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08
– 308화에 계속 –
308화 사회, 혁명의 시대
20세기 초엽, 한국 사회는 20년 전과 비교하면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일련의 변화는, 국가의 운명뿐만 아니라 한 개개인의 삶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한반도의 남쪽 끝, 전라남도 해남군에 살다 요동까지 와서 군 생활을 온 박대붕 상등졸의 사례는 상징적이라 할 수 있었다.
광무 5년(1901), 박대붕은 3년 의무복무연한을 마치고 전역의 시기가 왔다.
영광스럽게도 황제에게 받은 훈장을 달고 전역하여 금의환향할 날을 기다리던 박대붕에게, 연대장 홍범도 부령의 호출이 왔다. 박대붕은 연대장이 직접 자신을 부른다니 얼떨떨했다.
“박대붕 상등졸, 귀관은 우수한 복무 경력과 뛰어난 애국심으로 부대의 모범이 되었네. 황공하옵게도 황제 폐하께서 친히 귀관에게 훈장을 하사하셨으니, 우리 6연대의 자랑일세.”
“황제 폐하의 지극하신 황은 덕분입니다!”
박대붕은 이제 충성의 말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군에서는 우수한 경력을 쌓은 사병에게 하사관 임관을 권유하고 있네. 귀관도 임관 사례를 본 적이 있었겠지?”
“저, 저는 학력이 부족한데…….”
“원칙적으로 하사관은 소학교 이상의 학력을 갖춰야 하나, 군 특별교육을 이수한 사병에게는 갈음하는 학력을 인정하네.”
원칙적으로 장교는 최소 중등교육 이수자, 하사관은 최소 초등교육 이수자에게만 자격이 주어졌다. 다만 국민교육이 확립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수요 대비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에, 전공을 세우거나 우수한 복무를 한 이들에게 임관의 기회를 주었다.
“여러모로 귀관은 자격이 충분하지. 황제 폐하의 훈장을 받은 사병이 몇이나 되겠나? 황은에 보답하기 위해, 군에 남아 조국을 위해 계속 헌신함이 어떤가?
“높이 평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잠시 생각할 시간을…….”
“물론이지. 천천히 생각해 보게.”
막사로 돌아온 박대붕은 연대장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직업군인이 된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지만, 의외로 자신이 군대 체질이랑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억세게 좋은 행운이 따랐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전공을 세운 건 사실이었고, 그 전공을 인정받아 황제에게 훈장까지 받았다.
전쟁 영웅으로 유명한 연대장이 직접 하사관 임관까지 권유했다.
‘연대장 말대로 이런 사병이 몇이나 되겠어? 해남으로 돌아가 봐야…….’
고향으로 돌아가 봐야, 손바닥만 한 농토를 가족들과 나눠서 부쳐야 했다. 새로운 삶을 경험한 자신이, 겨우 그런 삶을 살 생각은 없었다.
박대붕이 시골에 살면서 가장 멋있다고 부러워하는 이들은, 교사와 순검이었다. 양복을 입은 젊은 교사를 모두가 ‘선상님’이라고 부르며 우러러봤고, 제복을 입고 칼을 찬 순검이 나타나면 모두가 ‘나으리’리고 부르며 조아렸다.
자신은 가방끈이 짧아 ‘선상님’은 될 수 없겠지만, ‘나으리’는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사관이 되면 순검과 비교해서 부족할 게 없었다. 교사처럼 존경은 못 받아도 존중의 대상은 될 수 있었다.
박대붕은 하사관 임관을 결심했다.
연대장 추천서를 받은 박대붕은, 하사관 학교가 있는 평양으로 가서 속성교육을 6개월간 받았다.
가방끈이 짧기는 해도, 군 생활에 단련된 박대붕은 하사관 교육을 무난히 이수했다. 병학(兵學) 필기시험이 가장 난제이긴 했지만, 김성숙 참위의 조언을 받은 후 꾸준히 공부를 해 왔던 박대붕은 최종 성적도 상위권으로 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
병과는 헌병(憲兵)을 선택했다. 헌병은 인기가 좋아 경쟁이 치열하고 선발 기준도 엄격했지만, 황제로부터 친히 팔괘장을 수여받은 박대붕은 자질을 인정받아 헌병이 될 수 있었다.
“나, 박대붕은 영광스러운 대한의 무관으로서, 우리 조국 대한국과 육·해군을 통수하시는 대황제 폐하께 영원한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박대붕은 정식으로 헌병 참교(參校)로 임관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가난한 시골 촌놈, 농민의 아들이 최하급이라 할지라도 당당한 무관의 반열의 오른 것이다.
임관식을 마친 후, 박대붕은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향했다. 평양에서 해남까지는 자신이 입대를 위해 떠나온 길을 그대로 되짚어가는 길이었다.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었다. 육군 참교 제복에 황제로부터 수여 받은 팔괘장을 달고 온 박대붕은 고향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부모님은 드디어 집안에 ‘나으리’가 나왔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던 형과 형수는 경악과 부러움으로 쳐다보았다.
박대붕이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이 선망의 눈빛으로 쫓아 왔고,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거렸다. 길을 가다 순검을 보면 죄지은 것도 없이 괜히 주눅이 들었는데, 이제는 순검이 주눅 든 것마냥 지나갔다.
‘흐흐, 이제 나는 영광스러운 대한의 무관이라고!’
박대붕은 김창숙 참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휴가 기간이 짧아 직접 경북 성주까지 갈 수는 없었지만, 우체사(郵遞司)를 통해 편지를 보냈다.
우체사는 사회 변화의 한 상징이었다. 전국 곳곳에 우체사가 있고, 우전부(郵傳夫)가 시골까지 돌아다니며 편지를 전달했다.
김창숙의 주소는 몰랐지만, 성주에서 유명한 의성 김문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주소란에 ‘경상북도 성주군, 의성 김문 김창숙’이라고 적었다. 당시만 해도 주소를 모른 채 편지 보내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이렇게 보내도 반송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지역 출신인 우전부가 전달해 주었다.
휴가를 마친 박대붕은 황성의 헌병사령부로 갔다. 박대붕에겐 첫 서울 나들이었다.
헌병사령부에서 추가 교육을 받은 후, 임지가 결정되었다. 무관, 특히 헌병에게는 상피제(相避制)가 엄격히 적용되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다.
박대붕의 첫 임지는 황해도 해주로, 해주 헌병대의 지소로 발령이 났다. 그가 하는 일은 일반 치안 업무였다.
광무 4년의 신군제 개혁 이후, 헌병이 프랑스식 국가헌병대(Gendarmerie, 國家憲兵隊)로 재편되었다.
기존의 헌병이 군인들만 감독했다면, 국가헌병대는 치안 업무도 수행했다. 경찰이 향촌 권력과 결탁하여 ‘닫힌 사회’를 형성하는 걸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프랑스 장다르메를 모델로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만,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국가헌병대가 생겼고, 향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길 원하는 대한제국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다만 일본의 헌병대처럼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는 건 아니고, 군무부 소속이기는 해도 평시에는 내무부의 지휘를 받으며 경무국과 협력 관계였다.
“내일 교회에서 합동 농민 강연회가 있다는군. 농지법 이후 농촌운동가들이 당국에 우호적이라고는 하지만, 일부 과격분자들이 끼어드는 불상사가 없잖아 있네. 물론, 오늘은 명망 높은 분들이 대거 참여할 예정이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걸세. 박 참교가 경비도 맡을 겸 가 보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헌법 제정으로 정치 결사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일정 인원 이상이 모이면 사전에 신고하고 헌병이나 순검의 감독을 받아야 했다. 특히 의회 개설 이후 정치 운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헌병의 업무도 증가했다. 그래도 정치적 충돌까지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교회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박대붕은 새삼 놀랐다.
‘서북 지방에는 야소쟁이들이 많다더니, 진짜 그렇구만.’
동학이 만주에서 개가를 울림에 따라, 기독교도 공세적으로 신도 확장에 나섰다. 특히 서북 지방에서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경쟁적으로 신도 수를 늘렸다.
하지만 박대붕의 생각과 달리, 교회를 찾는 이가 꼭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다. 문명개화와 서구가 동일시되면서 기독교 신자가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급증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은 진짜 신앙이라기보다는 ‘서학’의 개념에 가까웠다.
근래 급증하고 있는 농촌운동가들도 교회를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삼고 있었다. 오늘 강연회도 그랬다.
“오늘 참관을 맡은 헌병이신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강연회를 주관하신 분인가요? 성함이…….”
박대붕이 들고 온 서류를 뒤적이자,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악수를 청했다.
“나도 한때 군직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12연대 소속으로 평양 전투에서 싸웠죠. 예비역 부교 김창수입니다.”
“아이고, 대선배님이셨군요. 박대붕 참교입니다.”
박대붕은 김창수와 반갑게 악수를 했다.
군대를 전역한 김창수는, 고향 해주로 돌아와 농업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그는 근래 불고 있는 농촌 운동의 바람에 동참하고 있었다.
“노파심으로 말하는데, 오늘 강연회는 불온한 성격이 아니외다. 강연회를 후원하신 안태훈 예비역 정령은 평양 전투의 영웅이자 해주의 유지시고, 그 자제인 안중근 부위도 북경 공사관 전투의 영웅이지요. 강연자도 학무부에서 선발한 국비유학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한 인재이올시다.”
“아유, 뭐 꼭 그래서 제가 온 게 아닙니다. 선배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형식상 필요한 일이죠.”
김창수의 설명에, 임관한 지 몇 달도 안 된 박대붕은 마치 오래된 관리마냥 말했다.
“하하, 그럼 박 참교도 좋은 말씀 듣길 바랍니다. 쉽게 들을 기회가 아니거든.”
“예, 그러지요.”
강연자가 연단에 오르자, 사람들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박수가 쏟아졌다.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 나는 평안도 강서 사람 안창호입니다.”
“와아아아!”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에 박대붕은 놀랐다. 박대붕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날의 강연자는 사회운동가이자 명연설가로 소문이 자자한 안창호였다.
1896년 국비유학생이자 대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서 학업을 시작한 안창호는, 학업을 마치고 1900년 귀국했다.
귀국한 안창호는 정부의 관직 제안을 사양하고,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 운동에 동참했다.
정부가 덴마크 모델을 토대로 농촌 재편을 계획하자, 대사절단의 일원으로 덴마크를 방문한 바 있었던 안창호가 그 선봉에 섰다.
“동포 여러분! 대한의 근원은 이 농촌입니다. 대한의 인구 9할이 농민이오, 이 농촌을 계몽하지 않으면, 대한도 바뀌지 않는 것이외다. 나는 정말(덴마크)의 사례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농민교육사상, 이상적 농업국 정말과 그 국민교육에 대하야 말씀드리외다…….”
덴마크가 새로운 모범으로 떠오르면서, 덴마크의 ‘폴케호이스콜레(Folkehøjskole)’를 모델로 한, ‘국민고등학교’ 운동이 농촌에서 일어났다.
덴마크의 사상가이자 개혁가인 그룬트비(Nikolai Grundtvig)가 촉발시킨 농촌계몽운동은, 농민의 ‘교육’과 ‘협동’에 치중했다. 폴케호이스콜레는 학력의 제한 없이 모든 성인이 들어갈 수 있는 평생학교로, 실질적인 농업 기술 외에도 덴마크의 역사, 언어, 지리, 문화를 공부하며 민족혼을 일깨웠다. 농촌계몽을 통한 국민의 확립이었다.
폴케호이스콜레는 ‘국민국가 확립’과 ‘농촌계몽’을 중시하는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농촌운동가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도 덴마크에 주목했고, 청년 안창호도 그러했다.
“농민이라고 배움에 주저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배워야 사는 존재입니다. 농학을 배워서 농촌을 풍요롭게 합시다. 우리 대한의 역사, 국어, 지리를 배워서 대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집시다.”
덴마크의 황무지 개간운동과, 1860년대에 처음 출연하여 1880년대에 전국적으로 확산된 농업협동조합도 참고사례가 되었다.
1864년 프로이센과의 전쟁 후 실의에 빠진 국민을 일깨우기 위해, 달가스(Enriko Dalgas) 대령을 중심으로 유틀란트 반도 황무지 개간운동이 일어났다.
필연적으로 대자본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소농이었지만, 덴마크의 농업협동조합은 이를 극복했다.
“대한의 농민이여, 협동합시다! 황제 폐하께서는 우리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자립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자영농이라고 각개도생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단결하고 협동하면 경쟁에서 패배하지 않습니다. 평양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이 수립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양을 시작으로, 대한 13도와 요동에 이르기까지 협동조합의 신사회를 건설할 것입니다!”
이미 1890년대 후반부터 금융조합이 수립되었지만, 이는 관의 영향하에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민간 협동조합운동은, 1901년 평양에서 시작된 농상협동조합의 저축·소비운동이었다.
개화 열풍이 강한 평양에서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시작된 협동조합운동은, 청년 안창호가 중심에 있었다. 상업이 발달한 평양의 특성상 농상협동조합으로 시작되었지만, 농촌에서는 농업협동조합을 촉구했다.
협동조합운동의 시작에 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에 나섰다.
차이가 있다면, 덴마크의 운동은 민중의 자발적인 것이었으나 한국의 운동은 정부의 영향이 있다는 점이었다. ‘민중’, ‘인민’에 더 가까운 ‘폴크’를 ‘국민’으로 번역하여 ‘국민고등학교’라고 명명한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고, 협동조합도 정부의 후원이 있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협동과 공생의 정신은, 꼭 서양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전통, 향약과 두레, 품앗이, 이게 다 바로 협동의 기초입니다. 요동에서는 동학교도들이 종교적 조직을 바탕으로 농촌협동조합에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라고 그들에게 밀릴 이유가 없습니다!”
동학은 협동조합운동과 무관하게 독자적인 농촌협동체계를 구축했고, 이 역시 정부의 후원 대상이었다.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서력 20세기, 우리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서양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잘살아 봅시다!”
“와아아아아!”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헌병으로 참관하기 위해 온 박대붕도 감격하여 박수를 쳤다. 그 역시 결국 농민 출신이었다.
정치나 사회운동에 무관심하다가 근래 헌병 업무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 박대붕이지만, 이렇게까지 미래를 희망적으로 그리며 구체적인 진로를 제시해준 사람은 황제 말고 처음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정말로 세상이 바뀔 것 같았다. 정말로 잘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한국의 민중들은 절대 다수가 가난하고, 과중한 세금과 힘든 노동에 시달렸지만, 그들에게는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희망이야말로, 사회 변혁의 동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