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22
– 3화에 계속 –
2부 3화 열도의 야망
1903년 현재, 동양 정세는 평화롭게 보였다.
문제는 이선의 계획대로 되리란 법이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바로 내년, 1904년에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바뀐 역사에서는 그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졌지만, 앞으로의 정세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바로 역사가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세계사는 큰 변화가 없지만, 동아시아 역사는 바뀌어 버렸으니…….’
20세기 이전까지 한국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했기에, 세계사는 크게 바뀐 바가 없었다. 하지만 주변국들, 최소한 중국, 일본, 러시아의 역사에는 영향력을 미쳤다.
청나라는 역사보다 훨씬 큰 규모의 의화단 전쟁을 겪었고, 중국의 분할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서태후가 실각하고 광서제가 재집권하여 청조를 되살리기 위한 광서신정을 재개했지만, 중국의 분할과 청조의 몰락은 기정사실이었다.
일본은 1895년 이후 북수남진(北守南進) 정책을 이어 나갔다.
한반도와 북방에 대한 침략을 포기한 대신, 대만을 기점으로 하여 남중국, 남양군도, 태평양 진출을 노렸다. 미국-스페인 전쟁에 끼어들어 남양군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의화단 전쟁으로 목표했던 복건 진출은 실패했지만 해남도(하이난)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는 1900년 의화단 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극동 진출 정책을 추진했다. 만주의 독점적 지배를 원했고, 몽골과 신강도 세력권으로 넣고자 했다. 틀림없이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가장 가까운 우방이었지만, 러시아의 공격적인 극동 정책은 이선에게도 부담을 주었다.
‘그래도 러시아는 차르가 있으니까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어. 문제는 일본이다. 지금은 잠잠해도 어디로 튈지 모르니…….’
결국 이선이 가장 경계하는 건, 일본이었다. 일본의 주류가 북수남진 정책을 쓴다지만, 조슈 번벌과 육군의 강경파는 여전히 대륙을 향해 칼을 갈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역사라는 해도를 갖고 있어 배를 순항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미지의 항로로 접어들고 있다. 언제 암초와 유빙이 튀어나올지 몰라. 정신 차리지 않으면 한순간에 침몰이다.’
대한제국호의 선장, 이선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 * *
메이지 36년(1903), 일본 제국, 도쿄.
“동지 여러분, 신임 입헌정우회 총재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후작께서 선출되었습니다.”
“만세! 만세! 만세!”
“불초 긴모치, 존경하는 이토 공의 뒤를 이어 정우회의 총재를 겸임하게 되어 책임이 무겁습니다. 우리는 집권여당으로서, 위로는 천황 폐하와 아래로는 국민에 책임지는 정당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1900년,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입헌정우회가 창설되었다. 정당정치에 부정적이던 실력자 이토는, ‘자유민권세력’인 헌정당의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이 2년이나 유지되자 정당 창당의 필요성을 느꼈다.
하문(샤먼) 파병 실패의 여파로 오쿠마 내각이 퇴진하고, 이토의 정치공작으로 헌정당이 분열하여 이타카키 다이스케(板垣退助)의 구 자유당 계열이 대거 입헌정우회에 합쳐졌다.
1, 5, 7, 9대 네 번째 총리직을 수행한 이토는 1901년 여름에 친우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퇴임했다. 하지만 이노우에는 이토의 영향권에 있었으니, 사실상 5차 이토 내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7회 중의원 선거 결과, 전체 376석 중 입헌정우회 191석, 헌정본당 91석…….”
1902년 8월, 선거권 개정으로 선거인이 확대된 중의원 선거에서 입헌정우회가 단독 과반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은 내각이 정당이 아닌 천황에게 책임을 지는 구조였으니, 이전에는 의석수와 상관없이 내각이 구성되었다.
신임 총리는 54세의 추밀원 의장 사이온지 긴모치였다. 이토는 사이온지를 후계자로 낙점했고, 정우회에 영입했다. 이노우에 거쳐 가는 단계였다.
11대 총리로 사이온지가 취임하니, 일본 최초로 원내 다수정당에 의한 조각(組閣)이 이뤄진 의회정치의 일대 발전이었다.
“사이온지 군, 총재 취임을 축하하네. 앞으로 황국의 미래는 자네에게 달렸네.”
“황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열성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허허, 자네가 어련히 잘하겠냐만, 힘껏 돕지.”
“감사합니다, 각하.”
1903년에는 이토가 유지하고 있던 정우회 총재직도 사이온지에게 넘어감에 따라, 사이온지 내각 – 입헌정우회 여당이라는 체계가 완성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본은 흠잡을 데 없는 입헌군주제 의회정치 국가로 보였다.
“하지만 원로가 내각과 정부 위에서 군림하며 지배하는 건 달라지지 않지.”
총리와 여당 총재라는 권력을 한 손에 쥔 사이온지 긴모치지만, 내심 불만은 남아 있었다.
메이지 유신의 원훈들, 즉 원로(元老)에 의한 막후 통치는 여전했던 것이다.
이토가 총리와 총재에서 물러나 명예직인 추밀원 의장으로 갔다지만, 원로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이온지는 사실상 이토가 지명한 후계자이니만큼, 그에게 거역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또 다른 원로, 4대, 6대 총리 마쓰가타 마사요시(松方正義)는 사쓰마 번벌을 대표하는 위치였다. 재정 전문가 출신인 마쓰가타는 온건한 입장이었지만, 문제는 제3의 원로였다.
“일본 육군의 원훈이신 야마가타 공께서 그동안 부당하게 은퇴와 침묵을 강요받아 오셨습니다. 마침내 복귀하시게 됨을 축하드립니다.”
“육군은 야마가타 공의 지휘를 원합니다.”
“허허, 이 사람들이. 군부는 오직 대원수이신 천황 폐하께 충성해야 하는 법이네. 사사로이 이렇게 파벌을 형성하면 안 되지.”
말은 그렇게 해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분명히 정부 내에 러시아 스파이가 있습니다. 야마가타 공의 실각으로 이득을 본 자가 범인이겠지요.”
1891년, 니콜라이 황태자가 피습당한 오쓰 사건의 여파로 야마가타는 정계 은퇴를 강요받았다.
야마가타가 주장했던 ‘주권선과 이익선’,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青木周蔵)의 ‘청일동맹에 의한 시베리아 분할론’이 러시아의 강한 의혹과 비난을 사면서였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야마가타 총리, 아오키 외무대신, 오야마 이와오(大山巌) 육군대신이 책임을 지고 정계에서 물러났다.
야마가타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히 정부 내 기밀이었거늘, 어떻게 러시아가 그걸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역시 이토나 마쓰가타가 아니겠소? 지난 10년간 최대 수혜자인데.”
“이토겠지. 러시아한테 뇌물을 받아먹은 게 틀림없소.”
“아니, 그 색마 영감이라면 러시아의 미인계에 넘어간 걸 수도 있지.”
지난 10년간 홀대를 받아 왔다고 여긴 육군은 불만을 토해 냈다. ‘허리 아래로는 인격이 없다’고 할 정도로 악명 높은 이토의 여자관계는 정적들에게 공공연한 조롱 대상이었다.
“어허, 이토 후작은 우리와 입장은 달라도, 애국심만은 부정해선 안 되네. 그럴 사람이 아니야.”
야마가타는 옛 조슈 동지 이토를 옹호하는 척하면서, 내심 부하들의 비난을 즐기고 있었다.
“이토 공과 사이온지 총리는 정당 정치의 흉내를 내느라 열강의 눈치나 살살 살피고 있습니다! 모든 사안에서 해군만 끼고돌고, 육군은 찬밥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륙진출을 도외시한 결과 만주를 러시아에 넘겨주게 되지 않았습니까? 한국 황제는 차르의 총애를 받는 친러파고 말입니다!”
“조선은 러시아의 앞잡이, 동양의 배신자입니다. 러시아가 황국에 부당하게 삼국간섭을 가해 요동반도를 탈취했는데도, 조선은 오히려 만주에 영토를 넓힌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지척인 한국과 만주, 저 멀리 떨어진 해남도와 남양군도 중에 뭐가 더 중요하단 말입니까? 제국의 안보가 위태롭습니다!”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바로잡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야마가타 공뿐입니다!”
1901년, 10년 만에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여, 일시적으로 대러 강경 여론이 득세한 덕이었다.
막후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던 야마가타가 이노우에-사이온지 내각의 수립에 동의하는 대신, 원로 직함을 내려 정계에 복귀할 수 있게 하였다.
야마가타는 원로, 육군 원수의 직함을 받아 정계에 복귀, 조슈 출신으로 육군을 대표하는 가쓰라 다로(桂太郎) 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중장의 지지를 받았다.
일본은 1895년 이후 북수남진 정책을 이어 나갔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해주육종(海主陸從) 전략을 택했다.
‘메이지 29(1896)~38년(1905) 군비 10개년 계획’에도, 해군이 할당받은 군비는 70%에 달했지만 육군은 30%에 불과했다.
해군은 메이지 38년까지 이른바 ‘8·8함대계획(八八艦隊計画)’을 설립, 전함 8척과 장갑순양함 8척을 건조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실제 역사에서는 동시기에 6·6 함대 계획이었으나, 해주육종 정책에 따라 격상된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육군이 요구한 15개 상비 사단은 예산 부족을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육군은 이런 상황이 매우 불만스럽기 짝이 없었다. 육군 수뇌부가 복귀한 야마가타에게 달라붙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음, 이 아리토모, 제군의 우국충정을 잘 알겠네. 저 문약해 빠진 문관 놈들, 육군은 도외시하고 군함만 만들어 내는 해군 놈들, 자파의 이익만 챙기는 사쓰마 촌놈들로부터 황국의 권리를 수호할 것이야.”
“천황 폐하 만세! 대일본제국 만세!”
야마가타는 여전히 육군의 대부를 자처했지만, 실제 역사와 달리 그의 힘은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실제 역사의 야마가타는 오쓰 사건 이후에 원로가 됐고, 1군 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맡아 청나라와의 전쟁을 지휘했으며, 1898년부터 2년간 총리직을 수행했다.
바로 이 야마가타 2차 내각 시기, 사소해 보이지만 일본 근대사의 분수령이 될 법이 정해졌으니, ‘육해군대신 현역무관제’였다.
현역 육·해군 장성만이 육해군대신에 입각할 수 있어, 군부는 대신에서 사임하고 후임자를 추전하지 않는 것만으로 내각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
이는 정부의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어, 일본 군부가 정부 위에 군림할 수 있게 하여 1930년대 이후 폭주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야마가타 2차 내각이 수립되지 않음에 따라, 이 요인이 배제된 것이다.
군부의 정부 압박은 한계가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야마가타의 압박으로 이노우에는 조각에 실패하고, 야마가타 파벌인 가쓰라가 총리가 되어 러일전쟁으로의 길을 열었지만, 역사가 바뀌었다.
오쓰 사건의 나비효과이자, 이선이 니콜라이를 충동하여 만든 정략의 결과였다.
“아무래도 춘산장 영감(야마가타)이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오.”
“영감탱이, 권력욕은 어지간히 놓지 않는구만. 다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욕심 좀 내려놓지…….”
이토와 마쓰가타는 야마가타와 육군의 행보에 우려를 표했다.
“제국의 방침인 북수남진 정책을 뒤흔들려고 하는 것 같소.”
“그 영감은 벌써 노망이랍디까? 분명히 자기도 북수남진에 동의해 놓고선 왜 이제 와서 딴소리인지? 북진은 한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을 모두 적으로 돌릴 수 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소?”
“왜 모르겠소? 북수남진보다는 해주육종 정책이 배알이 꼴린다 이거겠지.”
“섬나라인 일본이 영국처럼 해군을 중심으로 삼겠다는데 뭔…….”
북수남진에 대해선, 이토-마쓰가타-야마가타, 육군과 해군, 조슈와 사쓰마, 정부와 의회가 모두 동의했던 사안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뒤집겠다는 것이었다.
“하여튼 육군이 주력이 되려면 북진정책을 써야 하니까. 황국보다 육군을 위에 두려는 태도를 용인할 수 없소.”
“뭐, 괜찮겠지요. 야마가타와 함께 복귀한 오야마 원수도, 고다마도 모두 북수남진에 동의하고 있으니까.”
“야마모토와 해군도 가만히 안 있을걸.”
오야마는 사쓰마 출신이고, 육군대신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는 조슈 출신이지만 북수남진의 실무를 맡은 대만총독을 역임했던지라 육군이라 할지라도 야마가타 파벌에 응하지 않았다.
해군대신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権兵衛)는 사쓰마 출신이고, 가장 강력한 해주육종 정책의 지지자이니만큼 말할 것도 없었다.
야마가타 파벌의 가쓰라가 내무대신, 데라우치가 육군차관을 맡고 있기는 했지만 파워게임에선 역부족이었다.
“한국은 그렇다 치고, 굳이 러시아와 대립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소. 만주는 러시아가 알아서 하라 그러고, 한반도는 일본에 적대적이지 않은 정권만 있으면 그만이오.”
“뭐, 한국 황제가 러시아와 친밀하지만, 그래도 균형감각은 있으니까 괜찮겠지.”
“아예 러시아와 협상을 해서, 조약을 맺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러시아와 불가침조약을 맺으면 북방의 위협은 사라지는 거니까.”
“음, 일리가 있소.”
“사이온지에게 잘 말해 두겠소. 내가 직접 러시아에 가서 협상을 하겠다고.”
사쓰마 출신인 마쓰가타는 북수남진, 해주육종이 당연한 선택이었고, 이토는 조슈 출신이라지만 파벌보다는 국익을 더 중시했다. 그가 보기에 러시아와의 대립은 무익했고, 대륙침략은 더 무익했다.
이토는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인 사이온지가 자기의 통제하에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이온지의 생각은 달랐다.