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18
319화 외전. 황제 폐하의 사생활 (5)
제중원 부인과에 있던 마르가리타는, 갑작스러운 황궁의 부름을 받고 장비를 챙겨 급히 입궐했다. 시종이 보안을 철저히 하는 바람에, 그녀는 황후나 황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닥터, 오셨군요.”
“황후 폐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내가 아니라 황상께서…….”
“아…….”
마르가리타는 가슴이 철렁했다. 순간 아득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의사답게 곧 냉철함을 되찾았다.
‘난 의사로서 할 일을 해야 해.’
마르가리타는 급히 강녕전으로 들어가 환후를 살폈다. 체온계로 열을 살피니, 열이 높았다. 그녀는 이어 청진기를 꺼냈다.
“폐하의 상의를 올려 주십시오.”
“그, 그 무슨 망측한……. 어찌 여인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런 말을!”
늙은 태의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마르가리타는 유창한 한국어로 쏘아붙였다.
“진찰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환자를 두고 쓸데없는 말은 삼가십시오.”
“뭐, 뭐요!”
“태의, 나 역시 이미 청진기 진찰을 수차례 받은 바 있습니다.”
황후의 개입에 태의는 입을 다물었지만,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이선의 제복 상의 단추가 풀어지고, 맨몸이 드러났다. 순간 황후는 민망함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마르가리타는 의사로서 냉철하게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이선은 한동안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격렬한 폭풍우 속에서 이선이 탄 작은 배는 휘청휘청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거친 풍랑을 헤치고 겨우 육지에 도달할 무렵, 이선의 눈이 번뜩 떠졌다.
“아, 여기가 어디…….”
“폐하, 폐하! 정신이 드셨사옵니까?”
아영이 반가운 표정으로 이선을 반겼다. 이선은 두통을 느끼다가, 문득 자신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황후, 내가 어찌 되었습니까?”
“과로로 쓰러지셨습니다. 아, 어서 선생을 안으로 뫼셔라! 폐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르가리타가 침전으로 들어왔다. 이선은 그녀의 나타난 게 뜻밖처럼 느껴졌다.
마르가리타는 흰 손을 뻗어 이선의 이마를 짚었다. 이선은 손의 감촉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열은 떨어졌군요.”
“닥터, 내 병명이 뭡니까? 설마…….”
순간 이선은 불안을 느꼈다.
‘만약 중병이면 앞으로 제국은 어찌한단 말인가?’
“제 소견으로는, 폐하께서는 수면 부족과 불규칙적인 식습관, 과로가 누적되어 쓰러지신 것입니다. 주사 한 대 놔드렸으니, 푹 쉬시면 건강은 되찾으실 겁니다.”
“어휴……. 그나마 다행이군요.”
이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금방 회복하겠지요? 해야 할 일이 태산이라.”
“젊으니까 괜찮으시겠지만, 계속 과로가 누적되면 안 됩니다. 앞으로 균형 잡힌 식단, 충분한 수면, 적절한 운동, 음주와 흡연은 줄이고, 무엇보다 쉬셔야 합니다. 일과 휴식의 균형을 맞추는 게 폐하께 가장 중요합니다.”
냉철하고 사무적인 어조였지만, 이선은 마르가리타의 눈빛에서 그녀의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꼭 그리하지요. 고마워요, 닥터.”
사흘 뒤. 이선은 내각의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단순한 과로였기에, 황제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내각을 제외하면 알려지지 않았고, 대외적으로도 공표되지 않았다.
“폐하, 옥체 강녕하신지요? 신등은 소식을 듣고 밤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경들이 걱정해 준 덕에 별 탈은 없소. 단순한 과로라고 합니다.”
“실로 열성조가 보우하셨습니다.”
“물론 그렇지만, 산 사람의 공도 컸지. 닥터 얀코프스카와 태의를 치하해 주고 싶소.”
“지당하십니다. 또한 감히 황상을 내버려 두고 왕진을 갔던 보조의들은 치죄하겠습니다.”
“대체 무슨 왕진을 갔다든가?”
“고양군에서 환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양의 중에는 뛰어나다고 알려진 그들을 초빙했다고 합니다. 일의 경중을 구분하지 못한 건 처벌 받아 마땅합니다.”
시종원경의 처벌 요청에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의사가 환자의 부름을 받아 떠난 게 처벌받을 일은 아닌 듯싶군. 애초에 황궁에만 있지 말고, 왕진이 필요하면 가라고 명한 건 짐이오. 유능한 양의가 부족한 판에, 처벌할 수야 있나. 견책 한 번만 하고 넘어갑시다.”
“하오나…….”
“보다 중요한 건, 의사를 보다 많이 배출하는 것이오. 궁중 시의가 됐건, 의학교 교수가 됐건, 병원 의사가 됐건, 앞으로 우리 한국인 의사로 배출해야 하지 않겠소?”
“실로 그러하옵니다.”
이윽고 이선은 대신들에게 당면한 업무에 대해 지시했다.
“외무대신.”
“예, 폐하.”
“10월 청국 황제와의 회담은 예정대로 추진하시오.”
“하오나 폐하, 옥체를 살피심이…….”
김옥균의 우려에 이선이 웃었다.
“단순한 과로에 지나지 않으니, 짐이 그때까지 건강을 회복할 터.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부처별로 간단히 큰 틀만 지시한 이선은, 대신들을 돌아보았다.
“이번 일을 통해, 짐이 느낀 바가 많소. 짐 또한 사람일진대, 만기친람은 한계가 있소. 짐이 어찌 나라의 모든 사안을 심의하고 결정할 수 있겠소?”
“옥체의 보중(保重)하심은 대한의 국운과 관련된 일입니다. 신등이 불민하여 성총의 보좌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큽니다.”
“그러하옵니다. 대죄(待罪)를 청하옵니다!”
대신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하자, 이선이 손을 내저었다.
“일어나시오. 경들을 탓하려는 게 아니오. 경들은 대한에서 가장 유능한 이들이오. 각자 맡은 바 업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는데, 짐이 욕심이 너무 많았던 것 같소.”
“황공하옵니다.”
“이래서야 내각의 의미가 없지. 앞으로 경들이 책임감을 갖고, 짐의 통치를 잘 보좌해 주길 바라오. 짐은 경들의 충정과 능력을 믿고 있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충심으로 성총을 보좌하겠나이다!”
이선의 요청에 총리대신 박정양 이하 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1901년 8월, 공교롭게도 의회 개원에 맞춰, 예기치 않게 내각의 책무가 막중해졌다.
황제가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던 국무의 일부를 내각에 이관함에 따라, 황권에 종속되어 있던 내각의 정치적 독립성이 강화되었다.
진정한 입헌군주제로의 길이 한 걸음 더 진행된 것이다.
이선은 한동안 업무를 최소화하고 휴식을 취하면서, 아영과 마르가리타의 간호를 받았다.
소식을 들은 분쉬가 급히 귀국하겠다고 했으나, 이선은 전보를 보내 괜찮음을 알리고 그가 휴가를 마치도록 했다.
이선의 곁을 늘 지키던 아영은, 마르가리타가 진찰을 위해 오면 자리를 비켜 주었다.
단둘이 만나지 않겠다고 내심 결정했던 이선이었지만, 이제 그런 결심은 내던진 뒤였다.
“많이 좋아지셨네요. 보세요, 의사 말만 잘 들어도 건강을 되찾잖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진작 닥터 말 좀 들을걸. 잘 먹고, 잘 자고, 담배만 줄여도 이렇게 몸이 가뿐해지는데. 기력을 되찾으면 운동도 열심히 해야지.”
“술도 줄이면 좋겠습니다.”
“아, 그건 안 돼요. 인생의 몇 안 되는 낙인데.”
아이처럼 구는 이선을 보며 마르가리타는 쿡 웃었다.
“새로운 즐거움을 좀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그러기엔 황제로서의 삶이 너무 팍팍해서. 흠, 10월에 천진과 북경에 가는 건 즐거울까.”
“여행으로 가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물론 일하러 가는 거죠. 외교는 중요한 일이니까.”
“그래도 폐하께선 해외에 나가셨을 때 행복해 보였어요.”
“아, 그런 시절도 있었지. 당신과 함께 바르샤바에서 페테르부르크에 가고, 시베리아 횡단했던 게 생각이 나네요.”
“제게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어요.”
“좋은 추억이죠. 하지만 앞으로 그러진 못할 것 같아 아쉽군요.”
“어째서요?”
“황제가 어떻게 장기간 국외여행을 갑니까? 왕관을 내려놓는다면 모를까. 옥좌에 앉아 있는 이상, 나는 옥좌를 벗어날 수 없어요.”
이선이 왕좌를 가리키며 쓴웃음을 짓자, 마르가리타는 서글픔을 느꼈다.
‘왕좌가 이 사람의 생명력을 갉아먹는구나. 차라리 황제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 순간, 이선은 마치 마르가리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너무 그렇게 슬프게 쳐다보지 마요. 나는 지금 충분히 즐겁고 행복하니까.”
“네?”
“나의 선택으로, 한 나라의 역사와 미래를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를, 한 민족의 삶을, 더 나아가 세계의 미래를 바꾸고 있지요. 정치가에게 이보다 더 짜릿하고 쾌감을 주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이를 위해서, 내 개인의 사소한 행복을 줄이면 좀 어떻습니까?”
이선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마르가리타는 정치가가 아니기에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망국의 백성으로 태어나 역사를 바꾸길 원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의식 과잉같이 들려도 할 수 없지만, 나는 역사를 바꾸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예정된 운명이었던 망국을 피하고, 내 민족이 가능성을 짓밟히지 않고 근대 세계에서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그게 내가 이 시대에 오게 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르가리타는 이제야 비로소 이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한국어가 완벽하지 못해, 그가 말한 ‘이 시대에 오게 된 이유’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는 일반인과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의 몸은 궁궐에 있을지라도, 훨씬 넓은 세상을 보고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비밀로 합시다.”
“네, 물론이죠. 우리만의 비밀이에요.”
“우리만의 비밀이라, 왠지 은밀한 느낌인데. 앗, 그러고 보니 당신이 감히 내 옷을 벗겼다고 태의가 노발대발하던데…….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이선의 표정이 엄격해졌다. 마르가리타는 순간 당황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건 의사로서 당연히 할 일을…….”
“이런, 황제의 옥체는 아무나 볼 수 없는 거란 말입니다. 사대부들이 알면 난리가 날 텐데,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지금까지 내 몸을 볼 수 있었던 여인은 어머니와 황후밖에 없어요. 어떻게 책임을 질 겁니까?”
마르가리타는 이선의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유교 예법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로선, 정말 자신이 큰 죄를 저지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전 의사로서 최선을 다한 거예요. 다시 그 순간이 와도, 똑같이 할 겁니다. 처벌받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푸하하핫!”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직업윤리를 강조하는 마르가리타를 보며 이선은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이에요, 장난.”
“뭐예요! 전 진짜 죄를 저지른 줄 알았다고요!”
“아니 뭐, 사대부들이 알면 난리가 나기야 하겠지만. 황제가 괜찮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마요.”
마르가리타는 눈을 흘기며 토라진 듯 입을 다물었다. 이선은 성숙해 보이던 그녀가 은근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의료행위에 의미를 두는 게 더 이상한 거지. 그래서 이 나라에 여성 의사가 더 많이 필요한 겁니다. 여성 환자들은 남성 의사 앞에서 몸을 드러내길 극도로 꺼려하니까. 아플지언정 병원은 안 가려고 하죠.”
“…… 맞아요. 그래서 시기를 놓치는 여인들이 많죠.”
“그래서 당신 같은 사람의 존재가 소중한 겁니다, 이 나라에선.”
이선은 순간 마르가리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크고 파란 눈이 더욱 커졌지만, 잡은 손을 빼진 않았다.
“당신은 내게 있어도 소중한 사람이지요. 이 나라에서 내가 동등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당신이 없었으면, 난 정말로 고독했을 겁니다.”
“폐하…….”
마르가리타는 생각했다. 왜 자신이 이 머나먼 나라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물론 사촌오빠, 미하우 얀코프스키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나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 나라에 오게 된 건, 조선에 오게 된 이후에야 처음 본 사촌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이 남자 때문이었다. 태어난 해는 같지만 태어난 곳은 지구 반대편이고, 신분은 자신과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고 친밀히 여겨 준 사람.
처음에는 그가 왜 자신을 그토록 잘해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되었다.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멸망한 나라에서 태어나 독립을 열망하는 사람과, 조국의 멸망을 막고 독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 사이의 특별한 정신적 유대로 시작하여, 그의 진면목을 알아 갈수록 더욱 깊은 감정을 느꼈다.
그가 그녀를 소중히 여기는 것만큼 그녀도 그를 소중히 여겼다. 단지 내색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군주였고, 유부남이었다.
가톨릭 신앙을 저버린 그녀였지만, 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랑할 순 없었다. 착한 그의 아내를 배신할 수 없었다. 만약 감정에 굴복한다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도,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제게도, 폐하는 소중한 분이십니다. 앞으로도 저는 영원히 폐하의 친구로 남겠습니다.”
“…… 고마워요, 마르가리타, 아니, Małgorzata.”
마르기라타는 여전히 자신의 폴란드식 이름을 어려워하면서도, 발음을 흉내 내는 이선을 보며 빙긋 웃었다.
두 사람은 맞잡은 손을 한동안 놓지 않았다. 손을 놓았다 싶더니, 곧 포옹을 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날 밤.
이선과 아영은 모두 깨어 있었지만,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이선이 먼저 침묵을 깼다.
“고맙소, 황후.”
“제가 감사합니다, 폐하.”
이선과 아영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황제의 건강은 곧 회복되었고, 이선은 예전과 달리 균형을 지키는 생활을 하며 건강관리를 했다. 이선의 기력은 과로로 쓰러지기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북경에서의 정상회담은 성공적이었다. 연말에는 계획한 대로 1차 토지개혁안도 반포되었다. 의회 정치도 정착하고 있었다. 국민은 환호하며 황제의 덕을 칭송했다.
20세기의 초엽, 대한제국의 미래는 더없이 창창하고 밝아보였다.
이듬해, 광무 6년(1902). 황실에 경사가 있었다.
황제의 셋째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