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10
– 310화에 계속 –
310화 경제, 혁명의 시대
개항 이후, 한국의 가장 큰 변화는 경제적 변화였다. 경제 구조가 급속도로 변화한 건 아니었지만, 전통적인 농업 경제에서 자본주의적 산업 경제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었다.
한국은 서구가 주도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늦게 편입된 후발국가지만, 역설적으로 후발국가의 이득도 있었다.
“우리는 현재 가장 뒤떨어졌지만, 당신들이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어 완성을 한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할 것이다.”
1883년, 보빙사로 미국을 방문한 유길준은 서구 문명에 찬탄을 표하면서도, 그들의 성공을 본받아 빠르게 성장을 이뤄 내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보빙사 귀국 후 집권한 이선과 개화당의 정책은 실제로 그랬다. ‘식산흥업’과 ‘부국강병’을 표어로 내건 개화당은, 빠르게 근대 기술을 도입했다.
1880년대 중반, 조선에 경제적 혁명의 시대가 시작됐다.
“국력은 국부(國富)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신속히 경제를 건설해야 한다. 조선과 서양 열강의 격차는 100년, 일본과의 격차는 족히 30년에 달한다. 앞으로 그 격차를 최대한 신속히 메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파멸할 것이다.”
이선과 서구 문명을 체험한 이들을 필두로, 강한 위기의식과 함께 경제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한국의 경제 근대화 특징은, 초기에는 거의 100% 정부 주도로 추진되었다는 점이었다. 민간의 자본 축적은 취약했고, 정부가 경제를 모두 주관하는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 형태를 띠었다.
“당면한 과제는, 인구의 절대다수인 농촌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국토를 광범위하게 개발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다. 축적한 자본을 토대로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여, 상공업의 일대 혁신을 꾀한다.”
1885년, 체계적인 경제 정책이 처음 수립될 당시만 해도, 조선의 경제는 극도로 빈약했다. 전통적인 사농공상 구조에서 상공업의 발전은 제한적이었고, 농업 역시 생산성이 떨어졌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인 수준에서 무작정 식산흥업에 나선다고 상공업이 발전할 리가 없었다. 초기 10년은 국토 개발을 통해 농업, 어업, 임업, 광업과 같은 1차 산업을 발전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잡았다.
호조와 공조, 훗날의 탁지부와 농상공부는 국토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농촌에서는 상업 작물의 장려가 이뤄졌다. 지역별로 삼업(蔘業, 인삼)과 연초(煙草, 담배), 양잠(養蠶, 생사), 첨채(甜菜, 사탕무) 재배가 권장되었다.
전통적인 가내 수공업은 점차 공장의 기계공업으로 대체되는 대신, 나전칠기나 자수 등 수공예품의 상업화를 추구했다.
농업의 상업화를 추구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가장 많은 수출이 이뤄지는 건 미곡이었다. 일본과 조선은 미곡 무역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었다. 조선은 미곡 수출 통제를 통해, 가격의 현실화를 이뤄 일본과의 무역 불균형을 맞췄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미곡 수출을 통한 상업형 지주가 등장했다.
한반도에는 개발되지 않은 금광과 탄광이 많았다. 금, 은, 구리, 텅스텐의 채굴이 본격화됐다. 채굴기술이 부족한 조선은, 주로 경제적 동기는 강하지만 정치적 개입은 피하는 미국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광산 개발에 나섰다. 광산은 국유화를 원칙으로 했다.
대표적으로 평안도 운산금광의 생산성만 해도 아시아 최고였고, 금광 투자에 나선 미국인 투자자들에게 높은 이윤을 제공하고도 정부는 연간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돈, 돈, 돈이 필요해…….”
1894년에 이르기까지는, 참으로 눈물겨운 투쟁이었다. 일련의 개혁으로 세입이 급증했지만, 그만큼 세출도 급증했다.
행정개편과 지조개정으로 얻은 조세수입, 해관세가 국가 재정의 대부분이었고, 근대화와 군비에 막대한 재정 투자와 수출입 불균형으로 재정 적자는 계속되었다.
조선의 재정에 숨통을 틔게 해 준 건 독립전쟁의 승전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는데, 전쟁이야말로 국가적인 대사업이 아닐까 싶습니다.”
청나라에서 받은 배상금 은 7천만 냥은 조선에 엄청난 액수였고, 충분한 은의 확보는 태환권 발행과 화폐경제 실시를 가능하게 했다.
1880년대에 조선은 명목상 화폐경제와 은본위제 실시를 내걸었으나, 실질적으로 백동화만이 화폐로 쓰였던 동본위제나 다름없었다.
화폐가 제대로 통용되지 않아 화폐 신용도가 턱없이 낮았던 조선에서, 마침내 화폐경제가 본격화되었다.
“이제 드디어 화폐경제를 확립할 수 있는 조건이 이뤄졌습니다. 장차 중앙은행을 창설하고 금보유고를 늘려 금본위제를 실시해야 합니다.”
1819년 영국을 시작으로, 1890년대에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마지막으로 금본위제에 합류하면서 유럽 국가 대부분은 금본위제를 실시했다.
오랫동안 금본위제를 준비했던 일본도, 청나라에서 받은 배상금을 토대로 1897년 금본위제를 실시했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이웃나라에서 금본위제가 실시된다는 것은, 신생 대한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1898년, 한국은 장차 금은 복본위제(複本位制)를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중앙은행 창설에 돌입했다. 금 보유고의 한계로 인해 현실적인 대안은 복본위제였다. 금 보유고를 확보하기 위해 금 수출이 일시 정지되었고, 청나라로부터 받은 배상금의 일부는 중앙은행 창설을 위해 전용되었다.
당시 한국에는 조선은행, 한성은행, 제일은행, 대한천일은행, 한아은행, 상업은행 등 국·민립 은행이 생겨났으나, 거시경제와 통화정책을 총괄하는 중앙은행은 부재했다.
“황명에 의거하여, 대한제국특립중앙은행 창설을 선포한다.”
1900년, 마침내 대한제국특립중앙은행, 이른바 한국은행이 창설되었다.
초대 한국은행 총재는 탁지부대신 어윤중이 겸임했고, 부총재에는 대한천일은행장을 역임한 이용익, 화폐 전문가인 최석조(崔錫肇)가 취임했다.
1901년, 금은 복본위제 실시를 목표로 20원, 10원, 5원의 금화, 1원, 50전의 은화, 10전, 5전의 백동화, 1전의 청동화가 발행되었다. 이중 본위 화폐는 금화였다. 한국은행 금본위를 토대로 태환권 발행과 지폐 제작에도 돌입했다.
각고의 노력에도 여전히 화폐의 신용도는 낮았으나, 화폐경제 확립을 위한 중대한 진전이 이뤄졌다. 이는 자본주의 발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본격적인 식산흥업의 시기가 왔소. 장차 식산흥업을 넘어 산업화로 나아가야 하오.”
1900년경이 되면, 대한제국의 자본 축적은 상당 부분 이뤄졌다.
초보적이나마 민간 자본의 축적도 이뤄졌다. 전통적인 사상(私商)들, 황성의 시전상인, 경기도의 경강상인, 개성의 송상, 평양의 유상, 의주의 만상, 삼남의 보부상이 근대적 자본가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물결을 탄 신흥 자본가들도 등장했다.
유교적 관념하에서 ‘천한 행위’로 여겨졌던 상업 활동과 치부(致富)가, 새로운 시대의 미덕으로 떠올랐다.
바야흐로 회사의 시대가 도래했다. 합자회사(合資會社) 열풍이 불었다.
“여러분, 투자를 합시다. 세계 대세는 자본주의요. 돈이 돈을 낳는 시대지.”
“식산흥업, 자본주의, 산업화! 상공인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올시다! 합자회사에 투자를!”
자본주의도 ‘위로부터의 자본화’가 시작되었다.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은 회사들이 성장했다.
정부의 상공업 진흥정책에 따라, 무수히 많은 회사가 생겨났다.
농업과 삼업, 양잠업, 연초 생산을 위한 농상 합자회사 설립에 이어, 금융·제조·광업·운수·토건 등 전 분야로 회사가 확대되었다.
정부 정책의 기조는 국가 중심의 국가자본주의, 상공업 육성을 위한 보호주의였다.
경제 정책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외국 자본과의 경쟁이었다. 자본주의 경쟁의 정글로 던져지면 취약한 국내 자본은 살아남기 어려웠다.
후발 산업국가의 상징인 프로이센처럼 관세와 보호주의 정책을 채택했으나, 관세자주권이 없는 대한제국은 세밀하게 보호 정책을 세워야 했다.
“관세를 무한정 부과할 수 없으니,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관세 조항을 준수하며 경쟁합시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관세를 인정했다. 영국은 관세 비율에 반발하여 수차례 인하를 시도했으나, 이선의 단호한 태도에 번번이 실패했다. 영국과 일본은 공동으로 군함을 파견해 관세 인하를 협박한 바 있었으나, 러시아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자본주의 발전이 취약한 러시아는 한국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만족하고 있었다.
결국 한국 경제의 육성에 가장 큰 위협은, 동아시아 무역을 지배하는 영국과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일본이었다.
어쩌니저쩌니해도, 일본은 대한(對韓) 무역 시장의 가장 큰 손이었다. 한국의 무역 정책은 수출입의 대일 의존도를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본격적으로 공업을 발전하기에 앞서, 무역수지 확보를 위한 수출 대체 품목부터 생산해야 합니다. 당분간은 경공업 중심의 육성에 나서야 합니다.”
무기의 국산화를 위한 일부 군수공업을 제외하면, 대한제국의 초기 공업화는 소비재 중심의 경공업에 초점을 맞췄다. 경공업의 기반 없는 중공업은 어불성설이었다.
경공업 중에서도, 제사업(製絲業, 고치나 솜으로 실을 만드는 공업)과 면 방적업(紡績業, 섬유공업), 도정업(搗精業), 제당업(製糖業)에 초점이 맞춰졌다.
비단, 면직물, 미곡, 설탕은 국내외적으로 막대한 수요가 보장되는 산업이었다.
역시나 이 분야의 선두주자인 영국과 그간 축적된 산업 발전을 토대로 동아시아 시장을 지배하려는 일본의 견제를 받았지만, 한국을 동아시아의 협력대상으로 여기는 프랑스 자본의 적극적인 투자를 받아 경공업이 육성되었다.
“새로운 시대에는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여성이여, 공장으로!”
“도시에서의 윤택하고도 멋진 삶을 보장합니다!”
경공업, 특히 기계와 증기기관을 활용했을지라도 노동집약적인 제사업과 방적업은 농촌에서 상경한 젊은 여성들이 주된 인력이 되었다.
가내수공업 경제구조에서도 직물 방직은 여성의 일로 여겨지곤 했기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여성의 자립’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저임금이었다.
후발국가인 한국으로서는 저임금으로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수밖에 없었다. 시골에서 갓 상경한 여성들의 임금은 가장 저렴했고, 여공들은 이 냉혹한 자본주의 질서의 착취 대상이 되었다.
“여러분은 외화 획득, 무역수지 균형, 산업화의 주역이자, 신여성의 상징이다. 자부심을 갖고 일하도록!”
“임금이 적다고? 너 말고도 일할 사람은 많아. 싫으면 나가던가.”
공장주들은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내밀었다.
정부 주도의 ‘모범공장’은 8시간 근무를 권장했지만, 자본주의 경쟁질서가 도입되면서 민영 공장은 8시간이 10시간으로, 10시간이 12시간으로 점차 증가했다. 모범공장은 민영 공장의 생산성 논리에 밀리고 말았다.
12시간 2교대제가 확립되면서, 공장은 24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초기 자본주의는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선발대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하는 후발 산업국가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더욱더 가혹하게 노동자를 착취했다.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과중한 노동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로 오려는 농촌 인력은 속출했다. 농지법으로 자영농 보호 정책이 이뤄진다 해도, 농촌에서 특히 여성이 설 자리는 적었다. 농촌 여성은 도시 생활을 꿈꿨다. 그래도 도시는 일자리와 삶의 변화를 약속했던 것이다.
“경제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고는 하나, 직공의 권익도 보장되어야 한다. 대한국은 일시동인으로, 직공 또한 대한의 형제자매이다.”
경제 발전을 위해 눈감아 주고 있기는 했지만, 정부는 12시간 이상 근무 금지, 16세 이하의 미성년 노동 금지, 주당 최소 1일 휴식을 명했다.
이선의 명을 받은 김옥균의 주도로, 개화당 정부는 프랑스의 연대주의를 새로운 강령으로 참고했다. 노동 착취는 자본 축적을 위해 단기적으로 불가피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금지되어야 할 ‘필요악’으로 간주되었다.
한국의 경공업은 단기간에 발전했다. 일본이 점차 경공업 중심의 산업에서 중공업 중심으로 정책을 전환한 것도 한국의 경공업 수요 확보에 영향을 미쳤다.
“요동의 확보는 대한국 공업 성장의 중대한 진일보가 되었소. 무순과 연길의 탄광, 안산과 본계의 강철은 대한국 산업화의 초석이 될 것이오.”
대한제국은 정부 주도 하의 경공업 육성에 나섰지만, 장기적으로 중공업으로의 전환을 준비했다.
한반도에는 드문 남만주의 유연탄과 강철은, 한국의 자체적인 중공업화를 위해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그렇기에 이선은 대한제국의 영토 확장을 자원 공급지를 중심으로 이룬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한국의 공업이 발전된 서구 열강과 도약하는 일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중공업을 즉시 육성해 봤자 막대한 비용만 발생할 뿐, 경쟁에서 패배할 게 뻔했다.
이선은 장차 1910년대에 중공업의 육성을 위한 기반 확보에 나섰다. 남만주의 탄광과 철광을 대대적으로 개발했다.
‘1910년대에 분명히 중공업 수요가 온다. 세계대전 붐은 온다…….’
유럽이 촉발할 세계대전은, 유럽 열강의 쇠퇴와 신흥 공업국의 성장으로 이어질 기회였다. 이 기회를 탈 수 있다면, 한국의 중공업이 확립되어 성장일로에 접어들 수 있었다.
1885년부터 시작된 조선의 경제 발전은, 1901년을 전후하여 식산흥업을 넘어 초기 산업혁명과 자본주의화의 맹아를 보였다.
전근대적 경제는, 점차 자본주의적 경제로 재편되었다.
그 발전의 양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속화되었다.
자본주의 경제로의 변화는, 사회 전체를 야심만만하고 냉혹한 자본의 논리로 재편하고 있었다.
개인의 삶이 변화하고 사회는 전례 없는 변혁을 맞이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어찌 보면, 근대화 정책이 추진한 가장 혁명적인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