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1
– 31화에 계속 –
31화 차르(царь)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앞에 선 이선은 러시아 황실 예법에 따라, 최고의 경의를 표하면서 말했다.
“Your Majesty! It is a great honor to meet you. On behalf of my people, I take my hat off to you for your achievement. I’m Li sun, an Envoy Extraordinary of Corea, and I am here to represent my country and my people. (폐하! 뵙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제 백성들을 대표하여, 폐하의 업적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이선, 특명 전권 공사로서 제 조국과 제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선의 말은 최고의 경의를 표하면서도 묘한 의미를 주었다. ‘내 백성들을 대표하여’, ‘특명 전권 공사로서 내 조국과 백성을 위해’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자칭이었다. 하지만 듣는 이에게는 상당한 무게감을 주는 말이었다.
재위 24년차, 노련한 황제가 이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러시아 제국은 공작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짐은 조선의 국왕 폐하께서 비공식적이나마 사절을 보낸 것에 감사를 표하는 바요.”
“폐하의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세계에 방대한 국토를 점유하고 있는 러시아로선, 수많은 이웃 나라들 중에 유일하게 조선만이 국교가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소. 양국이 국경을 접한 지 20년 만에, 마침내 비공식적이나마 대화를 시작할 수 있어서 다행으로 생각하오.”
황제는 거듭 ‘비공식적’ 성격을 강조했다. 이선도 굳이 반박하진 않았다.
“조선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일을 끝마치기는 그리 어렵지 아니함을 말합니다. 오늘의 알현으로 양국의 관계는 처음 시작되었으나, 좋은 이웃으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이선의 말에 황제도 껄껄 웃었다.
“좋은 말이군. 짐 역시 그리 생각하겠소.”
이선은 조선에서 가져온 석파란 중, 가장 화려하고 가치가 높은 그림을 황제에게 바쳤다.
“제 할아버님이시자, 조선의 섭정이셨던 대원군께서 조선 왕실을 대표해 폐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조선에 있는 대원군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지만, 황제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고맙소. 짐은 조선 왕실의 후의를 기쁘게 받아들이겠소.”
알렉산드르 2세는 석파란을 잠시 감상하다가, 문득 생각이 미치는 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국경을 접한 이래, 여러 차례 귀국에 수교를 논의했지만 조선의 섭정께서 거절했던 기억이 나는군.”
양국이 국경을 처음 접한 1860년대, 러시아는 두만강을 넘어 여러 차례 수교와 무역을 제안했지만 그때마다 대원군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때는 부득이한 조치였습니다. 프랑스와 미국 등이 조선의 국체를 위협하는 상황이라, 서양 국가와 수교를 논의할 단계가 아니었습니다.”
“이해하오. 하지만 그때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소이다. 조선 국왕께서는 이미 서양 국가들과 수교를 논의 중이라 들었소. 그런데 최근의 우리 측 수교 제안도 거절했는데, 어찌 된 일이오?”
1880년, 러시아 사절은 두만강을 넘어 조선에게 다시 회담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러시아는 북방의 대국으로서, 청국조차 두려워하는 강국입니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는 러시아를 우려하는 여론이 있습니다.”
“군함을 동원해 침범한 프랑스와 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그동안 귀국에 어떠한 해를 끼치지 않았소. 그런데 러시아에 대해서만 경계하는 마음을 갖다니, 안타까울 따름이오.”
“특히 최근에 동양에는 러시아의 남침을 우려하는 여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영국이 헛소문을 퍼트린 탓이겠지.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하려 한다든지, 부동항을 얻으려 한다든지 하려는 헛소문 말이오.”
이선은 이제 본론으로 바로 치고 나갈 필요성을 느꼈다.
“폐하, 그렇기에 조선 국왕께서는 왕자인 저를 직접 보내시어 러시아 제국의 의사를 확인하고자 하십니다. 러시아가 조선에 대해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하하, 직설적이라 좋구려. 이웃 나라로서 수교를 맺어 우호를 키우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좀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지요. 러시아가 조선에 대해 원하는 건, 러시아에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서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러시아에 적대적인 열강에 의해 종속되지 않고, 러시아를 공격하는 데 이용되지 않는 조선을 원치 않으십니까?”
이선의 말은 정확히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세간의 소문과 달리, 러시아는 조선을 원치 않았다. 극동의 희박한 인구와 부족한 경제력으로 인해, 러시아는 새로 얻은 영토를 관리하기조차 버거워했다.
러시아가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는 하나, 극동 지역에서는 미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러시아가 구태여 조선을 차지해 열강, 특히 영국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러시아가 우려하는 건, 조선이 영국이나 일본에게 점령되어 러시아를 공격하는 전진기지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역시 영국의 공격을 두려워했다. 상호 신뢰가 없이 오해만 가득 쌓이는 상황이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그러길 바라지. 하지만 그럴 수 있겠소?”
“유감스럽게도 영국은 조선의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특히 거문도를 노리고 있지요.”
“거문도? 거기가 어딘가?”
차르의 질문에 조미니가 답했다.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을 말합니다.”
그러자 차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선은 가져온 동아시아 지도를 펼쳤다.
“영국은 이미 1875년에 거문도 점령을 논의했습니다. 조선의 의사와 무관하게,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할 의지와 능력이 있습니다.”
거문도, 이른바 ‘포트 해밀턴’은 군항으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춰, 열강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었다. 러시아 또한 이미 1854년에 군함을 파견해 거문도를 둘러본 적이 있을 정도였다.
1875년 7월, 영국 해군부는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을 공동으로 침략한다.’는 소문을 듣고 거문도 점령을 논의했다. 실제로는 일본이 단독으로 운요호 사건을 도발함에 따라, 영국의 계획은 페이퍼 플랜으로 끝났다.
하지만 계획 자체는 얼마든지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885년,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엉뚱하게도 거문도 강점을 결정했다. 유사시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영국이 귀국의 영토를 불법적으로 갈취한다면, 러시아는 결코 용인하지 않겠소.”
“조선 또한 국토를 단 한 뼘도 내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조선이 자국의 외교를 독자적으로 실천하고, 자국의 국토를 독자적으로 방위할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제가 러시아를 방문한 목적은 그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뜻이오. 그런데 이를 어찌 실천할 수 있겠소?”
“조선이 서양 국가들과 수교하고,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면 차차 실천할 수 있겠지요. 표트르 대제께서 그러하셨듯, 저 또한 조선의 개혁과 자주독립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작이 러시아를 방문한 이유가, 표트르 대제처럼 신문물을 배우기 위함이었단 말이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표트르 대제를 언급하는 이선의 포부에, 그 후손인 알렉산드르 2세는 웃음을 터뜨렸다.
“포부가 커서 좋소. 그런데 우려가 되는 바가 있소. 자주독립이라 하였는데, 청은 조선의 종주권을 주장하고 있소. 이에 대한 조선의 입장은 어떻소?”
“유럽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면, 1878년 이전의 세르비아 공국이나 현재의 불가리아 대공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불가리아는 법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내정·외교·군사 모두 독립되어 있지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비유한 건, 러시아 입장에선 더없이 적절한 비유였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독립한 건 러시아가 오스만을 격파한 덕분이었다. 러시아 덕에 독립을 쟁취한 두 나라는 발칸의 대표적인 친러 국가였고, 러시아의 중요한 동맹국이었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라, 이해하기가 쉽구려.”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극비입니다. 보안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비공식 회담이니만큼, 이 자리에서 하는 말은 우리만 아는 사실이오.”
“조선이 1637년 이래 청의 종속국이 되었지만, 이는 스스로 원한 바가 아니었습니다. 만주족의 폭력적인 침략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원해서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던 게 아니었듯이 말입니다.”
이홍장 앞에서와는 전혀 다르게 말하는 이선이었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옛 종주국을 걷어찰 생각이다. 러시아가 유럽에서는 발칸으로 진출하는 걸 원하듯이, 아시아에서는 만주로 진출하길 원하는 걸 안다.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에게 발칸 고토(故土) 수복의 명분이 있듯이, 조선 또한 만주 고토 수복의 명분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할 수 있다.’
이선의 말은 이런 내용을 암시하고 있었고, 알렉산드르 2세는 행간에 숨겨져 있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하, 좋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외교에서, 귀국은 정말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군 그래.”
“외교라는 게, 50년 앞을 내다보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 조선은 어린 소년인 저와 같습니다. 현재는 미약하기 짝이 없으나, 앞으로는 동양 정세의 중요한 축으로 떠오를 것입니다.”
이선의 말은 허장성세였으나, 이 정도는 소년의 패기 정도로 보였다.
“어린 나이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니, 대단하오.”
“폐하, 공작은 제 부친의 전쟁술뿐만 아니라,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동양의 손자병법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전략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조미니의 말에 황제는 더욱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군. 동양에서 말하는 심모원려라는 것인가.”
“앞으로의 일은 그렇다 쳐도, 양국 간의 당장 논의될 일은 무엇이겠소?”
“역시 제일 먼저 수교를 논의해야겠지요. 또한 두만강을 사이에 둔 육로 통상 장정이 논의되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불법 이주나 밀무역은 양국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희박한 인구와 부족한 경제력으로 인해, 연해주 지역은 조선 이주민과 조선과의 밀무역으로 인해 지탱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확한 지적이오.”
“다행히도 양국 간에는, 조선 이주민이라는 교두보가 존재합니다. 그간 조선 조정에서는 이주민을 죄인으로 여겼으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극동 개발을 이끄는 첨병이자, 양국 간의 관계를 이을 중요한 가교입니다.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양국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관계를 경색시키는 원인 중 하나인 이주민 문제에 대해, 이선이 통 크게 나오자 황제도 만족했다.
“짐 또한 그렇게 생각하오.”
“다만 이들은 러시아보다는 여전히 고국인 조선을 특별히 여기고 있으며, 러시아의 통치 방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조선의 책임 있는 당국자의 협력이 있어야만 러시아의 통치에 순응할 것입니다.”
실제 이주민 1세대의 정체성은 여전히 조선에 있었다. 이들에게 러시아는 극심한 기아와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준 고마운 나라이긴 했지만, 사회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조선의 방식을 고수했던 것이다.
“참고하겠소.”
황제는 거듭 단답형으로 답했지만, 이선의 남다른 식견에 내심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게 고려인의 자치권을 맡겨 달라. 그러면 러시아에게도 이득이 된다. 이게 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할 요구 사항이라 이거지.’
비록 황제가 이선을 마음에 들어 했다곤 하지만, 아직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마지막 한 수가 더 필요했다.
‘차르 암살을 막아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이 황제를 위해서도, 조선과 러시아를 위해서도.’
알렉산드르 2세의 갑작스러운 암살로 입헌군주국 러시아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혁명으로 가는 기나긴 몰락의 길이 시작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이선은 역사를 바꿔 버릴 생각이었다.
“비공식적인 회담이나, 아주 유익한 대화였소. 공작이 호언장담한 것처럼, 조선 국왕 폐하께서는 아주 훌륭한 책략을 짐에게 제공해 주었구려.”
황제의 찬사에 이선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현재 어디에 머물고 있소?”
“여기서 가깝습니다. 넵스키 대로의 그랜드 호텔 유럽에 머물고 있습니다.”
“왕자를 특사로 보냈는데 호텔에 머물게 해서야 러시아 제국의 체면이 서지 않는군.”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저는 호텔이 편합니다.”
“니콜라이, 이리 와 보거라.”
할아버지의 부름에 손자가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별궁에 빈방이 많이 남아 있지? 그중에 하나를 공작에게 내주도록 할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뭐라고, 황궁에?’
황제의 제안에 이선이 오히려 더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