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15
316화 외전. 황제 폐하의 사생활 (2)
광무 5년(1901) 여름.
북경에서 의화단 전쟁을 마무리하는 조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이 다시 한번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다.
8월 14일의 개국기원절 국경일은 중국에서 귀환한 근위여단의 승전 기념 열병식으로 성대하게 치러졌고, 국민은 승전을 열렬히 환영했다.
의회 개원과 승전이라는 경사가 겹치면서, 전국이 축제 분위기였다.
하지만 궁궐의 이선은 승전에 도취되어 있지 않았다.
만주를 점령한 러시아와의 협상, 열강과의 관계 개선, 그리고 무엇보다 올해로 예정되어 있는 1차 토지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이선은 국무에 매진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 안에 농지법을 마무리 지을 거요. 경들은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해 주길 바라오.”
이선은 올해 안에 토지개혁을 이루기 위해 관료들을 쉴 새 없이 닦달했다. 의회 개설과 승전이라는 분위기를 타고 농지법을 상정할 계획이었다.
10월에 북경에서 청 황제 광서제와의 정상회담이 확정됨에 따라, 이선은 업무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출국 전까지 농지법의 핵심을 모두 완성하길 원했다.
주무부처인 농림부대신 전봉준과 협판 김성규는 토지개혁에 강한 열의를 갖고 있는 인사들이니만큼, 이선의 요구에 열정을 다해 업무에 임했다.
황제와 대신이 8월의 더위도 개의치 않고 맹렬히 일하는데, 아랫사람들이 쉬엄쉬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자, 일이오, 일! 당분간 퇴청은 없을 테니 그리 아시오!”
농지개혁과 관련이 있는 부처, 즉 내무부, 탁지부, 법무부, 농림부, 상공부, 토지위원회 등에는 밤에도 불이 꺼져 있는 날이 없다시피 했다.
대규모 양안 이후 전국에 확립된 토지대장을 꼼꼼히 살피고, 프랑스와 덴마크의 사례를 참고하여 대한제국 농지법의 기틀을 만드는 것도 이선의 일이었다.
물론 이선이 모든 걸 다할 수는 없고, 황제와 대신이 큰 틀을 잡으면, 세부사항은 실무관료들이 채워 놓았다.
올해 김홍집이 총리대신에서 사임한 것도, 이선의 업무를 증대시키는데 기여했다.
세간에 ‘비오는 날의 나막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행정 업무능력이 탁월한 관료 김홍집이 내각총리대신으로 장기간 재임하는 동안, 이선은 상당한 업무를 김홍집에게 맡겨 왔다.
모든 업무를 총괄하던 김홍집이 은퇴하자, 이선은 그 공백을 체감했다.
‘이래서 그동안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던 건데. 세종께서 황희의 은퇴를 윤허하지 않았던 것처럼 끝까지 앉혀 놓을걸. 이제 와서 아프다고 사임한 노인네를 다시 앉힐 수는 없는 일이고…….’
60대의 김홍집은 이대로 계속 총리직을 수행하면 과로사할까 봐 사임한 것일지도 몰랐다.
후임 총리 박정양이나 내각의 실세인 김옥균도 유능한 관료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행정능력의 측면에서 도저히 김홍집을 따를 순 없었던 것이다.
자연히 이선의 수면시간은 더욱 줄어들었다.
“폐하, 그래도 밤에는 좀 주무셔야…….”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덥지 않소? 새벽에 일의 능률이 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구려. 황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당분간 함께 만찬을 못 해도 이해해 주시오.”
“당치도 않으십니다. 신첩은 단지 폐하께서 건강을 상하실까 염려가 되어…….”
“걱정 마시오. 짐의 건강은 아주 좋소. 정기적으로 검진도 받고.”
말은 그렇게 해도, 이선은 자신의 기력이 점차 떨어져 간다는 걸 느꼈다. 그동안은 젊은 육체로 과로를 견뎌 냈지만, 30대 중반에 접어들자 체력이 몸이 예전만 못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시력이 현저히 떨어져, 평상시에는 안경을 안 써도 괜찮지만 문서를 살필 때는 안경을 써야 했다.
‘제길, 벌써 노안이 왔나. 10대 이래로 그렇게 눈을 혹사시켰으니 시력이 떨어져도 당연한 일이겠지. 후, 진짜 관리하지 않으면…….’
이선은 현대인의 기억이 있는 만큼, 건강관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운동량이 극도로 적었던 조선의 군주들과 달리, 이선은 아무리 바빠도 틈틈이 매일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궁궐을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주말 오후에는 황실 소유 목장에서 승마를 하면서 운동을 했고, 사격 연습도 했다.
덕분에 기초체력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점점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폐하, 상소문이옵니다.”
“음. 읽어 보리다.”
상소문을 읽는 것도 군주의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상소문을 전한 궁내부 시종원경(옛 도승지) 이채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한 일이오나, 오늘 상소문에는 괴이쩍은 비방이 있사오니 개의치 마시옵고…….”
“그 무슨 말인가? 괴이쩍은 비방이라니?”
“민의원의 유림 출신 무소속 의원 몇몇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사옵니다. 하온데 그 내용이…….”
이선은 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상소문을 읽었다. 상소문을 읽던 이선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 대황제 폐하의 신무(神武)한 위업은 대한의 왕업을 새롭게 하였고, 북벌을 완수하여 위로는 열성조의 한을 씻고, 아래로는 신민의 의기를 북돋웠으니…… 성상께서는 실로 다시없을 성군이시오나, 근자에 신등이 황경에서 보고 들은 바를 염려가 되어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의례적인 아부로 시작한 상소문은, 점차 비판으로 이어졌다.
성상께서는 존엄한 지체로서, 만인의 존엄을 받으셔야 마땅하거늘, 어찌 한낱 서양인의 무리와 어울리시옵니까? 서양인이 가져다주는 기물이 신묘하다고는 하나, 이는 사치스럽고 허망한 일입니다. 정부는 늘 예산이 부족하다며 증세를 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백성의 부담입니다.
…… 또한 왕조의 근본은 성학(聖學)에 있사온데, 성상께서는 성학을 멀리하시고 양이의 기물과 학문에만 매진하시니 참으로 우려가 되지 않을 수가 없사옵니다. 이는 김홍집, 박정양, 김옥균, 박영효, 전봉준 등이 성총(聖聰)을 어지럽히고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상소문은 이선의 ‘사치스러운’ 취미 생활을 지적하며 서구화 정책을 비판하고 있었다.
“집정 이래 이런 상소는 수없이 받아 봤지만, 입헌정치를 실시하고 국민의 대표라는 민의원에까지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군. 아직도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한단 말인가?”
“황공하옵니다. 이들이 자처한 대로 향촌에서 올라온 어리석은 선비의 무리에 불과합니다. 성심을 쓰실 일이 아니옵니다. 비답을 내리실 가치도 없습니다.”
한성부판윤을 역임하며 도시계획으로 서울을 싹 뜯어고친 이채연도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 역시 개탄을 감추지 못하는데, 이선이 냉소했다.
“겨우 저들이 내 취미생활이나 비방하자고 이런 상소를 연명으로 썼겠나? 입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전봉준을 콕 짚어 비판하는 걸 보게. 토지개혁의 소문이 도니까 그거 막아보자고 여론몰이 하려는 거겠지. 가당찮을 노릇일세.”
이선은 상소를 올린 의원들의 속내를 짐작했다. 이들 무소속 의원들은 향촌지주를 대표하고 있었고, 토지개혁에 반감을 가졌다.
토지개혁에 반감을 가진 건 여당인 입헌개화당의 상업지주 출신 의원이나 제국당의 향촌지주 의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들은 감히 입 밖으로 내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총대를 멘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비답을 내리겠다. 시종원경은 적으라.”
“예, 폐하.”
황제의 비답은 지체 없이 소두(疏頭)에게 전해졌다.
…… 짐의 통치,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건 의회의 역할이요, 의원된 자의 책무이다. 언제든 짐의 통치를 비판해도 좋다. 짐은 건강한 비판은 언제든 환영하는 바이다. 하지만 짐의 생활을 규제하려 들지 말라. 짐의 취미는 국가의 대계와 무관한 일이다. 그런 사소하고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하여 무엇을 얻겠는가? 경들이 논하고 싶은 바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짐은 반드시 농지법을 관철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의회를 통해 정당하게 하라! 언로(言路)는 언제든지 열려 있다.
황제의 비답에, 상소문에서 비방을 받은 대신들도 동조했다.
“우리 대황제 폐하께옵서는 촌음을 아끼지 않고 불철주야 국무에 매진하시거늘, 어찌 이따위 졸렬한 비방이나 한단 말인가?”
“성상께서는 세종 대왕과 정조 선황제에 비견될 만큼 성실하신데, 이자들은 신하된 자로서의 도리도 모른단 말인가?”
“성상께서도 하답하셨으니, 정책을 비판하고 싶다면 의회를 통해 정정당당히 하시오!”
“옳소! 옳소!”
“해당 의원은 당장 해명을 하시오!”
김옥균의 비판에 여당인 입헌개화당뿐만 아니라 제국당, 독립당을 막론하고 야당 의원들도 일제히 동의의 함성을 내질렀다. 황제가 국가를 위해 수많은 업적을 세우고, 지금 이 순간에도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상소를 쓴 무소속 의원들은 자신들의 ‘불경’을 사죄해야 했다.
“황제의 권위에 기대어 의회 의원을 공박한 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나, 저들의 방식이 너무 구태의연하고 의도가 빤히 보여 부득이하게 반박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
“지당하십니다. 다시는 이런 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오. 언로를 막는 건 온당치 못한 일이지. 말했다시피 짐은 정당한 비판은 언제든 환영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총리대신 박정양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나는 걸 보고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이 정도 비난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나도 점점 성미가 성마르게 변하는 건가.’
갑신경장 이래, 저런 비난은 셀 수 없이 많이 받아 왔다. 하지만 무시할 뿐이었다.
이선은 자신이 멸망의 귀에 처한 국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냈다. 그런데도 이런 비난이 나오니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이선은 근래 자신이 자주 짜증을 느끼고, 권태감을 느끼는 날도 많아지는 것 같았다.
‘설마 우울증은 아니겠지? 아니야, 잠을 제대로 못 자는 탓이겠지. 후, 농지법만 마무리하면 한숨 돌릴 수 있겠지.’
자신을 다독이던 이선은 다시 짜증이 났다.
‘러시아, 일본, 영국, 제국주의 열강 놈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 한숨 돌릴 여유 같은 게 어디 있나? 난 아마 앞으로도 이렇게 살다 죽겠지. 대한제국이 그 어떤 나라도 넘볼 수 없는 강국의 반열에 들어설 때까지, 내게 정신적 여유 같은 건 없어!’
이선은 한숨을 내쉬면서, 보고서를 다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폐하,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요새도 잠을 잘 못 이루시나요?”
매주 황실 여인들을 진찰하러 입궁하는 마르가리타는, 진찰을 마치고 이선과 대화를 나누며 조심스럽게 이선의 안색을 살폈다.
“뭐, 불면증은 이제 고질적이라. 괜찮아요. 분쉬 박사의 검진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합디다.”
독일인 리하르트 분쉬 박사는 황궁시의(皇宮侍醫)였다. 당시 최고 의학 선진국인 독일 출신답게 분쉬는 유능한 의사였다.
“황제 폐하의 건강에는 문제가 없으나, 과로가 누적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지나친 업무는 피하고, 잠을 충실히 자며, 술과 담배를 줄이십시오.”
“알겠소. 그리하리다.”
분쉬의 조언에 이선은 알겠다고 답했으나, 따르지는 않았다. 마르가리타에게도 분쉬의 조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분쉬 박사가 그리 말씀하셨다면 맞겠지요. 하지만 황후께서도 걱정이 많으셔요.”
“황후가 걱정이 많은데 내가 그 걱정을 덜어 주지 못하는군. 닥터가 황후의 말벗이 되어 줘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선이 쓴웃음을 짓자 마르가리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도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당신도 걱정이 된다니 묘하게 기쁘군요.”
이선의 말에 마르가리타의 하얀 얼굴이 잠시 붉어졌다.
“뭐, 나도 사람인데, 왜 쉬고 싶은 마음이 없겠어요. 단지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을 뿐이지.”
“물론 성실함이 군주의 덕목이라고 해도, 다른 나라 군주와 비교하면 폐하께서는 너무 일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요?”
“그들은 멸망의 위험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니까!”
순간 이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선이 갖고 있는 위기의식, 경술국치의 역사를 아는 사람의 트라우마를, 그 역사를 알지 못하는 이 시대의 조선인들은 공유하기가 어려웠다.
“멸망한 나라에서 태어난 당신은 이해해 주리라 생각합니다. 군주가 노력해서 멸망을 피할 수 있다면, 멸망의 운명을 피해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어요?”
마르가리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기 한참 전에 있었던 일, 폴란드의 멸망을 가장 슬퍼하고 그 회복을 염원하는 그녀로서는 이선의 말에 공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점도 있었다.
“분명 위기도 있었지만, 폐하와 국민의 노력으로 한국은 활기찬 신흥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마음을 좀 놓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마음을 놓을 수가 있겠어요. 지금은 틈을 보이면 언제든지 위태로워질 수 있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입니다.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호시탐탐 노리던 18세기 폴란드와 현재의 한국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폐하와 같은 군주가 120년 전 폴란드에 있었더라면 제 조국도 멸망을 피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저는 한국인들이 부럽습니다.”
“칭찬은 감사히 받지요.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이선은 허공을 바라보며 와인 한 잔을 들이켜더니, 표정을 풀었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나 합시다.”
– 외전 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