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21
– 2화에 계속 –
2부 2화 제국의 수도
광무 7년(1903) 5월 31일은 이선의 탄일, 건원절(乾元節)이었다.
건원절에 맞춰 새로운 어진이 대내외에 공표되었다.
“이야,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인물도 참 훤칠하시지! 완화군 대감이셨던 시절부터 알아봤지.”
“어진만 봐도 황제란 이런 분이시다, 라는 걸 보여 주지 않나!”
“암, 새삼 충성심이 북돋는군.”
“근데 태극기는 알겠는데, 저 뒤의 새는 뭔가?”
“매 같은데? 팔괘기가 그려져 있군.”
“독수리 아닌가. 서양의 제국들은 독수리를 상징으로 삼고 있다네. 아라사, 덕국, 오지리, 미국…….”
“아, 그런가? 하긴, 우리 대한도 이제 당당한 제국의 반열에 올라섰으니!”
“헌법도 있군! 그렇지, 대한은 입헌국가지!”
어진에 대해서는 호평 일색이었다.
이선 이전까지 어진을 일반에 공개하는 일은 없었고, 군주의 모습을 일반 국민이 알기는 어려웠다.
제국 선포와 더불어 황제는 일상의 영역에서 국민의 곁으로 다가왔다. 국민은 황제의 어진을 보며 만족감을 느꼈다.
“올해 건원절 행사는 간소하게 하라. 근위사단의 관병식은 예년에 준해서 한다.”
성대하게 이뤄졌던 광무 6년 건원절과 달리, 올해는 행사를 간소화했다.
경희궁에서 근위사단 관병식이 거행되었다.
보병·포병·기병·공병·치중병의 완벽한 편제를 마친 근위사단은, 자타공인 대한제국 최고의 정예였다.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재한 외교관들도, ‘대한제국군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근위사단만은 열강의 정규군에 필적할 만하다’라고 평가했다.
각지의 진위대가 사단 체제로 개편되면서, 근위사단을 모범으로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
10만의 상비군, 20만의 예비군 확보를 목표로 한 2차 군제개혁은 1904년에 완료될 예정이었고, 대한제국군은 착착 변모하고 있었다.
6월초, 이선은 평양행 경의선 기차에 올랐다. 황제 즉위 후에도 매년 평양을 방문하는 이선이었지만, 올해는 목적이 특별했다.
꼭 1년 전인 광무 6년 건원절, 궁내부대신 김규홍은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
「옛날에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은 모두 두 개의 수도를 세웠습니다. …… 평양은 우리나라에서 맨 먼저 인문이 열린 고장으로서 세 성인이 연이어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린 지가 모두 천여 년이며 지금도 인물이 번성하고 고을이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 멀리 주(周), 한(漢), 당(唐), 명(明)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이런 것이 있었으며, 가까이로 고려와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을 상고해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당한 황제의 나라로서 어찌 두 개의 수도를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제국의 격에 맞게 양경(兩京) 체제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전례를 살피면 한·당의 장안과 낙양, 명의 북경과 남경, 고려의 개경과 서경, 근래에는 일본의 교토와 도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가 잇달아 언급되었다.
“전례를 살피니, 경들의 의견은 일리가 있다. 내각에서 논의하여 결정을 내리겠다.”
서경 구축은 이선이 진작 마음에 둔 바였지만, 양경을 선포하여 도시계획을 새로 하려면 비용이 많이 발생하니, 석조전 공사가 끝날 때까지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다.
석조전이 준공되고, 의화단 전쟁으로 받게 될 배상금의 일부를 양경 구축에 활용하여 비용을 마련하게 되자 내각은 동의를 표했다.
「평양은 단군이 정한 천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로서, 아국의 역사와 문명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웅혼한 기상을 떨친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였으며, 고구려를 계승하고자 했던 고려가 특별히 평양에 서경을 두고 개경과 함께 양경으로 삼았다.
대한은 옛 조선과, 고구려와 고려를 계승한 국가로, 바야흐로 그 국세가 북방으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도다.
이제 평양에다 행궁(行宮)을 두고 서경이라고 부름으로써 나라의 천만년 공고한 울타리로 삼겠다.
더구나 이는 그 곳 백성들이 모두 바라고 기꺼이 호응하는 데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에 짐은 조령을 내려 평양을 서경으로 선포하노라!
광무 6년 6월 6일」
한양의 정식 명칭이 제국 선포와 함께 황성(皇城)이 된 것처럼, 평양은 고려의 전례를 따라 서경(西京) 평양부가 되었다.
922년 개국 직후의 고려가 서경을 두어 양경으로 삼은 지 약 천 년, 몽골과의 전쟁 이후 평양부로 격하된 지 약 600년 만의 일이었다.
“평양이 서경으로 격상되었소!”
“서경이라 불리게 되다니, 대체 이 얼마만의 일인가?”
“옛 조선, 고구려, 고려의 적통으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은 일이나 다름없소!”
“실로 황제 폐하의 지극한 황은이오!”
“황제 폐하 만세!”
당연한 일이지만, 평양 주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조선왕조에서 오랫동안 차별을 받은 평안도 사람들에게, 이선의 개화당 집권 이후 인사의 차별이 사라진 것만으로 크게 기쁜 일이었다.
청나라와의 독립전쟁에서 전장이 되어 적잖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입은 평안도지만, 이선이 몸소 군대와 함께 평양을 방위하고, 마침내 승전까지 이끌게 되니 평안도 사람들은 그를 열렬히 지지했다.
변화에 진취적인 평양은 개화의 수혜를 입어 상공업이 크게 발전하니, 개화당 정권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다.
도시로서의 위상이 올라가던 차에 서경이 선포되니 겹경사가 아닐 수가 없었다.
“성상께서 설마 평양으로 천도를 하시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황성은 왕조의 오백년 도읍일세. 이 도시를 가리키는 ‘서울’이란 말부터가 수도란 뜻이 아닌가. 우리 백성들은 물론이요, 외국인들도 다 서울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흠, 대한국의 미래가 북방, 만주에 있다는 걸 감안하면 평양이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더 어울리긴 하지. 바야흐로 대한의 모범은 고구려가 아니겠소?”
“맞소. 그리고 평야가 넓은 평양은 새로운 근대적 도시 육성에 유리한 점이 많지.”
“어허! 천도는 쉬운 일이 아니오. 지난 500년 간 축적된 건 차치하더라도, 개화 이후 20년 간 서울의 발전에 투자한 돈이 얼만데. 성상께서도 황성을 아끼시는 건 다 알지 않소.”
내각과 정부는 서경 선포와 행궁 건설에는 동의했지만, 천도(遷都)는 반대했다. 개화당이라 할지라도 그 근본은 경화사족이니만큼, 이들의 머리에서 서울이란 오직 황성뿐이었다.
이는 국민들의 인식에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조정이나 양반들은 서울을 한성이나 한양으로 불렀지만,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서울이라고 호칭했다. 무지한 사람들도 ‘한성’이란 명칭은 몰라도, ‘서울’이란 표현은 알아들을 정도였다.
“짐이 서경을 선포한 건 천도에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대한의 미래인 북방 진출을 위해 평양을 육성하고 발전시키려는 것이지, 다른 뜻이 있겠는가? 열성조의 오백 년 도읍이자 짐의 뿌리이기도 한 황성을 떠날 생각이 없다.”
이선은 천도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그 자신도 고향인 서울에 대해 애착이 깊었고, 서울의 정치·경제·문화·역사적 중요성을 무시할 순 없었다.
다만 조선을 건국할 당시의 국토 정중앙이 한양이었다면, 북방의 넓은 영토를 확장한 대한제국의 정중앙은 평양에 더 가까웠다.
‘제국의 양경, 고조선·고구려·고려를 계승했다는 명분은 아주 좋지.’
이선에게 전례나 형식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평양을 북방으로 나가는 전초기지, 새로운 제국의 근대적 도시로 육성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그에게, 양경은 좋은 명분이었다.
‘평평하고 비옥한 땅(平壤)’이란 이름처럼, 평양은 대동강 주변에 너른 평야를 갖고 있었다. 강을 끼고 있는 너른 평야, 바다와 외항도 가까우며, 산업화에 필요한 북방의 광산에서도 멀지 않으며, 육로교통과 수운의 편리함은 도시개발에 좋은 조건이었다.
개화 이래 서울은 20년간 일신(一新)했다고 할 만큼 변화했다.
사대문 안에 해당하는 황성 중심부는 개화당 정부가 주도한 도시계획을 실행, 서양식의 장엄한 건물이 들어서고 철도, 도로, 상수도 등 각종 사회간접자본이 집중된 근대적 도시로 탈바꿈했다.
황성부의 경계는 성저십리를 넘어 확장되었고, 도시 규모가 확대되었다.
서울에 초기 산업화가 이뤄지며 교외에는 공장이 계속 들어서고, 발전에 맞춰 인구가 계속 몰려드는 바람에 도시계획에 한계가 있었다.
‘서울을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도시로 만든다면, 평양은 근대제국의 계획도시가 될 것이다.’
서울의 모델이 파리와 빈이었다면, 평양의 모델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베를린이었다.
표트르 대제의 페테르부르크가 ‘유럽으로 열린 창(窓)’이었다면, 이선의 서경은 ‘대륙으로 열린 창’이었다.
“시종원경 이채연을 평안남도 관찰사 겸 서경 유수로 임명하니, 서경 건립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미국 공사를 재임하여 근대적 도시계획의 필요성을 깨닫고, 한성 판윤으로 서울의 근대화에 역할을 맡았던 이채연이 서경 유수로 임명되어 새로운 도시계획에 나섰다.
1902년 7월부터, 서경 공사가 시작되었다.
평양 외성에 확보된 너른 부지에는, 흥경궁(興慶宮)이라 명명된 행궁이 건설되었다.
정전(正殿)의 이름은 태극(太極), 편전의 이름은 지덕(至德), 침전의 이름은 중화(重華), 정문의 이름은 황건(皇建), 동문의 이름은 건원(建元), 서문의 이름은 경성(景成)으로 정해졌다.
이것만 보면 실제 고종이 건립하고자 했던 평양 풍경궁(豐慶宮)과 유사했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했다.
“전통 전각은 태극전, 지덕전, 중화전이면 충분하다. 석조전과 유사한 전각을 짓되, 규모와 비용은 실용의 범위는 넘지 말라. 황실 내탕금과 궁내부 예산을 활용하되, 주민들의 자발적인 기부 외에 특별세는 함부로 걷지 말도록 하라.”
고종이 평안도에 막대한 결세를 부과해 민심 이반을 초래한 것과 달리, 이선은 황실 내탕금과 궁내부 예산을 건축비로 보내고, 부족한 부분은 의화단 배상금의 일부를 활용하게 했다.
경복궁 재건 당시의 원납전(願納錢)처럼 평양 상공인들의 희사(喜捨)가 이어졌지만, 이는 말이 원해서 내는 돈이지 강제 징수였던 원납전과 달리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장차 서경을 일본의 동경,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처럼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만들어야 하네. 그러면 돈을 희사하는 게 뭐가 아깝겠나?”
“암, 대한제국의 수도로 평양만큼 좋은 곳이 없다는 걸 전국에 알려야지.”
“천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경제적 중심지는 되어야지. 북방의 부가 전부 서울로 쏠리지 말고 평양에서 쓰이도록 말이야.”
개화의 수혜를 입어 발언권이 성장했지만, 여전히 서울에 대한 열등감과 경쟁의식이 상당한 평양의 상공인들에게, 서경 건립만큼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일은 없었다.
“흥경궁은 단순한 궁궐이 아니라, 신도시계획의 중심지요. 건물 배치는 이렇게 할 예정이오.”
전통적인 궁궐 건축과 달리, 흥경궁의 너른 부지는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태극전, 지덕전, 중화전 영역은 전통 방식을 따랐지만, 계명(繼明)으로 정해진 서양식 전각 앞에 광장을 조성하고, 광장 주변에 건물들을 세우기로 했다.
서경유수관(평양부청), 평안남도 향회, 평양법원, 평양 주둔 4사단 사령부, 평양우체국, 국립 평양대학교, 관립 자혜병원, 의학전문학교, 평양박물관 등이 건립될 예정이었다.
“폐하, 황궁 지척에 민간 건물을 지어 잡인의 출입이 자유롭다면, 황실의 권위가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되옵니다.”
“짐은 흥경궁을 황실의 권위를 뽐낼 용도가 아니라, 북방의 행정 중심지로 삼고자 하오. 서양의 궁전들이 도시와 공존하고 있다고 해서 그 권위가 떨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평양 외성의 흥경궁 부지는 일종의 계획신도시였다. 행정, 입법, 사법, 군사, 교통, 교육, 의료, 문화 등을 한자리에 모았다. 잘 조성된 대로와 각종 사회간접자본이 신도시를 상징할 터였다.
광무 7년 6월 6일.
서경 선포 1주년이 되는 날에, 이선은 평양 흥경궁에 있었다.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어 목조 건물인 태극전, 지덕전, 중화전, 황건문은 이미 완성되었다.
정전인 태극전은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경복궁 근정전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정면의 월대(月臺)와 답도(踏道)로 인해 웅장함이 느껴졌다.
“실로 제국의 격에 맞는 전각이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음, 짐이 한 일이 무엇이 있겠소? 실무를 맡은 경들과 건축을 맡은 이들의 노고가 많았소.”
이선은 태극전에 황제와 태상황의 어진을 봉안하는 봉안식을 가진 후, 황건문 앞에서 선언했다.
“짐은 서경을 제국의 양경, 부(副)수도로 삼아 나라를 공고히 만들고 반석같이 크게 다지리라!”
“와아아아아!”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황제를 환영하기 위해 나온 평양 주민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석조로 된 전각과 신도시는 완성까지 5년의 기한을 가져, 광무 11년(1907)에 완공될 예정이었다.
‘…… 계획대로 평화가 유지된다면 말이지. 당분간, 적어도 10년 정도는 평화와 번영이 필요해.’
이선이 평양을 북방의 창으로 육성하는 건, 예상되는 1910년대의 일대격변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때에 대비하여 최대한 국력을 신장하기 위해, 이선은 진심으로 10년간의 평화를 희구(喜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