인데, 일본처럼 일부러 대지주를 만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토지 개혁의 사상적, 역사적 선례는 근대 프랑스와 덴마크에서 따왔지만, 한국인을 설득하려면 한국의 역사에서 설명하는 게 좋았다.
가장 좋은 전례는, 당연히 선황제의 고사(古史)였다.
“경자유전, 농민이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왕조 초기의 이상이기도 합니다. 우리 태조 고황제께서는, 정도전과 조준 등에게 명하시어 일대 경장을 단행하셨습니다. 전조(前朝, 고려)의 권문세족들이 사사로이 토지를 농단하여 백성을 괴롭히니, 태조께서는 과전법을 실시하시어 권문세족의 횡포를 뿌리 뽑고 국가의 근간인 농민을 바로 세우셨습니다!”
“홍무 24년(1391), 개경 시내에서 권문세족의 토지 문서를 모아 불태우니, 온 백성들이 만세를 외치며 태조의 성덕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로써 태조께서는 천명을 받아 조선을 개국하게 되었으니, 어찌 민심이 천심이 아니겠습니까!”
“아! 우리 대황제께서는 천명을 받들어 조선을 계승해 대한제국을 선포하셨으니, 실로 제2의 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조 고황제의 과전법이 개국을 뒷받침한 것처럼, 대황제 폐하의 농지법이 제2의 개국을 뒷받침할 것입니다!”
“새 농지법은 국민의 빈곤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황제 폐하의 성심이십니다. 백성을 긍휼히 여겨 일대 경장을 단행한 건,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의 전통입니다.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농림대신 전봉준과 토지 개혁을 지지하는 각료, 의원들이 의회에서 일장연설을 했다.
왕조 창업자로 숭앙받는 태조 이성계의 전례를 활용하니, 보수적인 의원들조차 쉽게 반발할 수가 없었다.
조선 개국의 지대한 공을 이뤘으나, 무인정사(戊寅定社, 왕자의 난) 이후 오랫동안 역사의 패자로 남아 있었던 정도전의 역사적 복권도 이뤄졌다.
오랜 세월이 지나 대원군 집정 시기에 이르러 정도전은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받고 복권되었다. 하지만 이는 경복궁 재건을 앞두고, 경복궁 창건의 주도자로서 공을 인정한 것에 가까웠다.
정도전의 사상과 행적은 사후 500년이 지난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 주목을 받았고, 이선은 ‘문헌공 정도전’을 개혁의 모범으로 삼으라고 권했다.
특히 주목받는 것은 정도전이 추구했으나 미완으로 끝난 경자유전 원칙의 토지 개혁이었다.
“대조선 개국 510년, 제2의 개국! 태조 고황제, 문헌공 정도전의 유업을 계승하여 일대 경장을 완수하자!”
정도전에 이어 복권된 역사적 인물은 다산 정약용이었다. 공식적으로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로 18년간 귀양살이를 한 죄인이었다.
정약용의 복권은 태상황 재위기에 시작되었다. 왕명으로 방대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필사되어 규장각에 수장되었다.
갑신경장 이후, 개화당 정부는 경장의 역사적 근원을 멀리 율곡 이이에서 찾았으나, 실권자인 이선이 가까운 시대의 정약용을 주목하라고 권했다.
정약용은 실각한 남인,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조정을 주도하는 노론 명문가들에 의해 무시되었다. 하지만 비로소 그의 탁월한 개혁 사상이 주목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1896년, 정약용 사후 60주기를 맞이하여 여유당전서가 인쇄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다.
“다산 정약용의 개혁 사상과 애민 정신을 본받자!”
“다산이야말로 자주적 개혁의 선구자이다!”
정약용이 주장했던 토지 개혁, 「전론(田論)」과 ≪경세유표≫의 정전의(井田議)가 주목을 받았다.
정약용의 토지 개혁은 고대의 이상인 정전제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고친 것이었다. 국가가 농지를 국유화하여 공전을 만들고,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른 공전의 분배, 공전의 공동 소유·공동 경작, 농업 전문화를 통한 상업적 토지 이용 등이었다.
자본주의화가 진행 중인 1900년 시점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으나, 정약용의 주장은 일정 부분 받아들여져 토지 개혁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았다.
“개화당 무리는 서양의 것만 숭앙한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전통에서 개혁을 찾으니 좋은 일이오.”
“다산은 비록 이단적이라고는 하나, 남인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 정조 대왕 이래 오랫동안 배제되었던 남인을 국가의 사표(師表)로 기리는 날이 왔군.”
그동안 개화에 가장 부정적이었던, 남인 계통의 영남 유생들도 만족했다.
사실 영남 남인이 개화에 부정적인 건, 이들이 증오하는 노론 경화 사족들이 재빨리 개화로 갈아탔기 때문이었다. ‘지조 없는 노론 놈들과 달리 남인은 성리학의 정통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들도 시대의 변화를 외면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남인을 등용해 지지를 받았던 대원군도 개화로 돌아섰고, 서양을 숭상한다고 의심받던 이선은 북벌과 제국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선과 개화당에 대해 부정적이던 보수적 유생들조차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선은 제국 선포 이후 황제의 모범을 ‘태조-세종-정조’로 찾았고, 아직도 정조를 그리워하는 남인들에게 정조 숭앙과 정약용의 복권은 환영할 일이었다.
더욱이 경상도는 대지주가 드문 소농 중심의 향촌 사회였기에, 소농을 존중하는 토지 개혁의 방향성에 대해 반대할 명분과 실리도 없었다.
“성상은 북벌을 성공시켜 복수설치와 존주대의를 이뤄냈소. 이제 정전의 이상을 추구하여 경장을 추진하고 있으니, 주나라 이래 내려온 중화의 정통은 실로 우리 조선, 아니 대한으로 오게 된 것이오.”
“흠흠, 성상께 우리 유생들도 변화했다는 걸 보여 줍시다. 유학도 개신(改新)의 시기가 온 것이오. 퇴계 선생님께서도 살아 계셨으면 우리의 뜻을 옳다 여기실 것이외다.”
“그렇소. 농지법을 지지하는 만인소를 올립시다.”
역사의 주류로 갈아타고 싶었으나 나설 명분이 부족했던 유생들에게, 북벌 성공과 토지 개혁은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가장 보수적인 영남 남인들이 정부를 비판하는 만인소가 아니라 토지 개혁을 지지한다는 만인소를 작성하니, 이선 입장에서는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다.
“허,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역시 북벌은 유학자들조차 움직일 마법의 단어라니까.”
북경에서 만주 협약을 체결하고 귀국하니, 여론은 역시나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조선의 군주가 옛 주군인 대청 황제와 동등한, 아니 은근히 우월한 입장에서 회담을 갖고, 그 결과로 만주의 광활한 영토를 ‘자치령’으로 얻어 왔으니, 또다시 황제의 외교적 승리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이제 거리낄 것이 없어진 이선은, 토지 개혁을 상정할 준비를 했다.
광무 5년(1901) 12월.
프랑스와 덴마크의 사례를 참고하여, 국유지 분배안이 결정되었다.
농림대신 전봉준은 전국의 즉각적인 시행을 주장했다.
“개혁에도 전쟁과 같은 기세가 있습니다. 기세를 몰아, 대한 13도 전역에서 국유지 분배를 실시해야 합니다.”
“선대왕 시기 대동법을 실시할 때, 도별로 순차적으로 실시해, 100년이란 시간이 걸렸소. 즉시 전국에 시행하는 건 어렵소.”
“경장의 시기가 화급한데, 어찌 100년의 시간을 말씀하십니까?”
“물론 그만큼 오래 하자는 말은 아니지만, 토지 법제를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란 말이오. 13도의 상황이 지역별로 다른데 일거에 실시하는 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소. 순차적으로 나눠서 진행해야 하오.”
오랫동안 토지 개혁의 실무를 맡아온 김홍집과 어윤중이 전국 즉시 시행에 반대했다. 이선은 그들의 의견도 존중했다.
“토지의 상황이 다른 북부와 남부를 한 번에 하는 것보단,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게 좋겠소. 먼저 서북에서 국유지 분배를 단행합시다.”
서북, 즉 관서(평안도), 관북(함경도), 해서(황해도)가 국유지 분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 북부 지방은 남부와 비교하면, 면적 대비 인구도 적고 토지의 개간이 부족했다. 그로 인해 국유지로 편입된 토지가 많았고, 대지주라고 부를 계층이 없었다. 대지주와 소작농이 드물고, 소농 단계의 영세 농민들이 대다수였다.
양전을 거치면서 함경도 토지의 약 30%, 황해도 토지의 약 20%, 평안도 토지의 약 15%가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민의 반발도 있었지만, 이는 토지 분배를 위한 선결 과정이라는 말에 반발도 잠잠해졌다.
타 지역 대비 많은, 이 방대한 국유지가 분배와 매각의 대상이 되었다.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황해도의 옛 궁방전과 역둔토였던 국유지는 경작인들에게 소유권을 인정하고, 광무 6년부터 분배를 실시해 향후 10년간 생산량의 5할을 납부하는 조건으로 토지를 분배한다. 미개간지로 국유지에 편입된 지역 중, 개척을 희망하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토지를 분배한다. 국유지의 상업적 이용을 희망하는 이들을 선별하여, 경매를 통해 토지를 불하한다.”
“북방 영토에서는 예전대로, 이주 희망자에게는 토지 분배의 원칙을 이어 나간다. 서북 5도 국유지 분배의 추이를 살피고, 중부와 남부 지방에서도 분배를 실시할 것이다. 향후 민유지의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발급된 지계를 등기 대장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실시한다. 개인의 토지 소유 제한은 1인당 3결(3헥타르)을 넘길 수 없으며, 외국인의 토지 구매는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농림부가 주관한 농지법이 황제와 내각의 재가를 받아, 의회에 상정되었다.
지주들의 우려와 달리 온건한 법령이었다. 민유지는 건드리지 않았고, 궁방전과 역둔토에서 전환한 국유지가 분배 대상이 되었다. 이는 황제와 정부가 자발적으로 내놓은 것에 가까웠다.
일부 국유지의 경매 조치는, 자산가 계층이 토지 구매에 나설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민의원은 농지법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중추원은 농지법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농지법은 민의원과 중추원에서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일부 무소속 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지거나 기권을 한 것과 달리, 주요 3당은 당론으로 찬성을 가결했다.
입헌개화당은 정부 여당으로서 정부 안을 지지했고, 독립당은 민의를 존중하는 당을 내세웠기에 지지했고, 제국당은 농지법에 반감을 가졌음에도 ‘근왕’을 내세운 당답게 황제의 뜻을 따랐다.
“짐은 정부와 의회의 법안을 받아들여, 농지법이 실시됨을 선언한다.”
광무 5년 12월 22일, 의회에서 가결된 농지법에 황제가 최종 서명하면서, 농지법이 제정되었다.
“농지법 통과!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황해도에서 국유지 분배 실시!”
“나라가 스스로 땅을 농민들에게 나눠 준다니,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오는군.”
“그게 바로 임금님의 성은이 아닌가.”
“마침내 내 소유의 땅이 생기다니, 조상님이 알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나!”
법안의 최대 수혜자는, 현지에 거주하는 국유지의 소작농들이었다.
소작농들에게 자기 소유의 땅이 생기는 것만큼 일생의 소원이 없었다. 토지를 보유하게 된 자영농은 열심히 경작하여 토지 생산량을 늘리고, 지세를 납부하여 국가재정의 큰 역할을 차지할 터였다.
10년간 생산량 5할의 세금도, 예전과 비교하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이를 납부하여 자신 소유의 토지가 생긴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납부 기간에 대한 정부 내 이견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1861년 러시아의 농노 해방과 토지 분배가 무려 49년 분할이라는 장기 분할로 인해 농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고려해, 10년이라는 비교적 단기간에 이루어졌다.
비록 지역이 한정되고, 분배 대상이 국유지로 한정되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농민들은 농지법에 기뻐하면서도 아쉬워했다. 삼남 지방, 특히 곡창 지대인 호남 지방에서 더욱 그러했다.
“제길, 이럼시롱 나도 진즉 북짝으로 가부렀어야 했는디.”
“차라리 나도 진즉 궁방전에 들어가야 했는디. 그람시롱 나가 땅 하나 먹어 분 거 아니것소.”
“아따 기다려 보소. 우덜 나랏님께서 언제 언 놈 언 사람 편애하시는 거 보았능가? 다 어련히 알아서 하시것제.”
“더군다나 농림대신이 우덜 농민을 대표하는, 거 녹두장군 전봉준 선상님 아니신가. 분명 우덜을 위한 조치가 있을 것이시.”
“암, 나랏님을 믿어야제.”
농민들은 실망하지 않고 황제의 후속 조치를 기다렸다.
‘물론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지.’
국유지 분배는 광무 6년(1902)부터 순차적으로 진행하여, 광무 8년 이후로는 중부와 남부에서도 국유지 분배를 단행하기로 했다.
국유지 분배와 함께 민유지 소유권에 대한 법령 확립과 조사는 계속 이뤄졌다.
사적 소유권을 확립하면서도, 민유지의 소작농에 대해서도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른 토지 분배를 준비했다.
1차 농지법은 문자 그대로 시작에 불과했다.
1900년대를 상징할, 전국적 토지 개혁의 물꼬가 트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