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2
– 32화에 계속 –
32화 로마노프 황가
황제와 그 직계 자손들은 겨울 궁전 외에도, 주로 차르스코예 셀로(Tsarskoye Selo)의 황궁과 가치나(Gatchina)에 있는 궁전에서 생활했다.
“가치나가 좋을까? 아니, 이왕이면 차르스코예 셀로가 낫겠군. 알렉산드르 궁전은 어떠냐? 그 궁에는 주로 네가 머무르니 결정하거라.”
“폐하의 명이라면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안 계신데 제가 결정할 수는…….”
황태자 알렉산드르는 현재 황제를 대신해 외유 중이었다. 최근 모종의 이유로 황제와 황태자의 관계가 껄끄러워지면서, 니콜라이는 난감해했다.
“황태자가 지금 부재하니, 결정은 황태손인 네 몫이다. 장차 너는 이 제국을 다스릴 사람인데, 그런 사소한 결정 하나 내리지 못하느냐?”
할아버지의 준엄한 말에 손자는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공작, 내 초대를 받아 주십시오. 차르스코예 셀로로 함께 가시지요.”
이선은 차르의 엄청난 호의에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 거절할 수도 없었다.
“폐하와 전하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를 러시아 황실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는 건가? 무슨 속셈이 있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지.’
이선이 경의를 표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자, 황제는 손자에게 속삭였다.
“저 조선 왕자 말이다. 조선 왕이 자식 교육을 정말 잘 시켰더군. 식견이나 배포가 보통이 아니다. 너랑 나이가 같다고 하니 잘 사귀어 두어라. 러시아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예, 폐하.”
미래의 황제가 될 황자에게는, 또래의 똑똑한 친구를 곁에 두어 도움을 주게 했다. 예컨대 표트르 대제에겐 멘시코프란 친구이자 심복이 있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심성은 착하지만 우유부단한 손자에게, 동갑내기 이선의 재능과 기질을 본받게 하려는 것처럼 곁에 붙여 놓았다.
차르스코예 셀로. 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20km 교외에 위치했다. 이름처럼 ‘차르의 마을’이란 뜻이다. 도시 전체에 황제의 별궁과 휴양지가 있었고, 특히 아름다운 호박 방으로 유명한 예카테리나 궁전으로 유명했다.
이선이 초대를 받은 알렉산드르 궁전은, 황태자 알렉산드르와 황태자비 마리야 표도로브나(Maria Feodorovna)가 자주 머무르는 궁전이기도 했다.
동시에 니콜라이가 태어난 궁전으로, 지금은 황태손에게 주어진 궁전이나 다름없었다.
“어서 오세요, 공작. 공작이 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알렉산드르 궁전에 온 걸 환영합니다.”
황태자비 마리야 표도로브나가 이선을 맞이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황태자비 전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선은 동양 예법으로 정중히 머리를 조아린 뒤, 서양 예법으로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선의 유창한 영어와 깍듯한 예의에 황태자비는 만족했다.
“조선에서 왔다고 하지요? 먼 나라까지 와서 고생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께서 호의를 베풀어 주신 덕에, 감히 황궁에 머무르는 결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 무슨 말씀을. 니키(니콜라이의 애칭)가 초대했다면 곧 내 손님이기도 하지요. 편히 쉬도록 하세요.”
이선에게는 동쪽 회랑의 넓은 방이 주어졌다. 이선은 자신의 비서와 근위병이라고 소개한 안영흠과 장무영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비유하자면 지금 우리는 창덕궁 연경당(演慶堂)에 특별히 거주를 허락받은 외국인 사절이나 다름없소. 그럼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고 있겠지?”
별궁의 화려한 내부에 거듭 감탄하던 안영흠과 장무영은 정신을 퍼뜩 차렸다.
“예, 극히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언어도 안 되니까 더 걱정이오. 내가 공부하는 책을 줄 터이니, 간단한 회화 정도는 익혀 두도록 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이선의 명령에, 안영흠과 장무영은 팔자에도 없는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이선의 황궁 생활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추운 겨울은 유명했지만, 다행히도 황궁은 따뜻했다. 온도뿐만 아니라 분위기 자체가 따뜻한 편이었다.
궁전의 안주인 역할을 하는 마리야 황태자비는 예의범절에 엄격한 사람이었지만, 본질적으로 선량한 사람이었다.
외국의 어린 왕자, 그것도 니콜라이와 동갑인 아이가 특사로 파견되어 국익을 위해 노력한다는 말을 듣고 놀랍고 안쓰럽게 여겼다.
“덴마크는 작은 나라라 외교가 중요하지. 더욱이 독일이라는 강대국과 붙어 있기에 더욱 그렇지. 그래서 아버님과 오라버니도 외교를 위해 절치부심하셨다. 그렇기에 여러 황실과 관계를 맺어 둔 것이고.”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자비는 본래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Christian IX)의 딸인 다그마르(Dagmar) 공주였다. 1860년대, 덴마크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영토의 상당수를 빼앗기고, 통일된 강력한 독일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공포에 떨었다. 크리스티안 9세는 여러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관계를 튼튼히 맺었다.
다그마르의 오빠는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Frederik VIII)와 신생 그리스 왕국의 국왕으로 추대된 요르요스 1세(Geórgios I), 언니는 영국 태자비 알렉산드라였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열강, 영국과 러시아를 사돈으로 두게 된 덴마크는 안심했다.
“조선 또한 중국과 일본, 영국과 러시아라는 강대국 사이에 둘러싸인 게 꼭 덴마크를 보는 것 같구나. 이를 타개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직접 외교를 하기 위해 먼 나라까지 오다니, 얼마나 갸륵한 일이냐!”
이선과 조선에게서 덴마크의 어려웠던 상황을 떠올린 황태자비는 아들에게 당부했다.
“니키, 너는 장차 대제국의 황제가 될 몸이다. 그러니 작은 나라의 고민은 잘 모르겠지. 이번 기회에 어린 나이에도 나라를 위해 노력하는 저 왕자를 통해 배워 보도록 하거라.”
“예, 어머니.”
아직 어린 소년인 니콜라이는 어머니의 말이라면 곧잘 따르는 편이었다.
황궁의 안주인에게서 호감을 얻어낸 건 이선의 생활을 편하게 만들었다.
30대 초반, 여전히 뛰어난 미모를 간직한 아담한 체구의 마리야 황태자비는 이선으로 하여금 잊었던 모성애를 떠올리게 했다.
황태자비는 아들 니콜라이, 유리(9세), 딸 크세니야(5세)와 함께 하는 가족 식사에 이선을 자주 초대했다.
“공작, 음식은 입맛에 맞나요?”
“예, 정말 맛있습니다. 태자비 전하 덕분입니다.”
이선은 나이에 맞지 않은 정중하고 겸손한 처신으로 황태자비를 만족시켰다.
“호호, 요리야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조리장이 하는걸요.”
“전하의 배려 덕에 맛있게 먹고 편히 지낼 수 있으니 전하 덕분입니다.”
“어쩜, 말도 참 잘하지.”
응석받이로 자라 제멋대로인 황족 아이들을 보다가 어른스러운 동양 왕자를 보니 신선했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주로 어떤 음식을 먹나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조선 왕실과 조선에 대해 넘어갔다. 이선은 자기가 아는 지식을, 훌륭한 화술로 설명했다. 어린 황자와 공주들은 생전 처음 듣는 동양의 이야기에 신기해했다.
“공작의 어머니, 조선의 왕비님은 어떤 분인가요?”
장차 황후가 될 마리야에게는 자연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이선으로선 답하기가 참 난감한 문제였다.
“왕비 마마께서는 왕실에서 보기 드문, 현명하신 분입니다.”
‘쓸데없는 쪽으로 똑똑해서 문제지.’
이선의 칭찬에 애정이 없는, 어딘가 냉소적인 태도라는 걸 황태자비는 여자의 직감으로 눈치챘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공작은 왕비님과 무슨 문제라도?”
“저는 서자입니다. 제 법적인 어머니는 왕비 마마가 맞습니다만, 친어머니는 따로 계십니다.”
“으음, 그런…….”
이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황태자비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동양에서는 첩이 존재했으므로 서자의 존재는 인정을 받았으나, 서양에서는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했으므로 서자는 존재 자체가 ‘사생아(私生兒)’로 부정 받았다. 사생아의 속어인 ‘bastard’가 욕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태어날 때부터 불명예스러운 존재였다.
최근 황제와 황태자 부자의 사이가 껄끄러워진 것도 정부(情婦)와 서자 문제였다.
알렉산드르 2세에게는 황후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Maria Alexandrovna)와 6남 2녀 외에도 정부와 서자가 있었다.
황제에게는 무려 29살 연하, 황태자비와 동갑인 정부 예카테리나는 2남 2녀를 두었다.
결정적으로 황태자가 분노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1880년 황후가 오랜 투병 끝에 서거하자마자 황제가 정부를 황후로 끌어올리고, 서자들을 적자로 만들려고 시도를 한 것이었다.
황태자는 격분해서 정부를 황후로 만들면 전 세계가 비웃을 것이라고 아버지를 면전에서 비판했고, 부자(父子)는 크게 다투었다. 황태자는 이후로 황제를 알현하기도 꺼렸다.
황제는 이선이 왕의 서자라는 걸 알고, 더욱 흥미를 느꼈다. 그 자신도 서자들에게 적당한 지위를 주고 싶었던 차에, 때마침 먼 동방이라고는 하지만 왕의 서자가 와서 외교관으로 활약하는 걸 보고 만족스러워했던 것이다.
나중에야 그런 사정이 있었다는 걸 조미니가 은근슬쩍 흘렸고, 이선은 굉장히 역설적인 느낌을 받았다.
‘내가 서자라는 게 오히려 차르의 호감을 사게 될 줄이야. 처음엔 왜 그렇게 차르가 나를 환대하고, 황궁에까지 머무르게 했는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지.’
이선이 아무리 말을 잘했다지만, 러시아에 있어 조선이 그렇게 중요한 나라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이해가 됐다.
‘서자라 할지라도 나라와 왕실에 도움이 된다, 이런 걸 황태자에게 시위하고 싶었던 건가?’
이선의 예상대로, 황태자비는 황제의 의도를 읽고 난감해했다. 니콜라이도 비로소 이해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만약 황태자가 이 자리에서 있었다면 더욱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을지도 몰랐다.
‘여기서 호감을 얻으려면 황제가 원하는 것과 정반대의 처신을 해야겠지.’
“조선 왕실에는 제게 아우가 되는, 왕세자가 계십니다. 왕비 마마의 친자로 적자지요. 제가 비록 서자라고는 하나, 장자라는 이유로 왕비와 왕세자께 부담이 될까 봐 걱정이었습니다.”
이선은 복잡한 조선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빼고, 왕실 간의 문제로 치환했다.
“그렇기에, 제 스스로 외교 특사를 자처하고 조선을 떠난 것입니다. 가급적 조선에서 먼 나라로 오길 희망했고, 그래서 러시아에 오길 자처했습니다.”
절반의 사실과 절반의 거짓이었다. 하지만 황태자비는 감명을 받은 듯했다.
“어쩜! 어린 나이에 그토록 생각이 깊을 수가 있다니.”
“저로 인해서 왕실에 갈등이 생길까 봐 우려가 됐지요. 저 역시 어린 나이에 정든 고국을 떠나 만리타향에 가는 게 어찌 기뻤겠습니까마는, 저는 영영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도 있습니다. 이 또한 왕족으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선은 일부러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럴 수가! 왕실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고국을 떠나다니, 아무나 할 수 없는 희생이로군요. 조선 국왕 폐하께서는 공작의 충정을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왕비와 왕세자께서도 이해해 줄 날이 올 겁니다.”
마리야는 이선이 진심으로 안쓰러웠다.
“니키, 유라. 공작의 말씀을 들었지? 공작께서 사적인 감정을 접고 자신의 부친과 형제를 위해 충성을 다하듯, 우리 러시아 황실의 사람들도 본받아야 한다.”
아직 어린 유리는 그렇다 쳐도, 니콜라이도 이선에게 감탄한 표정이었다. 전 생애에 걸쳐 유독 ‘충성’의 문제에 집착했던 니콜라이에게, 이선은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왕족의 표본처럼 보였던 것이다.
“로마노프 황가에도 공작과 같이, 국가와 황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나라와 왕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어찌 헌신이나 희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선은 더욱 겸손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마리야는 더욱 감탄했다.
“공작! 어린 나이에 그런 결의를 하다니, 참으로 대단합니다. 러시아에 있는 동안이라도, 부디 마음 편히 갖고 지내길 바랍니다. 어떤 고민이 있더라도, 나와 니키에게 털어놓으세요.”
“제가 어떻게 감히…….”
이선이 일부러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자, 황태자비는 더 강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해요. 나와 니키가 비록 공작의 어머니와 형제는 아니지만, 친구로서 함께 고민을 나눌 순 있을 겁니다. 그렇지, 니키?”
“예, 어머니. 나를 친구처럼 여겨 줘요, 공작.”
‘됐다!’
이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무리 황제의 호감과 황실과의 친분을 얻었다고 해도, ‘황제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다!’라고 경고하고 그 자신이 막을 준비를 한다는 건 참으로 난감한 문제였다.
‘그런 미래를 예견하고 경고했다고 하면 미친놈이나 불순분자 취급받기 딱 좋지.’
하지만 황태손이나 황태자비를 통해 경고한다면, 훨씬 수월한 형태로 암살 현장에 접근할 수 있을 터였다.
‘진정하자, 진정해.’
이선은 번져가는 미소를 억누르고, 차분함을 유지하고자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