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16
317화 외전. 황제 폐하의 사생활 (3)
“곧 미국인 영화 기술자가 입국해서 한국에서 최초의 영상을 촬영할 예정인데.”
“와, 몇 년 전에 프랑스에서 처음 나왔다는 영화요? 놀라운 소식이군요.”
“내가 특별히 궁궐도 촬영하도록 허락했지요. 촬영할 때 당신도 같이 오도록 해요.”
“예, 그럴게요.”
이선과 마르가리타는 한동안 즐겁게 환담을 나누었다.
마르가리타는 순간 까닭 모를 비애감을 느꼈다.
이선의 표정은 웃고 있으면서도,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과 공허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생생했다.
눈앞의 이 남자, 대한제국 황제이자 2천만 국민의 지도자는 그 자체로 국가를 인격화한 것 같았다.
‘Pater Patriae(국가의 아버지). 그 말처럼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지도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모범적인 군주이지만, 한 인간으로서도 행복할까?’
한동안 상념에 잠겨 있던 마르가리타는, 이선의 물음에 깨어났다.
“생각이 많나 보군요. 생각에 독서만큼 좋은 게 없지. 요새는 어떤 책을 읽어요?”
“정치철학에 대해 좀 공부하고 있어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홉스의 ≪리바이어던≫, 로크의 ≪통치론≫, 루소의 ≪사회계약론≫, 칸트, 토크빌…….”
“하하, 이거야 더 어려운 이야기군요. 나는 황제로서 공부하는 책인데, 의사인 당신은 무슨 이유로?”
“투표권도 없는 여자가 정치철학에 관심이 있다니, 누가 들으면 웃기겠다고 생각하겠지요.”
아직 전세계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나라에서도 여성 참정권이 없던 시대였다. 마르가리타가 자조적으로 말하자, 이선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전혀! 20세기에는 보통선거와 여성참정권도 보편화될 겁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건 시민의 권리죠. 언젠가 인종차별, 신분차별, 성차별도 모두 사라지는 날이 오겠지요.”
“폐하께서는 그런 날이 오리라 믿으십니까?”
“난 종교는 없지만, 역사의 진보를 믿지요. 내가 의회를 개설하고 입헌정치를 실시한 것도, 훗날의 보통선거를 위한 첫 단계로 준비한 겁니다. 국민주권이 대세가 오는 날이 올 테니까.”
“정말 폐하께서는 진보적이세요. 그 어떤 지도자보다도.”
마르가리타는 진심으로 이선에게 찬탄을 보냈다.
그녀는 전직 사회민주주의자이자 폴란드 독립운동가로서 늘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정치철학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녀가 마키아벨리에서 토크빌에 이르기까지 공부하는 건, 눈앞의 남자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쩌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나 홉스의 리바이어던 같은, 초월적 존재로서의 국가를 인격으로 구현하는 것 같은 이선을 이해해 보고 싶었다.
‘대체 어떤 교육을 받았기에, 동양의 유서 깊은 왕조의 왕자로 태어났으면서, 가장 보수적인 위치에 있어야 할 사람이 진보와 이성의 화신과 같이 국가를 급진적으로 바꿔 버리는 걸까. 아, 정말로 폴란드에 이런 지도자가 있었더라면 망국은 피했을지도…….’
이선이 미래 세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상상도 못 하는 마르가리타로선, 그저 다양한 추측을 할 뿐이었다.
“사실 제가 의사가 된 건, 가난한 인민에게, 가련한 내 조국에게 봉사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지요. 물론 지금 한국에서 하는 일도 만족하지만…….”
“지금도 그때의 이상을 갖고 있겠지요?”
“물론이죠.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날이 오기를 저도 고대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반동의 총본산인 러시아 차리즘은 타도되어야 하겠지만요.”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서양의 모든 진보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막론하고 반동적인 러시아 전제정을 혐오의 대상으로 여겼다. 폴란드 독립운동가인 마르가리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우리끼리만 있는 자리니까 말하는 건데, 20세기에 전제정은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러시아 제정도 개혁을 해야 살아남겠지요. 안 그러면 혁명을 피할 수 없겠지…….”
이선의 담담한 예측에 마르가리타는 놀랐다. 이선은 그 누구보다 차르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건 내 개인으로서의 전망이고, 대한제국 군주로서의 짐은, 결코 우방인 러시아 제국의 멸망을 원치 않습니다. 동양의 평화와 세력균형을 위해서 러시아는 꼭 필요한 존재니까.”
이선은 친우 니콜라이 2세의 반동 정치에 우려를 하고 있었다. 끝내 혁명으로 나아가는 실제 역사에서의 실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국외자인 이선으로서는 러시아 국내정치까지 조언해 줄 수는 없었다. 대한제국의 이익을 위해서 차르를 움직이는 게 최선이었다.
‘내가 러시아와의 관계에 투자한 게 얼마인데, 망하면 곤란하지. 일본을 견제하고, 청나라를 해체하고,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하려면 앞으로도 러시아가 필요해.’
결국 이선에게 중요한 건, 대한제국 군주로서의 입장이었다. 러시아 제국과의 돈독한 관계가 유지된다면, 차르가 전제를 하든 말든 중요치 않았다.
“폐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나라별로 처한 위치가 다르니까요.”
“나 역시 당신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애국심과 이상도 높이 평가하고.”
이선은 새삼 마르가리타를 잘 데려왔다 싶었다. 만약 내버려 두었다면, 지금쯤 시베리아의 차가운 형무소에서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선은 역사를 바꾸고 있지만, 한 사람의 인생도 바꾸어 버렸다.
“이거, 계속 정치 이야기만 하면 재미없지. 다른 취미생활은? 요새 난 유럽인들과 당구를 치고, 테니스도 배우기 시작했는데.”
“폐하께서 테니스를요? 놀랍군요.”
“아, 나이를 먹으니까 계속 체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운동을 해야 하는데, 궁중에서는 황제가 뛰어다니는 게 채신머리없다고 생각하니까. 서양에서 테니스는 귀족의 운동이기도 하니, 뭐 괜찮겠지.”
이선은 산책 대신에 조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전통적으로 군주가 운동을 하는 습관이 없던 조선에선 뛰어다니는 걸 체면 상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테니스는 귀족 스포츠(Noble sport)라고 불릴 정도로 귀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군주 중에도 테니스를 즐기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한국에서도 최초의 테니스를 도입한 건, 재한 서양 외교관들이었다.
이선은 외교적 필요성을 내세워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와 테니스를 치는 재한 외교관들 모두 만족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었다니요, 아직 젊으신데요.”
“아아, 하루하루 늙어 가는 느낌인데요.”
“폐하는 나이가 들어도 매력적인 남성이세요.”
뜻밖의 말에 이선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당신이야말로. 예전에도 매력적이라 느꼈지만, 지금은 더욱 매력적이라.”
마르가리타도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제 나이도 서른셋인걸요. 중년에 접어들었죠.”
“무슨 그 나이에 중년 타령이에요? 아직 이렇게 젊고 매력적인데.”
“후후, 거봐요. 폐하께서는 저보다 겨우 6개월 먼저 태어났으면서, 늙었다고 하면 안 되죠.”
‘…… 내가 인생을 산 기간을 모두 합치면 이미 50년을 훌쩍 넘는다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 시대에 20년을 살면서 40년 이상의 일을 한 느낌이야.’
물론 이선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대신 말 없이 마르가리타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르샤바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17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그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른 인종에 비해 노화가 빠른 백인으로서는 놀랍도록 동안이었고, 자연스럽게 앉은 세월의 무게가 오히려 더 품위 있는 아름다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마르가리타는 어린 시절의 이상을 그대로 품고, 탁월한 재능을 빛나는 지성과 헌신으로 더욱 갈고닦았다. 그녀의 이상과 지성이야말로, 이선이 가장 끌리는 매력이었다.
‘만약 황제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선은 순간 다른 미래를 상상했다가, 쓰게 웃으며 접어 버렸다. 무의미한 상상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저녁을 알리는 괘종 소리에 자연스럽게 정신이 들었다.
“폐하, 이만 가 봐야 할 시간이에요.”
“그래요. 궁내부에 선생의 귀가를 도우리라 하지요.”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예, 그러지요.”
마르가리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하니, 이선도 목례로 화답했다.
“마르가리타.”
“네?”
접견실에서 떠나려는 마르가리타를 이선이 불러 세웠다. 보통 ‘닥터’나 ‘파니(Pani, 폴란드 여성 경칭) 얀코프스카’라고 부르던 이선이 갑자기 이름으로 부르니 마르가리타는 의외이다 싶었다.
“아, 오늘 즐거웠어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그럼 이만…….”
두 사람은 다시 인사를 나눴다. 이선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이선은 교태전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고대하던 아이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어린 아들과 딸은 일찍 잠들어 버렸다.
아이들이 잠든 후, 황후가 간단한 주안상을 준비했다. 이미 술기운이 오른 이선은 사양하지 않았다.
“얀코프스카 선생이 매주 왕진을 와서 돌봐 주니까, 황자와 황녀도 참 좋아한답니다. 특히 황녀가 선생을 잘 따르더군요.”
“그래요? 그거 잘 됐군. 의사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앞으로 학문에 뜻이 있다는 것이니.”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선생이 아름답고 현명하고 친절하니까요. 선생도 마치 자기 딸처럼 예뻐해 준답니다.”
“흠, 황녀가 좀 더 자라면 교사를 부탁해도 좋겠군. 우리 공주님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줘야지.”
싱글벙글 웃는 이선을 보며, 아영도 따라 웃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그녀는, 생각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신첩의 생각으로는…….”
“음?”
“얀코프스카 선생도 자식을 원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서른이 넘었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조선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자가 서른 넘도록 결혼 안 하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보다 자유로운 서양에서는 종종 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본인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니까. 그 의견을 존중해야지요.”
“대한에 와서 재한 서양인들로부터 혼사가 꽤 많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선생의 조국 폴란드가 독립하기 전에는 결혼을 할 생각이 없다고 하더군요.”
“어리석은 신첩이 여인의 시각으로 생각해 보니, 어찌 그런 이유만 있겠습니까?”
“…….”
아영은 이선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폐하, 신첩이 감히 청원하건대, 제 청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황후가 짐에게 부탁을 하다니 흔치 않은 일이구려. 뭐든 말해 보시오.”
이선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영이 건네는 술을 받아 들이켰다.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를 황상의 후비(後妃)로 들이십시오.”
“푸훕!”
이선은 채신머리없게도, 마시고 있던 술을 내뱉고야 말았다.
“황후, 그 무슨 농담을…….”
“농담이라니요, 신첩이 어찌 감히 황상을 희롱하겠습니까?”
아영의 표정은 진지했고, 각오도 전에 없이 결연해 보였다.
“폐하께서 얀코프스카 선생을 만나는 날에는 얼마나 즐거워하시는지, 신첩이 폐하께 드리지 못하는 즐거움을 선생이 주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옵서 오래전부터, 그 여인을…….”
“아니, 잠깐, 잠깐만!”
이선은 황급히 아영의 말을 끊었다.
“황후,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해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선생도 폐하를 연모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조선에서는, 남녀칠세부동석이 오랫동안 내려왔으니, 젊은 남자와 여자가 벗이 되는 법이 없었지요. 하지만 서양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나와 선생은 그저 좋은 벗일 뿐이오. 어찌 남녀관계로 치환하려 합니까?”
이선은 아내가 오해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마르가리타 사이에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 상호 간에 호감이 있을지라도, 그걸 표현한 적도 없었다. 친구관계를 마치 불륜으로 오해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첩이 비록 견문이 좁다고는 하나, 서양을 공부하고 경험하였으니,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폐하와 선생, 그리고 이 나라 모두를 위해 후비로 간택함이 옳다고 생각하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신첩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 나라의 어버이시자 군왕이신 폐하께옵서, 황제의 격식에 맞게 후비를 들이시는 게 타당하옵니다. 그렇다면 황상의 심신을 평안히 할 수 있는 여인을 들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황후…….”
“주례(周禮)에 이르기를, 천자는 1명의 후(后) 외에 3부인(夫人), 9빈(嬪), 27세부(世婦), 81여어(女御) 등 모두 121명의 처첩을 둘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물론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폐하께서는 이 나라 대한을 세우신 황제로서…….”
“황후.”
이선은 더 듣지 않고 아영의 말을 끊었다.
“주례란, 3천 년이 지난 케케묵은 의례일 뿐이오. 조선에서는 주례를 의례로 삼았을지 몰라도, 대한에서는 헌법을 국체로 삼고 있소. 바야흐로 헌법에 이어 민법을 제정해 축첩(蓄妾)의 낡은 풍습을 없애려고 하는데, 국민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짐이 후궁을 들여서야 되겠소?”
조선은 첩을 두는 것이 허용됐고, 대한제국에서도 큰 흠이 아니었다. 축첩을 전근대의 인습으로 여기는 이선으로선, 민법을 제정해 축첩을 금지시킬 생각이었다.
오랜 관행이 당장 없어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축첩이 근대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법으로 규정할 계획이었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황제는 존귀하신 지체로, 어찌 한낱 법률에 연연하겠습니까?”
“황제라고 해도 법 위의 초월적인 존재로 군림할 생각은 없소! 대한은 법치국가가 될 것이오.”
법을 국가통치원리로 두려는 이선의 강력한 뜻에 아영은 더 말을 하지 못했다.
– 외전 4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