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19
– 외전 완결 –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태사령입니다.
1부 완결 후 두 달, 그동안 기다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초 제가 9월 25일에 2부 연재가 시작될 것이라 공지한 바 있었는데, 외전을 먼저 연재하고 9월 30일에 2부 연재 시작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공지한 사항을 변경하게 되어 죄송스러우나, 여러 사정이 있음을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부와 달리 2부는 11개의 플랫폼에 동시에 연재를 시작해야하니 일정 조율이 필요했습니다. 추석 연휴로 인한 일정 변화, 표지 최종 수정, 프롤로그 지도 제작, 프로모션 시작을 맞추다보니 9월 30일로 2부 연재가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늦어지는 대신 25일에 외전 5화를 연재하고, 30일 자정에 3연참을 시작으로 추석 연휴 기간 동안 연재를 이어나가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있어 2부까지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다려주신 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30일 자정에 2부 연재 시작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조선, 혁명의 시대 : 2부 대한, 제국의 시대≫ 도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 태사령 드림 –
2부 0화 프롤로그. 제국의 시대 : 1903년의 세계
제국의 시대 : 1903년의 세계
20세기 초.
세계는 압도적인 힘을 지닌 열강들에 의해 분할되어 있었다.
부의 증대, 산업 발전, 기술의 혁신, 문화예술이 꽃을 피는 ‘좋은 시절(Belle Époque)’과 절망과 고통이 넘치는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이 공존하던 모순의 시대.
인간의 노력은 육지와 바다를 넘어 하늘까지 정복하기에 이르렀지만, 동시에 인간의 마음은 탐욕과 증오로 병들어 가고 있었다.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약육강식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여겼던 적자생존의 시대, 제국주의 시대.
살아남아 패권을 쥘 것인가,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몰락할 것인가?
출처 : Hobsbawm, ≪The Age of Empire: 1875-1914≫, Herrmann, ≪Arming of Europe ≫, Halpern, ≪Mediterranean Naval Situation≫, 小野圭司, ≪明治末期の軍事支出と財政≫.
(단, 일본의 군사력은 소설 속 역사 변화로 인해 실제와 약간 차이가 있음.)
1903년(광무 7년, 메이지 36년, 광서 29년) 각국 정세
대영제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국가원수 : 에드워드 7세(Edward VII) 국왕
정부수반 :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 총리, 보수당-자유통일당 연립정부
정치체제 : 입헌군주정 (의회 다수당에 의한 정부)
인구 : 약 384,000,000명 (본토 39,875,900)
산업혁명의 선두주자, 대영제국은 영광의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세계의 패권자로 군림했다.
영국의 지배(Rule Britannia)는 5대양 6대주로 뻗어 나갔으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란 별칭을 얻었다. 19세기는 ‘영국의 세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02년, 빅토리아 여왕의 사후 즉위한 에드워드 7세의 시대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영국의 패권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남아프리카 보어 전쟁(1899-1902)은 영국의 위신을 떨어트렸으며, ‘영광스러운 고립’을 추구하던 영국이 실제로 열강 사이에 고립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였다.
19세기 초반 이래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놓고 대립 중인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 전통적 라이벌인 프랑스와의 식민지 경쟁,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독일의 건함 정책은 영국의 패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1903년 현재, 영국은 더 이상 고립이 영광스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압도적인 해군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프랑스 공화국(République française)
국가원수 : 에밀 루베 (Emile Loubet) 대통령
정부수반 : 에밀 콩브(Emile Combes) 총리, 급진당-사회당-민주공화연합 좌파 연립정부
정치체제 : 민주공화정 (의회내각제)
인구 : 약 78,790,700명 (본토 38,900,000)
프랑스는 중세 이래 유럽의 독보적인 강자였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단독으로 전 유럽에 맞설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실제 사례다.
하지만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결과, 프랑스는 치욕적인 참패를 겪었고, 독일이 유럽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1875년 성립한 프랑스 제3공화국의 국시는 독일에 대한 복수였다. 열광적인 애국주의 열풍 속에서, 프랑스는 식민지를 확대해 나갔다.
비스마르크 체제하에서 고립되었던 프랑스였지만,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즉위는 독일의 지배에 균열을 가했다. 프랑스 공화국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파리의 금융자본은 러시아를 위해 막대한 투자를 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프랑스 자금으로 추진되었고, 러시아의 우방들 역시 프랑스의 우방이었다.
1903년 현재, 프랑스는 독일 중심의 삼국동맹에 대적하고 있고, 동맹 러시아가 극동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원한다.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
국가원수 : 빌헬름 2세(Wilhelm II) 황제
정부수반 :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Bernhard von Bülow) 재상, 무소속
정치체제 : 외견적 입헌군주정 (군주에게 책임지는 정부)
인구 : 56,367,178명
1871년, 영광스러운 제국 선포 이후, 독일은 유럽 대륙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통일 독일 제국은 비약적인 산업 발전을 이룩했고, 비스마르크 체제하에서 유럽의 외교를 좌지우지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고립시켰다.
1888년, 야심만만한 젊은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즉위했고, 비스마르크는 은퇴하였다. 삼국동맹을 적으로 하는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체결되었지만, 카이저는 자신만만했다.
카이저는 독일 제국에 의한 패권을 원했고, ‘해가 비치는 자리’를 원했다.
독일은 1897년 본격적인 식민지 쟁탈과 건함경쟁에 나섰다. 독일은 더 이상 유럽 제국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카이저는 ‘세계 제국’을 원했다.
1903년 현재, 영국의 패권에 균열을 가하고, 프랑스의 복수전을 회피하기 위해, 카이저는 차르의 러시아가 극동으로 뻗어 나가길 원한다.
러시아 제국 (Россійская Имперія)
국가원수 : 니콜라이 2세(Nikolai II) 황제
정치체제 : 전제군주정
인구 : 약 136,305,900명
유럽의 변방이었던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격퇴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면서, 세계의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크림 전쟁(1853~1856)의 패배는 러시아를 허상에서 깨어나게 했다.
1861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일련의 ‘대개혁’을 통해 농노제를 폐지하고, 근대화를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기득권의 반발을 우려해 불완전한 것이었으나, 수차례 암살 위기를 넘기고 1887년까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887년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과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는 반동 정책으로의 회귀였다. 차르는 국내 정치는 반동으로 일관했지만, 대외 정치는 정세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독일의 삼국동맹에 대항했다.
1894년 즉위한 니콜라이 2세는, ‘극동으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동아시아 전쟁에 개입해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을 저지시키고, 조선과 연합하여 만주 진출을 노렸다. 1898년 청나라를 압박해 관동주를 확보한 이후, 1900년 의화단 전쟁의 발발은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정당화했다.
1903년 현재, 러시아는 만주를 넘어 몽골과 신강을 세력권으로 편입, 유라시아 제국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민족들의 감옥’인 러시아 제국의 낡은 전제정은 역사의 발전 속도를 못 따라가고 있었으며, 사회 기층에서는 혁명 운동이 싹 트고 있었다.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
국가원수/정부수반 :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
정치체제 : 민주공화정 (대통령 중심제)
인구: 75,994,575명
아메리카 대륙의 강자, 미국은 19세기에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외치며 서부로 진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의 확정 정책을 취해왔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산업력은 이미 영국을 앞지르기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의 원칙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고립주의를 채택해 왔던 미국의 대외정책에 변화가 왔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하와이, 괌을 편입하고 필리핀 공화국을 괴뢰국으로 삼아 태평양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했다. 이른바 ‘섬 제국주의(Island imperialism)’의 개막이었다.
1901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미국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루스벨트는 태평양의 독점적 지배를 원했고, 중국의 분할에 참여해 미국의 시장을 확대하길 원했다.
미국은 1900년 이후 본격화된 군비경쟁에서 유일하게 참여하지 않은 열강으로, 군대의 전력은 주요 열강에 비해 뒤떨어지지만, 세계 제1의 산업국가로 압도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1903년 현재, 이 젊은 제국은 아시아-태평양을 향해 눈을 돌리고 있었다.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국가원수 : 메이지(明治)천황 무쓰히토(睦仁)
정부수반 :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총리, 입헌정우회-조슈-사쓰마 번벌 정부
정치체제 : 외견적 입헌군주정 (군주에게 책임지는 정부)
인구 : 약 46,605,000명 (대만 포함, 하이난 제외)
1868년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은 신속한 서구화 정책으로 빠르게 성장해나갔다.
1873년 징병제 실시 후 일본군은 빠르게 팽창했고, 1874년의 대만 침입, 1876년 강화도 조약, 1885년 천진 조약으로 조선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청나라와의 패권 경쟁에 나섰다.
1880년대의 ‘내치우선’ 정책에 따라, 일본은 차분하게 국력을 신장해 나갔다. 하지만 조선의 빠른 근대화는 일본 지배층을 놀라게 했고, 일본의 대 조선 방침은 보호국화에서 중립으로 선회했다.
1894년, 동아시아 삼국전쟁에서 조일동맹은 청나라를 격파했고, 일본은 청나라를 대신해 동양의 새로운 강자로 등극했다. 비록 염원하던 대륙 진출은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실패로 끝났지만, 일본은 새로운 식민지 대만을 중심으로 ‘북수남진’ 정책에 나섰다.
1898년, 일본은 미국-스페인 전쟁에 합류하여 스페인에 선전포고하고, 최소한의 희생으로 남양군도(마리아나 제도, 팔라우)를 확보했다.
1900년, 의화단 전쟁을 틈타 일본은 복건 샤먼 출병을 단행하나 영국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대신 하이난섬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1903년 현재, 일본은 북으로는 지시마(쿠릴)에서 남으로는 남양군도까지, 서로는 하이난에서 동으로는 마리아나 제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해역을 소유하고 있다. 정부 주도층과 해군은 현재 상황에 만족하고 있으나, 정책 집행에서 소외된 육군은 불만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건함경쟁을 위한 막대한 세금 증액은 국민의 빈곤을 초래했고, 사회적 불안요소이기도 하다.
대청국(大淸國)
국가원수 : 광서제(光緖帝) 아이신기오로 자이티안(愛新覺羅 載湉)
정치체제 : 전제군주정
인구 : 약 400,000,000명 (정확한 통계 없음)
대청국은 중국 역사상 특별한 정복왕조였다. 대청 황제는 중화의 천자이자, 만주의 한이자, 몽골의 칸이자, 티베트의 전륜성왕이자, 무슬림 제후의 보호자로서 중화제국과 유목제국의 성격을 다층적으로 갖고 있는 제국이었다.
한때 동양에서 가장 강력했던 나라, 세계의 중심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청국은 19세기 들어 끊임없는 몰락을 겪고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은 중화의 자부심에 금을 그었고,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은 북경 함락이라는 치욕까지 겪게 하였다.
1860년대 이후 청나라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양무운동을 추진하여, 한때 동양에서 가장 강력한 함대를 구축했으나, 정치 체제의 후진성과 태평천국전쟁 이후 중앙집권의 붕괴는 새로운 시대에 발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게 했다.
1894년, 동양의 소국으로 얕잡아보았던 일본, 한때 제후국으로 종속시켰던 조선에게 패배를 당한 청나라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친정에 나선 광서제의 주도로 변법자강 정책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서태후와 지배 세력의 반동으로 변법은 실패로 끝났고, 이후 발발한 의화단 전쟁은 9개국 연합군에 의한 참혹한 패배로 끝나며 대청국이 더 이상 떨어질 위치조차 없다는 걸 재확인했다.
1903년 현재, 재집권한 광서제와 양무파는 청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과 청조의 몰락은 기정사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대한제국(大韓帝國)
국가원수 : 광무제(光武帝) 이선(李墡)
정부수반 : 박정양(朴定陽) 총리 (입헌개화당 내각)
정치체제 : 외견적 입헌군주정 (군주에게 책임지는 정부)
인구 : 약 18,000,000명 (본토와 신영토 포함, 자치령 제외)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마지막으로 문화를 개방한 국가였다.
오랫동안 작은 세계에 안주해오던 조선은, 1882년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 중심에는, 왕의 장자 완화군 이선과 개화당이 있었다.
1884년 갑신경장 이후, 조선은 빠르고 일관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서양 관찰자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선회였다.
1894년, 조선은 근대화 10년 만에 효율적인 행정과 작지만 발전된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고,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 위에서 종주국 청나라의 침입을 격퇴하고 자주독립을 달성한다.
1897년, 조선은 칭제건원을 실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당당한 자주국가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다.
1900년 의화단 전쟁은 대한제국이 9개국 연합국의 일원으로 열강과 동등한 대열에 서게 하였고, 승전은 민족주의적 열망과 외교적 수완을 힘입어 만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1899년의 헌법 반포와 1901년 의회 개원은 대한제국이 입헌군주국이 되었음을 대내외에 공포했다.
근대화 20년 만에 대한제국은 초기 산업화, 징병제, 국민교육, 헌정을 실시하여 근대국가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하지만 외형적 근대화를 빠르게 추진하는 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도 산적해 있었다.
1903년 현재, 황제 이선이 이끄는 대한제국호(號)의 항로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그 선택에,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